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란 무엇일까?

생리적인 의미로 유기화합물로 이루어진 단백질과 수분덩어리이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육체를 이루고 있던 에너지가 다해 미생물로 분화되어 곧 기타 유기물분자로 돌아갈 처지에 있는 움직이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 육체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심장의 활발한 운동으로 회백질의 뇌에 혈액을 공급받아 여러 가지 생각도 하고 근육을 움직이기도 하여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음식의 섭취, 배설을 하며,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느끼기도 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정신작용과 행동에 의하여 피드백 되는 정신의 반응은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살아있는 동안 그런 모든 행위는 나의 기억을 만들어가는 욕망과 욕망을 이루려는 의지, 그 의지가 실현 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지나온 과거에 의한 지금의 나는 어떤 것일까?

육체적으로는 세월이 흐르면서 몸집이 불어나고 특히 지방이 많이 늘어나 비만도나 체지방률을 측정한 결과는 중간 정도의 비만이라고 한다. 그게 어느 정도 범위의 인간들의 범주에 속하는지는 모르지만 내 나이 군에 속하는 사람이 또래 전체의 인간들 범주에서 다수를 차지한다니 소외감은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상의 범주에 속한 사람들의 형상이 부럽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겉 모습은 그렇고 속은 약간의 지방, 혹은 다량의 지방이 곳곳에 껴서 의지와 욕망을 모두 이루어 낼 수 없는 상태에다 두 번의 수술로 예전의 걸음걸이를 다시 걸을 수 없는 상태일 정도로 육체의 이곳 저곳이 정상은 아니다. 이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정상적인 변화의 범주에 들어간다 할 것이다.

 

그러면 정신의 경우에는 어떤가? 정신은 환경과 교육에 의하여 발전하거나 퇴보하는 경우가 있을 텐데 살아가면서 어느 부분에 많은 의지를 투영하였는가에 따라 달라졌을 것이라 본다. 내 정도의 나이에 있는 사람이라면 주변의 환경에 따라서 살아온 세월이 교육에 의지하여 살아온 세월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편적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육을 직업으로 살아온 사람이 아니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렇게 정의할 때 내 경우는 보편적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의 수술을 겪기 전까지는 말이다. 두 번의 수술 중 처음의 수술이 내게는 잊혀진 몇 시간을 갖게 만든 수술이었다. 두 번째의 수술은 내 무릎을 내시경을 통한 모니터로 지켜보면서 의식은 살아있던 수술이었으므로 색다른 경험을 주기는 했지만 잊혀진 기억을 주지는 않은 수술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의 수술 동안 잊혀진 3~4시간동안 나와 내 주변에는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그 수술 이후로 나는 그 좋아하는 걷기를 마음껏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 신체적 변화는 내 정신을 흔들어 놓았으며 그 변화는 내 남은 인생에 있어 신체적 변화만큼의 보상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고 상실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정신도 변화하였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변화는 육체적으로 동일한 세월을 겪은 범주의 사람들처럼 보편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면 그런 존재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 간에 이 논의에서 핵심은 형상(Eidos라고 사용하였고 그것은 Idea로 영어화 되었지만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정의와는 거리가 있다며 이데아라는 표현대신 형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요약)이란 완벽한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은 형상에 대해 생각하고 연구할 수 있다. 가령 정의. 아름다움. 건강. 선함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형상은 일반적이고 일상적이고 경험적인 세상의 일부가 아니다. 일반적. 일상적인 존재들은 다양한 정도로 형상을 공유할 수 있다. 세상 만물은 완벽한 정의, 아름다움, 건강, 선함 그 자체의 일부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형상은 세상의 일부가 아니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상적인 것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을 현실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요컨대 오로지 마음만이 플라톤의 형상을 이해할 수 있다.

4장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가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자연도…… 사람도……

그러면 나는 과거의 나와 지금 동일한 나일까?

4~50년전의 사진을 보아도 어느 구석에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과거에 나를 보았던 사람들이 나를 비교할 때 얼굴의 인상에서 주는 표정이나 형태가 세월이 흘렀어도 조금은 남아있을 것이다. 아직은…….

그렇다고 해서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동일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동일한 나라고 판단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같은 인물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기억과 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동일함 때문일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4~50년전의 내가 가지고 있던 의지와 욕망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때의 성품이 지금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유전적으로 타고난 인습에 앞선 본능적 요건일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성향을 띤 것으로 다양한 인간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혈액형 별 성격과 같은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무엇이고 어떤 것일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존재하였던 과거의 내가 나와 다르다면 나는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그 수술하는 동안 사라진 몇 시간 동안에 새로운 내가 만들어지거나 바꿔 치기 된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스스로의 자유의지가 없는 기계적, 누군가의 의지에 움직이는 영혼에 불과하다고 하여야 하는가? 시간의 영속성과 공간의 보편성 속에서 내 존재를 나타내는 나는 물리적인 내가 아닌 시공에 좌우되지 않는 영혼이라고 정의해야 하는가? 그런 것이 존재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내 속에 있는 의식의 어느 부분에 종교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창조적인 의미에서의 영혼의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니다. 교육이나 법보다 앞선 것이 관습일 테고 관습보다 앞선 것은 인습이고 인습 앞에 본능 있다고 한다면 내가 무의식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영혼은 탄생 이후의 서양식 교육에 의한 영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의 존재가 나라는 존재를 영속하기 위한 도구적 기능으로서 가져야 하는 성질의 것이라면

굳이 그런 성질이 인간의 존재에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영혼을 말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인간의 영속성을 믿거나 희망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종교작인 색채를 띤 개념을 말하는 것일 텐데 그것이 한 개인의 생존에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일까?

동기가 없는 무에서 시작된 것이 영혼이라면 인간의 생존에 특별한 가치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의 존재는 인간의 생존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얻고자?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생각한다면 나를 이루고 있는 것 중에 하나인 정신이라는 것은 몸을 움직이는 나와 생각을 움직이는 나와 그 양쪽을 조절하는 나로 이루어져있다고 한다. 여러 철학자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그 셋을 정의해왔다. 프로이트는 그 나름대로, 칸트는 칸트대로, 헤겔도 헤겔대로, 쇼펜하우어도 그 아름대로,,,,,, 그런데 그 셋이 모두 있어야 인간이라면 그 셋 중에 어느 것이 보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수술로 인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내가 되었다. 내의지가 아무리 어딘가로 얼마 동안 가고자 하거나 손을 뻗어 무엇인가를 집고자 하여도 내 몸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손상된 것이며 이 상황이 악화되어 언젠가 아무리 몸을 움직이고 싶어도 못 움직이는 안타까운 상황이 된다면 몸을 움직이는 나는 죽었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그럼 남아있는 나는 생각을 하는 나와 양쪽을 조절하다 한쪽만 조절해야 하는 있으나마나 한 기능의 나만 남아 있는데 생각이란 것이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따른 움직임이 있어야 그것에서 돌아오는 반응으로 생각이 완성되거나 발전 되가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정신도 결국은 완전한 정신의 정의에서는 벗어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때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떤 것일까?

저 유명한 <<국가>>에서도 플라톤은 영혼은 세 가지 다른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고 일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세 부분이란 이성을 관장하는 합리적부분, 의지와 같은 정신적부분, 그리고 식욕, 성욕, 소유욕 등과 같은 욕망적부분을 말한다. 즉 영혼이조합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하면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주장하고 있는 영혼의 단순성이 강력한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도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영혼이 조합물이 아니라면 우리는 구성요소들을 분리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영혼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존재라고 해서 소멸 불가능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4장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가

그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나는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 것인가? 그 세 부분을 따로따로 정의할 수는 있으나 통합하여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인간이란 모두 그 세 부분이 조화롭게 움직일 때 인간다운 것으로 정의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느 한쪽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경우가 자의에 의해서나 타의에 의해서나 발생한다고 해서 인간이 아니라고 정의 할 수 있나?

윤리적인 부분에서는 그렇게 정의 할 수도 있겠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고 70%의 인간이라고 정의해서는 안될 것이다. 순전히 기능적인 인간으로 말할 때에는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우가 의학적으로 즉 인간의 신체적 기능으로 전체를 다 할 수 없는 진단을 받았으므로 나는 70% 기능만 가능한 인간이라고 법에 의하여 정의되어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결국 나란 어느 한쪽 시각으로 정의되어있지 않은 무엇이라고 할 수 없거나 매 순간마다의 영속성을 가지고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반응하는 동일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잊혀진 시간(알코올성 black out이 아니라) 4번정도 가지고 있는 나는 기억의 영속성이 있으므로 어느 무엇에 의하여 그 순간 정신이 바꿔 치기 된 존재는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할 일이 되게 없는 어느 무엇이, 어느 영화(그 영화에서 어떤 남자는 매일 같은 날을 산다. 아침에 깨어나면 그는 어제 겪은 일 또다시 겪는다. 그가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해서 겪게 된다는 것은 주변의 모든 환경도 매일이 같다는 뜻이겠다.)에서와 같이 매번 그런 경우를 찾아 다니면서 같은 기억과 의지와 욕망, 믿음을 가진 무엇으로 대체해 주었던 결과의 하나이던가……

인와겐의 결론은 이렇다. 어던 물체를 분해해서 다시 조립한다고 해서 처음 것과 똑 같은 물체를 만든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심판의 날에 신이 모든 원소들을 재 조합해 죽은 이의 육체를 부활시켰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예전과 또 같은 육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면 동일한 육체를 갖는 것이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핵심이라는 육체 관점에서 보면 부활한 사람은 예전과 동일인물이 아니다. 심판의 날에 내 육체가 부활했다고 해도 그건 내 몸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육체적 부활에 대한 피터 반 인와겐의 지적이다.

5. 나는 왜 내가 될 수 있는가.

 그런데 그 잊혀진 기억 동안의 잃어버린 30%의 기능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 정신적인, 생각할 수 있는 기능으로 옮겨갔는가 보다. 잃어버린 30%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때 그만한 생각을 더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수술로부터 수년이 지난 아직도 그 둘을 조절하는 능력의 나는 수평조절적 분배를 잘 하지 못해 갈등과 고민의 결과로 우울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때로는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때도 점점 늘어간다.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받아들이는 피드백효과가 줄어들어서 일까?

새로 먹기 시작한 약 탓일까?

그렇게 변화한 상태가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전에 할 수 있던 것을 그때와 같은 심정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런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나쁠 수는 없으므로 그것은 주변의 누군가가 좋지 못한 감정을 지금 생각하기에 지금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주변의 환경에서 자유롭다면 나는 내 스스로 나쁘지 않은 상황을 만들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야 뉴스에서 간혹 알려주니 여러 가지를 알고 있으나 그 상황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다. 동기는 많을 수 있지만 결과를 끌어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어쨌든 존재한다는 것이 비 존재 보다는 나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동기가 절박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실행과정에서 겪게 될 낯섦이 두려움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짐작 때문이라 하겠다.

그때가 오게 될 때, 언젠가처럼 눈 앞의 세상을 하얀 빛으로 덮었을 때처럼 그때가 올 때

잠시라도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때 고통에 의하거나 통증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지나온 과거를 후회하지는 않았다고 다짐하고 싶다. 그 과거의 흔적들이 완성된 나를 만들지 못하였더라도 어쩌겠는가 그 순간에 후회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무엇인가를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남겨진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있기에 그에 맡길 따름이다. 그 정의가 서로 상반된다 한들 그것도 나를 이루는 하나의 정의에 속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의 글속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에피쿠로스가 쓴 이 글은 2,000년 동안 많은 사람을 괴롭혔다. 그는 인류에게 죽음에 관한 혼란스런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그의 글을 소개한다. 그러므로 가장 끔직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9. 죽음은 나쁜 것인가

약이 도움을 주기는 한다.

그래서 점점 더 강한 약을 원하지만……

약효는 이 글을 쓰는 처음의 의도와 다른 결론 쪽으로 가고 있게 만든다.

아니면 내가 스스로 깨닫거나 합리화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렇게 약물의 힘에 의하여서라도 나는 오늘도 변화하는 과정 위에 있다.

내일 무슨 생각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세상에는 고통과 질병, 죽음 그리고 아픔이 만연하다. 또한 우리가 갈망하는 것도 있으며, 운이 좋다면 그것들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다시 잃어버릴 때 고통과 괴로움이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이런 진실에 직면해 불교는 상실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삶의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강조한다. 실재하지 않는 자아(自我)라는 존재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한다. 뭔가를 상실할 수 밖에 없는 라는 존재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 자아의 관점에서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자아가 없다면 두려울 것도 없다.

13장 죽음을 마주하고 산다는 것

뭔가 이상하지만 이처럼 표현하는 것이 그들의 종교에서 뜻하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일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끝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책에 동조하는 의미로 말하자면 그것은 끝이 없는 순환의 일부일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느낌을 말하자면 처음에는 활기차게 강연을 하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갈수록 기운이 빠지고 핵심이 중복되고 결론이 과정에 앞서 있음을 간혹 느낀다.

그래도 종교적인 관점이나 심리학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온전히 철학의 관점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나의 죽음에 나는 무슨 말을 남길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