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 유네스코, 21세기의 대화; 세계의 지성 49인에게 묻다 현대의 지성 130
제롬 뱅데 엮음, 이선희.주재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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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그의 답사기 6번째 책의 본문 첫마디에 한국인의 문화의식에는 이중적인 면이 많다고 했다. 나는 문화의식뿐만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그런 면이 많다고 본다. 아이들의 교육에서부터 어른들의 정치에까지 말과 행동이, 정책과 실행이 다르게 나타나는 면이 상당히 많이 있다고 본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교문 밖을 나서자마자 거추장스러운 행동으로 표현되는 억압으로 반영되고, 정치에서는 만인의 경제적 행복을 위하는 정책을 말하지만 실행에서는 소수의 자산이 넘쳐흘러서 하층민의 생활을 적셔주기를 바라는 실행이 전부이며, 그런 자들을 혐오하면서도 그런 자들이 자선을 베풀어 주기를 바란다.

누구나 복지의 혜택을 받기를 원하면서 그것에 돈을 쓰는 것에 계층간의 선을 뚜렷이 하여 차별을 없애자고 하는 것은 이념이라고 몰아세우는 이중성,

이제 지나가는 정권이 자신들 스스로는 만족할만한 경제점수로 평가하는 것과, 새로운 당선자 자신도 그 정부의 일원이었으면서도 스스로 실패한 정부라고 말하는 이중성,

그 정부의 처음에는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고 했음에도 내년에 공무원 수가 백만 명이 되어 간다는 점과 같은 이중성.

 

그렇게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근소한 차이로 정권을 연장하게 된 이유를

미디어에서 분석하기를 20대가 취업이나 Spec문제에 시달리느라 사회에 둔감해지고 50대가 쓸데없이 과거에 매달리는 듯한 진보당에 질렸다는 식의 분석을 내놓지만 그것은 일을 해야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그저 기사를 만들어낸 것일 뿐이고,

-그 미디어들은 사회가 이념으로 양분화 되어 있다고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자신들, 미디어라는 사실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주 단순하다.

사람들은 그냥 어느 정부가 되던 자신들의 핍박한 삶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하여 알기 때문에, 과거 5년전에도 장밋빛 사회를 약속했었던 실패한 정부의 연장을 다시 인정한 것이 아니라 또 한번 속아주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렇게 속아준 이유로는 아마도 외신에서 말하는 독재자의 딸이 그의 부친과 같이 살았던 그 시대, 그때도 역시 이중적인 면으로 독재에 몸을 바쳐 반항했던 젊음도 있었지만, 그런 시절에도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지금의 대기업을 이룬 젊음들이 지금 사회의 지도층인 것처럼,

어두운 그림자만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반대 세력은 어두운 면만 부각시키려는 것에 짜증이 나서, 그래도 뭔가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그 뻔한 거짓말과 자신들이 하면 다르다는 정치권의 그런 이중적인 잣대에 또 속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미디어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선거란 아마도 조직적으로 잘 꾸며진 커다란 쇼를 통해 자신들의 연예인을 뽑는 것 같다는 미국의 유권자를 향한 어느 인문학자의 분석처럼, 우리나라도 TV에서 방영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처럼 그 쇼의 출연자들에게 인기 투표를 하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이미지화된 인기인을 뽑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정책은 누가 내세워도 정책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겉보기에 보기 좋고 장밋빛 향이 나는 화려함을 내세우는 세력을 쫓아가는 것이 요즘의 선거라고 생각한다. 즉 정책과 국가의 미래를 위하는 등의 이러쿵저러쿵하는 정책,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이나 실현 가능성 등에 대한 검증은 미디어에 의해서 각색된 각본에 의하여 그저 연예인의 스캔들처럼 취급하고 알아채려 하지도 않는다. TV에서는 그런 점을 이용하여 막대한 광고수익을 걷어들이는 점을 은근히 자랑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투표를 독려하는 시민단체의 구호와는 달리 투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거에 몇 번 있었던 혁명의 시절처럼 시민의 혁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시민들은 적당히 위에서 흘려주는 물을 받아 목을 적시는 것에 익숙해 있거나 자신이 실제로는 6명중의 1명에 속해있으면서도 시끄러운 혁명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 계층에 속한다고 믿고 있는 환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환상 속에 살고 있는 자유민을 한군데로 가두어 놓는 국가란 태생적으로 모순, 이중적인 위선과 가면으로 갇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정부가 그런 모태에 기생하고 있는 숙주라서 그 속에 갇혀 사는 자유민이란 위선과 모순을 자양분으로 삼아 이중성을 키우고 있는,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유라고 알고 있는 가련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중적인 면을 모순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모순에 빠지게 마련이고 그 모순에서 성급히 벗어나려고 아등바등해서는 안됩니다. 두 입장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합니다라고 말한 브뤼노 라투르의 말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이 말을 우리의 이중성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수천 년 동안 통합된 문화를 바라고자 하였으나 전혀 통합되지 않는 동서간의 차이를 다양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분열이라는 것으로 투사하여 공포로 반응하게 하는, 그래서 통일이라는 정책으로 강제하여 묶어놓는 것이 성급히 아등바등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니 그런 측면이 조금이라도 작용하였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금처럼 매번 선거 때마다 국토가 태극모양으로 구분되는 것을 문화라는 측면으로 이해하지 않고 성급히 벗어나려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국토의 동서 측은 적어도 천년 넘게 다른 문화에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통합된 정치권아래에 있었다 해서 문화가 같지는 않았음에, 심지어 말까지 다른데 같은 민족(정말 단일 민족일까?)이라고 해서 같은 색을 보여줄 이유가 있는가?

나는 그래서 결과가 같은 매 번의 선거 방송을 본 다음 날 동료들과의 한잔으로 제 정신이 아닐 때에 늘 하는 말이 있다. 다시 삼국시대처럼 신라 백제, 고구려로 나누어야 한다고……

 

만약 내가 이 나라에서 자극적으로 반발하는 북쪽의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90년 여름에 독일을 여행했을 때 듀셀도르프의 거리에 동독의 젊은이들이 조그맣고 낡은 차에 가득 타고 흥분된 얼굴로 창문을 연 채 달리는 것을 본 적이 있고 그때 본 그들의 웃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만약 그들처럼 내가 그런 이념에 갇힌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아니면 그보다 더 몇 년 전 아프리카에 갔을 때나,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처럼 의복과 먹을 것이 충분치 못하고 안락한 집이 없는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유나 행복을 주지 못하는 국가란 어떤 의미일까?

 

 

국가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의 역사적 형태일 뿐이며 추상적인 만큼 야만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역사상 모든 나라에서 폭력과 강탈, 노략질의 결합을 통하여, 한마디로 전쟁과 정복을 통하여 태어났고, 여러 나라의 신학적 환상에서 연속적으로 만들어진 신들 또한 이와 함께 했다.

국가는 그 기원에서부터 야만적인 힘과 거리낌 없는 불평등의 신성한 결함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권위이고, 국가는 힘이며, 국가는 힘의 과시이자, 그것에 대한 심취이다.

국가는 환심을 사려하지 않고 바뀌려고도 하지 않으며(중략), 선한 것을 명령할 때 조차도 그것을 방해하고 망쳐놓는다. 왜냐하면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며, 모든 명령은 자유에 대한 정당한 저항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진정한 도덕, 즉 인간적인 도덕(명백히 신성한 것이 아닌)의 관점에서 보면 선은 그것이 명령된 순간 악으로 바뀌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이 명령을 받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인식하고 바라고 사랑해서 선을 행할 때 거기에 자유와 도덕, 인간적 존엄이 함께 존재한다. 3장 자유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들 87p-미하일 바쿠닌 신과 국가의 미완성유고 인용

 

토머스 페인이 상식에서 정의한 말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데 이 말이 요즘 시대에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한편 국가 또한 이제껏 정부와 혼동되어 왔다, 정부 없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국가 폐지가 아니라 정부 폐지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이따금씩 주장되어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국가와 정부는 서로 다른 두 개념을 표상한다. 국가는 정부와는 상당히 다른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국가는 사회보다 더 높은 권력의 존재뿐 아니라 영토를 집중시키는 것, 또 사회생활의 여러 기능을 소수 또는 구성원 전체의 손에 집중시키는 것을 함께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사회 구성원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내포하기도 한다. <크로프트킨, 국가론>p1635장 국가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방법

 

나는 이러한 의견에 공감의 비율을 정의한다면 70%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적인 주장에, 사회주의자적인 주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이념이든 간에 모든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다수가 전부의 권리를 지닌다는 생각은 다른 모든 도그마가 그러하듯이 절대적 진리가 결여된 것이다. 강력한 민주주의를 이룩한 국가조차도 자칫하면 가장 우수한 시민들, 다시 말해 진보의 동력이 될 자주정신의 소유자들을 쉽사리 억압하곤 한다. 94p 3장 자유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들

 

자주정신은 어떤 것이며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그것을 이루려는 목적은 무엇일까?

누군가의 생각이 무엇에 견주어 경험적으로 옳을 수는 있다. 또한 선험적으로 옳고 그릇된 것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사회의 안정을 바라는 자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율이라는 것도 결국은 자아가 타자에 의하여 의지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자주정신인가?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섯 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게 되고 다섯 가지 음으로 사람의 귀가 멀게 되고: 다섯 가지 맛으로 사람의 입맛이 고약해진다 성스런 체함을 그만두고 아는 체함을 버리면 사람에게 이로움이 백 배나 더할 것이다 인을 그만두고 의를 버리면 사람이 효성과 자애를 회복할 것이다 재간 부리기를 그만두고 이익 보려는 마음을 버리면 도둑이 없어질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문명을 위하는 일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뭔가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물들이지 않은 명주의 순박함을 드러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다

 

사람들 모두에게 이러한 정신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사회가 어우러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21세기에 소국과민을 이룰 수 있을까?

동남아의 폴포트는 자본주의와 손을 잡은 정권을 몰아 내고 노자의 그 뜻을 따라 농민정권을 만든다며 도심을 해체하고 사람의 수를 강제로 줄이고자 결과적으로 “Killing Field”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을 무너뜨린 정권은 자본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닌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이었다고 한다. 결국 역사란 시간이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맞는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내가 지금 이 땅에서 누리고 있는, 비록 위선과 모순을 자양분으로, 자유를 자본으로 포장하고 있는 정부에 기생하고 있는 존재이지만 언젠가는 다른 세상을 살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시간에만 맡겨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간혹 촛불을 들고 나오는 시민단체의 주장처럼 목소리를 내어야만 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아무래도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는 세상이란 이세상에는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이것은 좋은 혁명일까요, 나쁜 혁명일까요? 사실 이는 우리가 마치 5세기 전 여기에 둘러 앉아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고,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묻는 것과 비슷하다. 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것. 여러분들은 이것이 좋은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오, 아니면 나쁜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가 역사상의 거대한 경제적 시대들에 대해 가장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시대들이 동시에 소란스럽고, 도전적이며, 흥분되고, 무시무시하고, 불안정하며, 방향을 잃은, 유토피아적이며 디스토피아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을 위한 혜택이 있는가 하면, 다른 이들에 대한 착취가 있으며, 아마도 인류를 위한 전진 도약이 있는가 하면, 환경에서의 퇴보가 있다. 이것들은 혼란 상태이다. 251p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본성상 사회적이지만 모든 사회의 특성이나 환경이 자신을 위한 방편으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존재. 이기적인 개인주의자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아나키즘이나, 프롬의 휴머니즘적 사회주의, 러셀의 길드사회주의 등의 각종 사회주의와 생디칼리즘은 개인에게 많은 도덕을 요구하기 때문에, 비록 본성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자율을 강제하는, 바쿠닌이 생각하는 사람이 명령을 받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인식하고 바라고 사랑해서 선을 행할 때 거기에 자유와 도덕, 인간적 존엄이 함께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성립되는 개인들의 모임이 된다면 노자를 비롯한 모든 철학자들이 고민한 국가론이 될 것 같다. 어떤 식의 ‘ISM’이든 스스로가 선택할 수 없는 도덕성을 실천하지 못하는 개인에게 욕망을 누르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요구되는 사회라면 그것이 과거의 잘못된, 그래서 실패했다고 생각되는 국가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그런 도덕을 정의하는 것이 자본의 양으로 결정된다고 보여지므로 아나키즘 등의 주의보다 오히려 국가나 정부에게 개인을 통제하기 쉬운 방식이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그런 자본주의는 어째서 그 탄생지를 비롯한 유럽의 학자들에게 의심을 갖게 했을까?

자본주의는 개인에게 도덕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결과만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잔인성의 결과 때문에 본인들이 위험성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들은 역사적 인간학을 잘못 알고 있다. 사실 상업은 하나의 파생물이고 문화의 수혜자인데도, 그들은 상업이 문화의 창시자라고 믿는다. 사실은 문화가 상업과 정부가 의존해 있는 수원인데도 그들은 상업이 1차적 제도라고 믿는다. 여러분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상업적 관계들을 맺고 그 뒤에 하나의 문화를 창조한 역사적 사례를 알고 있는가? 여러분은 사람이 먼저 정부를 만들고 그 뒤에 문화를 세운 역사적 사례를 하나라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 그리고 제3의 길 정치를 통한 계몽주의 때문에 잘못 알고 있다. 상업은 창조자가 아니라 수혜자이다. 하지만 수혜자가 시혜자를 식민화할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문명은 그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263p 접근의 시대 제레미 리프킨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문학과 지성사 2010

 

이제 이런 훌륭한 사람들의 의견으로 세상은 스스로 조율하며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사회는 이번 선거에서도 미디어에 의하여 또다시 이미지로 양분되고 세대별 분석이라는 신종 분석으로 갈기갈기 찢겨졌는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문화는, 짧은 시절의 정치 격랑 속에서도, 비록 유홍준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이중적인 면이 많았더라도, 수천 년 동안 견뎌온 것이 아닐까 한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미지로 갈갈이 찢겨진 시민일지는 몰라도 그들은 스스로 알지 못할 정도로 어우러져 있는지도 모른다. 각각의 진영은 퇴근 후의 술자리 등에서 보수는 속도를 조절하며 진보는 새로운 개혁으로 사회의 진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믿고 싶다.

 

그런 의미가 내포된 발전적인 진화의 과정이라고 보아도 될까?

Mayor may adopt 'coop' system

여기에 덧붙여서 내가 어설프게 생각하는 한가지는 나와 같은 세대들을 모아 협동농장을 운영하는 게 어떨까 한다. 각 시의 한군데만이라도 무엇인가(가령 생필품이나 기초 공산품을 만드는 공장이나, 특산품을 재배하는 농장 등)생산을 하는 농장. 혹은 공장 혹은 볼로냐의 ‘COOP System’을 활용한다면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노동력으로 보다 나은 경제를 이루지 않을까?

매번 뭔가 대형 프로젝트만을 운영하려 한다거나 지금도 거미줄 같은 도로 등의 기반시설에 투자하여 도심만 거대하게 되는 원치 않는 이중적 결과를 낳게 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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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의 자유로 가는 길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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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평범한 시대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형편뿐 아니라 세상사 전반에 대해서도 숙고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사회의 특정한 지위를 갖고 태어나 그날그날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일 뿐, 

당면한 현실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려는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거의 들짐승만큼이나 본능적으로 순간순간의 욕구를 충족하는 그들에게는 이렇다 할 선견지명도,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면 삶의 조건이 통째로 바뀔 수 있으리라는 통찰력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신들의 환경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보편적인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의 환경을 지키려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테고 

사회는 오히려 본인이 환경을 보존하려는 계층에 속한다고 믿고 싶은 사람의 수가 더 많을 것 같다. 

Robert Trivers는 자기기만 이론에서, 우리 정신은 자신의 능력을 이중으로 이용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자신부터 속여 남들에게 더욱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하는 동시에, 

무의식에서는 진짜 능력을 인지하고 스스로 그 현실에서 지나치게 멀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환경이 보존, 발전되어야 한다고 믿고자 하는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은 어쩌면 사회를 은밀하게 움직인다는보이지 않는 손이 범위를 정해 놓았을 것 같은 분류에 속하여 

자신의 의지와 관련 없이 적용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들은 객관적으로는 중산층으로 보이고 싶어하면서 

내심으로는 중산층이 아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계층의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그런 경제적 구분과는 별개로 그들에게 러셀이 말하는 선견지명이나 통찰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환경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현실적 압박에 가로 막혀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상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가 너무 많을 뿐이지…… 

그렇게 현실이 이상을 억누르는 시기가 지나게 되면 누구에게나 비로서 세상의 고민이 보이게 되는 시기가 오는 것 같다. 

그 시기란禮記(예기)≫ 曲禮篇(곡례편)에 구분한 것처럼 사람이 나서 10년을 말하여 ()라 하고 이때부터 글을 배운다. 

스물을 말하여 ()이라 하여 성인이 되었다는 의미로 갓을 쓴다. 서른을 말하여 ()이라 하여 가정을 이룬다.

마흔을 말하여 ()이라 하고 사회나 국가를 위하여 관직에 나서는 벼슬을 한다.

쉰을 말하여 ()라 하고 비로서 정치에 나서 官政(관정)을 맡는다며 삶의 흐름을 정의하였고, 

《위정편(爲政篇)》에서 마흔까지는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 하여 주관적 세계에 머물렀으나, 

50세가 되면서 지천명(知天命)이라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세계인 성인(聖人)의 경지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는 

 

때가 그 시기로 세상의 고민과 그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만의 해결책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즈음에 전에는 보이고 들리지 않던 세상의 이러저러한 계층도 보이고보이지 않는검은- 도 보인다고 느끼곤 하며, 

귀로 듣는 미디어의 뉴스나 광고가 절반을 차지하는 신문들을 보면서도

“거대 신문사를 경영하려면 큰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요 매체의 소유주는 자본가 계급일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들이 자기 계급과 다른 견해 및 전망을 내놓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어떤 뉴스를 일게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그들은 실제 뉴스를 왜곡할 수도 있고,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뉴스 자체를 주의 깊게 선별하여 독자의 감정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자극하거나 진실을 덮을 수도 있다." 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런 부조리를 알면서도 뭔가를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그간의 세월 동안 세상에 복종하는 제도 속을 살아온 기간이 길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비참하고 치사한 기간이지……

 

그런 강압적, 위선적, 특권층을 위한 제도나 프로파간다로 도배된 미디어를 지배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이들은 두꺼운 벽과 수많은 경찰관의 보호를 받으며 군중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안락하게 살아간다."

그렇게 군중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지나는 어느 정도의 시기가 지나면 

시민은 목소리를 높여 다양한 경로로 그들에게 변하기를 호소하였지만 무심했던 입법자들을 뽑게 되는 시기가 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자신들이 집권하는 시기에는 행복하다고 떠들던 시기를 

권력의 교체시기인 그때가 되면 

그때서야 자신들에게 호소하던 시민이 보이는지 더 이상 불행한 시기를 살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거공약을 남발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선거운동 당시의 열정과 공약은 다만 희미한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대표자들은 일부 집단이 품은 불만보다는 

이른바전체 공동체 전반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것을 정치적 수완의 본질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공동체 전반의 이해관계란 실로 모호하기 때문에 사리사욕과 겹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회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국민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는 것도 이미 머릿속에, 행동 속에 주입되어 습관화 되었으므로 

그 환경을 변화시키고자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뭔지를 모르게 되고, 

그런 무력함은 

“부자가 부를 쌓으려고 저지르는 악행은 대개의 경우 빈민이 저지르는 하찮은 범죄보다 

사회에 더욱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데도 불구하고 기존 질서를 헤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벌 받지 않고 넘어간다는 것도 

둔감해하며, 오히려 이중적인 정신으로 인하여 그러한 악행이 머지않아 자신들을 위한 선례로 남을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게 되는 것 같고, 그로 인해 교과서에서 주입된 교육이 현실과 많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진보적일 수 밖에 없는 

젊은 인생들과 명석한 사리판단으로 이미 그러한 부조리를 알고 있던 개혁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수구 꼴통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 같다. 

본인은 애국적보수라고 믿고 있겠지만……

 

세상은 자신의 고민을 어떻게 하기에는 이미 그 고민의 덩치가 너무 커버린 것 같다.

입법자들이 선거 때만 되면 그 동안 몰랐던 것을 갑자기 다 알아버리는 것 같은 그 고민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미 자신의 신체 일부분이 되어 버려 육신을 갉아먹고 있는 암세포처럼 퍼져버린 자유의 압제가 아닐까 한다. 누구나 생각하는 자유란 신체의 자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물론 신체의 자유마저도 우리에겐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 세상의 아무 곳이나 스스로의 의지와 욕망에 의하여 갈 수 있는 곳이 있는가? 국가라는 경계선에 막혀 갈 수 없는 곳이 지구상의 국가에 얼마나 많은가! 자유를 표방하는 나라마저도 허락을 받아 기간을 정해 놓고 가야만 하지 않는가? 그뿐 아니라 다른 시로 이사를 가고자 하여도 제도의 절차를 따라야 한다. 제도가 나쁘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자유라는 것이 알게 모르게 그런 제도아래 묶여 있다는 것이다. 제도는 인간의 사회를 마찰 없이 움직이기 위하여 인간이 만들어 놓은 약속이라고 믿고 싶지만 세상을 조금이라도 오로지 홀로 살아본 사람이라면 거기에 검은 손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 같다. 그것을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맞다 나의 몸은 이념의 벽에 막혀서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 프롬 (Erich Fromm) 은 사람들은 많은 속박에서 해방되어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를 얻게 되면 불안에 휩싸여 자유를 견딜 수 없는 중압감으로 느끼게 되며,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오히려 권위자에게로의 복종을 필요로 하는 노예의식이 파시즘과 같은 정치체제를 원한다고 한다. 따라서 소극적인 자유에서의 도피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율이나 자치로서의 적극적 자유가 중시되어야 한다고 한다고 했다. 그런 의미로의 제도가 권력자에게는 압제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 아닐까? 그런 수단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빌붙어 자신의 자산을 늘리려는 자의 탐욕이 합쳐지면 갖은 방법으로 군중이 누리고 있는 통제적 자유가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는 세상이 러셀이 말하는 어리석고 게으른 자들의 세상이 아닐까?

 

그러나 앞에 생각한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현실에 지쳐있는 무력한 삶을 사는, 또 자신의 무력함을 현실에서 소외 당하지 않으려 자기기만을 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불혹을 넘어 지천명도 넘어서면서 집단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자 비로서 자신을 보게 된 지금. 혼자서라도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세상으로부터 병에 걸린 컴퓨터를 치료해주는 바이러스로 인정 받던 어느 학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그 동안의 길에서 노선을 변경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바라고 있으리라고 믿고 싶은, 내가 바라는 세상은 국가가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도가 자유를 통제하거나 자본이 자유를 속박하는 세상은 아니다.

정부와 법률은 본질 자체가 자유에 대한 제한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유는 정치적 미덕 가운데 으뜸이다. 그렇다고 자유가 모든 미덕 가운데 최고라는 말은 아니다. 가장 훌륭한 것들은 내면으로부터 나온다. 창조적 예술, 사랑, 사색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정치적 조건에도 도움을 받기도 하고 방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에 의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자유는 그 자체로서도 그리고 앞서 말한 다른 미덕들과 맺은 관계에서도 정치 및 경제가 보장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미덕이다.’(5장 국가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방법)

 

아나키스트나 사회주의자나 생디칼리스트(Syndicalist)나 또는 폭압적인 전제주의 군주이거나 모두 입에 달고 있는 희망은 모든 국민이 잘 사는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이나 순서에 있어서 어느 길을 따라가는가에 따라 이념이라는 벽으로 갈라서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에 어느 이념이든 간에 단체가 구성되고 규모가 커지게 되면 모순에 닥치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념이나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이성이 문제라는 것 아닐까?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가 동물과 다른 점은, 언어. 도구. 제작물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습관, 신앙, 제도에 복종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원에 속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문화의 세계이며, 어떤 수준의 문명이라도 문화는 자연과 엄정하게 대립된다. 모든 인간은 말하며, 도구를 사용하며, 규칙을 지키면서 행동한다라고 했지만 그것은 제도를 먼저 생각하고 자유를 그에 복속되는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습관, 신앙, 제도에 복종하기 이전에 인간 스스로의 사회성에서 비롯된 문화가 있으며 규칙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사회성과 각 종족의 문화를 침해 당하지 않으려는 자율에 의한 것 아닐까?

자연과 대립적인 구조로 보는 것도 서양의 인식자체가 폭력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연과 동화하는 것이 아닌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도 제도아래, 관습아래에 두고 통제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같은 반응을 보이며 살아오지 않았을 텐데 지금과 같이 되어버린 이유는 인간이 가진 외로움, 그 외로움에 대한 불안을 벗어나려는 정신의 박약함 때문에 스스로 포기한 것도 있지 않을까 한다.

 

어쨌거나 수천 년을 사람들은 자유라는 것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지만 그것을 정의하고 모든 인간이 동시에 같은 무게로 느끼지는 못할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가져야 할 숙명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자유를 누르고 있는 제도나 정부라는 완장을 찬 일부 탐욕적인 인간에 의하여 전체가 속고 있는 채로 또 5년을 외면하고 사는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하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 내년에는 그런 완장을 찬 사람들의 숫자가 백만 명이 된다고 한다.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틀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반 군중에게 자유와 노동과 자본을 가져가는 세력이 늘어남을 말하는 것 아닐까?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인 1910 10 13일자 영국 <Times>에 실린 글과 Thomas Paine이 표현한 것이 그 시절, 그가 무엇을 꿈꾸었던 간에 그때나 지금 그 글속에 지칭한 세력이 달라졌는가?

 

사회와 정부를 혼동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거의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둘은 다를 뿐만 아니라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사회는 우리의 욕구에 의해 산출되며,

정부는 우리의 사악함에 의해 산출된다.

사회는 우리의 정서를 통합함으로써

우리의 행복을 긍정적으로 증진시키며,

정부는 우리의 악덕을 억제함으로써

우리의 행복을 부정적으로 증진시킨다.

사회는 상호작용을 고무하며, 정부는 구별을 창출한다.

사회는 후원자이며, 정부는 처벌 자이다. 모든 상태의 사회는 축복이며,

정부는 그것이 설사 최상의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필요악에 불과하다. (토마스 페인 상식 1776)

 

무리 지어 사는 동물인 인간은 사회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국가가 없으면 편안하게 살 수 있다. 그들이 보기에 자리만 차지할 뿐 쓸데없이 건방진 정치인은 기껏해야 값비싼 사치재에 지나지 않는다. (3장 국가 아닌 사회)

 

이번 선거에서는 본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친북, 종북, 좌파 운운하면서 자신들의 탐욕을 이념으로 몰아가는 세력이 사라지고 전통과 무절제한 개혁을 조절하고자 하는 사회의 힘을 보수라고 몰아가는 세력 또한 사라졌으면 한다.

 

처음으로 그는 浮世 고민이 자기 자신의 확신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았다. The Glass Bead Game (1942)   - Hermann Hesse

 

*글 속의 인용부분중 대부분은 자유로가는길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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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인가? - 인류가 밝혀낸 인간에 대한 모든 착각과 진실
마이클 S. 가자니가 지음, 박인균 옮김, 정재승 감수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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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것은 나의 종교다. 신전도 필요 없고 복잡한 교리도 필요 없는 종교다. 우리의 뇌, 우리의 마음이 곧 신전이며 애정이 곧 교리다. 텐진 가쵸. (14대 달라이 라마)

 

두꺼운 책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며 부수적인 설명을 한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은 다른 책(하버드교양 강의)속에서 인용한 내용에 대한 호기심에 읽게 된 책이다.

그랬던 만큼 다른 책 속에서 언급한 부분이 중복되어 설명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왜 인간인가?” 의 부 제목은 인류가 밝혀낸 인간에 대한 모든 착각과 진실-이다.

인간의 몸 속에 존재하면서 가장 최근에 밝혀지기 시작한 뇌에 관한 이야기.

뇌는 마음인가? 정신인가? 이성인가? 감정인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들. 지구 상의 동물들과의 먹이사슬에서 최고의 정점에 속해있는 포유류. 그런데 그 능력은 고작 1,300g의 회백질 덩어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신경 덩어리가 손상되는 부위에 따라 여러 장애가 생기며 인간이란 정체성을 의심받기도 하고 살인자, 싸이코 패스, 성 도착증환자와 같은 이상 행동의 소유자들로 구분되기도 한다.

그 뇌는 수천, 수만 년 동안 진화되어 온 결과이며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단다.

그 뇌의 성격과 정의에 따라 지구상의 독특한 한 종을 이루고 있는 인간인가 아닌가가 구분된다.

 

그러한 인간이 왜 다른 생명체와 다른가에 대한 설명과 증명으로 내용이 가득한데 레비스트로스의 이 말로 정리가 된다고 해도 좋을 듯 하다.

 

인류가 동물과 다른 점은, 언어. 도구. 제작물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습관, 신앙, 제도에 복종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원에 속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문화의 세계이며, 어던 수준의 문명이라도 문화는 자연과 엄정하게 대립된다. 모든 인간은 말하며, 도구를 사용하며, 규칙을 지키면서 행동한다. 레비 스트로스(Levi Strauss)”

 

그러나 나는 이 설명보다 마음에 끌리는 것은 인간만이 상상을 한다는 주장이다.

상상을 하면서 예술이 탄생되었고 인간만이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로 도구를 이용하여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물론 그 예술을 창조하는 행위가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했고 배후에 놓인 근본적인 행동 습성은 소위특별하게 만들기라고 다윈과 디사나약이 주장했다고 하였어도,

인간만이 그림을 보고 자신만의 상상을 하며 음악을 만들어 내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상징을 통한 언어를 구사하여 사회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지구상에 살면서 사회성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반 사회성적이고 제도에 반하는 경우더라도 인간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은 예술 말고도 많이 있겠지만 그런 것들을 창조해내는 근원은 뇌에 있다는 것이 五蘊皆空을 증명하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생각이 떠나있다. 그러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있다. “亡羊

책의 에필로그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인간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삶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해. 하지만 동물은 삶을 살아가지. 문제는 인간과 동물 중 누가 더 나은가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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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란 무엇일까?

생리적인 의미로 유기화합물로 이루어진 단백질과 수분덩어리이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육체를 이루고 있던 에너지가 다해 미생물로 분화되어 곧 기타 유기물분자로 돌아갈 처지에 있는 움직이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 육체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심장의 활발한 운동으로 회백질의 뇌에 혈액을 공급받아 여러 가지 생각도 하고 근육을 움직이기도 하여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음식의 섭취, 배설을 하며,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느끼기도 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정신작용과 행동에 의하여 피드백 되는 정신의 반응은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살아있는 동안 그런 모든 행위는 나의 기억을 만들어가는 욕망과 욕망을 이루려는 의지, 그 의지가 실현 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지나온 과거에 의한 지금의 나는 어떤 것일까?

육체적으로는 세월이 흐르면서 몸집이 불어나고 특히 지방이 많이 늘어나 비만도나 체지방률을 측정한 결과는 중간 정도의 비만이라고 한다. 그게 어느 정도 범위의 인간들의 범주에 속하는지는 모르지만 내 나이 군에 속하는 사람이 또래 전체의 인간들 범주에서 다수를 차지한다니 소외감은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상의 범주에 속한 사람들의 형상이 부럽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겉 모습은 그렇고 속은 약간의 지방, 혹은 다량의 지방이 곳곳에 껴서 의지와 욕망을 모두 이루어 낼 수 없는 상태에다 두 번의 수술로 예전의 걸음걸이를 다시 걸을 수 없는 상태일 정도로 육체의 이곳 저곳이 정상은 아니다. 이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정상적인 변화의 범주에 들어간다 할 것이다.

 

그러면 정신의 경우에는 어떤가? 정신은 환경과 교육에 의하여 발전하거나 퇴보하는 경우가 있을 텐데 살아가면서 어느 부분에 많은 의지를 투영하였는가에 따라 달라졌을 것이라 본다. 내 정도의 나이에 있는 사람이라면 주변의 환경에 따라서 살아온 세월이 교육에 의지하여 살아온 세월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편적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육을 직업으로 살아온 사람이 아니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렇게 정의할 때 내 경우는 보편적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의 수술을 겪기 전까지는 말이다. 두 번의 수술 중 처음의 수술이 내게는 잊혀진 몇 시간을 갖게 만든 수술이었다. 두 번째의 수술은 내 무릎을 내시경을 통한 모니터로 지켜보면서 의식은 살아있던 수술이었으므로 색다른 경험을 주기는 했지만 잊혀진 기억을 주지는 않은 수술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의 수술 동안 잊혀진 3~4시간동안 나와 내 주변에는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그 수술 이후로 나는 그 좋아하는 걷기를 마음껏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 신체적 변화는 내 정신을 흔들어 놓았으며 그 변화는 내 남은 인생에 있어 신체적 변화만큼의 보상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고 상실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정신도 변화하였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변화는 육체적으로 동일한 세월을 겪은 범주의 사람들처럼 보편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면 그런 존재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 간에 이 논의에서 핵심은 형상(Eidos라고 사용하였고 그것은 Idea로 영어화 되었지만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정의와는 거리가 있다며 이데아라는 표현대신 형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요약)이란 완벽한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은 형상에 대해 생각하고 연구할 수 있다. 가령 정의. 아름다움. 건강. 선함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형상은 일반적이고 일상적이고 경험적인 세상의 일부가 아니다. 일반적. 일상적인 존재들은 다양한 정도로 형상을 공유할 수 있다. 세상 만물은 완벽한 정의, 아름다움, 건강, 선함 그 자체의 일부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형상은 세상의 일부가 아니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상적인 것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을 현실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요컨대 오로지 마음만이 플라톤의 형상을 이해할 수 있다.

4장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가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자연도…… 사람도……

그러면 나는 과거의 나와 지금 동일한 나일까?

4~50년전의 사진을 보아도 어느 구석에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과거에 나를 보았던 사람들이 나를 비교할 때 얼굴의 인상에서 주는 표정이나 형태가 세월이 흘렀어도 조금은 남아있을 것이다. 아직은…….

그렇다고 해서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동일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동일한 나라고 판단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같은 인물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기억과 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동일함 때문일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4~50년전의 내가 가지고 있던 의지와 욕망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때의 성품이 지금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유전적으로 타고난 인습에 앞선 본능적 요건일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성향을 띤 것으로 다양한 인간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혈액형 별 성격과 같은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무엇이고 어떤 것일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존재하였던 과거의 내가 나와 다르다면 나는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그 수술하는 동안 사라진 몇 시간 동안에 새로운 내가 만들어지거나 바꿔 치기 된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스스로의 자유의지가 없는 기계적, 누군가의 의지에 움직이는 영혼에 불과하다고 하여야 하는가? 시간의 영속성과 공간의 보편성 속에서 내 존재를 나타내는 나는 물리적인 내가 아닌 시공에 좌우되지 않는 영혼이라고 정의해야 하는가? 그런 것이 존재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내 속에 있는 의식의 어느 부분에 종교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창조적인 의미에서의 영혼의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니다. 교육이나 법보다 앞선 것이 관습일 테고 관습보다 앞선 것은 인습이고 인습 앞에 본능 있다고 한다면 내가 무의식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영혼은 탄생 이후의 서양식 교육에 의한 영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의 존재가 나라는 존재를 영속하기 위한 도구적 기능으로서 가져야 하는 성질의 것이라면

굳이 그런 성질이 인간의 존재에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영혼을 말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인간의 영속성을 믿거나 희망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종교작인 색채를 띤 개념을 말하는 것일 텐데 그것이 한 개인의 생존에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일까?

동기가 없는 무에서 시작된 것이 영혼이라면 인간의 생존에 특별한 가치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의 존재는 인간의 생존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얻고자?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생각한다면 나를 이루고 있는 것 중에 하나인 정신이라는 것은 몸을 움직이는 나와 생각을 움직이는 나와 그 양쪽을 조절하는 나로 이루어져있다고 한다. 여러 철학자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그 셋을 정의해왔다. 프로이트는 그 나름대로, 칸트는 칸트대로, 헤겔도 헤겔대로, 쇼펜하우어도 그 아름대로,,,,,, 그런데 그 셋이 모두 있어야 인간이라면 그 셋 중에 어느 것이 보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수술로 인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내가 되었다. 내의지가 아무리 어딘가로 얼마 동안 가고자 하거나 손을 뻗어 무엇인가를 집고자 하여도 내 몸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손상된 것이며 이 상황이 악화되어 언젠가 아무리 몸을 움직이고 싶어도 못 움직이는 안타까운 상황이 된다면 몸을 움직이는 나는 죽었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그럼 남아있는 나는 생각을 하는 나와 양쪽을 조절하다 한쪽만 조절해야 하는 있으나마나 한 기능의 나만 남아 있는데 생각이란 것이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따른 움직임이 있어야 그것에서 돌아오는 반응으로 생각이 완성되거나 발전 되가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정신도 결국은 완전한 정신의 정의에서는 벗어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때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떤 것일까?

저 유명한 <<국가>>에서도 플라톤은 영혼은 세 가지 다른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고 일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세 부분이란 이성을 관장하는 합리적부분, 의지와 같은 정신적부분, 그리고 식욕, 성욕, 소유욕 등과 같은 욕망적부분을 말한다. 즉 영혼이조합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하면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주장하고 있는 영혼의 단순성이 강력한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도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영혼이 조합물이 아니라면 우리는 구성요소들을 분리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영혼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존재라고 해서 소멸 불가능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4장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가

그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나는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 것인가? 그 세 부분을 따로따로 정의할 수는 있으나 통합하여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인간이란 모두 그 세 부분이 조화롭게 움직일 때 인간다운 것으로 정의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느 한쪽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경우가 자의에 의해서나 타의에 의해서나 발생한다고 해서 인간이 아니라고 정의 할 수 있나?

윤리적인 부분에서는 그렇게 정의 할 수도 있겠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고 70%의 인간이라고 정의해서는 안될 것이다. 순전히 기능적인 인간으로 말할 때에는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우가 의학적으로 즉 인간의 신체적 기능으로 전체를 다 할 수 없는 진단을 받았으므로 나는 70% 기능만 가능한 인간이라고 법에 의하여 정의되어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결국 나란 어느 한쪽 시각으로 정의되어있지 않은 무엇이라고 할 수 없거나 매 순간마다의 영속성을 가지고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반응하는 동일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잊혀진 시간(알코올성 black out이 아니라) 4번정도 가지고 있는 나는 기억의 영속성이 있으므로 어느 무엇에 의하여 그 순간 정신이 바꿔 치기 된 존재는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할 일이 되게 없는 어느 무엇이, 어느 영화(그 영화에서 어떤 남자는 매일 같은 날을 산다. 아침에 깨어나면 그는 어제 겪은 일 또다시 겪는다. 그가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해서 겪게 된다는 것은 주변의 모든 환경도 매일이 같다는 뜻이겠다.)에서와 같이 매번 그런 경우를 찾아 다니면서 같은 기억과 의지와 욕망, 믿음을 가진 무엇으로 대체해 주었던 결과의 하나이던가……

인와겐의 결론은 이렇다. 어던 물체를 분해해서 다시 조립한다고 해서 처음 것과 똑 같은 물체를 만든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심판의 날에 신이 모든 원소들을 재 조합해 죽은 이의 육체를 부활시켰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예전과 또 같은 육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면 동일한 육체를 갖는 것이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핵심이라는 육체 관점에서 보면 부활한 사람은 예전과 동일인물이 아니다. 심판의 날에 내 육체가 부활했다고 해도 그건 내 몸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육체적 부활에 대한 피터 반 인와겐의 지적이다.

5. 나는 왜 내가 될 수 있는가.

 그런데 그 잊혀진 기억 동안의 잃어버린 30%의 기능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 정신적인, 생각할 수 있는 기능으로 옮겨갔는가 보다. 잃어버린 30%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때 그만한 생각을 더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수술로부터 수년이 지난 아직도 그 둘을 조절하는 능력의 나는 수평조절적 분배를 잘 하지 못해 갈등과 고민의 결과로 우울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때로는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때도 점점 늘어간다.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받아들이는 피드백효과가 줄어들어서 일까?

새로 먹기 시작한 약 탓일까?

그렇게 변화한 상태가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전에 할 수 있던 것을 그때와 같은 심정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런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나쁠 수는 없으므로 그것은 주변의 누군가가 좋지 못한 감정을 지금 생각하기에 지금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주변의 환경에서 자유롭다면 나는 내 스스로 나쁘지 않은 상황을 만들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야 뉴스에서 간혹 알려주니 여러 가지를 알고 있으나 그 상황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다. 동기는 많을 수 있지만 결과를 끌어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어쨌든 존재한다는 것이 비 존재 보다는 나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동기가 절박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실행과정에서 겪게 될 낯섦이 두려움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짐작 때문이라 하겠다.

그때가 오게 될 때, 언젠가처럼 눈 앞의 세상을 하얀 빛으로 덮었을 때처럼 그때가 올 때

잠시라도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때 고통에 의하거나 통증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지나온 과거를 후회하지는 않았다고 다짐하고 싶다. 그 과거의 흔적들이 완성된 나를 만들지 못하였더라도 어쩌겠는가 그 순간에 후회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무엇인가를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남겨진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있기에 그에 맡길 따름이다. 그 정의가 서로 상반된다 한들 그것도 나를 이루는 하나의 정의에 속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의 글속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에피쿠로스가 쓴 이 글은 2,000년 동안 많은 사람을 괴롭혔다. 그는 인류에게 죽음에 관한 혼란스런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그의 글을 소개한다. 그러므로 가장 끔직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9. 죽음은 나쁜 것인가

약이 도움을 주기는 한다.

그래서 점점 더 강한 약을 원하지만……

약효는 이 글을 쓰는 처음의 의도와 다른 결론 쪽으로 가고 있게 만든다.

아니면 내가 스스로 깨닫거나 합리화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렇게 약물의 힘에 의하여서라도 나는 오늘도 변화하는 과정 위에 있다.

내일 무슨 생각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세상에는 고통과 질병, 죽음 그리고 아픔이 만연하다. 또한 우리가 갈망하는 것도 있으며, 운이 좋다면 그것들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다시 잃어버릴 때 고통과 괴로움이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이런 진실에 직면해 불교는 상실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삶의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강조한다. 실재하지 않는 자아(自我)라는 존재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한다. 뭔가를 상실할 수 밖에 없는 라는 존재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 자아의 관점에서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자아가 없다면 두려울 것도 없다.

13장 죽음을 마주하고 산다는 것

뭔가 이상하지만 이처럼 표현하는 것이 그들의 종교에서 뜻하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일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끝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책에 동조하는 의미로 말하자면 그것은 끝이 없는 순환의 일부일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느낌을 말하자면 처음에는 활기차게 강연을 하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갈수록 기운이 빠지고 핵심이 중복되고 결론이 과정에 앞서 있음을 간혹 느낀다.

그래도 종교적인 관점이나 심리학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온전히 철학의 관점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나의 죽음에 나는 무슨 말을 남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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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진보와 빈곤
헨리 조지 지음 / 경북대학교출판부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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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부동산 관련 기사를 검색해보면 거의 다 과거에 비하여 침울한 내용들이 많다.

한때 무슨 무슨 조치하며 새로운 정책이 나오면 금방이라도 부동산 경기가 좋아질 것처럼 풍선을 띄우던 기사들도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내려졌으며, 그런 기사들을 다룬 패턴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이제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처럼 반응하는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기사나 정책의 방향이 본질을 다루지 않고 감정적인 바람만 일으키려는 것 같아 진심을 얻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닐까 한다.

가령 정책을 만들어서 공표할 때 시장의 반응이 정책담당자의 수고를 알아주는 형태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입안자도 알기에 미리 언론에 자극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결과는 정책도 기사도 이미 힘이 빠져버려 눈길을 끌지 못하는…… 구체적인 케이스를 알 수는 없으나 기사들의 문장내용을 보면 사실을(물론 기사의 성격상 사실을 다룰 수 없는 미래의 내용이므로.)다루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부분이나 어느 한 부분에는 희망을 담은 문장이 보이고 그것조차도 힘이 있어 보이지 않는…… 문장을 그림으로 본다면 그런 이미지로 형상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내 생각에는 업자들의 표현대로 해먹을 만한 곳 이미 다 해먹었고 부동산의 판매 방법 또한 거의 다 써먹어서 획기적으로 눈길을 끌만한 재료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흥행을 다시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데에 공감하는 편이다. 단독주택이나 전원주택. 그것을 쪼갠 깡통주택이니 뭐니 하는 것도 이벤트화 할 정도의 끈기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이미 그 소재가 상해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정부가 부동산 시장의 끝을 알 수 업도록 자율화를 하지 못하게 계속 막는다면 무슨 조치를 내놓아도 이미 손님의 호기심을 끌지 못하는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정부가 부동산의 놀음으로 흥청망청하도록 놓아둔다는 말인가? 요즘처럼 부의 분배와 평등. 복지 등을 따지는 세대에 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잠시라도 정부가 쥐고 있는 목줄을 놓아준다면 부동산이란 언젠가 뉴스에 나온 구속에서 풀린 강아지처럼 시민을 물어버리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리 이 업으로 먹고 살았다고 해도 이처럼 끝을 모르고 오르려고 하는 본능을 가진 괴물은 더 이상 놔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포커 판이나 노름판에 가보면 돈이 있는 사람이 최후에 남게 되어있는데 마찬가지로 돈 가진 사람들의 배팅에 놀아나다가 결국에는 꽁지 돈도 못 쓰는 신세로 내몰릴 가능성이 백 프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택의 가격이 평당 5천만원가까이 오르게 되면 그것을 살 사람은 누가 될까?

그것을 팔고 사게 하는 사람들이야 뭔가 고물이 떨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선동하겠지만 그들의 Lotto게임에 결국 누군가 당하게 될 것인데 저마다 나는 아니겠지 라고 대드는 곳이 그 투전 판인 것이다. 그 바벨탑 쌓기(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므로) 같은 게임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주택가격이나 전세 값 상승이나 이유는 내가 보기에는 한정된 토지에 있다고 본다.

그 토지는 바이러스처럼 잠복하고 있다가 부동산경기라는 겉껍데기가 활성화되면 같이 활성화되어 온 시장을 잡아먹는다. 그 바이러스를 잡지 못하면 육체는 병들게 되어 있는 것처럼 토지에 대한 정책을 어떻게 해결하지 않고서는 부동산가격의 안정이나 서민의 내 집 마련(자력으로...)은 율도 국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얼마 전에 읽은.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책의 어느 주석에 실린 참고 내용을 보고 알게 된 책이 나의 이런 생각을 자세히 담고 있는 것 같아 읽게 되었다.

책은 130여년전인 1879년에 처음 발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이 내용의 어느 부분은 지금의 우리 상황과 많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책의 문장은 잔소리 많은 그러나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닌 수가를 늘어 놓는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다. 내용에 있어서는 모든 조세를 토지에 관한 것으로 일원화하면 부의 분배와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면 그럴듯하고 일면 수긍이 안 간다.

지금의 세금제도를 보면 이 학자가 주장한 부분이 반영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런 면에서는 이 사람의 주장대로 실현하고자 해도 나쁠 것은 없어 보인다.

다만 우리의 업자들은 그런 과정에서도 웃돈 얹어 팔기 등의 과거의 화려한 수법을 다시 꺼내 휘두르는 기가 막힌 리베이트 수완으로 망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리하면 이렇다.

노동이 투입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반드시 토지가 존재해야 하고 자본이 생산되려면 노동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본은 노동의 결과이고, 노동의 생산을 돕기 위해 노동에 의해 사용된다. 노동은 적극적이고 원초적인 힘이며 따라서 노동자는 자본의 사용자가 된다. 노동은 토지가 있어야만 실행될 수 있고 노동에 의해 부로 전환되는 물자는 토지로부터 나온다. 토지는 노동의 선행조건이며 노동의 장소이고 노동에 필요한 원료이다. 세 요소의 자연스러운 순서는 토지. 노동. 자본의 순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논의도 자본에서가 아니라 토지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7장 부의 분배)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이다. 토지소유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 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기본이 되는 요인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중략- 물질적인 진보는 인간의 토지에 대한 의존관계를 없애지 않으면 오히려 토지로부터 부를 생산하는 힘을 보태줄 뿐이다. 따라서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극도로 이루어지더라도 임금이 오르지 않고 노동밖에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다. 이때 물질적 진보는 토지가치를 올리고 토지소유자의 힘을 강하게 해줄 뿐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토지소유는 귀족층의 근거이자 거대한 재산의 기초이며 권력의 원천이다. – 14장 부의 증대 속에 존재하는 빈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사유토지의 몰수도 매수도 아니다. 매수는 정의롭지 못한 방법이고 몰수는 지나친 방법이다. 현재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대로 토지를 가지게 한다. 각자 소유하는 토지를 지금처럼 자기 땅이라고 불러도 좋다. 토지매매도 허용하고 증여, 상속도 하도록 한다. 토지를 몰수할 필요는 없고 단지 지대만 징수하면 된다. (16장 수수께끼는 풀리다-최초의 위대한 개혁)

정부가 전국의 토지를 시장가격으로 매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런 생각(토지 사유제도를 철폐하면 토지소유자에게 완전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국정부는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노예제도를 철폐할 때 이런 생각에서 노예 소유자에게 이천만 파운드를 보상해 준 적이 있다.)에서 나온 것이다. 존 스튜아트 밀(John Stuart Mill)도 토지사유제의 본질적 부당성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이런 생각에서 토지의 완전 환수가 아니라 미래에 추가로 발생하는 이익을 환수하자고 주장했다. 밀은 영국의 모든 토지를 시장가격에 따라 공정하게 내지 후하게 평가하고 그 이후에 소유자의 개량에 의하지 않고 증가하는 가치를 국가가 환수해야 한다고 하였다. (21장 토지소유자에 대한 보상문제)

국민에 의한 정부가 최악의 전제정부로 타락하는 것은 부가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인데 이는 결코 먼 훗날의 일이 아니다. 이 현상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우리의 눈앞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투표권을 분별없이 행사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이해시키기가 어려워졌으며 개혁을 실천하는 것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정치적인 견해차는 이제 근본 원칙의 차이가 아니게 되었으며 추상적인 사상은 힘을 잃고 말았다. 정당은 과두적 내지 독재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것이 모두 정치적 쇠퇴의 증거이다.

(25장 현대문명의 쇠퇴)

130년전의 이야기이니 현대사화랑, 특히 우리나라의 여러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모르겠고, 이 방법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부동산 가격을 현실화하여 누구나 자기 경제적 여력에 맞추어 집을 갖고 집이나 건물, 토지를 이용하여 부를 늘리는 불로소득자가 양산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 봐서 70년대이후부터 30년이상 지속되어오는, 검은 리베이트를 남발하며 각종 인연을 바탕으로 남의 돈을 빼앗고자 하는, 한탕주의는 이대로라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인본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교육으로 사회에서 또는 학교나 가정에서 부에 대한 올바른 경제의식을 장기간에 걸쳐서라도 심어준다면 자연스레 안정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지금처럼 일등이 최고이며 뒤쳐지는 인간은 자연 속 야생의 무리에서 소외되어 굶주려 죽어가는 동물과 같다라고 가르친다면 부동산의 괴물은 정말 바이러스처럼 다시 퍼져나갈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이 되는 것이 먹고 사는데 지장 없겠으나,

그것이 비록 현행법을 지키고 남을 해하는 짓은 아니라 해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정치상황과 경제적 독점을 볼 때, 망상이겠지만 떠오르는 상상은 헨리 조지가 14장에서 주장한대로 귀족사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기득권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은가? 조금이라도 분배니 평등을 입밖에 내는 사람을 북의 추종자로 몰 수 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통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나쁜 일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통일은 되야 한다고 본다. 그것도 조만간, 가급적 빠른 시기에……

왜냐하면 그래야 그 동네 가서 여기서 못해본, 예전 네덜란드 여행에서 보았던 건물.(암스테르담 역 근처에 있던 공공청사로 매춘이 가능했던 건물)과 같은 공공개발사업을 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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