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탄생 -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 인간과 자연에 던지는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의 현장
콘스탄틴 J. 밤바카스 지음, 이재영 옮김 / 알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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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동안 궁금했던 것들.

왜 서양과 동양에 있어서 사상의 실현은 다른 양태로 나타났을까?

합리적이라고 하는 서양사상은 무엇 때문에 폭력적으로 타 민족 위에 지배하는 것을 종교적 배경으로 포장하여 야만을 인정하였을까?

동양에서는 왜 노장에서 공맹으로 우회하였을까?

뭐 이런 것들.

 

그리고 내 책상 위의 퍼즐그림에 있는 아테네학당 속의 사람들.

그림에 알려진 사람들.

가운데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낮술한잔 걸친 듯한 디오게네스. 상자 위에 지난밤 숙취로 인해 빙빙 도는 마리에 팔을 괴고 만물은 유전한다고 생각하는 헤라클레이토스, 그 뒤에 노숙하여 굳은 몸을 푸는 듯한 아낙사고라스와 파르메니데스, 커다란 책을 들고 열심히 외상 술값 장부를 정리하는 듯한 피타고라스, 그 모습을 커닝하는 데모크리스토스, 파르메니데스 위에서 옆 모습만으로도 무도 F1 포스를 발하는 소크라테스, 그의 말을 콧등으로 듣는 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우측 아래의 한 무리 속에 섞여있는 유클리드와 조로아스터, 프톨레마이오스, 그들 틈에 삐죽 얼굴을 내민 라파엘로, 그 외 등등~~

 

그리고 이 그림 속에 없는 것이 당연한 석가모니 (출생 BC 대략 563? ~ BC 483?) 노자(老子)(BC. 대략570? ~ BC. ? (이름은 이이(李耳, 아명은 담())이라 했고 초나라 출생이라 했는데 제자들에게 의하여 가공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도 귓바퀴 없음 담()이라고 생김새의 구체적인 인상을 그리면서 그림은 귓바퀴가……) 공자, 맹자, 묵자, 퇴계, 율곡과 같은 동양의 사상가들...... 누가 우리 동양의 학자들도 모아서 한 화면에 그림으로라도 남기지. ~~.

 

그들은 지리적으로 지구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으면서도 거의 비슷한 세기에 살아가면서 거의 비슷한 사상을 만들어낸다. 아니 자연을 탐구하여 그 본말을 밝혀내고자 노력하며 각자의 학문체계를 발전시킨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들의 그 훌륭하면서도 비슷한 사상이 변질되어 달라졌을까?

아니 달라진 것처럼 보이게 되었으며 다양한 사상을 무시한 채 한가지로의 길을 들어서게 되었을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시한 두 가지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체계들이 이후 2천년동안 유럽의 정신세계를 번갈아 가며 지배했고(12세기가지는 신 플라톤주의가 지배했고,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의가 지배했다.) 과학적인 연구와 실험적인 측정은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추구했던 신비주의와 과학의 조화로운 종합은 해체되고 만다. 신 플라톤주의는 신비주의만 강조하면서 과학적 연구를 조롱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는 물리학을 신학의 영역에 포함시킴으로써 물리학과 수학 사이의 연관을 끊어버린다. 168P

David Bohm은 이렇게 단언한다.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이유는 측정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달랐던데 있었다. 서양 사회가 주로(측정에 의존하는)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강조 했던 반면, 동양에서는(궁극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종교와 철학을 중시했던 것이다. <전체와 그 안의 질서 P23>-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2? ~ BC 497? 177P

보움의 의견대로 척도, 측정에 대한 태도가 달랐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어려울 것 같다. 표현의 방법에 있어서 은유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가 다를 뿐 아닐까?  

비록 시기가 틀렸을지는 몰라도 만약 그들이 어느 순간에 만났더라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음에 반가워서 밤새 한잔 기울이지 않았을까?

 

이 책에 나온 철학자들의 말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동양학자들의 말을 비교해 보았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를 전적으로 비물질적인 개념과도 연결시킨다. 1은 슬기로움과 본질을, 2는 사유를, 4는 정의(22=4, 자기자신을 두 번 곱한 수)

와 함께 테트락튀스Tetraktys로서는 자연전체를 의미하며, 5는 결혼을, 6은 육화(肉化), 7은 시간과 빛과 건강을, 8은 우정과 사랑을, 그리고 완전함의 수 10수의 모든 본질을 의미한다. 또한 그들은 수 3에 특출한 지위를 부여한다. “우주와 만물은 수 3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끝과 중간과 시작은 이 만물의 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3은 윤리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만물은 3이며 이 3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다. 모든 개별적인 우수함도 3가지로 요약된다. 지성과 힘과 행복이 그것이다. 161P

 

온 세계는 조화와 수라고 한다.” “ 1은 만물의 시초다.” 그러나 수 1은 수가 형성되는 원리이기도 하다.” 1은 수의 원리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형이상학

道生一 一生二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沖氣以爲和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만물부음이포양충기이위화: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 <>을 낳고  <> <>을 낳고  <>이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을 등에 업고 <>을 가슴에 안았다 <>가 서로 합하여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약 3~4천년전에 바라보는 자연은 지금과 달랐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시선이 보는 관점이 지금과 달랐을 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종일 흐르는 강을 보고, 산의 나무들과 바위들과, 하늘의 구름과 별과, 바람과 온기와 한기를 느끼며 세상을 이루고 있는 불, , 공기, 흙과 같은 원소들이 분열하고 합하여 테트락튀스를 이룬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반대편의 인간은 그것이 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내고, 그 기를 분석해가며 道와 모든 것을 낳고 기르고, 物과 勢가 형상을 만들고 다진다는 생각을 하였다. 같은 시선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대상의 동기를 증명을 통하여 문자화하려 시도하고, 한쪽의 세상에서는 그 대상을 자연상태대로 인간과 동일화하려는 노력이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음이 아닐까 한다.

 (道生之(도생지)德畜之(덕축지)物形之(물형지)勢成之(세성지)

`

또 다른 같은 느낌을 주는 Metaphor?

 

 

"그러므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탐구 대상이 되고 언제나 의문거리인 것, 즉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실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니......, 우리는 가장 많이, 가장 먼저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그런 뜻으로 있는 것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형이상학

격물치지

致知(치지) 在格物(재격물)

物格而后知至(물격이후지지) 知至而後意誠(지지이후의성) 意誠而後心正(의성이후심정) 心正而後身修(심정이후신수) 身修而後家齊(신수이후가제) 家齊而國治(가제이후국치) 國治而後天下平(국치이후천하평) …… 此爲知本(차위지본) 此爲知之至也(차위지지지야)

앎에 이르게 됨은 사물을 구명함에 있다.

사물을 구명한 뒤에야 앎에 이르게 되고 앎에 이른 뒤에야 뜻이 정성이 되고 뜻이 정성이 된 뒤에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야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아진 뒤에야 집안이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집안이 가지런해진 뒤에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야 천하가 화평케 될 것이다. …… 이것을 근본을 앎이라 이르고 이것을 앎의 지극함이라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사물을 규명하여 본말(本末)을 알게 되는 사람 중에 자신이 알게 된 바를 글로 남기게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 지는 알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의 근원을 아는 사람이라고 글을 사용할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당시에 사용하는 단어의 수도 지금보다 적었을 테이고……

그리고 지식이나 지혜의 양을 측정할 수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에야 IQ, EQ 등으로 측정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신빙성이 있는 절대치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 자신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거나 자신이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도 말을 하며, 사람들이 말하는 언어의 상징을 알려는 방법에 의하여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지 않는다고 왜곡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해진 언어들과 글로 씌어진 단어들이 영혼의 감정들에 대한 상징들이라고 말한다. 그 후 그는 말해진 언어들과 글로 씌어진 단어들이 인습에 의해 가정되기 때문에 모든 인간 존재에 대해 동일하지는 않다고 한다. <움베르토 에코 기호학과 언어철학 50P>

 

 

문장은 하나의 형상일 때 비로서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221p 헤라클레이토스ράκλειτος

 

인간은 실제로 영원한 이 로고스Logos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로고스를 듣기 전에도 그러하고, 듣고 나서도 그러하다. 모든 일이 이 로고스를 따라 일어나지만, 인간들은 무지한자와 다를 바 없다. 로고스가 공통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를 자신의 독자적인 통찰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238p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知者不言(지자불언) 言者不知(언자불지) 塞其兌(새기태) 閉其門(폐기문) 挫其銳(좌기예) 解其分(해기분) 和其光(화기광) 同其塵(동기진) 是謂玄同(시위현동) 故不可得而親(고불가득이친) 不可得而疏(불가득이소) 不可得而利(불가득이리) 不可得而害(불가득이해) 不可得而貴(불가득이귀) 不可得而賤(불가득이천) 故爲天下貴(고위천하귀)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입을 다물고 문을 꽉 닫는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주고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신비스런 하나됨>이다

그러므로 도를 터득한 사람은 가까이할 수만도 없고 멀리할 수만도 없다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다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기에 세상이 이를 귀하게 여긴다

 

또 이런 은유도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네 가지의 원소가 파르미네데스의 존재가 지닌 모든 성질을 그대로 갖는다고 했지만, 부동성만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 원소들은 생성되지 않았고, 소멸되지 않으며, 변화하지 않고, 등질적이며, 경고하다. 허공은 있을 수 없다. 허공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실은 공기다. 340P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옮김>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은 것이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것이며, 불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은 것이다. <반야심경>

 

色卽是空 空卽是色을 떠오르게도 한다.

기독교의 경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많이 있는 줄 안다.

움베르토의 에코의 은유에 대한 설명에서 단어가 주는 무의식적 인식(?)

그렇게 본다면 다르지 않은 글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환경과 지식과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나름의 해석을 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경계를 두어 차이를 만들어 내 결국은 자신의 뜻이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는 바람에 간극은 더욱 벌어지고 진리는 시간에 의해서가 아닌 관점에 의해서 바뀐다. 과학은 철학에 바탕을 두고 증명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문명으로 답했다. 그것이 인류의 이동공간을 가깝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개인간, 민족간, 문명간의 거리는 더 멀리 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현대의 물리학적 세계관과 동양의 사상 체계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해내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번 이루어진 바 있다. 그러나 양자 사이의 공통점은 피상적인 차원에 머무를 것이다. 이에 반해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은 역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현대 과학의 관점에 창조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267P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데모크리토스 직후에 이미 철학은 우주에 비해 인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기 시작한다. 맨 먼저 소피스트들과 함께 회의주의가 나타난다. 이들은 새로운 인식을 획득하고자 시도하는 대신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로 연구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함께 윤리학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플라톤은 사유가 스스로 창조해낸 세계를 옹호하면서 감각의 세계를 부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근본 개념을 목적으로 삼고, 이목적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후기 4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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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 - 세계의 석학들, 위대한 자유주의자 이사야 벌린을 말하다
마크 릴라 외 엮음 / 동아시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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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이유로 이 사람의 책을 읽게 되었을까?

사전 지식도 없을뿐더러 다른 책에서도 인용된 적이 없던 사람의 책을 말이다.

그냥 어디선가 익숙한 왠지 익숙하다고 생각된 저자의 이름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다른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인터넷의 검색으로 알아본 이사야 벌린.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 1909년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출생, 1915년 러시아로 이주하여, 1920년에는 영국에 정착한다. 옥스퍼드대학교 코퍼스크리스티칼리지에서 철학을 공부한다. 인간의 일생, 인간의 사상, 인간의 희비극성을 해부하였다. 벌린은 1953년 논문『고슴도치와 여우(The Hedgehog and the Fox)』에서 인간은 2종류가 있는데 여우와 고슴도치를 비유로 들었다.

 

다원주의 분석은 Isaiah Berlin의 엄밀한 철학적 작업을 그와는 전혀 별개의 영역인 사상사 및 현실 정치에 대한 탐구와 연결해 주는 끈이기도 했다. Isaiah Berlin은 사상가들을 인간 행위 및 역사적 경험 그리고 정치적 가치들을 전부 포괄하는 통합 이론을 발전시키는 고슴도치들, 언제 어디서든 다중성(Multiplicity)을 발견하며 특정한 사상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존엄성조차도 기꺼이 희생제물로 바칠 수 있는 열광자들을 겁내는 여우들로 나눈다. 서문

 

이 고슴도치와 여우는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쿠스가 남긴 말로 여우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많이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본다는 구절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다.

이사람 말고도 아마 누구든 세상의 인간성을 또는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성들을 말할 때 상반되는 개념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런 인간의 본질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벌린은 그 비유를 고슴도치와 여우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것이 다원주의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자유를 예로 들며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에 대하여 주장한 것에 대하여 몇 사람의 학자들이 각 주제마다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책은 진행된다.

자유라는 것을 나의 생각으로는 루소의 방식으로 자율이 따라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상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우리는 자유(Liberty)는 원하는 것을 하는 자유(Freedom)가 아니라, 타인들의 도덕적 권리들을 존중하는 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Freedom)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정당한 자원을 소비하거나 정당하게 소유한 것을 주체에게 가장 좋은 방식으로 취급할 자유(Freedom)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된 자유(Liberty)는 다른 사람의 자원을 빼앗거나 아무 권리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자유(Freedom)는 포함하지 않습니다. 112P-자유주의 가치들은 서로 충돌하는가? Ronald Dworkin

 

그런데 자유라는 그 개념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그 양면성과 이중성이 사회를 이루는 근본이라고 하더라도 모순적이랄 수 있는 개념 때문에 수많은 이념과 철학자들을 고민하게 만들고 정치가들에게 새로운 재료를 제공해주는 것 같다.

 

모든 좋은 것들이 원칙상 조화를 이루는 완벽한 세계에 이르면 이러한 모순들은 해소될 것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충돌하는 가치에 부여한 의미는 우리가 말한 것과 다르다고 대답해야만 한다. 가치들이 그런 식으로 변형된다면, 지구상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관념들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총체라는 생각, 모든 좋은 것들이 공존하는 궁극적인 해법은 획득 불가능할(이는 진부한 이야기이다.) 뿐만 아니라 개념적으로도 일관성이 없다. 좋은 재화라고 해서 모두 다살 수는 없다. 그것이 개념적 진리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으며, 모든 선택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喪失)이 따른다. 100P-자유주의 가치들은 서로 충돌하는가? Ronald Dworkin <다원주의 Pluralism>

 

그렇지만

Isaiah Berlin에 따르면, 결국인간은 궁극적인 가치들 가운데에서 선택을 해야 하며, 그 선택은 그들의 삶과 사유가 시공간의 오랜 연속을 통해 그 존재, 사유, 정체성의 일부, 즉 그들을 인간답게 만드는 바의 일부인 근본 범주들 및 개념들에 따라서 규정 됩니다. 자유의 두 개념 168~169 – 유행에 뒤 떨어진 여우 78P Steven Lukes

 

그래서

갈등은 재 규정이라는 책략으로 처리됩니다. 마치 적극적 자유 강령에서 그러한 것처럼 말입니다.” 146P-가치의 다원성 Charles Taylor

 

이 것은 심리학의 부분을 차용한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프로이트를 싫어했다고 한다.

아마 프로이트 적 심리학의 근원에 대한 거부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생각은 인본주의적 사회주의에 많이 기울여져 있지만 그것이 사회의 어느 부분을 차지하고 있건 사람들은 각자의 이념을 말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어느 이념도 정답이라고 말 할 수는 없으리라고 본다. 사회는 현재 진행 중에 있으며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시간의 흐름에 맡겨져 있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그게 반드시 흥미로울 이라고 가정할 수 있는 선험적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48P (헤르첸. Herzen, Aleksandr Ivanovich)

 

어쨌든 벌린이 많이 인용한 헤르첸은

삶의 궁극적 목표는 삶 자체라고 믿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날 또는 다른 경험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멀리 있는 목적들은 하나의 꿈이며, 그에 대한 믿음은 치명적 환상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요원한 목적을 위해 현재 또는 곧 다가올 예견할 수 있는 미래를 희생하는 일은 항상 잔인하고 허망한 형태의 인간적 희생으로 귀착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가치들은 비인격적이며 객관적인 영역에서는 발견도지 않으며, 인간이 만들어 낸 것으로서 세대가 바뀜에 따라 변하지만 그 가치들을 존중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인간의 고통은 불가피하며, 전혀 오류가 없는 지식은 성취할 수도 없지만 필요하지도 않다고 믿었다.” 49P- 광신주의 없는 혁명가 Aileen Kelly

그리고

헤르첸은왜 인간만이 아주 적은 소수 집단들이 자기 집단의 목적을 위해 추구했던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의 그것을 얻기 위해 투쟁했던 바를 범주화하여 따라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Isaiah Berlin은 이 회의적 성찰에 대해 자신의 삶 전체를 단 하나의 열정(자유의 추구, 즉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 둘 다를 추구하는 것)을 좇아 살았던 사람이 제시한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37P 광신주의 없는 혁명가 Aileen Kelly

 

자유에 대하여 자유를 실천하고 지켜가는 방식에 대하여 서구의 역사는 종교를 빼놓고는 말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책은 그렇게 빼고 있다. 3부의 시오니즘에 대하여도 내가 생각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끌어내고 있지 않다. 모두 같은 민족이라서 그런 것이었을까?

나는 그들의 종교적인 무의식적 인성이 언제 어디에서부터 양면성을 극단적으로까지 보여지는 파괴적 성향으로 발전 왜곡되어 왔는지가 궁금한데

  

왜냐하면 그러한 입장에 서면 차이를 설명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견해를 갖는 것이 대안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만한 서구적 배외주의(Western-Chauvinistic)일뿐더러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않아 보입니다. 144P 가치의 다원성 Charles Taylor

 

이 책은 그냥 우연히 끌려서 읽게 되었지만 다원주의에 대한 것보다는 자유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는 편에서 잘못 산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요즘 우리에게 말이 많은 입으로 논쟁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로 마감한다.

 

진보가 목표라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인가? …… 당신은 진정으로 오늘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미래의 어느 날 사람들이 춤을 출 수 있도록 단상을 떠받치는 슬픈 여상주(Caryatid)역할을 하라 선고하고 싶은가…… 무한히 멀리 있는 목표는 ……일조의 기만이다. 목표는 좀 더 가까운데 있어야 한다. 노동자의 최적임금이나 일을 하고 나서 느끼는 보람처럼 말이다.(이 글은 Isaiah Berlin 자신도 종종 차용했던 인용구이다.)40P 광신주의 없는 혁명가 Aileen Ke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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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아기 - 아기한테 인간의 본성을 묻다, new humanist classic 6
폴 블룸 지음, 곽미경 옮김 / 소소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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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책을 고를 때는 인터넷을 통해 그 책들을 설명하는 요약 내용을 우선 보는 편인데, 책의 실제 주제와 요약내용이 달라서 구입한 후 후회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런 경우는 대게 내가 그 책의 서평 일부분만을 보고 그 책의 전체 내용을 지레짐작하여 생기는 일들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평을 쓰는 사람의 문장 서술방식이 저자들이 사용하는 방식과 다른 때문도 있는 것 같다.

특히나 책의 내용이 종교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에는 저자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나(물론 번역자의 방식에도 영향이 있겠으나) 문장의 서술방식도 심리학이나 철학, 역사 등의 분야를 설명할 때와는 달리 조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이 사용하고 주장하는 방식이 현재 생활하고 있는 사회의 언어 또는 방식을 나타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의 주장이 나머지 인생에 대하여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을 것이라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나같이 지식이 짧은 사람은 이해하는데 오래 걸릴뿐더러 그 이해가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수도 없다.

종교나 과학에 대하여 단호하게 피력하는 도킨스 같은 사람도 있지만 이 책의 저자의 경우는 대상에 대하여 너무 온건하게, 낙관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책을 덮어도 색깔을 분명하게 칠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발달심리학을 연구하는데 아주 훌륭한 대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성격이 완성, 고착, 전위 등 발달되는 과정, 혹은 이상성격이 발현되는 근거를 찾아내는데 중요한 연구 대상이라고 한다. 그런 여러 분야 중에서 아기들이 언제 자아를 인식하고 타자와의 구별을 할 줄 알며 죽음이나 신과 같은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알게 되고 왜 그런 성질을 타고 나는지에 대하여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아기들의 발달과정을 통하여 밝히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이라 하겠다..

 

예전에 성격심리학(D.J지글러 L.A 젤리, 이훈구 역 법문사 1983년판)이라는 책을 통하여 인간의 성격 형성과정과 이상성격의 주제를 다루는 것을 보아서 그런지 발달심리학과 성격심리학은 그 분야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고 더욱이 인간 본성을 다루는 데에서 있어서는 같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정신의 표현양식인 성격이냐 물심양면의 전체적인 인간 범주를 다루느냐 만 다른……

어쨌든 예전에 보았던 그 책에는모든 중요한 성격이론은 이 기본가정의 각각 다른 입장에서 세워졌고 이 기본과정을 도외시하고는 어던 이론도 충분히 그리고 적절히 이해할 수 없음을 확신한다며 다음과 같은 양극이 있다고 했다.

자유론 결정론

합리성 비합리성

전체주의 요소주의

체질론 환경론

가변성 불변성

주관성 객관성

발생성 응성

평형성 불평형성

가지성 불가지성

 

그리고는철학적 견지에서는 이 기본가정에 내재해 있는 주제를 연속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양분적인 것으로, 즉 사람을 자유롭거나 혹은 결정된 존재로 간주한다고 했다.(인간 본성에 관한 기본가정)

 

이와 같이 사람은 대상을 인식할 때의 방법에 있어서 양면성을 갖춘 서로 대립되는 방식처럼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대상과 나와의 양면성은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 등과 같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에 굳이 일원론이나 이원론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면 성격심리학인가 발달심리학인가의 구분과 같은 정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나만의 눈으로 보는가, 도덕적인 방법으로 보는가, 사회적 테두리 안의 적용으로 보는가, 형이상학적인 눈으로 보는가, 예술적 마인드로 창조를 위한 눈으로 보는가 등. 목적과 동기에 따라 양면성과 이원론을 그대로 표현하는 방식이 있겠지만, 이런 방법은 성인이 사용하는 자신만의 학습과 경험적인 방법이므로 발달과정에 대한 연구라기 보다는 사회심리학 쪽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된다.

뭐 개인의 인생을 역 추론하면서 성격의 형성과정을 밝히는 과정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책의 주제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어쨌거나 요즘에는 많은 인문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일부 또는 전부 부인하는 편에 있거나 동의하지 않는 편이란다.

그런 와중에 이원론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고 이 책을 읽어보고자 서평을 둘러보았을 때의 느낌으로는 이원론이 맞는다고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것을 핏대 세워가며 데카르트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도 심하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느꼈기에, 과연 이 책은 어느 쪽에 시선을 두고 있는가를 알아보느라 구입하여 보는데 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막상 읽는 데는 반나절이었지만……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어디선가 봤다고 생각했었는데 엣지 재단(Edge Foundation Inc.)에서 2007년 발간한 위험한 생각들”(존 브록만(John Brockman엮음)이라는 책에 저자가 간략하게 요약해 놓은 글(: 103P: 영혼은 뇌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이 있었음을 이 책을 모두 읽고 나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책을 산 일이 조금은 후회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책에

하지만 비물질적인 영혼의 거부, 즉 영혼이란 뇌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견해는 여전히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반하고, 대중의 정서에도 맞지 않으며, 어던 사람들에게는 혐오감조차 불러일으킨다. 대중들은 영혼이란 뇌를 비롯한 육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본다. …… 그에 반해서, 널리 퍼져있는 영혼 거부론은 도덕과 법의 영역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죽고 나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며, 자신의 육체가 죽고 난 뒤에도 영혼만은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는 생각(미국인의 90%가 이렇게 믿고 있다)을 포기하게 할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위험한 생각이 또 어디 있겠는가

라고 했다.

정말로 내가 이들의 유머를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인간본성이 본질에 우선하기 보다는 인간의 자존감을 위해서라도 도덕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영혼이 필요한 것이라면 굳이 안 봐도 되었을 것을……

아마도 이 책의 대부분에 쓰여 있는 글들을 생각해보면 그의 그 말은 그만의 유머라고 보고 싶다.

내가 잘못 이해하는 것이라도 할 수 없다. 이미 책은 읽었고 그의 바램 대로 영혼이 필요하다면 저들이나 필요한 것으로 치면 그만이니까……

책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 아기에게 도덕이란 선천적인가 아니면 학습되는 것인가라는 나의 의문에 대하여 이렇게 써있다.

 

부모라면 누구든 19세기 성직자 토머스 마틴 목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어린아이들의 사악한 천성을 지적하며우리 인간은 모든 도덕적 악의 근원인 사악함으로 가득한 본성을 세상 밖으로 내놓는다고 보았다. 또는 프로이트의 말에 동의할 수도 있다. 그는 아기를 처음에 부모에 의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회에 의해 교화가 절실히 필요한, 온갖 왜곡된 욕구의 총체인 이드(id)에 불과한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인간은 타고난 본질을 초월하는 도덕적인 분별을 지닌다. 이는 분명 인간이 거둔 최고의 업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지성과 공감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난다. 189-도덕의 범위)

 

인간의 도덕성은 자연선택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기계에 불과한 인형 같은 육체에 부동의 실체인 무엇이 주입시켜 시간과 함께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거나, 사악한 본성을 끝까지 다스리지 못한 채 뉴스에 나오는 사람이 된다는 것인지,

타고났으며 본질을 초월하는 분별력이 인간의 업적인데 그 업적은 사회성에 의한 학습의 결과로 그렇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인간의 업적을 만드는 존재가 있다는 것인지 등에 관한 표현은 얻기 힘들다. 아마도 언어의 사회성 때문에 그렇게 표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유머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 책의 저자는 부모라면 누구든이나 모든 아기라고 표현하였지만 그런 시선은 일방적이며 편협적인 시선이 아닐까 한다.

심리학문에 있어 당연한 실험의 결과이겠지만 나는 다른 방법으로 추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결과를 모두 신뢰하지 않는다.

예로 저자는 아이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이들 역시 신체적 소멸은 받아들이면서도, 영혼은 지속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1896년의 한 연구자가 자신의 네 살배기 아들과 나눈 대화를 보고한 적이 있다.

아들: 말 안 듣는 사람만 땅에 묻히는 거죠, 그렇죠?

아버지: ?

아들: 고모는 착한 사람은 모두 천국에 간 댔어요

 

이 경우에서 아이가 타자의 말을 이해하고는 별도로 뇌의 기능에 인식이 된다면 그 기억이 말을 하게 되는 시기에 이르러서 위의 예와 같이 표현되는 것은 아닐까?

사후 세계에 대한 개념은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과정 속에 부모에 의한 학습과정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머지의 실험이라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경우도 대부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의문스럽다.

 

어쨌든 책은 도덕성, 공정성, 혐오감등에 관하여 실험을 근거로 한 추론을 주장하는데 그 여러 장의 글을 읽고 생각난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수오지심(羞惡之心)”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저자의 생각이 동양인의 사상과 결과만을 생각하면 비슷할지도 모르겠지만 증명의 과정을 표현한다면 아마 다를 것 같다.

동양학에서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한 부분으로라도 이 책과 같은 분석을 한 내용이 있을까? 인간 전체에 대한 이론 말고 아동에 관한 것 말이다. 있겠지?! 있다면 보고 싶다.

 

문제는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신의 존재를 안다거나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거나 같은 의문을 증명하는 것일 텐데 그런 아이들의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였을 때 그런 현상은 일시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며,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관점으로 분석하거나 표현된다면 나타날 수 있는 차이가 아닐까 한다.

아기들의 유아들의 습성이나 표현을 분석하기 전에 그들에게 주입되는 문화적 요소가 있다면 본질을 분석할 수 있다는 표현은 아닐 것 같다. 발달과정이 그렇다는 있을 수 있어도…….

 

불행히도 이러한 명료함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견해가 있지만, 이들 영혼은 육체와 뇌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도덕적 입장에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는 특성들-양심, 고통의 경험, 번영의 욕구-은 두뇌 작용의 결과이며, 이러한 작용은 성장과 진화과정 모두에서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것들이 나타나는 성장 단계의 일순간을 찾는다거나 갑작스런 진화상의 도약 단계를 찾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292-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간은 선험적으로 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가, 아니면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는 규범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포이에르바하나 니체 등과 같이 자신의 분노의 대상으로 투사된 존재로서만 인정한다고 수긍하는 차원인가.

분노와 공포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와 같은 본성적인 의문은 심리학의 다른 분야나 다른 표현에서 이미 많이 공감하는 부분을 얻었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이원론을 어떻게 풀어내는가에 흥미가 있었을 뿐이었다.

인간의 본성 혹은 본질을 밝혀내려는 수 많은 학문에서 아무리 주장한다고 하여도 우주의 시작과 끝은 볼 수 없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리 다른 입장을 과학에서 얻어와 교리에 덧붙여 주장한다 하여도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근원이나 이유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책들의 저자가 남의 말을 인용하여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회유하여도 화합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역사를 통틀어 영혼이 육체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의심할만한 어떠한 과학적 논리 같은 것은 없었다. 이러한 견해는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인 데다(우리는 육체와 영혼을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지극히 구미가 당길 이야기이다 보니(누가 우리의 영혼이 소멸한다는 이야기를 좋아하겠는가), 쉽사리 사람들의 믿음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306

 

과학과 종교를 구분할 때, 믿음의 내용에서 차이점을 찾는 것은 그릇된 접근법이다. 그보다는 이러한 믿음이 형성된 과정과 이러한 믿음이 유지되고 수정되는 사회적 정황을 살피는 것이 더 낫다. 누군가가 경험적인 증거에 휘둘려 귀신의 존재를 믿었다가 자신의 견해를 선뜻 테스트해보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유령의 존재를 다시 부인하게 된다면 이것은 과학적 가설이다. 이러한 믿음이 강한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어 증거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다. 315 -

 

사람의 본성이 종이에 선을 긋듯이 딱 나누어진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흑백논리를 선호하는듯하다.

왜 저들은 같은 신을 놓고 싸우는가를 궁금해하는 나는 어쩌면 그런 그들의 흑백논리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경전에서 조차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한다.

육체가 정신을 만들고 정신이 다시 육체를 진보한 정신으로 이끌고 그 정신이 다시 건강한 육체를 만든다는 것은 저들의 격언 아니던가? Mens Sana in Corpore Sano (a healthy mind in a healthy body. Satire X: Juvenalis (10.356-64) 그렇게 순환된다는 사실을 인간의 본질에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나는 결론을 꼭 말해야 한다면 사람은 폴 블룸이 말하는 데카르트의 아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육체로 이루어진 존재로 바라보는 세계관과 영혼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는 세계관, 이렇게 두 가지 상반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지만 여기서우리를 본인은 책에서 아기로 표현했다고 본다. 그러나 아기의 시선, 혹은 정신을 이해하는데 성인이 성인의 방식으로, 성인의 시선으로 보아서는 순수성을 잃었다고 본다. 인간 정신의 발달과정에는 두 상반된 관계가 기본가정인 것처럼 당연한 것이므로 의식적인 자아가 순전히 뇌의 물리적인 반응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비물질적인 영혼이 없다. 우리는 물질적인 존재로, 그 선장이 물에 빠뜨린 바로 그 "괴상한 물건"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아기들인 것이다.”는 현대 뇌 과학의 주장을 걱정스러워 한다. 이래서 조심스러워한다거나 유머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아니면 내 무식을 그에게 전위하며 투덜거리는 것이거나……

 

내가 마음을 고찰할 때, 즉 내가 단지 생각하는 존재인 한, 나는 내 자신을 어떤 부분들로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고, 내 자신을 온전한 하나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비록 온전한 마음이 온전한 육체와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발이나 팔이나 어느 부위가 몸에서 분리된다 해도 내 마음에서는 어떤 것도 빠져나가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성찰

 

그런데 왜 인간이 영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왜 정신과 다르다고 표현하는가.

인간이 인간 스스로 불안함을 뭔가 다른 것으로 합리화, 승화, 동일화 한다는 것을 프로이드는 우리 자신이 마음의 진실된 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부인하려고 하는 까닭은 바로 헛바람 든 우리의 자존심 때문이다라고 했다는데 이 표현은 한편으로 헤겔의 노예나 니체의 노예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데카르트가 생각한다는 영혼을 내세우며 육체는 인형과 같은 기계로서 표현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표현했다고 결론을 말할 수는 있어도 그가 생각한 영혼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조심스러워하는 것일까? 나머지인생을 걱정해서? 그는 파스칼의 내기에 배팅하였던 것일까?

나는 요즘 선사들의 임종게(臨終偈)나 기독교의 경전 등에 나오는 글귀에서 어쩌면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을 얻는 중이다.

 

외과의사가 뇌에 전류를 보내면 그 사람은 실제같이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된다. 화학물질을 뇌에 주입하면 그 사람의 지각, 기분, 성격, 사고를 바꿀 수 있다. 뇌 조직의 한 부분이 죽으면 마음의 한 부분도 사라진다. 신경학적 환자는 도구의 이름을 말하거나, 얼굴을 인식하거나, 행동의 결과를 예상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거나, 공간 상의 한 구역 또는 자기 신체의 일부를 기억하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은 분할할 수 없는 전체이며, 신체와는 다르다고 말한 데카르트는 틀렸다.) 빈 서판 89

 

비록 과학이 인간의 정신, 영혼의 실체를 밝힌다고 한들 그것의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모든 개인은 성격의 통일성(unity)을 나타내고 동시에 자기 나름대로 그 통일성을 형성해가는 존재이다. 고로 개인은 그림인 동시에 미술가이다. 그는 그 자신의 성격을 창조하는 예술가이다. 예술가이지만 그는 결코 완전한 작업자도 아니고,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약하고, 극히 잘못이 많고 불완전한 인간이다. (Alfred Adler)

 

어렸을 적에 나뭇잎을 화학물질로 녹여 나뭇잎 속의 잎맥만 남기게 하는 일이 있었는데 요즘 자주 그 모습이 떠오른다. 그 나뭇잎 속의 잎맥은 땅 속의 수분을 빨아들여 나무를 한여름 내내 푸르게 하여,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겨우내 설화를 뒤집어 쓴 채로 차가움을 견뎌내어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입춘이 지나면 싹을 내밀어 다시 푸르름을 기대하는 마음을 제공한다. 나는 내가 그런 나무의 잎맥을 타고 흐르는 수액과 같다고 생각한다. 더 크게 생각을 넓히면 사람은 그저 끝을 모르는 우주를 구성하는 작은 원소와 같다.

내 생각에 인간의 정신 혹은 무엇이든 그 목적은 Adler의 말대로 나뭇잎을 구성하는 통일성을 형성해가는 존재로서 살아가면서 그 외로움을”199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천국과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생명의 다른 상태라고 말했다.(데카르트의 아기 315)”라는 것으로 위안받기도 하며, 경전에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 17:20, 21) 는 말에 자존감을 갖기도 하고, 또한 조계종 8대 종정인 서암(西菴) 남긴 “"나는 그런 거 없다. 정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라는 말에 인간의 목적이 있음을 알고 대상이 있어야 내가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 어렸을 적의 나뭇잎의 잔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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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종말 - 이성과 종교의 충돌, 이제 그 대안을 말한다
샘 해리스 지음, 김원옥 옮김 / 한언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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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끝자락

인류가 10만년전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상에 널리 퍼져나가 살게 되면서-사실 난 현재의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그 설을 못마땅해하는 편이다. 그건 서양의 편파적인 시선 아닐까? 동양에 베이징원인이 있었다면 그들이 어떤 급작스런 이유로 종말을 맞게 되고 화산 폭발로 인하여 화산재 위해 발자국을 남긴 루시의(320만년전에 두발로 걸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는 직립원인의 화석 주인공 「오스트랄로 피테 아파렌시스 <Australopithecus afarensis>」 후손들이 동양으로 건너올 때까지 남아있던 베이징원인의 후손이 그 넓은 지역에 살면서 루시의 후손을 만나 새로운 부족을 이룬 후손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인가? 학계에서는 아시아인의 선조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현생인류(現生人類)와의 직접적 연관성은 부정되고 있다고 하여도 어찌 갑자기 한 지역에서 비슷한 개체가 모조리 사리질 수가 있었단 말일까? 아프리카보다도 훨씬 넓은 아시아에서 말이다. - 제일 먼저 닥치게 된 시련은 무엇이었을까? 베이징원인이 적어도 동양에서만이라도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의심받는다면 루시의 후손들이 동아시아까지 왔을 때 그들은 부족간의 전쟁이나 전염병 등으로 이미 몰살되었다는 말이었을까?

 

어쨌건 그렇게 세월이 또 한참을 더 흘러 각기 흩어져 살던 부족들이 의사표현을 하기 위한 상징을 사용하게 되고 상징이 체계화되어 언어나 문자로 발전 하게 되어 서로간의 의사를 교환하게 되었을 때, 이방인에게 내 뜻을 전달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무엇을 고민하였다고 하였을 그 전에 이방인을 만나기 앞서 부족간의 교류가 이루어지기 전에 그 대표로 나서게 되는 인류가 자신과 다른 모습의 이방인에게 전해줄 무언가를 생각을 하였다면 그것은 요즘의 의미로 무엇을 말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전쟁의 대상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교역의 대상으로 봐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근거를 생각했다면 그 근거로 사용되었을 상징이나 표현은 무엇이었을까?

인류가 가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국가로 성장하기까지 많은 의식의 발전이 있었다면

그 중심에는 요즘의 의미로 철학이 있었을까? 아니면 신학이 있었을까?

 

나는 그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하기 힘들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만일 자연에서 형성되는 것들 이외의 실체가 없다면 자연학이 제일지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어떤 부동하는 실체가 있다면, 그것이 첫 번째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학문은 더 우선적이고, 제일철학이어야 하며, 이런 방식으로 보편적이어야 한다.”라고 했다지만 신의 유무(부동하는 실체)에 따라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면 자연학이라고 했으므로 철학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주술이나 역술 등이 어떤 단체에서 인정받으려면 종족의 단위가 어느 정도 성장해야 그 필요성이 대두되고 그것을 행하는 자가 직업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할 수 있도록, 그래서 학문으로 성장하여 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다면 최초에 부족간의 전쟁이 아닌 대화는 신학이 아닌 철학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부족간의 문화에서 동질성을 느끼는 것도 둘 다 공통되어야만 마찰이 없었겠지만 철학은 달라도 살 수 있지만 신학은 다르면 전쟁이었을 것이다. 우리 부족에서 신격화 된 것이 상대부족에서 하찮은 쓰레기로 취급된다면 철학이 다르다는 이해를 하기 위해서 문화 (meme으로 진화하기까지의) 의 급격한 섞임은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을 할 것인가 아니면 교류를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하기 위해 그 둘을 잘 무마시켜 말썽 없이 부족간의 화합을 이루는 것은 정치의 시작이고……

화합이란 것은 어느 한쪽이 양보하거나 속거나 협박당하거나 하는 것을 감추어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치가가 어느 한쪽을 속이거나 협박하려면 가장 필요로 한 세력은 부족을 움직일 수 있는 철학자(현자)외에 주술사나, 역술가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협잡은 비슷한 규모의 부족간의 경쟁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커나갈 수 있는 중심세력이 될 것이고……

그렇게 문자가 기록된 이후로 철학과 신학과 정치는 떨어질 수 없는 애증의 삼각관계로 지내온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가 요구하는 과학이나 문학이나 수학이나 의학으로서의 전문성보다는 종교성이 가장 우선시 되는 나라가 있다고 한다. 그런 나라는 교황이 왕보다 우위에 섰던 중세 유럽에나 있었던 것으로 알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에너지 시장에서 가장 돈이 되는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북반구의 여러 나라 중에서 경제적으로 뒤처지는 나라들-(2002년 모든 아랍국가들의 국내총생산 총계가 스페인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 실정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전체 아랍국가들이 9세기 이래 아랍어로 번역해온 책의 수가 스페인이 매해 번역해내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158) , 가장 첨단에 자리한 과학과 의학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이천 년 전의 책의 내용을 믿어야 한다는 선서를 해야 하며 수백 년 전의 종교 싸움을 테러라는 이름으로 변화시켜 종교전쟁을 계속하려는 자에게 정권을 주려 하는 나라가 있다.

 

신정이 빚어낸 중세 유럽의 공포들과 비교할 때 현재 서방에서 종교가 가지는 영향은 다소 양호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차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가 여전히 정부 정책, 특별히 미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현 상황은 모든 이에게 엄청난 위험을 안겨준다. 예를 들자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성경의 예언들을 통해 중동의 발작을 감지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제리 팔웰(Jerry Falwell: 대표적인 극우파 보수주의 목사), 할 린제이(Hal Lindsey: 환상적인 개인 체험에 의거하여 휴거 설에 관한 소설을 쓴 목사) 같은 이들을 국가 안보 브리핑에 참석시킬 정도 였다. 그들은 핵무기 배치에 대한 조언을 구할 만한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183p 신념의 종말(The End of Faith/ Sam Harris 2005)

 

그렇게 정치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종교와 철학을 가운데 두고 그 때의 상황을 재빠르게 인식한 권력자에 의해 어느 한쪽을 이용하여 편파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도록 되어있던 것 같다.

세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서양은 조용하게 지내던 동양이나 남반구의 나라들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나누어 지배하려는 욕심으로 전쟁을 일으켰는데,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A.H.맥마흔이 전쟁에서의 승기를 잡기 위하여 전후 이집트의 Muhammad Sharif Pasha의 자손인 후세인과의 왕복서신을 통해 시리아의 서부를 제외한 오스만제국의 영토에 아랍인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선언 McMahon Declaration했으나 1916 5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URG 에서 영국은 남()메소포타미아 지역, 프랑스는 시리아 지역, 러시아는 흑해 남동지역을 각각 차지한다는 터키 분할의 밀약사이크스 피코 협정(the Sykes Picot Agreement)’을 체결하였다. 그래 놓고는 1917 11월에는 팔레스티나에 유대인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을 발표하였다. <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고, 그 일을 성취하는 데 대하여, 팔레스타인에 거하는 비 유대인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 또는 타국에 거하는 유대인의 정치적인 상태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언은 1915년의 맥마흔선언과 상호 모순되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한 나라가 외교정책상 두말을 한 결과로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그때부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인 셈이었다.
이와 같이 영국이 모순된 정책을 강행한 것은 그때그때의 전국(
戰局)을 유리하게 전개시키면서 전후 중동지역을 지배하려는 의도에서였지만, 그 결과 아랍인의 많은 희생을 발생시켰다고 한다.

 

어쨌든 결과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우면서 지금에 이르지만 그런 행동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인의 이스라엘 지지는 정치 담론에서는 거의 알아차리기 불가능할 만큼 심원한 종교적 냉소주의의 한 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한 이유는 성지에(Mecca)유대인 권력이 최후로 들어설 때, 특히 솔로몬 성전이 재건축될 때 그리스도의 재림과 유대인의 최후 멸망은 동시에 촉발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희망에 찬 멸망에의 기대가 바로 이스라엘의 탄생을 관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처음으로 지지한 영국의 1917밸푸어 선언은 상당부분 성경적 예언을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현대 정치로 침범해 들어오는 이러한 종말론은 신앙이 초래하는 위험은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184

 

이 책에서는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 모두가 자신들의 경전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가 오늘날 신앙의 문제에서 사람들이온건하게 되는 유일한 이유는 지난 2,,000년 동안 거둔 인간 사상의 결실(민주주의,다각적으로 이루어진 과학의 진보, 인권에 대한 관심, 문화적, 지리적 고립현상의 종결 등)중 일부를 자기 식으로 흡수 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 말은 인류가 수천 년 전의 생활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에서 살아가게 되었으므로 그 때에 쓰여진 경구는 때로는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 과 같다고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성경의 경우 축자영감설 verbal inspiration,에 따라 일자의 오류도 없다는 말을 무시하는 것이 되거나, 그런 설을 부인하는 것이 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지젝(slavoj Zizek이 표현한 대로 믿는다기 보다는 문화의 일부로 생활할 뿐이라는 표현이 맞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도 그들은 성경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죽음 이후의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만 그것이 경전의 명령대로 해야 한다거나, 경전에서 요구하는 생활을 그대로 따라야만 받을 수 있는 보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직장이나 가족과는 또 다른 각자만의 조직을 구성하여 생활을 하는 것 같다. 하기야 경전대로 한다면 요즘의 제도나 규율에 따라 교수형에 처해질 테니…(신명기 13)

그런데 기독교인이나 유대인과는 달리 이슬람은 경전에 쓰여 있는 데로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여 행동으로 옮기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듯 하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전에 써 있는 대로 자신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돌로 쳐 죽여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말들은 보다 더 심오한 뜻이 담겨 있으므로 보류해놓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책의 22페이지에 있는 신명기의 구절은 아무나 알아들을 수 없는 암호로 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럼 모세는 무엇 때문에 그 말을 암호화 해야 했을까? 뭐가 두려워서? 불안해서? 자신이 몰고 나온 식솔들 중에 간첩이 있을까 해서? ~ 그것도 아니라면 하느님이 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전한 말이라서 골라서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종교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실제로믿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속한 공동사회의생활양식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일부) 종교 의식과 관습을 따를 뿐이다. ‘전통에 대한 존중심으로 코셔(kosher) 원칙을 지키는 비신도 유대인 등이 그런 예다. “실제로 그것을 믿지 않아. 그냥 내 문화의 일부분일 뿐이야라는 말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거부되거나 전치된 신앙의 두드러진 양식인 듯하다. 이렇듯실제 종교, 예술 등과는 구별되는 문화비근본주의적개념이야말로 버려지거나 특정 개인과 무관해진 신앙의 영역을 보여주는 핵심일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믿거나‘심각하게 받아들이지않고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키는문화말이다(슬라보에지젝>

 

종교에 대하여는 요즘 좀 싫증이 나 있는 상태이다.

불교는 내게 있어서 종교로 생각되지 않았기에 그쪽의 경전은 반야심경말고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다. 다만 선()에 대하여는 관심이 많아 몇 가지 책을 읽거나 최인호의 소설을 통해 얻어 들은 것이 전부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런 면으로는 유학도 마찬가지여서 최근에 들어서서야 이황(이황(李滉)1501~1570)이나 기대승(기대승(奇大升)1527~1572)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비교할 때 기독교관련 서적은 이 둘보다 더 많이 접했었는데 이슬람에 대한 서적은 한번도 본적이 없어서 이 책에서 저자가 밝히는 이슬람에 대하여 약간은 충격적이었다라고 할 수 있다. 9.11 빌딩 폭파 사건 때 그들은 그런 행위를 성전(지하드Jihad)라고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은 적대관계에 있을 때 일종의 작전명령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지 그로 인해 천국을 가고 그들의 가족이 주위로부터 칭송을 듣는다는 종교의 교리라는 것은 몰랐었다. 그로 인하여 충격적이었다라는 것이다.

 

인터넷의 안내에는 ■ 코란에 규정된 지하드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2190: 너희를 상대하여 싸우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라. 그러나 침략하지 말라. 하나님은 침략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2194: 신성한 것을 위반한 데에는 똑같은 형태의 형벌이 있다. 침략자에 대해서는 너희에게 침략한 범위까지 응징하라.

1733: 정당한 사유 없이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과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

그런데 Sam Harris는 책에서 이슬람의 문제점이라는 장에서 140페이지에서 146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불신자들에 대한 비방의 냉혹성을 알리기 위해서 원전에 있는 글을 인용, 편집하여 놓고 코란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종교 분쟁의 근거를 제시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점은 토라라고 불리는 구약의 일부분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들은 왜 싸울까?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이 셋은 같은 신을 따르고 있는 것 아닌가?

 

책을 읽으면서 이미 이와 비슷한 책들을 여럿 보았기 때문에 종교가 주는 폐해에 대하여는 특별히 추가할 것이 없으나 몇 구절은 내 생각과 딱 들어맞는다.

지금 세상에서 폭력을 일으키는 주범인 그 종교들이 동양에 없을 떼에도 동양은 역사를 잘 만들어가고 있었으며 그들만의 방법으로 신이든 정령이든 무엇을 따르고 믿어왔지만 그 신이 다르다고 하여 전쟁을 하였던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공맹시대(孔孟時代)에는 이웃의 군주가 군주다움을 잃으면 그것을 질책하는 이유로 전쟁을 하였다고는 알고 있지만 서양처럼 종교문제로 수천만의 인구를 살해하는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흔히 사람들은 그래도 종교가 주는 영향이 크다고 말하며 경전에 써있는 글들이 훌륭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글은 이 동양에서는 그들보다 더 오래 전에 그보다 더 훌륭한 글들이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경전들은 상당부분 지혜롭고 위안을 주는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지혜와 위로와 아름다움의 말들은 세익스피어, 버질, 호머의 작품들에도 풍부하며, 그런 작품들 속에서 영감을 찾아 냈다고 수천 명을 살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43

 

특히나 동양에서의 기독교는 그들이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한 행동으로 볼 때 적어도 백인우월주의에 빠져있는 그들에게는 안중에도 없을듯하다. 어차피 그들은 선택 받은 민족이고 나머지는 그저 들러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그들만의 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말이다.

 

이제 세상은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우주의 생성원인이나 배경, 그리고 인간의 신경 세포 등의 역할을 알아내게 될 날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태양계를 벗어나는 탐사선을 쏘아 올리는 과학은 믿으면서 지구의 창조가 육 천년 밖에 안 된다고 믿는 자들이 종교를 빗대어 자본을 확대하려는 자들의 꼬임에 넘어가거나, 이제 세상을 갓 보게 된 어린이들에게 과학과 종교의 모순을 알게 해준다거나, 특히 현대적인 대량살상무기를 지니고 있는 그 양쪽 근본주의자들이 경전에 써있는 대로 행동으로 나선다면 그들과 상관 없는 애꿎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일까?

 

신앙은 윤리와 고통 사이를 이간시킨다. 어떤 행동들이 조금의 고통도 유발하지 않을 때도 종교 교조주의자들은 그런 행동들(동성간 성행위, 마리화나 복용, 동성애, 배 반포 파괴 등)은 사악하며 처방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반면 고통과 죽음이 다반사로 발견되는 상황의 근거들은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3세계 국가의 가족계획에 대한 자금지원 중지. 일체의 폭력도 휘두르지 않은 마약사범의 기소, 줄기세포 연구 금지 등), 이러한 우선순위의 역전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부족한 자원들을 낭비할 뿐 아니라 우리의 윤리까지 왜곡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에 답변하기 위한 보다 이성적인 접근법을 찾아야 할 때다. 202-에덴의 서쪽

 

이 책은 어쩌면 무신론자가 자신의 방어율을 높이기 위한 참고자료로 읽기 보다는 신자들이 각자의 반대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나을 듯 하다. , 아예 시간을 꼭꼭 감산 사람에게는 소용없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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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심리학은 내가 좋아하는 분야이다. 그냥 연애놀음을 알려주거나 혈액형에 따라 성격이 어떻게 다르다는 등의 궁금증을 장난 삼아 알려주는 것과 같은 정도가 아닌 전분분야로서의 내용을 배우는데 시기를 놓친 나와 같은 사람이 다른 분야의 학문을 배우는 데는 교과서 이외의 여러 가지 부속물들이 필요하지만, 심리학은 사람만 주변에 있으면 그 사람의 성격, 행동, 발달 등에 관한 의문만으로도 한참을 생각해볼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해준다. 그러한 행동이 학문의 목적에 맞는 행동일지는 모르지만 책에 있는 내용과, 대상과의 차이점이나, 다른 점을 생각해보는 것 만으로도 흥미를 준다.

그래서 예전에 처음으로 심리학 관련서적을 읽은 것이 프로이트였는데 아마 꿈의 해석이었을 것이다. 꿈을 해석하는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정신 분석에서 사용하는 언어들, 그것만으로도 뭔가 재미있는 연관을 지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유명서적을 몇 권 읽고 나서는 이상행동이나, 이상 성격, 발달 심리나, 사회심리, 나중에는 언어심리까지 뒤적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심리학에는 프로이트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다 최근에야 에릭슨이나 다른 학자들의 책과 함께 융 Carl Gustav Jung의 책을 보기 시작해서 심리학의 다른 관점을 내 나름대로 발견하기도 한다.

심리학의 변화는 아마도 프로이트의 독주체제에서 여러 다른 학자들의 주장으로 변화되어 왔던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의 이유는 아마도 성에 관한 프로이트의 집착과도 같은 libido 주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libido 설을 인간 행위의 거의 모든 부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데에는 나도 약간은 싫증인 나있던 터에 융의 무의식에 관한 주장을 접한 후로 그가 동양적인 사상과 친근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로 많이 옮겨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한편으로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내재해있는 성의 역할에 대하여는 융은 아마도 프로이트에 반한 주장을 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 요즘의 심리학관련 책을 읽거나, 또는 인터넷 검색 중, 포스트모던이나 구조주의니 해체주의니 하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을 분석하는 심리학자들의 글을 읽다 보면, 그들의 표현 방식에서 프로이트의 구순기(口脣期)적 욕망에 대한 분석을 떠올리고는 한다.

 

특히 얼마 전 읽었던 소칼 Alan Sokal의 『지적 사기』Fashionable nonsense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이희재 옮김 (2000). 《지적 사기》. 민음사)에서 꼬집은 것과 같은 글의 표현방식을 보면 융보다는 프로이트에게 더욱 비중이 옮아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지젝 Slavoj Zizek의 이 책은 초반부에서 소칼의 비판에서 느꼈던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그가 따르는 학파가 라캉, 들뢰즈 그리고 청년헤겔, 마르크스 등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난 후에야 그럴만한 근거가 있구나 하였다.

그가 표현하는 분석의 방법은 지적 사기에서 소칼이 꼬집은 라캉의 방식과 유사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책에서 인용되는 라캉의 책이나 들뢰즈의 책은 아직 읽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렇다.

고전을 읽기 시작했던 어렸을 적부터 철학 분야에 있어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표현하는 인간 본성이라든가 인간의 자아 등에 대한 표현은 그 단어만 달랐지 결국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칸트부터 하이데거까지 그들이 구분하는 나와, 내 안의 나와, 그 사이의 나를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의 세가지는 모두 다른 단어로 표현되지만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과 같이 결국은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 본성이나 자아와 같이 불변하는 본질을 찾는 학문에 대하여는 굳이 현대의 것을 읽을 이유가(고전도 만족할 만큼 읽지 못하였으면서)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현대에 오면 올수록 그들의 표현은 비틀어진 고목과 같이 새끼줄처럼 꼬아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이다. 그래서 그들이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결국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방식, 즉 생존의 방식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학문도 경쟁이므로)

`

그런데 심리학분야에서도 환경에 지장을 받는 사회심리학이나 발달, 정치, 언어심리학 등은

변화한 사회상과 접근방식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읽어 볼만하다고 생각되어, 최근의 심리학자들의 책을 보고자 하였으나 누가 유명한지 알 수 없던 바람에 다른 분야의 인문관련 책을 보게 되었었다.

그러던 중 진화심리학과 생물학에 대한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리처드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Devil’s Chaplain라는 책을 읽다가 그 속에 인용된 지적 사기라는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책을 먼저 보게 된 것이 다른 심리학자 특히 자크 라캉Jacques Lacan, 질 들뢰즈Gilles Deleuze,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펠릭스 가타리 Felix Guattari 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심리학에 흥미가 있음에도 더 이상 진보를 못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들은 왜 보편적인 표현으로 간단히 분석할 수도 있었을 텐데 비유에 비유를 거듭하며 그것도 자신만의 신조어를 사용해가며 표현해가는지 알 수 없을뿐더러, 아마 요즘의 시대에는 그 뜻을 이해할 때 즈음에는 아마 또 다른 학설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한참을 되풀이해서 읽어봐도 그 문장이 그 뜻인 것은 알겠는데 그걸 한 장()에 걸쳐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마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이 그런 것일까? 하기야 순간의 꿈을 가지고도 수백 페이지의 글을 만들어 내는 학문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아니면 경쟁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특이성을 소칼의 비유처럼 사용하였거나……

 

어쨌든 이 책의 도입부는 그렇게 짜증스러운 되씹기를 반복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으나

중반으로 가면서 저자의 방식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서 되새김의 수는 줄어드는 그런 책이었다.

책을 모두 읽은 후의 요점을 느낌으로 표현한다면 그가 내가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라캉을 비유하거나,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에서 분석의 타깃을 삼은 것으로 인하여(나는 . .’가 미국 드라마를 말하는 것임을 최근에야 알았음) 그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채 마르크스로 돌아가자고 하는 데서 신선하면서도, 일면 새로운 지식과 These에 대한 공감을 갖게 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조는 왜 그리 날카로운 가시를 휘두르는 것 같을까? 사회를 분석하고 거기에 잘못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깨우치기 위한 방편의 하나라고 이해하고자 하여도 공통적으로 그들은 불만스러워 보인다. 당연하겠지만,

요즘 세상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겉으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그 이념이 상대당을 공격하는데 사용되고는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그들만의 싸움에서만 그럴 뿐 정치를 술 안주 삼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몇 년 전 촛불을 든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어 정권에 소리 높인 적은 있지만 그 속에서 이념은 없어 보였다. 사실은 있었을지라도 적어도 그들은 문화로 비추어지길 바랬던 것 같다.

60여년간 이념을 입에서 내뱉으면 잡아가던 그런 시절이 아직 뇌의 어딘가에 남아 있어서인지 몰라도 겉으로는 이념을 말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념을 말하고 내세우는 자들은 오히려 어용단체이거나 보수를 표방하는 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소설 아틀라스: 지구를 떠받치기를 거부한 신>에서 에인 랜드(Ayn Rand)가 즐겨 쓰던 이데올로기적 환상, 즉 파업에 나선 (창의적)자본가의 환상을 떠올려보자. 특권을 누리던 봉급 부르주아계급이 자신들의 특권(최저임금 이상의 잉여가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이는 오늘날의 수많은 파업에서도 이러한 환상이 도착적인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의 시위는 프롤레타리아적 시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전락할 위험에 저항하는 시위다. 달리 말하자면, 정규직을 얻는 것 자체가 특권인 요즘 상황에서 감히 시위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035

 

이렇게 보면 이념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념보다는 돈, 봉급이 모든 것에 앞서는 세대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런 한쪽 부류의 사람만 살지 않았다. 소위 혁명이라고 불리는 시민들의 행동은 인류가 사회를 이루고 살던 때부터 규모만 다를 뿐 줄곧 시민과 같이 했었다고 본다. 그 시민을 정치나 종교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자신의 욕망의 분출구로서 이용하는가 하는 이용의 대상으로 보일 뿐 정작 시민은 가족으로서의 소규모 사회만 원했던 것은 아닐까? 소규모의 사회로서의 평온만을 원하는 가족단위의 사회에서도 욕망과 불만을 가진 자는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커가는 규모의 사회가 심리학자들이 예측하는 스트레스의 해소방편으로 이념을 이용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념을 이용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의 협잡으로 사회는 점점 규모가 커지고 국가로 경계가 나누어지는 과정에서 이념이 뿌리를 내린 것 아닐까 한다.

심리학자로서 사회를 대상으로 삼아 분석을 시행할 때에는 아마 그런 발달과정이 보여지는 것 아닐까? 프로이트가 모세의 탈출을 다른 시각으로 본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로 소농은 오늘날 악명 높은 중간 계급이 되었다. 중간 계급의 모호성. 마르크스가 조제프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을 묘사한 말처럼 이 살아있는 모순은 그들이 정치와 관계 맺는 방식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한편 중간계급은 정치화에 반대한다. 이들은 그저 자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간섭 없이 일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사회의 광적인 정치적 동원을 종식시켜 모두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겠다고 약속하는 독재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향을 보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중간계급의 구성원들이 오늘날 위협받는 애국주의적, 헌신적, 도덕적 다수파의 형태를 이루며, 프랑스의 르 펜(Le Pen),과 네덜란드의 헤르트 빌더스(Geert Wilders)부터 미국의 티파티(Tea Party) 운동에 이르는 우익 풀 뿌리 포퓰리즘 운동의 주된 선동자로 나서고 있다.058

 

사람들이 타인의 간섭을 싫어하면서 잘 조직된 규율과 제도가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란다는 면에서 모순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찌 보면 이기적인 측면으로서의 사회 속의 규율과 제도가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항시 세상은 한쪽만 존재하지 않는 면으로 보아서는 이기적인 측면이라는 점은 가학적인 면이 있다고 하겠다. 그 반대도 있고…… Sadomasochism.

라캉은 젊은 시절에 동양의 지인으로부터 아마도 주역이나 노자를 배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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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항상 극동의 문화를 동경해서 노자의 사상을 직접 공부하기도 했으며, 1963년과 1971년 두 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불교사찰을 돌아보면서 불상조각의 신비한 미를 극찬하였다. 서구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주·객 이원론적 이성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던 라캉이 무위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노장사상이나 연기론적 입장에 근거해 무아의 법리를 강조하는 불교사상에 끌린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라캉은불안을 주제로 1962~63년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욕망의 망상적 성격과 진리에 대한 전복적 태도를 주장하는 불교의 변증법적 사고가 자신이 개념화한 욕망이론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비록 라캉이 불교와 정신분석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탐구하지는 않았지만 실재계, 상징계, 상상계의 세 고리를 통해 무의식적 욕망을 설명하는 라캉과 불교의 사상에는 많은 유사성이 있다. 이하에서 필자는 라캉의 사상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그것이 불교 이론과 어떠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출처] [불교와 지성] 16. 자크 라캉-김석 건국대 교수 |작성자 까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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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심리학에 도입하려니 소칼에게 표적이 되었던 것이고……

동양의 은유를 어찌 논리로서 낱낱이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해석은 소용돌이처럼 크게 본질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을 벗겨낸 부분만으로 표현한 부분에서 유추해보면 대충이나마 모순을 이해할 수 있다. 지젝도 마찬가지로 라캉을 분석한 부분을 빼면- 그것이 그의 중심이라고 할지라도, 분석의 유일한 대상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Pink Floyd "The Wall" DVD에 나오는 날카로운 가시를 휘두르는 장미의 향을 맡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왜 한참 지나간 남의 나라를 따라 하는가 하는 점도 동양의 사상으로 빗대어 본다면 그럴만하고 우리는 이미 결과에 들어선 것이 아니고 과정을 지나는 시기일 뿐이다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프랭크는 오늘날 미국의 포퓰리즘적 보수주의의 역설을 설명하면서, 그 기본 전제는 경제적 이해관계와 도덕적문제의 간극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다시 말해 경제적 계급대립(가난한 농부와 블루 칼라 노동자 대 변호사, 은행가, 대 기업)이 정직하고 근면한 기독교도 미국인 대 카페 라떼를 마시고 외제차를 몰며 낙태와 동성애를 옹호하고 애국적 희생과 시골의 소박한 생활방식을 무시하는 데카당스 자유주의자의 대립으로 변환 또는 코드화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방국가의 개입을 통해(스쿨버스 정책부터 학교에서 다윈의 진화론과 도착적 성행위를 가르쳐야 한다는 규정까지)진정한 미국인의 생활방식을 해치려는 자유주의자가 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포퓰리즘적 보수주의자들의 주돈 경제적 요구는 규제적 개입의 재원을 마련하자고 열심히 일하는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강력한 국가를 타도하라는 것이고, 그들이 원하는 최소한의 정책은 세금 감소, 규제완화. 개인적 이익의 합리적 추구라는 일반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분명히 모순적이다. 포퓰리즘적 보수주의자들은 말 그대로 자신의 경제적 파멸에 투표하고 있다. 감세와 탈규제는 가난한 농민을 파산으로 몰아가는 거대기업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라는 의미다. 국가 개입이 감소하면 영세농에 대한 연방정부의 지원이 줄고 그밖에 사회전반에서도 마찬가지다. 067

 

동양에서의 서양은 한동안 그렇게 좋은 희망을 가져다 주는 신기한 상징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과학을 앞세운 문물만을 가져왔다면 그렇게 그들은 상징적인 존재로서 아마도 지금 시기쯤에는, 어쩌면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일지라도 멋진 상징으로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재로서 그들은 문물과 같이 문명을 심으려 했으므로 피사로(Francisco Pizzaro)가 되었다.

 

서구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들은 공개적으로는 전 세계로 민주주의의 전파를 지지하지만, 막상 사람들이 종교가 아닌 정의의 이름으로 압제자에 맞서 봉기하자 깊이 우려하고 있다”. 왜 우려하는가? 왜 자유의 기회를 얻었는데도 기뻐하지 않는가? 마오쩌둥의 오래된 경구가 오늘날처럼 적합할 때가 없었다. “하늘 아래 혼란이 있다. 상황은 더할 나위 없다. 140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이곳 나름으로의 상황이 존재한다.

이념은 때로 전쟁과 반목과 피를 부른 싸움으로 시간을 소비하지만 때로는 그 이념으로서 진보한다. 아마도 세상의 역사를 이끈 원동력은 보수를 탈피하려는, 모두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의문을 벗어나고자 했던 진보적인 사람들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마치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문의 증명.

그 증명을 따라준 일부가 지금 태양계 밖으로 위성을 보낸 것과 같은 힘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비록 지젝의 지적대로 중간계급(나는 이들이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만)이나 소농이라고(지금 시대에도 소농이 프롤레타리아로 변화할 가능성은 항시 있다.)하는 사람들이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여도 결국 그들을 이용하는 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치부를 내보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아무리 미디어 광고에서 당신들은 고급 차를 타고 잘 꾸며진 집에서 살면서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돕고 있다는 자부심을 꾸며주려고 해도 그것의 속셈은 당신의 고급 차와 집은 조금이라도 이자 지급시기를 어기면 길로 내쫓을 것이며 당신의 도움은 정말로 그들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돕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려는 것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서양과 달리 일부의 탐욕으로 대다수가 힘들어지게 되더라도 민족주의로 흐를 가능성은 희박할지 몰라도 사회가 지금처럼 일부가 전체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착각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월 가 점령시위에 대한 공격도 너무 깊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측 가능한 보수세력의 비난은 대응하기도 쉽다.

시위가 비 미국적인가?

보수주의적 근본주의자들이 미국은 기독교 국가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이 성령과 사랑으로 뭉친 신자들의 평등주의적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한다. 월 스트리트의 이교도들이 (황소상으로 구현 된)거짓 우상을 섬기는 동안 성령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시위대이다.

시위대는 폭력적인가?

() 이들은 현재 돌아가는 상황에 제동을 걸려 하기 때문에 폭력적이지만, 글로벌 자본주의 체계를 원할 히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폭력에 감히 비교할 수준이나 될까?

( 이들은 사회주의자라 불린다. 그러나 미국에는 이미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있다.

이들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 받는다. 그러나 2008년의 붕괴를 야기한 월 스트리트의 투기꾼들은 시위대가 벌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피땀 어린 사유재산을 일거에 허물어뜨렸다.

( 이들이 공산주의자라면 시스템에 위협받고 있는 공동The Common(공동의 자연, 지식)을 염려한다는 의미에서뿐이다.

( 이들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파괴일로를 걷는 시스템에 대응하고 있을 뿐이다. 시위대는 그저 권력자들에게 발 밑에서 입 벌리고 있는 심연으로 내려다보라고 알려줄 뿐이다 154~155.

 

사람들이 뭔가의 목적을 가지고 집단화하여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는 데에는 그들이 표면에 내세우는 주장 말고 다른 무엇이 있다고 하며 인류 초기에 사람을 이용하려는 집단처럼 그들을 이용하려는 일부의 주장을 합리화시켜주려 하거나 그들의 주장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이 책에서는 한마디 한다. 그것을 비유하자면 왜 꼭 북쪽 정권의 인간들은 이쪽의 선거 때가 되면 도발적인 행위를 하는 것일까? 그들은 스스로 미국을 주 적으로 생각하며 우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면서 왜 그럴까? 일부와 일부는 공동의 목적이 있을 수 있다. 통일을 원치 않는 세력은 조 봉암이 주장했던 것(발굴 한국현대사인물: 141p)처럼 이쪽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1%로 대변되는 세력이 경제적인 것만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이념으로 무장하고 가면을 쓴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려는 세력도 일부의 세력이다. 그들을 위해 세금을 써가면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훌륭한 제도와 규율을 만들려고 몇 년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짜증나는 일이다. 그래도 시민들이 선택한 민주주의 방법이니 실행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솔직히 동의하기 싫다. 뭔가 속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담배는 몸에 해로우니 피우지 말라고 담배 갑에 표기한 것처럼 이상하다. 그런 표기. 담배가 해로운 줄을 알려면 그것을 사야 한다는, 그 와중에 그 돈은 고스란히 누군가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민주적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니 따라야 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쳐지는 느낌이다. 찝찝하다. 소주 한잔하다 잘못하여 코 속으로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사르코지: 예상보다 더 나쁜/ 타자: 최악을 기대하라 Sarkozy: Worse than expected/ The Others: Expected 라는 대단히 난해한 제목의 최근 저서에서 민주적투표 참여에 반대하는 정교한 주장을 제시한다. 설사 진정한 자유선거라고 해도 한 후보가 다른 후보보다 명백히 바람직하다 해도(이를 테면 반성별차별주의자 대 반 이민주의 포퓰리스트 구조처럼)국가가 조직한 다당제 선거라는 형태 자체가 초월적이고 형식적인 층위에서 부패해있으므로 투표에서 스스로 빼내야subtract 한다는 것이다. 164

 

이런 사회를 심리학의 여러 가지 이론과 분석의 방법으로 이해 또는 제시하려는 시도가 쓰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방향을 제시하려고 하는 방식에서 틀어지려고 하는 것을 바른 쪽으로 인도하는 도덕을 다른 표현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학문으로서의 역할이고 술자리나, 시장에서, 공원에서, 등산하다가 쉬는 쉼터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실천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아마 열 살도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가 어려 보이는 점을 이용하여 바리케이드 사건에서 훌륭한 역할을 하는데 일부의 세력이 자본으로 권력으로 압박해오는 세상에서 누가 그 아이처럼 나설 것인가?

 

 

이 사회가 정상적으로기능하려면 명백히 소시오 패스(Sociopath; 반 사회적 인격장애자)가 필요하다. 오로지 그들만이 이 사회를 구할 수 있다. 이 말은 사회를 위해 사회의 규칙을 깰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224

 

어쩌면 너무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지금 그런 역할을 누군가 하였더라도 그 의미를 사람들 모두가 알게 되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시기는 아무리 인터넷으로 무장하였다고 하여도 알지 못한 채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인터넷의 사용은 주로 북반부의 일부에서만 활용되고 있다는…….

누구나 자신의 성안에서 안주하려 하고 정권이 자본이 자신을 묶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지만 않는다면 어느 누가 프롤레타리아가 되려고 할까?

그러나 내 생각에 그 단어는 과거의 이념에서 사라지지 않은 단어일 뿐이고 아직 내가 읽지 않은 다른 책의 학자는 다른 표현으로 지젝의 표현처럼 전치하여 알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바라는 바는 다만 언젠가 또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들었을 때 사실을 알리려 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일부를 위하여 사용하여 자신만의 탐욕을 채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목적했던 것은 영도(zero-level)의 저항이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폭력이었다.

그들을 이해하고 돕겠다고 나선 사회학자, 지식인, 논평가들을 보고 있자니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시위를 그들에게 익숙한 용어로 번역하려는 필사적인 끝에 그들이 거둔 유일한 성공은 폭동이 제시한 수수깨끼를 교란시킨 것뿐이었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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