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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세상을 지배해왔다
알랭 소랄 지음, 이현웅 옮김 / 갈라파고스 / 2013년 1월
평점 :
단기기억과 장기기억
가끔 집안의 물건이 사라지는 일은 무엇 때문일까? (패드용 터치 펜이 감쪽같이 사라졌음)
매일 쓰던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좁은 집구석에 난쟁이들이 내가 쓰던 물건을 말도 없이 빌려가고는 그들도 깜빡 해서 반납하는 것을 잃어버렸거나, 집안의 도깨비가 장난을 하려고 숨겨 놓고는 내가 찾아내지 못하자 싱거워져서 까먹고 도로 내놓지 않았다는…… 설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머리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요정들이 살면서 기억의 시냅시스(synapsis)를 연결시키는 일을 하는데 잠시 그 일을 까먹었거나 너무 많은 정보의 입력에 파업이라도 한다는……. 그것도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아직 유 튜브에 물건을 집어가는 난쟁이나 도깨비들의 장난이 담긴 동영상이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 이것은 사람의 단기기억 상실의 일부분을 동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우겨도 되지 않을까?
불과 백여 년 만에 인간은 참 많은 일을 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내일이면 잊어버릴 단기기억으로 갑자기 떠오른다.
1915년 완성한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만유인력의 이론적 실험적 한계를 모두 해결하고 우주로 인간의 시선을 옮기게 한 Albert Einstein
그리고 인간은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우주의 한 부분에 위치한 은하계 속에서도 한 구석에 속한 태양계 중에서도 한 별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 Edwin Hubble
그리고 인간의 몸 속을 들여다 본 Wilhelm Röntgen
또 지구를 물리적 공간을 넘어 동시간대로 가깝게 만들도록 컴퓨터를 만든 Konrad Zuse
그 외 여러 과학자들과 인류를 지구에만 머물지 않고 드넓은 우주로 나아가게 하여 다양한 세상을 알게 하여준 사람들.
그들이 일구어 낸 노력으로 지금 한 화면으로 음악도 들으며 Google Map으로 유럽사진여행도 하고 아프리카나 유럽의 친지에게 실시간으로 연락도 할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수천 년의 인류의 역사를 볼 때 현재의 시간 속에 사는 나의 관점으로 보는 시각의 한편일지 모르겠지만, 기록에 의한 면면을 정리한다고 하여도 획기적이랄 수 있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과학자들의 훌륭한 발견 중에서도 인간이 누군가에 의하여 조종당하는 기계와 같은 고기덩어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는 ‘자아’라는 단단하고 확고한 실체 대신 차마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 Sigmund Freud와 Gustav Jung의 무의식과 종교에 대한 개념이 가장 인간정신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학문이 아닐까 한다.
누군가는 인류의 정신은 기원전500년전에 꽃피운 이후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하지만 물리적인 변화가 인류의 정신을 퇴회시키고 있을 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과학이-심리학을 포함해서- 인간의 생활에서 떨어질 수 없는 분야로 성장한 것은 맞는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나 공자가 윤리를 논한 그 시점부터, 아니면 더 오래 전부터 유전자에 새겨진 장기기억이 만들어낸 진화의 결과라고 우겨도 뭐라 할 것 같지는 않다.
집안의 물건이 사라지면 난쟁이들의 소행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이었으면 하는 것처럼 수세기가 지나오면서 사람들에게 장기기억의 힘으로 진화하는 동안 끊임없이 퇴화하는 정신 속에 자리잡은 이상향들도 사실로 존재했으면 좋겠다.
한동안 조미료 광고만 하던 여배우가 “신도시에 가보면 마치 딴 세상에 와있는 것 같다” 면서 대한민국에게 잘 부탁한다고 하는데 그 여배우나 광고주의 개념으로서의 물리적인 존재이든 동화나 영화에 나오는 환상 속의 존재이든, 다르게 말하자면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능력은 그 이상향을 현실 속에서 찾기 위해 지구를 샅샅이 뒤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태양계를 너머 은하계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언젠가는 정말로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다. Goldilocks Zone이라고도 하는 생명체 거주영역이 우주에는 수백만에 이른다고 하는데 어딘가에는 분명 있다고 희망해도 되지 않을까? 희망인데 굳이 이직 우리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은 어디에 있지?”라고 인간만의 관점으로 딴지 걸 필요야 있겠는가?
어쨌거나 나는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우주가 아닌 기억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우주 속에 존재할 이상향. 그곳에 영혼이 있든 유령이 있든 氣가 있든 무언가가 인생을 구분 지어서 또 다른 무언가를 보며 느끼며 살 수 있는 그 세상에서는 제발 요즘 연일 뉴스를 통해 보고 있는 탐욕의 인간들(물론 탐욕이 아닌 욕망이 그런 과학을 이루어냈다고도 할 수 있지만)이 없거나 다른 모습으로(가급적이면 지구와는 반대의 모습으로)사는 상황을 볼 수 있으면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없음을 이미 수천 년 전에 깨달은 인간은 현실의 불만으로 인한 전이와 억압된 마음속의 善을 투사하는 방법으로 위안을 주는 대상을 만들어 냈다.
언제쯤인가 측두엽에 충격을 받은 어떤 先祖가 환상을 현실인 것처럼 상징화하는 재주가 있었고, 사냥능력과 힘이 있는 부족의 우두머리가 공동의 이익을 위해 같이 협동하여 조직을 끌어가는 수단으로 발전시킨 것이 오늘날의 종교가 아닐까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으며, 고립되지 않고 더욱 큰 전체의 일부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을 생각하려고 한다. 열망하지만 결국은 성취 불가능한 윤리적 질서나 생활 방식의 근거(authority)로 신을 찾는다" <Stephen William Hawking>
그 속에서 둘을 연결 시킨 사람은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뜬다는 것을 발견한 말 재주꾼으로 훗날 정치가로 발전했다는……
그렇게 또 한참의 세월이 흘러 인간은 서로 다름을 넘어서지 못하고 서로를 없애기 위하여 이념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종교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네트워크를 만들어 그 교차되는 회로를 장악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어느 한편의 종교가 진실이고 이념이 진리이고 제도가 옳고 그들 한쪽의 네트워크만이 진실이라고 한다고 해도 그것이 영겁의 시간 속에 얼마간이나 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간이라는 개념은 중요치 않다고 할 것인가? 그저 단 한 순간이라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인가?
천년 전에는 지구가 중심이었고 그것은 불변의 진리인 것으로 알고 있었음을 비교한다면 지금의 네트워크가 진실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가? 20여년전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고 마르크시즘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으며, 종교적 터부가 사라졌다고 그 종교의 근본주의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는가? 萬事皆有定이 옳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浮生空自汒은 아니다.
인간은 영원을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개인은 그럴 수 없지만……
그렇다면 인간의 입장으로 진리란 현실에만 적용되는 일종의 신기루와 같은 현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다른 생각과 다른 이념 다른 종교는 영원을 향해 진화해가는 진취적인 또 다른 수단일 수도 있다.
그런 면으로 생각한다면 현실에 충실한 것이 지금 진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마치 딴 세상에” 라는 표현에서 보지 않은 것을 본 것과 같이 동일시한다는 희망일 뿐이라고 한다면 ‘지금 충실”이라는 표현도 지극히 자의적인 해석에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다름아닌 성공이 신의 선택으로 보일 수 있다. 경제적인 것으로 거의 모든 것을 평가하게 될 시대에는 신의 선택이란 부와 번영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앞서 언급한 타락한 전도 현상의 여러 모습 가운데 하나가 매우 명확하게 나타난다. 사실상 칼뱅의 이론은 승리라는 고대의 신비주의 이론을 물질주의적이고 이교도적인 방식으로 모방한 것임이 드러난다. 한동안은 상인 집단이 부상할 때 그 이론이 윤리적. 종교적 정당성을 제공할 것이다.
제3신분인 그 집단은 스스로가 만든 서클 내에서 활동하는데 그 서클이란 현대의 거대한 민주정체들과 자본주의다. < Julius Evola: The Revolt against the Modern World /율리우스 에볼라. 현대 세계에 대한 반항 216p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면 서로 다른 무엇은 대치하여 없애야만 하는 개념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그 서로 다른 것 때문에 각각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로 만들고 하나의 맨 위에 존재하려고 하는 인간들은 무엇을 얻으려고 서로를 삭제하려고 하는 것일까?
현실의 불만으로 인한 전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종교라면 그런 인간은 스스로가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고자 노력하는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하여도 그 네트워크에서 하부의 조직일 수 밖에 없는 존재는 무엇 때문에 충성하는가?
그들도 신의 대열에 속한다면 네트워크의 수장은 존재이유가 없을 것이다. 유일해야만 하므로……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로 통합된 세상에서도 현실에서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할 텐데 왜일까?
노예근성 때문에? 그 유전자의 흔적 때문에?
뇌 속에 정보가 많이 들어갈 때…… 집안의 물건이 흔적 없이 살라지는 것처럼, 갑자기 친구의 전화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을 때처럼, 난쟁이가 반납을 까먹었듯이, 요정이 연결버튼을 누르지 않은 것처럼, ……난쟁이가 나타나는, 도깨비가 나타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게 그런 때가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고민이 많은 부세에서 잠시나마 떠나고 싶었는데 잘못 진화되었음이 틀림없을 노예근성의 유전자의 흔적이 남아있는 네트워크의 움직임이 눈에 거슬렸다.
“보수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받아 보도했고, 노무현 정부 시절 탄생한 '뉴라이트'는 이를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2005년 '교과서포럼'이 출범했다. 경제단체들에게 '좌 편향 교과서' 공격 논리를 제공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것과 맞물려 "잃어버린 10년"을 주장한 새누리당은 이명박이라는 스타 정치인을 대선 후보로 내세웠다. 정권이 교체되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3월, 뉴라이트는 '대안 교과서-한국 근 현대사'를 출간하고 강도 높은 공세에 나선다.” <프레시안 2013년 2월 22일자>
김씨는 지난 7월14일 자신의 `'시조새 관련 진화론을 삭제시키려고 한 교과부의 음모'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이 글에서 김 씨는 "교과부가 종교단체의 집요한 청원에 밀려 교과서에서 진화론 관련 내용을 삭제하려 한다"며 "삭제 방침을 명백하게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경제 2012.10.15일자>
“어떤 것의 원인을 검증 불가능한 초자연적 힘으로 돌리는 반증 불가능한 주장을 하게 되면
자연적 설명들을 계속 찾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우리는 항상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 중부 미국연방 지방법원 판결문 발췌>
더구나 이는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아론 루소(Aaron Russo) 도 인정한 끔직한 진실이다. 아론 루소는 죽기 몇 달 전 용기를 내어 자신의 고백을 담은 유명한 비디오에서 그 이야기를 폭로했다. 『譯註』 아론 루소에게 그들의 최종 목표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이크로 칩을 장착시켜 전 세계를 통제하고 은행가와 엘리트들이 세계를 통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그는 엘리트그룹에 의해 인류가 통치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세계인구를 절반으로 축소시켜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닉 록펠러 한 개인의 의견만 듣고 현재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전략이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품거나 부분적으로 실천하는 부나 권력을 지닌 개인과 조직들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세상을 지배해왔다. 113P>
이 책은 제국주의, 자본주의, 금권주의의 뒤에는 프리메이슨이 다른 이름, 다른 네트워크로 존재하여 지구를 정복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그에 따른 과정의 일부일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프리메이슨 조직은 문명의 변화와 인구의 증가 이동. 통신의 발달로 구시대와 같이 좁은 공간이 아니기에 인종과 공간의 Mason Lodge를 인정하였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백인 우월주의에 근거하여 일부 양보하였을 뿐인 것이고, 만약 그런 다수의 로지를 인정한다고 하여도 그들은 결국 서로에게 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상관 없다. 영화 속에 나오는 미래의 인간들처럼 머리에 모두 칩을 심어 가상의 세계에서 산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그들, 즉 서양인의 세계에서 바라본 저들만의 오만이며 배타성을 버리지 못한, 사라져야 할, 사라질 수 밖에 없는 네트워크라고 하고 싶다.
그런데 그런 배타성을 기본으로 하는 네트워크에 기생한 이 땅에 사는, 저들의 야욕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저들의 개념으로는 불완전한 유전자를 가진 야만족에 속하였던, 인간들의 네트워크는 뭐란 말인가? 아이들에게 지구의 역사는 6,000년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가르치고 진화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하여서 얻어낼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시간에 한정된 진리?
그것도 저들의 배려로 인정받는다고 하여도 서로 이단이라고 싸워대는 인간들이 잠시 연합한 그 네트워크의 종말이 어떨 것인가는 짐작할 수 있는 수준 아닐까?
제국주의가 승리하고, 일신교 중에 백인의 종교가 지배하고, 자본주의가 Globalization의 이념을 이룩한다고 하여도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저마다 나는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착각처럼 결국 제국이던 자본이던 누군가를 밟지 않고는 높은 곳에 서있을 수 없다. 하다못해 단테에 의하면 천국을 받치고 있는 것도 지옥이다.
누구나 나는 거기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이 단기기억과 같은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고자 한다. 그러면 영원을 보지 못하는, 개인은 인류의 한 부분에 속하였을 뿐이라는,
그 점은 버리지 못할 무엇일까?
근래에 읽은 여러 책들이 인류의 기원은 모든 인간이 같고 그러므로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가 주장하는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인가? 그의 예언은 거짓으로 인정하고 스스로 심판자가 되고자 하려는 것일까?
모두 다 내 머리는 다른 새가 쪼아서 긁어주기를 바라는 새와 다름없다.
그런데 어찌할 것인가?
세상은 변화하여 저들만의 세상이 아니며 지구의 어느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시대가 되었고 현대 과학이 저들만의 것이 아니며 자본도 저들만의 세상이 아님을 증명해가고 있다. 일신교도 같은 아버지를 가진 세 형제가 서로 물고 뜯을 뿐이며 그것을 하나로 만들지 못한 것이 저들의 역사이다.
이념이 희미해진(이 땅은 아직 아니라고 우겨대는 인간들이 있지만)세상에서 만들어지는 S.F영화에서 인간의 적은 인간의 머리 속에 칩을 심은 인간이거나, 인간을 복제하여 가상의 세계에서 살게 하는 컴퓨터로서 소수의 네트워크가 다수의 인간을 조작하지만 그 소수의 지배집단인 네트워크를 파괴하여 인간성을 지속시키는 것도 결국 소수의 탄압받는 인간이다.
국가는 조국이 아니다. 그것은 조국을 추상화한 것이며 조국을 형이상학적으로 신비주의적으로, 정치적으로, 사법적으로 구성한 픽션이다. 어느 나라의 대중이든 자신들의 조국을 깊이 사랑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실재하는 자연스런 사랑이다. 사고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사실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명백히, 그리고 항상, 나 자신을 모든 탄압받는 조국들의 동포라고 느낀다. –미하일 바쿠닌- 계급을 혼란 시켜 현실을 은폐하다. 11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