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종말 - 이성과 종교의 충돌, 이제 그 대안을 말한다
샘 해리스 지음, 김원옥 옮김 / 한언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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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끝자락

인류가 10만년전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상에 널리 퍼져나가 살게 되면서-사실 난 현재의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그 설을 못마땅해하는 편이다. 그건 서양의 편파적인 시선 아닐까? 동양에 베이징원인이 있었다면 그들이 어떤 급작스런 이유로 종말을 맞게 되고 화산 폭발로 인하여 화산재 위해 발자국을 남긴 루시의(320만년전에 두발로 걸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는 직립원인의 화석 주인공 「오스트랄로 피테 아파렌시스 <Australopithecus afarensis>」 후손들이 동양으로 건너올 때까지 남아있던 베이징원인의 후손이 그 넓은 지역에 살면서 루시의 후손을 만나 새로운 부족을 이룬 후손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인가? 학계에서는 아시아인의 선조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현생인류(現生人類)와의 직접적 연관성은 부정되고 있다고 하여도 어찌 갑자기 한 지역에서 비슷한 개체가 모조리 사리질 수가 있었단 말일까? 아프리카보다도 훨씬 넓은 아시아에서 말이다. - 제일 먼저 닥치게 된 시련은 무엇이었을까? 베이징원인이 적어도 동양에서만이라도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의심받는다면 루시의 후손들이 동아시아까지 왔을 때 그들은 부족간의 전쟁이나 전염병 등으로 이미 몰살되었다는 말이었을까?

 

어쨌건 그렇게 세월이 또 한참을 더 흘러 각기 흩어져 살던 부족들이 의사표현을 하기 위한 상징을 사용하게 되고 상징이 체계화되어 언어나 문자로 발전 하게 되어 서로간의 의사를 교환하게 되었을 때, 이방인에게 내 뜻을 전달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무엇을 고민하였다고 하였을 그 전에 이방인을 만나기 앞서 부족간의 교류가 이루어지기 전에 그 대표로 나서게 되는 인류가 자신과 다른 모습의 이방인에게 전해줄 무언가를 생각을 하였다면 그것은 요즘의 의미로 무엇을 말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전쟁의 대상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교역의 대상으로 봐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근거를 생각했다면 그 근거로 사용되었을 상징이나 표현은 무엇이었을까?

인류가 가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국가로 성장하기까지 많은 의식의 발전이 있었다면

그 중심에는 요즘의 의미로 철학이 있었을까? 아니면 신학이 있었을까?

 

나는 그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하기 힘들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만일 자연에서 형성되는 것들 이외의 실체가 없다면 자연학이 제일지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어떤 부동하는 실체가 있다면, 그것이 첫 번째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학문은 더 우선적이고, 제일철학이어야 하며, 이런 방식으로 보편적이어야 한다.”라고 했다지만 신의 유무(부동하는 실체)에 따라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면 자연학이라고 했으므로 철학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주술이나 역술 등이 어떤 단체에서 인정받으려면 종족의 단위가 어느 정도 성장해야 그 필요성이 대두되고 그것을 행하는 자가 직업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할 수 있도록, 그래서 학문으로 성장하여 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다면 최초에 부족간의 전쟁이 아닌 대화는 신학이 아닌 철학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부족간의 문화에서 동질성을 느끼는 것도 둘 다 공통되어야만 마찰이 없었겠지만 철학은 달라도 살 수 있지만 신학은 다르면 전쟁이었을 것이다. 우리 부족에서 신격화 된 것이 상대부족에서 하찮은 쓰레기로 취급된다면 철학이 다르다는 이해를 하기 위해서 문화 (meme으로 진화하기까지의) 의 급격한 섞임은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을 할 것인가 아니면 교류를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하기 위해 그 둘을 잘 무마시켜 말썽 없이 부족간의 화합을 이루는 것은 정치의 시작이고……

화합이란 것은 어느 한쪽이 양보하거나 속거나 협박당하거나 하는 것을 감추어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치가가 어느 한쪽을 속이거나 협박하려면 가장 필요로 한 세력은 부족을 움직일 수 있는 철학자(현자)외에 주술사나, 역술가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협잡은 비슷한 규모의 부족간의 경쟁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커나갈 수 있는 중심세력이 될 것이고……

그렇게 문자가 기록된 이후로 철학과 신학과 정치는 떨어질 수 없는 애증의 삼각관계로 지내온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가 요구하는 과학이나 문학이나 수학이나 의학으로서의 전문성보다는 종교성이 가장 우선시 되는 나라가 있다고 한다. 그런 나라는 교황이 왕보다 우위에 섰던 중세 유럽에나 있었던 것으로 알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에너지 시장에서 가장 돈이 되는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북반구의 여러 나라 중에서 경제적으로 뒤처지는 나라들-(2002년 모든 아랍국가들의 국내총생산 총계가 스페인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 실정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전체 아랍국가들이 9세기 이래 아랍어로 번역해온 책의 수가 스페인이 매해 번역해내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158) , 가장 첨단에 자리한 과학과 의학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이천 년 전의 책의 내용을 믿어야 한다는 선서를 해야 하며 수백 년 전의 종교 싸움을 테러라는 이름으로 변화시켜 종교전쟁을 계속하려는 자에게 정권을 주려 하는 나라가 있다.

 

신정이 빚어낸 중세 유럽의 공포들과 비교할 때 현재 서방에서 종교가 가지는 영향은 다소 양호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차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가 여전히 정부 정책, 특별히 미국의 정책을 결정하는 현 상황은 모든 이에게 엄청난 위험을 안겨준다. 예를 들자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성경의 예언들을 통해 중동의 발작을 감지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제리 팔웰(Jerry Falwell: 대표적인 극우파 보수주의 목사), 할 린제이(Hal Lindsey: 환상적인 개인 체험에 의거하여 휴거 설에 관한 소설을 쓴 목사) 같은 이들을 국가 안보 브리핑에 참석시킬 정도 였다. 그들은 핵무기 배치에 대한 조언을 구할 만한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183p 신념의 종말(The End of Faith/ Sam Harris 2005)

 

그렇게 정치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종교와 철학을 가운데 두고 그 때의 상황을 재빠르게 인식한 권력자에 의해 어느 한쪽을 이용하여 편파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도록 되어있던 것 같다.

세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서양은 조용하게 지내던 동양이나 남반구의 나라들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나누어 지배하려는 욕심으로 전쟁을 일으켰는데,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A.H.맥마흔이 전쟁에서의 승기를 잡기 위하여 전후 이집트의 Muhammad Sharif Pasha의 자손인 후세인과의 왕복서신을 통해 시리아의 서부를 제외한 오스만제국의 영토에 아랍인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선언 McMahon Declaration했으나 1916 5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URG 에서 영국은 남()메소포타미아 지역, 프랑스는 시리아 지역, 러시아는 흑해 남동지역을 각각 차지한다는 터키 분할의 밀약사이크스 피코 협정(the Sykes Picot Agreement)’을 체결하였다. 그래 놓고는 1917 11월에는 팔레스티나에 유대인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을 발표하였다. <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고, 그 일을 성취하는 데 대하여, 팔레스타인에 거하는 비 유대인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 또는 타국에 거하는 유대인의 정치적인 상태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언은 1915년의 맥마흔선언과 상호 모순되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한 나라가 외교정책상 두말을 한 결과로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그때부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인 셈이었다.
이와 같이 영국이 모순된 정책을 강행한 것은 그때그때의 전국(
戰局)을 유리하게 전개시키면서 전후 중동지역을 지배하려는 의도에서였지만, 그 결과 아랍인의 많은 희생을 발생시켰다고 한다.

 

어쨌든 결과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우면서 지금에 이르지만 그런 행동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인의 이스라엘 지지는 정치 담론에서는 거의 알아차리기 불가능할 만큼 심원한 종교적 냉소주의의 한 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한 이유는 성지에(Mecca)유대인 권력이 최후로 들어설 때, 특히 솔로몬 성전이 재건축될 때 그리스도의 재림과 유대인의 최후 멸망은 동시에 촉발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희망에 찬 멸망에의 기대가 바로 이스라엘의 탄생을 관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처음으로 지지한 영국의 1917밸푸어 선언은 상당부분 성경적 예언을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현대 정치로 침범해 들어오는 이러한 종말론은 신앙이 초래하는 위험은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184

 

이 책에서는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 모두가 자신들의 경전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가 오늘날 신앙의 문제에서 사람들이온건하게 되는 유일한 이유는 지난 2,,000년 동안 거둔 인간 사상의 결실(민주주의,다각적으로 이루어진 과학의 진보, 인권에 대한 관심, 문화적, 지리적 고립현상의 종결 등)중 일부를 자기 식으로 흡수 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 말은 인류가 수천 년 전의 생활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에서 살아가게 되었으므로 그 때에 쓰여진 경구는 때로는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 과 같다고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성경의 경우 축자영감설 verbal inspiration,에 따라 일자의 오류도 없다는 말을 무시하는 것이 되거나, 그런 설을 부인하는 것이 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지젝(slavoj Zizek이 표현한 대로 믿는다기 보다는 문화의 일부로 생활할 뿐이라는 표현이 맞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도 그들은 성경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죽음 이후의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만 그것이 경전의 명령대로 해야 한다거나, 경전에서 요구하는 생활을 그대로 따라야만 받을 수 있는 보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직장이나 가족과는 또 다른 각자만의 조직을 구성하여 생활을 하는 것 같다. 하기야 경전대로 한다면 요즘의 제도나 규율에 따라 교수형에 처해질 테니…(신명기 13)

그런데 기독교인이나 유대인과는 달리 이슬람은 경전에 쓰여 있는 데로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여 행동으로 옮기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듯 하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전에 써 있는 대로 자신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돌로 쳐 죽여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말들은 보다 더 심오한 뜻이 담겨 있으므로 보류해놓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책의 22페이지에 있는 신명기의 구절은 아무나 알아들을 수 없는 암호로 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럼 모세는 무엇 때문에 그 말을 암호화 해야 했을까? 뭐가 두려워서? 불안해서? 자신이 몰고 나온 식솔들 중에 간첩이 있을까 해서? ~ 그것도 아니라면 하느님이 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전한 말이라서 골라서 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종교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실제로믿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속한 공동사회의생활양식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일부) 종교 의식과 관습을 따를 뿐이다. ‘전통에 대한 존중심으로 코셔(kosher) 원칙을 지키는 비신도 유대인 등이 그런 예다. “실제로 그것을 믿지 않아. 그냥 내 문화의 일부분일 뿐이야라는 말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거부되거나 전치된 신앙의 두드러진 양식인 듯하다. 이렇듯실제 종교, 예술 등과는 구별되는 문화비근본주의적개념이야말로 버려지거나 특정 개인과 무관해진 신앙의 영역을 보여주는 핵심일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믿거나‘심각하게 받아들이지않고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키는문화말이다(슬라보에지젝>

 

종교에 대하여는 요즘 좀 싫증이 나 있는 상태이다.

불교는 내게 있어서 종교로 생각되지 않았기에 그쪽의 경전은 반야심경말고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다. 다만 선()에 대하여는 관심이 많아 몇 가지 책을 읽거나 최인호의 소설을 통해 얻어 들은 것이 전부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런 면으로는 유학도 마찬가지여서 최근에 들어서서야 이황(이황(李滉)1501~1570)이나 기대승(기대승(奇大升)1527~1572)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비교할 때 기독교관련 서적은 이 둘보다 더 많이 접했었는데 이슬람에 대한 서적은 한번도 본적이 없어서 이 책에서 저자가 밝히는 이슬람에 대하여 약간은 충격적이었다라고 할 수 있다. 9.11 빌딩 폭파 사건 때 그들은 그런 행위를 성전(지하드Jihad)라고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은 적대관계에 있을 때 일종의 작전명령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지 그로 인해 천국을 가고 그들의 가족이 주위로부터 칭송을 듣는다는 종교의 교리라는 것은 몰랐었다. 그로 인하여 충격적이었다라는 것이다.

 

인터넷의 안내에는 ■ 코란에 규정된 지하드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2190: 너희를 상대하여 싸우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라. 그러나 침략하지 말라. 하나님은 침략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2194: 신성한 것을 위반한 데에는 똑같은 형태의 형벌이 있다. 침략자에 대해서는 너희에게 침략한 범위까지 응징하라.

1733: 정당한 사유 없이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과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

그런데 Sam Harris는 책에서 이슬람의 문제점이라는 장에서 140페이지에서 146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불신자들에 대한 비방의 냉혹성을 알리기 위해서 원전에 있는 글을 인용, 편집하여 놓고 코란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종교 분쟁의 근거를 제시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점은 토라라고 불리는 구약의 일부분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들은 왜 싸울까?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이 셋은 같은 신을 따르고 있는 것 아닌가?

 

책을 읽으면서 이미 이와 비슷한 책들을 여럿 보았기 때문에 종교가 주는 폐해에 대하여는 특별히 추가할 것이 없으나 몇 구절은 내 생각과 딱 들어맞는다.

지금 세상에서 폭력을 일으키는 주범인 그 종교들이 동양에 없을 떼에도 동양은 역사를 잘 만들어가고 있었으며 그들만의 방법으로 신이든 정령이든 무엇을 따르고 믿어왔지만 그 신이 다르다고 하여 전쟁을 하였던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공맹시대(孔孟時代)에는 이웃의 군주가 군주다움을 잃으면 그것을 질책하는 이유로 전쟁을 하였다고는 알고 있지만 서양처럼 종교문제로 수천만의 인구를 살해하는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흔히 사람들은 그래도 종교가 주는 영향이 크다고 말하며 경전에 써있는 글들이 훌륭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글은 이 동양에서는 그들보다 더 오래 전에 그보다 더 훌륭한 글들이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경전들은 상당부분 지혜롭고 위안을 주는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지혜와 위로와 아름다움의 말들은 세익스피어, 버질, 호머의 작품들에도 풍부하며, 그런 작품들 속에서 영감을 찾아 냈다고 수천 명을 살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43

 

특히나 동양에서의 기독교는 그들이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한 행동으로 볼 때 적어도 백인우월주의에 빠져있는 그들에게는 안중에도 없을듯하다. 어차피 그들은 선택 받은 민족이고 나머지는 그저 들러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그들만의 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말이다.

 

이제 세상은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우주의 생성원인이나 배경, 그리고 인간의 신경 세포 등의 역할을 알아내게 될 날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태양계를 벗어나는 탐사선을 쏘아 올리는 과학은 믿으면서 지구의 창조가 육 천년 밖에 안 된다고 믿는 자들이 종교를 빗대어 자본을 확대하려는 자들의 꼬임에 넘어가거나, 이제 세상을 갓 보게 된 어린이들에게 과학과 종교의 모순을 알게 해준다거나, 특히 현대적인 대량살상무기를 지니고 있는 그 양쪽 근본주의자들이 경전에 써있는 대로 행동으로 나선다면 그들과 상관 없는 애꿎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일까?

 

신앙은 윤리와 고통 사이를 이간시킨다. 어떤 행동들이 조금의 고통도 유발하지 않을 때도 종교 교조주의자들은 그런 행동들(동성간 성행위, 마리화나 복용, 동성애, 배 반포 파괴 등)은 사악하며 처방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반면 고통과 죽음이 다반사로 발견되는 상황의 근거들은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3세계 국가의 가족계획에 대한 자금지원 중지. 일체의 폭력도 휘두르지 않은 마약사범의 기소, 줄기세포 연구 금지 등), 이러한 우선순위의 역전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부족한 자원들을 낭비할 뿐 아니라 우리의 윤리까지 왜곡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에 답변하기 위한 보다 이성적인 접근법을 찾아야 할 때다. 202-에덴의 서쪽

 

이 책은 어쩌면 무신론자가 자신의 방어율을 높이기 위한 참고자료로 읽기 보다는 신자들이 각자의 반대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나을 듯 하다. , 아예 시간을 꼭꼭 감산 사람에게는 소용없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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