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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심리학은 내가 좋아하는 분야이다. 그냥 연애놀음을 알려주거나 혈액형에 따라 성격이 어떻게 다르다는 등의 궁금증을 장난 삼아 알려주는 것과 같은 정도가 아닌 전분분야로서의 내용을 배우는데 시기를 놓친 나와 같은 사람이 다른 분야의 학문을 배우는 데는 교과서 이외의 여러 가지 부속물들이 필요하지만, 심리학은 사람만 주변에 있으면 그 사람의 성격, 행동, 발달 등에 관한 의문만으로도 한참을 생각해볼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해준다. 그러한 행동이 학문의 목적에 맞는 행동일지는 모르지만 책에 있는 내용과, 대상과의 차이점이나, 다른 점을 생각해보는 것 만으로도 흥미를 준다.
그래서 예전에 처음으로 심리학 관련서적을 읽은 것이 프로이트였는데 아마 “꿈의 해석”이었을 것이다. 꿈을 해석하는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정신 분석에서 사용하는 언어들, 그것만으로도 뭔가 재미있는 연관을 지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유명서적을 몇 권 읽고 나서는 이상행동이나, 이상 성격, 발달 심리나, 사회심리, 나중에는 언어심리까지 뒤적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심리학에는 프로이트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다 최근에야 에릭슨이나 다른 학자들의 책과 함께 융 Carl Gustav Jung의 책을 보기 시작해서 심리학의 다른 관점을 내 나름대로 발견하기도 한다.
심리학의 변화는 아마도 프로이트의 독주체제에서 여러 다른 학자들의 주장으로 변화되어 왔던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의 이유는 아마도 성에 관한 프로이트의 집착과도 같은 libido 주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libido 설을 인간 행위의 거의 모든 부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데에는 나도 약간은 싫증인 나있던 터에 융의 무의식에 관한 주장을 접한 후로 그가 동양적인 사상과 친근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로 많이 옮겨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한편으로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내재해있는 성의 역할에 대하여는 융은 아마도 프로이트에 반한 주장을 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 요즘의 심리학관련 책을 읽거나, 또는 인터넷 검색 중, 포스트모던이나 구조주의니 해체주의니 하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을 분석하는 심리학자들의 글을 읽다 보면, 그들의 표현 방식에서 프로이트의 구순기(口脣期)적 욕망에 대한 분석을 떠올리고는 한다.
특히 얼마 전 읽었던 소칼 Alan Sokal의 『지적 사기』Fashionable nonsense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이희재 옮김 (2000). 《지적 사기》. 민음사)에서 꼬집은 것과 같은 글의 표현방식을 보면 융보다는 프로이트에게 더욱 비중이 옮아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지젝 Slavoj Zizek의 이 책은 초반부에서 소칼의 비판에서 느꼈던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그가 따르는 학파가 라캉, 들뢰즈 그리고 청년헤겔, 마르크스 등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난 후에야 그럴만한 근거가 있구나 하였다.
그가 표현하는 분석의 방법은 “지적 사기”에서 소칼이 꼬집은 라캉의 방식과 유사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책에서 인용되는 라캉의 책이나 들뢰즈의 책은 아직 읽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렇다.
고전을 읽기 시작했던 어렸을 적부터 철학 분야에 있어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표현하는 인간 본성이라든가 인간의 자아 등에 대한 표현은 그 단어만 달랐지 결국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칸트부터 하이데거까지 그들이 구분하는 나와, 내 안의 나와, 그 사이의 나를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의 세가지는 모두 다른 단어로 표현되지만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과 같이 결국은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 본성이나 자아와 같이 불변하는 본질을 찾는 학문에 대하여는 굳이 현대의 것을 읽을 이유가(고전도 만족할 만큼 읽지 못하였으면서)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현대에 오면 올수록 그들의 표현은 비틀어진 고목과 같이 새끼줄처럼 꼬아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이다. 그래서 그들이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결국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방식, 즉 생존의 방식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학문도 경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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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심리학분야에서도 환경에 지장을 받는 사회심리학이나 발달, 정치, 언어심리학 등은
변화한 사회상과 접근방식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읽어 볼만하다고 생각되어, 최근의 심리학자들의 책을 보고자 하였으나 누가 유명한지 알 수 없던 바람에 다른 분야의 인문관련 책을 보게 되었었다.
그러던 중 진화심리학과 생물학에 대한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리처드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Devil’s Chaplain라는 책을 읽다가 그 속에 인용된 “지적 사기”라는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책을 먼저 보게 된 것이 다른 심리학자 특히 자크 라캉Jacques Lacan, 질 들뢰즈Gilles Deleuze,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펠릭스 가타리 Felix Guattari 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심리학에 흥미가 있음에도 더 이상 진보를 못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들은 왜 보편적인 표현으로 간단히 분석할 수도 있었을 텐데 비유에 비유를 거듭하며 그것도 자신만의 신조어를 사용해가며 표현해가는지 알 수 없을뿐더러, 아마 요즘의 시대에는 그 뜻을 이해할 때 즈음에는 아마 또 다른 학설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한참을 되풀이해서 읽어봐도 그 문장이 그 뜻인 것은 알겠는데 그걸 한 장(章)에 걸쳐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마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이 그런 것일까? 하기야 순간의 꿈을 가지고도 수백 페이지의 글을 만들어 내는 학문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아니면 경쟁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특이성을 소칼의 비유처럼 사용하였거나……
어쨌든 이 책의 도입부는 그렇게 짜증스러운 되씹기를 반복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으나
중반으로 가면서 저자의 방식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서 되새김의 수는 줄어드는 그런 책이었다.
책을 모두 읽은 후의 요점을 느낌으로 표현한다면 그가 내가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라캉을 비유하거나,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에서 분석의 타깃을 삼은 것으로 인하여(나는 ‘미. 드.’가 미국 드라마를 말하는 것임을 최근에야 알았음) 그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채 마르크스로 돌아가자고 하는 데서 신선하면서도, 일면 새로운 지식과 These에 대한 공감을 갖게 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조는 왜 그리 날카로운 가시를 휘두르는 것 같을까? 사회를 분석하고 거기에 잘못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깨우치기 위한 방편의 하나라고 이해하고자 하여도 공통적으로 그들은 불만스러워 보인다. 당연하겠지만,
요즘 세상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겉으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그 이념이 상대당을 공격하는데 사용되고는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그들만의 싸움에서만 그럴 뿐 정치를 술 안주 삼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몇 년 전 촛불을 든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어 정권에 소리 높인 적은 있지만 그 속에서 이념은 없어 보였다. 사실은 있었을지라도 적어도 그들은 문화로 비추어지길 바랬던 것 같다.
60여년간 이념을 입에서 내뱉으면 잡아가던 그런 시절이 아직 뇌의 어딘가에 남아 있어서인지 몰라도 겉으로는 이념을 말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념을 말하고 내세우는 자들은 오히려 어용단체이거나 보수를 표방하는 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소설 아틀라스: 지구를 떠받치기를 거부한 신>에서 에인 랜드(Ayn Rand)가 즐겨 쓰던 이데올로기적 환상, 즉 파업에 나선 (창의적)자본가의 환상을 떠올려보자. 특권을 누리던 ‘봉급 부르주아’계급이 자신들의 특권(최저임금 이상의 잉여가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이는 오늘날의 수많은 파업에서도 이러한 환상이 도착적인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의 시위는 프롤레타리아적 시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전락할 위험에 저항하는 시위다. 달리 말하자면, 정규직을 얻는 것 자체가 특권인 요즘 상황에서 감히 시위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035
이렇게 보면 이념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념보다는 돈, 봉급이 모든 것에 앞서는 세대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런 한쪽 부류의 사람만 살지 않았다. 소위 혁명이라고 불리는 시민들의 행동은 인류가 사회를 이루고 살던 때부터 규모만 다를 뿐 줄곧 시민과 같이 했었다고 본다. 그 시민을 정치나 종교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자신의 욕망의 분출구로서 이용하는가 하는 이용의 대상으로 보일 뿐 정작 시민은 가족으로서의 소규모 사회만 원했던 것은 아닐까? 소규모의 사회로서의 평온만을 원하는 가족단위의 사회에서도 욕망과 불만을 가진 자는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커가는 규모의 사회가 심리학자들이 예측하는 스트레스의 해소방편으로 이념을 이용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념을 이용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의 협잡으로 사회는 점점 규모가 커지고 국가로 경계가 나누어지는 과정에서 이념이 뿌리를 내린 것 아닐까 한다.
심리학자로서 사회를 대상으로 삼아 분석을 시행할 때에는 아마 그런 발달과정이 보여지는 것 아닐까? 프로이트가 모세의 탈출을 다른 시각으로 본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로 소농은 오늘날 악명 높은 중간 계급이 되었다. 중간 계급의 모호성. 마르크스가 조제프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을 묘사한 말처럼 이 ‘살아있는 모순’은 그들이 정치와 관계 맺는 방식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한편 중간계급은 정치화에 반대한다. 이들은 그저 자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간섭 없이 일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사회의 광적인 정치적 동원을 종식시켜 모두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겠다고 약속하는 독재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향을 보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중간계급의 구성원들이 오늘날 위협받는 애국주의적, 헌신적, 도덕적 다수파의 형태를 이루며, 프랑스의 르 펜(Le Pen),과 네덜란드의 헤르트 빌더스(Geert Wilders)부터 미국의 티파티(Tea Party) 운동에 이르는 우익 풀 뿌리 포퓰리즘 운동의 주된 선동자로 나서고 있다.058
사람들이 타인의 간섭을 싫어하면서 잘 조직된 규율과 제도가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란다는 면에서 모순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찌 보면 이기적인 측면으로서의 사회 속의 규율과 제도가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항시 세상은 한쪽만 존재하지 않는 면으로 보아서는 이기적인 측면이라는 점은 가학적인 면이 있다고 하겠다. 그 반대도 있고…… Sadomasochism.
라캉은 젊은 시절에 동양의 지인으로부터 아마도 주역이나 노자를 배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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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항상 극동의 문화를 동경해서 노자의 사상을 직접 공부하기도 했으며, 1963년과 1971년 두 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불교사찰을 돌아보면서 불상조각의 신비한 미를 극찬하였다. 서구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주·객 이원론적 이성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던 라캉이 무위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노장사상이나 연기론적 입장에 근거해 무아의 법리를 강조하는 불교사상에 끌린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라캉은 ‘불안’을 주제로 1962~63년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욕망의 망상적 성격과 진리에 대한 전복적 태도를 주장하는 불교의 변증법적 사고가 자신이 개념화한 욕망이론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비록 라캉이 불교와 정신분석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탐구하지는 않았지만 실재계, 상징계, 상상계의 세 고리를 통해 무의식적 욕망을 설명하는 라캉과 불교의 사상에는 많은 유사성이 있다. 이하에서 필자는 라캉의 사상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그것이 불교 이론과 어떠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출처] [불교와 지성] 16. 자크 라캉-김석 건국대 교수 |작성자 까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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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심리학에 도입하려니 소칼에게 표적이 되었던 것이고
……
동양의 은유를 어찌 논리로서 낱낱이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해석은 소용돌이처럼 크게 본질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을 벗겨낸 부분만으로 표현한 부분에서 유추해보면 대충이나마 모순을 이해할 수 있다. 지젝도 마찬가지로 라캉을 분석한 부분을 빼면- 그것이 그의 중심이라고 할지라도, 분석의 유일한 대상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Pink Floyd의 "The Wall"의 DVD에 나오는 날카로운 가시를 휘두르는 장미의 향을 맡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왜 한참 지나간 남의 나라를 따라 하는가 하는 점도 동양의 사상으로 빗대어 본다면 그럴만하고 우리는 이미 결과에 들어선 것이 아니고 과정을 지나는 시기일 뿐이다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프랭크는 오늘날 미국의 포퓰리즘적 보수주의의 역설을 설명하면서, 그 기본 전제는 경제적 이해관계와 “도덕적’문제의 간극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다시 말해 경제적 계급대립(가난한 농부와 블루 칼라 노동자 대 변호사, 은행가, 대 기업)이 정직하고 근면한 기독교도 미국인 대 카페 라떼를 마시고 외제차를 몰며 낙태와 동성애를 옹호하고 애국적 희생과 시골의 소박한 생활방식을 무시하는 데카당스 자유주의자의 대립으로 변환 또는 코드화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방국가의 개입을 통해(스쿨버스 정책부터 학교에서 다윈의 진화론과 도착적 성행위를 가르쳐야 한다는 규정까지)진정한 미국인의 생활방식을 해치려는 자유주의자가 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포퓰리즘적 보수주의자들의 주돈 경제적 요구는 규제적 개입의 재원을 마련하자고 열심히 일하는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강력한 국가를 타도하라는 것이고, 그들이 원하는 최소한의 정책은 ‘세금 감소, 규제완화’다. 개인적 이익의 합리적 추구라는 일반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분명히 모순적이다. 포퓰리즘적 보수주의자들은 말 그대로 자신의 경제적 파멸에 투표하고 있다. 감세와 탈규제는 가난한 농민을 파산으로 몰아가는 거대기업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라는 의미다. 국가 개입이 감소하면 영세농에 대한 연방정부의 지원이 줄고 그밖에 사회전반에서도 마찬가지다. 067
동양에서의 서양은 한동안 그렇게 좋은 희망을 가져다 주는 신기한 상징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과학을 앞세운 문물만을 가져왔다면 그렇게 그들은 상징적인 존재로서 아마도 지금 시기쯤에는, 어쩌면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일지라도 멋진 상징으로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재로서 그들은 문물과 같이 문명을 심으려 했으므로 피사로(Francisco Pizzaro)가 되었다.
서구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들은 공개적으로는 전 세계로 민주주의의 전파를 지지하지만, 막상 사람들이 종교가 아닌 정의의 이름으로 압제자에 맞서 봉기하자 “깊이 우려하고 있다”. 왜 우려하는가? 왜 자유의 기회를 얻었는데도 기뻐하지 않는가? 마오쩌둥의 오래된 경구가 오늘날처럼 적합할 때가 없었다. “하늘 아래 혼란이 있다. 상황은 더할 나위 없다. 140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이곳 나름으로의 상황이 존재한다.
이념은 때로 전쟁과 반목과 피를 부른 싸움으로 시간을 소비하지만 때로는 그 이념으로서 진보한다. 아마도 세상의 역사를 이끈 원동력은 보수를 탈피하려는, 모두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의문을 벗어나고자 했던 진보적인 사람들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마치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문의 증명.
그 증명을 따라준 일부가 지금 태양계 밖으로 위성을 보낸 것과 같은 힘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비록 지젝의 지적대로 중간계급(나는 이들이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만)이나 소농이라고(지금 시대에도 소농이 프롤레타리아로 변화할 가능성은 항시 있다.)하는 사람들이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여도 결국 그들을 이용하는 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치부를 내보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아무리 미디어 광고에서 “당신들은 고급 차를 타고 잘 꾸며진 집에서 살면서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돕고 있다”는 자부심을 꾸며주려고 해도 그것의 속셈은 당신의 고급 차와 집은 조금이라도 이자 지급시기를 어기면 길로 내쫓을 것이며 당신의 도움은 정말로 그들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돕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려는 것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서양과 달리 일부의 탐욕으로 대다수가 힘들어지게 되더라도 민족주의로 흐를 가능성은 희박할지 몰라도 사회가 지금처럼 일부가 전체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착각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월 가 점령시위에 대한 공격도 너무 깊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측 가능한 보수세력의 비난은 대응하기도 쉽다.
시위가 비 미국적인가?
보수주의적 근본주의자들이 미국은 기독교 국가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이 성령과 사랑으로 뭉친 신자들의 평등주의적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한다. 월 스트리트의 이교도들이 (황소상으로 구현 된)거짓 우상을 섬기는 동안 성령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시위대이다.
시위대는 폭력적인가?
략(略) 이들은 현재 돌아가는 상황에 제동을 걸려 하기 때문에 폭력적이지만, 글로벌 자본주의 체계를 원할 히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폭력에 감히 비교할 수준이나 될까?
략(略 이들은 사회주의자라 불린다. 그러나 미국에는 이미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있다.
이들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 받는다. 그러나 2008년의 붕괴를 야기한 월 스트리트의 투기꾼들은 시위대가 벌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피땀 어린 사유재산을 일거에 허물어뜨렸다.
략(略 이들이 공산주의자라면 시스템에 위협받고 있는 공동The Common(공동의 자연, 지식)을 염려한다는 의미에서뿐이다.
략(略 이들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파괴일로를 걷는 시스템에 대응하고 있을 뿐이다. 시위대는 그저 권력자들에게 발 밑에서 입 벌리고 있는 심연으로 내려다보라고 알려줄 뿐이다 154~155.
사람들이 뭔가의 목적을 가지고 집단화하여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는 데에는 그들이 표면에 내세우는 주장 말고 다른 무엇이 있다고 하며 인류 초기에 사람을 이용하려는 집단처럼 그들을 이용하려는 일부의 주장을 합리화시켜주려 하거나 그들의 주장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이 책에서는 한마디 한다. 그것을 비유하자면 왜 꼭 북쪽 정권의 인간들은 이쪽의 선거 때가 되면 도발적인 행위를 하는 것일까? 그들은 스스로 미국을 주 적으로 생각하며 우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면서 왜 그럴까? 일부와 일부는 공동의 목적이 있을 수 있다. 통일을 원치 않는 세력은 조 봉암이 주장했던 것(발굴 한국현대사인물: 141p)처럼 이쪽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1%로 대변되는 세력이 경제적인 것만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이념으로 무장하고 가면을 쓴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려는 세력도 일부의 세력이다. 그들을 위해 세금을 써가면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훌륭한 제도와 규율을 만들려고 몇 년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짜증나는 일이다. 그래도 시민들이 선택한 민주주의 방법이니 실행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솔직히 동의하기 싫다. 뭔가 속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담배는 몸에 해로우니 피우지 말라고 담배 갑에 표기한 것처럼 이상하다. 그런 표기. 담배가 해로운 줄을 알려면 그것을 사야 한다는, 그 와중에 그 돈은 고스란히 누군가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니 따라야 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쳐지는 느낌이다. 찝찝하다. 소주 한잔하다 잘못하여 코 속으로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사르코지: 예상보다 더 나쁜/ 타자: 최악을 기대하라 Sarkozy: Worse than expected/ The Others: Expected 라는 대단히 난해한 제목의 최근 저서에서 ‘민주적’ 투표 참여에 반대하는 정교한 주장을 제시한다. 설사 진정한 ‘자유’ 선거라고 해도 한 후보가 다른 후보보다 명백히 바람직하다 해도(이를 테면 반성별차별주의자 대 반 이민주의 포퓰리스트 구조처럼)국가가 조직한 다당제 선거라는 형태 자체가 초월적이고 형식적인 층위에서 부패해있으므로 투표에서 스스로 빼내야subtract 한다는 것이다. 164
이런 사회를 심리학의 여러 가지 이론과 분석의 방법으로 이해 또는 제시하려는 시도가 쓰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방향을 제시하려고 하는 방식에서 틀어지려고 하는 것을 바른 쪽으로 인도하는 도덕을 다른 표현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학문으로서의 역할이고 술자리나, 시장에서, 공원에서, 등산하다가 쉬는 쉼터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실천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아마 열 살도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가 어려 보이는 점을 이용하여 ‘바리케이드 사건’에서 훌륭한 역할을 하는데 일부의 세력이 자본으로 권력으로 압박해오는 세상에서 누가 그 아이처럼 나설 것인가?
이 사회가 ‘정상적으로’기능하려면 명백히 소시오 패스(Sociopath; 반 사회적 인격장애자)가 필요하다. 오로지 그들만이 이 사회를 구할 수 있다. 이 말은 사회를 위해 사회의 규칙을 깰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224
어쩌면 너무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지금 그런 역할을 누군가 하였더라도 그 의미를 사람들 모두가 알게 되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시기는 아무리 인터넷으로 무장하였다고 하여도 알지 못한 채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인터넷의 사용은 주로 북반부의 일부에서만 활용되고 있다는…….
누구나 자신의 성안에서 안주하려 하고 정권이 자본이 자신을 묶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지만 않는다면 어느 누가 ‘프롤레타리아’가 되려고 할까?
그러나 내 생각에 그 단어는 과거의 이념에서 사라지지 않은 단어일 뿐이고 아직 내가 읽지 않은 다른 책의 학자는 다른 표현으로 지젝의 표현처럼 전치하여 알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바라는 바는 다만 언젠가 또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들었을 때 사실을 알리려 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일부를 위하여 사용하여 자신만의 탐욕을 채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목적했던 것은 영도
(zero-level)의 저항이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폭력이었다
.
그들을 이해하고 돕겠다고 나선 사회학자, 지식인, 논평가들을 보고 있자니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시위를 그들에게 익숙한 용어로 번역하려는 필사적인 끝에 그들이 거둔 유일한 성공은 폭동이 제시한 수수깨끼를 교란시킨 것뿐이었다.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