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아기 - 아기한테 인간의 본성을 묻다, new humanist classic 6
폴 블룸 지음, 곽미경 옮김 / 소소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책을 고를 때는 인터넷을 통해 그 책들을 설명하는 요약 내용을 우선 보는 편인데, 책의 실제 주제와 요약내용이 달라서 구입한 후 후회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런 경우는 대게 내가 그 책의 서평 일부분만을 보고 그 책의 전체 내용을 지레짐작하여 생기는 일들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평을 쓰는 사람의 문장 서술방식이 저자들이 사용하는 방식과 다른 때문도 있는 것 같다.

특히나 책의 내용이 종교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에는 저자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나(물론 번역자의 방식에도 영향이 있겠으나) 문장의 서술방식도 심리학이나 철학, 역사 등의 분야를 설명할 때와는 달리 조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이 사용하고 주장하는 방식이 현재 생활하고 있는 사회의 언어 또는 방식을 나타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의 주장이 나머지 인생에 대하여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을 것이라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나같이 지식이 짧은 사람은 이해하는데 오래 걸릴뿐더러 그 이해가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수도 없다.

종교나 과학에 대하여 단호하게 피력하는 도킨스 같은 사람도 있지만 이 책의 저자의 경우는 대상에 대하여 너무 온건하게, 낙관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책을 덮어도 색깔을 분명하게 칠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발달심리학을 연구하는데 아주 훌륭한 대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성격이 완성, 고착, 전위 등 발달되는 과정, 혹은 이상성격이 발현되는 근거를 찾아내는데 중요한 연구 대상이라고 한다. 그런 여러 분야 중에서 아기들이 언제 자아를 인식하고 타자와의 구별을 할 줄 알며 죽음이나 신과 같은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알게 되고 왜 그런 성질을 타고 나는지에 대하여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아기들의 발달과정을 통하여 밝히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이라 하겠다..

 

예전에 성격심리학(D.J지글러 L.A 젤리, 이훈구 역 법문사 1983년판)이라는 책을 통하여 인간의 성격 형성과정과 이상성격의 주제를 다루는 것을 보아서 그런지 발달심리학과 성격심리학은 그 분야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고 더욱이 인간 본성을 다루는 데에서 있어서는 같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정신의 표현양식인 성격이냐 물심양면의 전체적인 인간 범주를 다루느냐 만 다른……

어쨌든 예전에 보았던 그 책에는모든 중요한 성격이론은 이 기본가정의 각각 다른 입장에서 세워졌고 이 기본과정을 도외시하고는 어던 이론도 충분히 그리고 적절히 이해할 수 없음을 확신한다며 다음과 같은 양극이 있다고 했다.

자유론 결정론

합리성 비합리성

전체주의 요소주의

체질론 환경론

가변성 불변성

주관성 객관성

발생성 응성

평형성 불평형성

가지성 불가지성

 

그리고는철학적 견지에서는 이 기본가정에 내재해 있는 주제를 연속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양분적인 것으로, 즉 사람을 자유롭거나 혹은 결정된 존재로 간주한다고 했다.(인간 본성에 관한 기본가정)

 

이와 같이 사람은 대상을 인식할 때의 방법에 있어서 양면성을 갖춘 서로 대립되는 방식처럼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대상과 나와의 양면성은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 등과 같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에 굳이 일원론이나 이원론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면 성격심리학인가 발달심리학인가의 구분과 같은 정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나만의 눈으로 보는가, 도덕적인 방법으로 보는가, 사회적 테두리 안의 적용으로 보는가, 형이상학적인 눈으로 보는가, 예술적 마인드로 창조를 위한 눈으로 보는가 등. 목적과 동기에 따라 양면성과 이원론을 그대로 표현하는 방식이 있겠지만, 이런 방법은 성인이 사용하는 자신만의 학습과 경험적인 방법이므로 발달과정에 대한 연구라기 보다는 사회심리학 쪽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된다.

뭐 개인의 인생을 역 추론하면서 성격의 형성과정을 밝히는 과정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책의 주제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어쨌거나 요즘에는 많은 인문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일부 또는 전부 부인하는 편에 있거나 동의하지 않는 편이란다.

그런 와중에 이원론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고 이 책을 읽어보고자 서평을 둘러보았을 때의 느낌으로는 이원론이 맞는다고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그것을 핏대 세워가며 데카르트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도 심하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느꼈기에, 과연 이 책은 어느 쪽에 시선을 두고 있는가를 알아보느라 구입하여 보는데 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막상 읽는 데는 반나절이었지만……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어디선가 봤다고 생각했었는데 엣지 재단(Edge Foundation Inc.)에서 2007년 발간한 위험한 생각들”(존 브록만(John Brockman엮음)이라는 책에 저자가 간략하게 요약해 놓은 글(: 103P: 영혼은 뇌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이 있었음을 이 책을 모두 읽고 나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책을 산 일이 조금은 후회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책에

하지만 비물질적인 영혼의 거부, 즉 영혼이란 뇌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견해는 여전히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반하고, 대중의 정서에도 맞지 않으며, 어던 사람들에게는 혐오감조차 불러일으킨다. 대중들은 영혼이란 뇌를 비롯한 육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본다. …… 그에 반해서, 널리 퍼져있는 영혼 거부론은 도덕과 법의 영역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죽고 나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며, 자신의 육체가 죽고 난 뒤에도 영혼만은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는 생각(미국인의 90%가 이렇게 믿고 있다)을 포기하게 할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위험한 생각이 또 어디 있겠는가

라고 했다.

정말로 내가 이들의 유머를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인간본성이 본질에 우선하기 보다는 인간의 자존감을 위해서라도 도덕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영혼이 필요한 것이라면 굳이 안 봐도 되었을 것을……

아마도 이 책의 대부분에 쓰여 있는 글들을 생각해보면 그의 그 말은 그만의 유머라고 보고 싶다.

내가 잘못 이해하는 것이라도 할 수 없다. 이미 책은 읽었고 그의 바램 대로 영혼이 필요하다면 저들이나 필요한 것으로 치면 그만이니까……

책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 아기에게 도덕이란 선천적인가 아니면 학습되는 것인가라는 나의 의문에 대하여 이렇게 써있다.

 

부모라면 누구든 19세기 성직자 토머스 마틴 목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어린아이들의 사악한 천성을 지적하며우리 인간은 모든 도덕적 악의 근원인 사악함으로 가득한 본성을 세상 밖으로 내놓는다고 보았다. 또는 프로이트의 말에 동의할 수도 있다. 그는 아기를 처음에 부모에 의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회에 의해 교화가 절실히 필요한, 온갖 왜곡된 욕구의 총체인 이드(id)에 불과한 존재로 보았다……. 하지만 인간은 타고난 본질을 초월하는 도덕적인 분별을 지닌다. 이는 분명 인간이 거둔 최고의 업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지성과 공감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난다. 189-도덕의 범위)

 

인간의 도덕성은 자연선택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기계에 불과한 인형 같은 육체에 부동의 실체인 무엇이 주입시켜 시간과 함께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거나, 사악한 본성을 끝까지 다스리지 못한 채 뉴스에 나오는 사람이 된다는 것인지,

타고났으며 본질을 초월하는 분별력이 인간의 업적인데 그 업적은 사회성에 의한 학습의 결과로 그렇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인간의 업적을 만드는 존재가 있다는 것인지 등에 관한 표현은 얻기 힘들다. 아마도 언어의 사회성 때문에 그렇게 표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유머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 책의 저자는 부모라면 누구든이나 모든 아기라고 표현하였지만 그런 시선은 일방적이며 편협적인 시선이 아닐까 한다.

심리학문에 있어 당연한 실험의 결과이겠지만 나는 다른 방법으로 추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결과를 모두 신뢰하지 않는다.

예로 저자는 아이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이들 역시 신체적 소멸은 받아들이면서도, 영혼은 지속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1896년의 한 연구자가 자신의 네 살배기 아들과 나눈 대화를 보고한 적이 있다.

아들: 말 안 듣는 사람만 땅에 묻히는 거죠, 그렇죠?

아버지: ?

아들: 고모는 착한 사람은 모두 천국에 간 댔어요

 

이 경우에서 아이가 타자의 말을 이해하고는 별도로 뇌의 기능에 인식이 된다면 그 기억이 말을 하게 되는 시기에 이르러서 위의 예와 같이 표현되는 것은 아닐까?

사후 세계에 대한 개념은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과정 속에 부모에 의한 학습과정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머지의 실험이라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경우도 대부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의문스럽다.

 

어쨌든 책은 도덕성, 공정성, 혐오감등에 관하여 실험을 근거로 한 추론을 주장하는데 그 여러 장의 글을 읽고 생각난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수오지심(羞惡之心)”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저자의 생각이 동양인의 사상과 결과만을 생각하면 비슷할지도 모르겠지만 증명의 과정을 표현한다면 아마 다를 것 같다.

동양학에서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한 부분으로라도 이 책과 같은 분석을 한 내용이 있을까? 인간 전체에 대한 이론 말고 아동에 관한 것 말이다. 있겠지?! 있다면 보고 싶다.

 

문제는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신의 존재를 안다거나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거나 같은 의문을 증명하는 것일 텐데 그런 아이들의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였을 때 그런 현상은 일시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며,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관점으로 분석하거나 표현된다면 나타날 수 있는 차이가 아닐까 한다.

아기들의 유아들의 습성이나 표현을 분석하기 전에 그들에게 주입되는 문화적 요소가 있다면 본질을 분석할 수 있다는 표현은 아닐 것 같다. 발달과정이 그렇다는 있을 수 있어도…….

 

불행히도 이러한 명료함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견해가 있지만, 이들 영혼은 육체와 뇌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도덕적 입장에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는 특성들-양심, 고통의 경험, 번영의 욕구-은 두뇌 작용의 결과이며, 이러한 작용은 성장과 진화과정 모두에서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것들이 나타나는 성장 단계의 일순간을 찾는다거나 갑작스런 진화상의 도약 단계를 찾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292-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간은 선험적으로 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가, 아니면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는 규범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포이에르바하나 니체 등과 같이 자신의 분노의 대상으로 투사된 존재로서만 인정한다고 수긍하는 차원인가.

분노와 공포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와 같은 본성적인 의문은 심리학의 다른 분야나 다른 표현에서 이미 많이 공감하는 부분을 얻었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이원론을 어떻게 풀어내는가에 흥미가 있었을 뿐이었다.

인간의 본성 혹은 본질을 밝혀내려는 수 많은 학문에서 아무리 주장한다고 하여도 우주의 시작과 끝은 볼 수 없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리 다른 입장을 과학에서 얻어와 교리에 덧붙여 주장한다 하여도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근원이나 이유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책들의 저자가 남의 말을 인용하여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곳에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회유하여도 화합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역사를 통틀어 영혼이 육체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의심할만한 어떠한 과학적 논리 같은 것은 없었다. 이러한 견해는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인 데다(우리는 육체와 영혼을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지극히 구미가 당길 이야기이다 보니(누가 우리의 영혼이 소멸한다는 이야기를 좋아하겠는가), 쉽사리 사람들의 믿음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306

 

과학과 종교를 구분할 때, 믿음의 내용에서 차이점을 찾는 것은 그릇된 접근법이다. 그보다는 이러한 믿음이 형성된 과정과 이러한 믿음이 유지되고 수정되는 사회적 정황을 살피는 것이 더 낫다. 누군가가 경험적인 증거에 휘둘려 귀신의 존재를 믿었다가 자신의 견해를 선뜻 테스트해보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유령의 존재를 다시 부인하게 된다면 이것은 과학적 가설이다. 이러한 믿음이 강한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어 증거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다. 315 -

 

사람의 본성이 종이에 선을 긋듯이 딱 나누어진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흑백논리를 선호하는듯하다.

왜 저들은 같은 신을 놓고 싸우는가를 궁금해하는 나는 어쩌면 그런 그들의 흑백논리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경전에서 조차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한다.

육체가 정신을 만들고 정신이 다시 육체를 진보한 정신으로 이끌고 그 정신이 다시 건강한 육체를 만든다는 것은 저들의 격언 아니던가? Mens Sana in Corpore Sano (a healthy mind in a healthy body. Satire X: Juvenalis (10.356-64) 그렇게 순환된다는 사실을 인간의 본질에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나는 결론을 꼭 말해야 한다면 사람은 폴 블룸이 말하는 데카르트의 아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육체로 이루어진 존재로 바라보는 세계관과 영혼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는 세계관, 이렇게 두 가지 상반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지만 여기서우리를 본인은 책에서 아기로 표현했다고 본다. 그러나 아기의 시선, 혹은 정신을 이해하는데 성인이 성인의 방식으로, 성인의 시선으로 보아서는 순수성을 잃었다고 본다. 인간 정신의 발달과정에는 두 상반된 관계가 기본가정인 것처럼 당연한 것이므로 의식적인 자아가 순전히 뇌의 물리적인 반응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비물질적인 영혼이 없다. 우리는 물질적인 존재로, 그 선장이 물에 빠뜨린 바로 그 "괴상한 물건"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아기들인 것이다.”는 현대 뇌 과학의 주장을 걱정스러워 한다. 이래서 조심스러워한다거나 유머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아니면 내 무식을 그에게 전위하며 투덜거리는 것이거나……

 

내가 마음을 고찰할 때, 즉 내가 단지 생각하는 존재인 한, 나는 내 자신을 어떤 부분들로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고, 내 자신을 온전한 하나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비록 온전한 마음이 온전한 육체와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발이나 팔이나 어느 부위가 몸에서 분리된다 해도 내 마음에서는 어떤 것도 빠져나가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성찰

 

그런데 왜 인간이 영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왜 정신과 다르다고 표현하는가.

인간이 인간 스스로 불안함을 뭔가 다른 것으로 합리화, 승화, 동일화 한다는 것을 프로이드는 우리 자신이 마음의 진실된 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부인하려고 하는 까닭은 바로 헛바람 든 우리의 자존심 때문이다라고 했다는데 이 표현은 한편으로 헤겔의 노예나 니체의 노예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데카르트가 생각한다는 영혼을 내세우며 육체는 인형과 같은 기계로서 표현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표현했다고 결론을 말할 수는 있어도 그가 생각한 영혼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조심스러워하는 것일까? 나머지인생을 걱정해서? 그는 파스칼의 내기에 배팅하였던 것일까?

나는 요즘 선사들의 임종게(臨終偈)나 기독교의 경전 등에 나오는 글귀에서 어쩌면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을 얻는 중이다.

 

외과의사가 뇌에 전류를 보내면 그 사람은 실제같이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된다. 화학물질을 뇌에 주입하면 그 사람의 지각, 기분, 성격, 사고를 바꿀 수 있다. 뇌 조직의 한 부분이 죽으면 마음의 한 부분도 사라진다. 신경학적 환자는 도구의 이름을 말하거나, 얼굴을 인식하거나, 행동의 결과를 예상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거나, 공간 상의 한 구역 또는 자기 신체의 일부를 기억하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은 분할할 수 없는 전체이며, 신체와는 다르다고 말한 데카르트는 틀렸다.) 빈 서판 89

 

비록 과학이 인간의 정신, 영혼의 실체를 밝힌다고 한들 그것의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모든 개인은 성격의 통일성(unity)을 나타내고 동시에 자기 나름대로 그 통일성을 형성해가는 존재이다. 고로 개인은 그림인 동시에 미술가이다. 그는 그 자신의 성격을 창조하는 예술가이다. 예술가이지만 그는 결코 완전한 작업자도 아니고,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약하고, 극히 잘못이 많고 불완전한 인간이다. (Alfred Adler)

 

어렸을 적에 나뭇잎을 화학물질로 녹여 나뭇잎 속의 잎맥만 남기게 하는 일이 있었는데 요즘 자주 그 모습이 떠오른다. 그 나뭇잎 속의 잎맥은 땅 속의 수분을 빨아들여 나무를 한여름 내내 푸르게 하여,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겨우내 설화를 뒤집어 쓴 채로 차가움을 견뎌내어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입춘이 지나면 싹을 내밀어 다시 푸르름을 기대하는 마음을 제공한다. 나는 내가 그런 나무의 잎맥을 타고 흐르는 수액과 같다고 생각한다. 더 크게 생각을 넓히면 사람은 그저 끝을 모르는 우주를 구성하는 작은 원소와 같다.

내 생각에 인간의 정신 혹은 무엇이든 그 목적은 Adler의 말대로 나뭇잎을 구성하는 통일성을 형성해가는 존재로서 살아가면서 그 외로움을”199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천국과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생명의 다른 상태라고 말했다.(데카르트의 아기 315)”라는 것으로 위안받기도 하며, 경전에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 17:20, 21) 는 말에 자존감을 갖기도 하고, 또한 조계종 8대 종정인 서암(西菴) 남긴 “"나는 그런 거 없다. 정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라는 말에 인간의 목적이 있음을 알고 대상이 있어야 내가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 어렸을 적의 나뭇잎의 잔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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