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력서 - 오만불손한 지배자들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이정모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10여년전 서울에 사업을 마련하려던 많은 개발사업자들이 눈길을 주었던 지역 중 한곳은 요즘 시끄러운 철도기지창 지역의 맞은편지역에 있었던 미군 군수기지창 자리였는데 그 지역은 아직도 3종일반주거지역으로 고시된 채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상태로 여전히 서류봉투를 든 브로커들의 한탕주의 희망사항지역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예전 기억으로 그 지역을 협의하기 위해서는 노조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 돌기도 했던 것으로……

타락한 과거 80년대의 서울시 지하철 노조를 생각나게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제 그 지역 건너편의 넓은 땅이 제시했던 휘황찬란한 빛이 꺼져버렸다고 한다.

 용산IBD 개발사업은 공공기관 자금이 전체 지분의 46.3%를 차지하는 범국가적인 프로젝트로서, 이의 성공적 개발을 위해 정부와 서울시는 3 6천억 원에 달하는 광역 교통망 집중화 계획은 물론 서울도시기본계획, U-Turn계획 등 다양한 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51 5483( 171,245)의 개발용지는 복합도시 개발의 대표적 사례인 일본 동경 롯본기 힐스의 다섯 배에 달하며, 투입자금은 31조 원으로 롯본기힐스(4조원), 영국 런던의 카나리워프(6조원), 독일 베를린의 포츠다머플라츠(3조원) 등 기존의 세계적 복합단지 프로젝트와 비교가 되지 않는 큰 규모입니다.

이를 통해 발생하는 부가가치 규모는 67조 원으로, 36만 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며, 외국인 관광객을 포함한 용산IBD의 유동인구는 연간 1 4,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라고 그들의 사업을 소개하는 사업개요의 규모 소개에 번쩍이는 조감도들과 함께 적혀있다.

 

그런데 장밋빛 꿈은 왜 망가졌을까?

자금 조달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였을 것이며, 그 이유로는 부동산경기침체가 한 몫을 하였으며, 세계 경기불황과 금융의 불안정이 어쩌고 저쩌고…….

세계적인 설계규모를 자랑하며 서울의 중심을 바꾸려던, 아시아 최고를 넘어 뉴욕보다 큰 도심을 만들려던 성공의 자신감과 우월감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2년전 이들의 사업개요가 처음으로 민간에 알려졌을 무렵 나의 생각은 웃기고 있네!”였다

건물들은 무슨 용도로 다 채우려나? 다 채우리라고 예상하여 계획하겠지.

나중에 그 당시의 사업성, 경제성운운 하며 아파트로 용도 변경하여 팔지는......않겠지?

초기 계획 당시에는 부동산 경기가 잘 나가던 때이라서 수익성이 충분하다고 여겨 놓고 준공이 가까워지는 시점이 되면 그 시기의 부동산 경기에 따라 국가경기 어쩌고 사업성이 떨어져서 용도대로 처분하지 못하니 사업의 결말을 위해서라도 아파트로 용도 변경해서 팔아야 한다.

이러지 않을 것이란 생각..  맞으려나?  틀리겠지.”

그랬는데,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말았는데 이제 무슨 이유로 그리 되었을까를 짚어보고자 사업개요를 들여다보니 모든 개발업자들의 망상이 다 그렇듯이 크고 화려하고 높고 넓으면 다 잘 팔릴 것이라는 망상의 집합체 같아 보인다.

전부 8블록으로 크게 구분 지어진 면적에 여지없이 주택부분이 들어있는데 모두 최고급 주거시설로 표기되어있다. 그 지역에 살던 무주택자들을 위한 배려는 임대아파트라는 블록으로 외진 곳에 ‘1~2세대 특화 주거시설로 되어있는데 이는 아마도 개요상의 표현이고 오피스텔로 전용하기 위한 눈가림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주거부분 계

883,582

68.86%

업무시설

75,167

5.86%

판매시설

272,873

21.26%

문화시설

15,668

1.22%

상업시설

35,953

2.80%

1,283,243

100.00%

 

대략적인 개요를 계산해보니 나의 2년전 우려는 바보 같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시아 경제의 허브니 뭐니 하는 말은 모조리 공염불 겉포장이고 그저 집장사치들의 그림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때 내가 그거 무엇으로 다 분양할 것이란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고 우겨도 별반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토지비용이 비싸니 원가를 회수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파트라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40평에서 100평정도 규모의 대형 평형으로 분양하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평균 45평형의 아파트로 계산한다면 4~5천세대의 규모인데 그 규모에 나머지 시설은 분양가를 최고로 책정하기에 적절한 비율 같아 보인다. 그러니 그까짓 땅값에 대한 P.F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주민들을 위한 보상도 뻥튀기 계산으로 책정하여 지급한다고 해도 판매시설의 전부가 남는 장사라는 계산을 하였을 것 같다.

이런 계산은 아마 개발업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그만한 규모의 고급주택을 분양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계산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리고 일정지역에 그만한 인구를 집중시킨다면 다른 어디에서인가 그만한 인구가 빠져나간다고는 생각 안 하였을까? 만약 분양 가격을 당시의 예상대로 평당 3~4천만원대로 분양하였을 경우 인구의 흐름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림대로만, 계획대로 착착 이루어져 건물이 완성되고 주변 교통과 국제적 도심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었다면 강남의 상권이 요동칠 수 있는 자극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됐다면 서울시의 부동산 흐름은 또 한번 요동치며 끝간 데를 모르고 치솟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볼 때 계획대로 무엇인가가 의지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흔히 마무리 짓는 사필귀정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Broken City”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내용은 뉴욕시의 낡은 슬럼화 주거지역인 Bolton Village를 재건축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운 시장과 철거업체와의 밀거래를 다룬 영화였다.

영화의 줄거리는 재선을 꿈꾸는 현 시장과 철거업자와의 부정한 거래를 위한 치밀한(? 내가 보기에는 설명이 부족한)작전이 권선징악의 결과로 시장은 구속되고 진보적인 시장이 당선된다는 것이지만 그 안에는 철거업체의 지분을 갖고자 하는 탐욕적 시장과 정직해서 탈인 아들을 둔 철거업자의 계획으로 소중한 보금자리를 잃게 될 수많은 가난하고 선한 사람들의 불안정한 미래를 그린 점이 우리의 재개발 지역에 부는 뉴-타운바람과 비슷한 내용이어서 다소 흥미가 있었던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상 업자의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대부분의 부정거래가 그렇듯이 계획이 승인도 되기 전에 축배를 먼저 드는데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찍 터뜨린 샴페인은 파티를 깨버리기 십상인 경우가 경험상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외국이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몇몇 오래된 대도시들은 벌써 과거의 바빌론이나 로마처럼 비틀거리며 몰락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뉴욕 시민들의 걱정거리라면 노후한 사회 기반시설이다. 상수도관 파열과 가스 폭발은 유럽 어느 지역보다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며, 2007년에는 1924년에 설치된 지역난방 배관이 파열돼 끓는 물이 30미터 치솟으면서 30명이 다치고, 함몰된 구덩이에 화물차가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인간이력서/ 볼프 슈나이더 지음. 2013 을유문화사 <인류가 지은 콘크리트의 미래>)”

한 것처럼 우리의 도시든 저들의 도시든 도심은 언젠가는 낡게 마련이다. 최근에 서울시에서 백 년 동안 지속 가능한 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반시설부분의 설계를 개혁하겠다고 발표하였는데 공동주택의 기반시설인 전기, 가스, 통신 케이블의 노후화를 예상하고 교체를 쉽게 하여 기존 구조는 오래가도록 하겠다는 의도인데 그것은 아쉽게도 이미 20여년전에 실시했어야 했던 정책이었다. 사람들이 싫증나거나 불만을 가질 수 있던 조건은 건축물의 콘크리트 구조가 아니라 그 콘크리트 DUCT속에 묻혀있던 배관과 기술의 발전을 따라 가지 못한 인프라시설의 변화에 따르지 못한 설계구조였음은 이미 다 알고 있었음에도 적극적으로 변하지 않으려는 일회성의 의식에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 100년이 지나도 나라의 곳곳에 닭장 같은 건물들이 산과 강을 가리고 서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제 이 땅에 본격적인 아파트가 들어선지 30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사람들의 개념은 변화하고 있는데 시는 100년이 가는 아파트를 계획하겠단다. 이제라도 훌륭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는 생각이 가상하다고 해야 하는가?

 

도시는 교통과 기반시설의 편리함으로 사람이 모여들 수 밖에 없고 사람이 모여 듦으로써 살아있는 도시의 역할을 하지만 그것은 도시의 처음 개발 당시의 모습이지 낡아가는 도시를 재건축하고 재개발하고자 기존의 도심을 망가뜨리고 철거한다고 살아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도시가 문화를 포함하고 있는 그 시기의 역사라면 그것은 전통을 포함한 한 지역의 문화를 파괴하는 행위와 같으므로 자꾸 신상으로 옷을 바꿔 입힌다고 주위로부터 존중을 끌어내는 도시계획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같으면, 내 생각대로 할 수 있다면 나는 최근의 생각을 그 지역에 건설하고 싶다.

구체적인 안은 몇 날을 정리해야 나올 듯하지만 적어도 그렇게 도시와 도시의 흐름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1등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뉴욕의 어느 블록보다 보다 크고 도쿄의 롯본기 지역보다 큰 블록을 하나 만들어낸다고 하여 타

도시로부터의 유입이 없이 인구를 증가하게 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인구증가는 그리 바람

직한 정책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LOHAS(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는 단순한 소비와 생산의 균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사회적 정의 등을 고려하고 후대에게 물려줄 미래 소비 기반으로서 지구의 자연환경을 보호하려 한다는 뜻이 같이 있듯이 지구의 미래를 위하여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아 쾌적한 환경을 후대에 물려주는 사회적 구호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구 동독의 몇몇 도시에서는 이미 제3세계의 도시 팽창과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곳에서는해체 작업즉 빈집을 철거해 녹지대로 만드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같은 책 같은 부분>

이것은 자국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지구의 지리적 사회적 공간을 좁혀 세계화 되어가는 과정에 인구의 자연스런 이동을 감안한 조치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지구의 자원을 생각할 때, 지구과학적 문명개발의 집중을 볼 때 제3세계의 인구 집중과 그로 인한 생산성의 저하나 에너지의 불균형을 생각한다면 인구의 이동은 불가피할 텐데 지금처럼 지구의 도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라고 이해한다. 

 

일개 개발업자였던 떡방업자가 참견하기에는 가당치 않은 생각이겠지만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요즘 책방에 가보면 인문학 코너에 노자와 장자의 책들이 인문학코너를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서양의 수렵인식 사고가 정착민인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한계를 드러내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관점이라면 몽골의 야율초제가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개혁이라면 새로운 사업이나 제도를 시작하여 백성을 번거롭게 만드는 것보다는 원래 있던 일 가운데서 해로운 일, 필요 없는 일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백성들을 위하는 결론을 피력하였던 '한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함은 한 가지의 해로운 일을 제거함만 못하다. 는 뜻의 (興一利不 若除一害)'의 정치철학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뭔가를 그것도 높게 크게 넓게 화려하게 지어야 한다는 생각은 도심의 미래나 국가의 지속을 위하여 필요한 정책이 아니라 개인집단의 탐욕에 불과함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대한민국의 인구를 모두 서울과 경기도에 집합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면 지금과 같은 방식은 자제하거나 포기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LOHAS‘를 위한 정책이며 삶의 질을 낫게 하는 ‘Well-Being’이 아닐까?

 

한 국가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경제적 거래를 하는 시장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되며 보이지 않는 손이 자연스럽게 시장을 안정시키도록 해야 한다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주장한 대처리즘Thatcherism의 영국 마가렛 대처 전 수상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있는데 그의 업적은 역사적인 관점으로 보아 시간의 당위성이 보호해줄는지는 모르지만 그 시간이 흐르고 난 후의 평가에는 날카로운 잣대로 들이대어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시기가 지난 후에 그 모델을 본 받으려는 국가에게 힌트를 주고 있다고 본다. 내가 그의 주장이나 경제이념을 책에서 조금 보았다고 인용할 정도의 지식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진행자가 짤막하게 요약한 주제나 그 이념을 담은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까막눈은 아니므로 그의 경제정책을 현실의 시간에 적용하려 할 때에는 국가의 특이성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는 것쯤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영국에서 자유시장을 부활시키려 한 마가렛 대처의 시도는 그 전략과 성공뿐만이 아니라 그 몰락의 양태와 원인 때문에 교훈적이다.””또한 대처주의 정책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 전지구적 자본주의환상, 존 그레이 자유시장의 건설/ 45P ~66P 대처주의 실험>

 

1990년대에 대처를 계승한 존 메이저의 정부는 대처 정책을 완화하지 않았다, 대처의 정책을 더욱 기계적으로 적용했을 뿐이었다, 영국의 철도망은 80개의 민영화된 기업으로 분산되었는데, 그 조치는 철도회사 주식을 통해 이익을 얻은 소수의 불로소득자를 제외하고는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것은 결국 지난 번 선거에서 메이저 정부의 어려움을 가중시켰을 뿐이었다. 47P”

 

대처주의 정책은 영국의 사회와 제도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변화 가운데 일부는 비가역적인 것이었다. 그 가운데 수 차례 실시된 민영화 조치만 놓고 보면, 그것은 그다지 심오하고 지속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지는 않을 것이다. 최초의 민영화는 보수당에 의해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즉 전자통신업을 현대화하는데 필요한 자금의 부족에 직면한 영국 정부는 당시로서는 혁명적 조치였던 주요 공공사업의 민영화를 고려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그리고 그레이는 이 장에 앞서 이렇게 말한다.

 명확히 전지구적 자유시장으로 편성된 세계경제는 사회적 안정치를 희구하는 인류의 보편적 필요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디서나 정부의 존재이유는 불안정한 상태로부터 국민을 지켜내는 능력에 있다. 전지구적 자유방임주의 체제는 정부로 하여금 이러한 보호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훨씬 더 커다란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성의 조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시장이 각 국민에게 부과한 위험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풍부한 정책자원을 활용하면서 적절한 관리가 이루어지는 선진경제에서 찾아질 것이다. 더욱 빈곤한 국가에서 전지구적 방임주의는 근본주의적인 체제를 낳으며 근대국가의 해체를 위한 촉매로서 기능한다. 국민국가 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지구적 차원에서도 자유시장은 안정성이냐 민주주의를 촉진하지 않는다, 전지구적 규모의 민주적 자본주의는 전세계적 규모의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실현 불가능하다. <거대한 전환으로부터 전지구적 자유시장으로. /

 

나는 지금의 부동산 정책이나 용산개발의 결과가 이렇게 되었음에도 정부는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면서 겉으로는 방임하는 같은 표정을 짖는 것은 염치없는 가식이라고 본다.

그러한 결과의 모든 이유는 그들이 만들어낸 정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므로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고 그것이 국가의 정책 외부요인에 있다고 한다거나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탐욕으로 물든 잘못된 계획을 수정하고, 정말로 필요한 시설로 마무리 되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한 과정에서 선거를 의식한다거나 보수의 시선을 의식하여 개입하지 않고 놓아둔다는 것은 영국의 경우처럼 결국은 보수를 돌아서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하지만 사회의 어느 편이 시류에 뒤처지는 것은 일시적으로 그럴 있다고 있지만 피해를 보는 쪽은 1% 보수가 아니라 99% 차지하는 서민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위험한 민영화를 중단하여야 한다고 본다.

 

부담 없는 코레일, 그러나 자본잠식-줄 소송 등 후 폭풍 불가피 = 일단 코레일은 큰 부담이 없다는 입장이다. 코레일은 우선 이달 말로 청구시한이 만료되는 협약이행보증금 2400억원을 드림허브에 청구하며출구 전략을 본격 실행하게 된다. 코레일은 총 24000억원에 달하는 토지대금 중 우선 반환하는 5400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9월 말까지 순차적으로 완납하고 사업부지를 되찾아올 방침이다. 코레일은 이 금액을 금융권 단기차입금을 조달해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땅값을 돌려주면 철도기치창 부지를 돌려 받으므로 나중에 재평가해 다시 팔면 되는 등 큰 피해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드림허브 주도의 현 용산개발 사업이 막을 내리는 대신 코레일이새 판을 짜고 새로운 개발사업을 재추진 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는 이유다.

 

이렇게 예상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은 나와 같은 떡방업자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졸렬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내 생각은 너무 진보적이랄 수 있지만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실현불가능 한 것이 자유시장경제라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차근차근 다시 시작해보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한다.

 

가령 도시 프레임을 구성하는 측면으로만 생각해본다면 전자산업이 몰려있는 그곳에 영국의 Letch worth마을과 이탈리아의 Bologna, 캐나다의 Quebec의 장점을 잘 섞은 시범도시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목표를 가지고 접근을 하는 것도 방법중의 하나가 아닐까 해본다. 단 여기에 정치색을 담은 좌파 운운하면 내 생각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나는 자꾸만 치솟는 토지가격의 성격을 조절하고 바꾸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으며,

가브리엘 타르드의 책에서 읽은 사회적 측면으로의 관점에 한하여만 개인 사유의 재산을 인정하자는 측면이 있다.

.

 

아마도 토지에 대한 개인 소유욕구에 대하여도 똑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드 라블레이E.L. de Laveleye(벨기에 경제학자)씨의 사상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음가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즉 무엇보다도 문명화의 촉진자였으며 일단의 농업 발명에서 생겨난 이 욕구는 공동 소유 욕구(북아메리카 푸에블로족, 인도의 원시공산제, 러시아의 미르Mir(제정러시아 촌락공동체)보다 나중에 생겨났으며, 아울러 아직도 미분할 상태로 있는 것, 예를 들면 프랑스 시골 공유지의 점차적인 분할이 증명하는 바처럼, 실제로 그 개인 소유 욕구가 공동 소유 욕구를 희생시키면서 오늘날까지 계속 성장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개인 소유 욕구는 더 이상 증대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 욕구가 더 좋은 음식과 일반적인 복지에 대한 욕구와 경쟁하게 되는 날, 우리는 그 개인 소유 욕구가 그 자신이 낳은 이 경쟁자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모방의 법칙/ 가브리엘 타르드/문예출판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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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먼 다이슨, 20세기를 말하다 - 과학자의 눈으로 본 인간, 역사, 우주 그리고 신
프리먼 다이슨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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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방법대로,

수억 년 동안 우주의 별들이 제 주위를 돌았듯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저렇게 반복되는 일상을 알 수 없는 주기에 따라 지내고 있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살던 고대인들이 수천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의 주변들에 있는 동물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게 된 시기가 있었을 때, 그들이 느끼게 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시간의 관념에 대하여 정확히 또는 근사치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얻는 무지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내게 주어질 시간은 백 년도 채 못 될 것이고 그 중에서도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은 그보다도 짧을 터인데 수백,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을 응축해서 담아내는 역사나 인문학의 시간관념을 현재의 순간에 접목시키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 의미라면 사람들이 세상의 존재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던 시기는 더 오래 전일 수 있으나 그 느낌을, 그 의문을 정리해서 내놓은 것은 몇 천 년 전의 일로 그 기록은 지금껏 남아 있으니 인간의 정신의 기록으로 남긴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수천 년 전의 어느 인간이 최초로 돌이나 거북이의 등껍질 또는 나무껍데기에 글이나 상징으로 새겼던 의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별에 관한 것? 날씨에 관한 것? 사냥에 관한 것?

 

우리는 세가지 생물학적인 발명품이 밀접하게 참여했음을 알고 있다. 고둥 생물이 출현하기 전에 생명이 만들어 낸 이 세가지 발명은 죽음, (), 종의 분화이다. 죽음은 미래를 달라지게 한다. 성은 유전적인 특성을 빠르게 혼합하고 공유할 수 있게 한다. 종의 분화는 유전장벽으로 격리된 종을 형성해서 다양성의 진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 세가지 발명은 모두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스스로 적응해 형태와 행동을 다양하게 바꾸면서 여러 가지 생태적 지위를 메워 가기 위해 꼭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의 원시사회를 보면 언어의 가소성과 다양화 경향이 인류의 진화에 본질 적인 역할을 했다는 가설을 지지하는 강한 증거들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다양한 언어가 있다는 것은 단지 불편한 역사적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인류의 진화를 촉진하는 자연의 방식이다. 인간 능력이 빠르게 진화하려면 사회적 진보의 생물학적 진보가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가야 한다. 생물학적 진화는 무작위적인 유전적 변이를 통하여 일어나며. 이 변이가 고립될 때, 새로운 종을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유전적으로 고립된 작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이 공동체가 새로운 사회조직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의 언어 장벽으로 이웃과 재빨리 격리되는 것이 극도로 중요하다. <프리만 다이슨: 20세기를 말하다. 20장 클레이드Clade, Klados 와 클론 308~ 309P>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타인에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하여 언어가 다양해지기 시작한 것은 상징이 필요한 양이 많아졌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징은 여러 방법으로 표현되었을 것이고 주변에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이 있었는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환경의 차이에 의하여 상징의 방식과 표현 의지도 달라졌을 것이나 지구의 어느 곳에 살던 간에 같은 모습을 한, 같은 생활 방식을 가진 인간인 이상 일차적 상징의 의미는 같았을 것 같다.

그러다 점점 더 표현해야 할 무엇이 늘어나게 되던 그 시기에 달했을 때, 의지의 분화가 시작되며 각 종족간의 경계가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정신이 두 가지 수준에서 우리의 자연에 대한 지각에 관련된다는 것이다. 가장 높은 수준에서, 정신은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전기적 화학적 패턴의 복잡한 흐름을 직접 의식한다. 가장 낮은 수준에서 정신은 원자와 전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기술에 개입한다. 그 중간에 분자 생물학의 수준이 있으며 여기에서는 기계적 모형이 적합하고 정신은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물리학자로서, 정신이 우주에 드러나는 두 가지 방식이 논리적으로 연결 되어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우리가 자신의 뇌를 의식한다는 것이 원자물리학에서 관찰이라고 부르는 과정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나는 우리의 의식이 단지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사건들에 수반되는 수동적인 부수 현상 정도가 아니라고 보며, 분자의 복합체에게 한 양자 상태와 다른 양자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능동적인 작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이미 모든 전자에 정신이 내재하며, 인간 의식의 과정도 정도만 다를 뿐 전자가 양자 상태들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할 때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과 종류자체는 다르지 않다. <23장 설계 논증 347P>

그런데 사람들이 수천 년을 이어져 오면서 왜 가치관이 달라졌는가에 대한 생각은 환경이 아주

많은 역할을 해주었다는 주장, 그것도 지구의 남북 측을 따라서가 아니라 기후 조건이 비슷한

동서 축을 따라서 의식의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에 동의할 만 하다는 점에서 어쩌면 진리라는

것은 여러 학문의 갈래 중에 비록 어느 한 부분에 한할지라도 보편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환경이 의식주를 바꿔 놓고 그 의식주의 발전에 따라 의식과 사물의 운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의하여 수렵민인가 정주민인가가 달라졌으며 그런 최적 분열의 효과는

(혁신은 분열이 최적에서 중간 정도에 머문 사회에서 가장 빠르게 일어나고, 지나치게 통합되어 있거나 너무 분열된 사회에서는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 . . 쇠 그 후의 이야기: 665P>

환경을 변화시키는데 일조를 하게 되어 팽창주의를 부추겼고 그 바람에 유라시아가 아닌 대륙에서 사는 민족은 수렵민족의 팽창주의에 희생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지만 그 팽창주의 속에 종교적인 역할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어쩌면 종교적인 의미로 인하여 팽창하려 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육지로 이동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바다를 통하여 유토피아를 찾으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동쪽으로 가기에는 분열된 다른 국가와 민족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러면 최종 목적지일 유라시아의 끝 쪽에 자리잡은 민족과 가장 가까운 민족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책에서는 수렵과 식량을 풍족하게 유지, 관리 보존할 수 있는 기후조건이 의식을 발전하게 하였고 의식의 발달은 문명의 발달로 이어졌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역사와 지리적인 문제로 보았을 때 그렇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수만 년의 역사를 지리적으로 건너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인류의 발달을 말하면서도, 어쩌면 기후만큼이나 세심한 정신의 문화는 역사학자의 시선이라는 이유로 빈 공간으로 놓아 두는 것 같다.

내가 만약 정리한다면 그의 주장에 더하여 가지려고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던 팽창주의와 소유는 폭력과 파괴를 불러온다고 믿으며 자연은 나와 같은 것으로 동일시화한 몽상가적 이상주의와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프리만 다이슨이 언어의 다양성이 진화를 도왔다는 점이나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분열이 최적화되었을 때 문명이 발달하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수 있겠으나 인류의 보편성을 두고 본다면 그렇게 되는 것은 결과론적이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인류의 공동체가 발전하면서 사회적인 제도가 공동체를 이끈 규범이었을지라도 공동체의 각 개인을 묶을 수 있는 동질감이나 동화의 심인은 그들이 추구한, 그들의 심성에 자리잡은 문화적 요인도 무척 중요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동과 서의 차이는 바로 그런 점 아닐까?

자연을 세세하게 그려낸 빛의 화가인가 아니면 흑백으로 소박하게 그려낸 수묵화인가의 차이.

그림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그것을 바라보던 그 지역, 그 기후, 그 풍토 속의 사람들의 생각은 어쩌면 커다랗게 원을 그릴 때 일어나는 바람의 흐름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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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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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향해 직접 다가가지 말고 우회하라.

목표가 연상되는  대상을 우선 공략하라.

목표로 상징되는 대상에 대하여 개념을 주입하라.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히틀러(Adolf Hitler)는 프로파간다의 중요성을 깨닫고 

괴벨(Paul Joseph Goebbels)을 통하여 독일민족에게 공작을 한다.

선전가에게 悔悟는 가장 큰 약점이다. 즉 선전가가 우선 선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다음 순서는?

 

5.16. 10월維新. 5.18 등등의 숫자로 나타나는 몇몇의 역사에 대한 시간적 관점에 호소하는 언론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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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
스티븐 컨 지음, 박성관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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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과 인간과 행동을 참과 거짓,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이라는 엄격한 이분법으로 가르면서 인간 경험의 혼성적인 성격을 인정치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라고 [빅토리야 정신의 틀: 1830년부터 1870년까지]이라는 책에서 월터 호턴Walter E. Houghton 은 시사하였다. (7장 형상 443P).

빅토리야 시대는 영국이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세계최강의 권세를 떨치던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기고만장한 시대는 정신적으로 많은 변화를 이루어낸 사상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중세의 기독교 사상이 종교개혁의 변화를 겪으면서 보수냐 진보냐의 갈등을 겪은 학자들은 관념으로 포장된 이성들이 아마도 변화에 대한 두려움에 합리화하고자 하는 경향이 커졌을 것이고 그런 합리화는 변화가 바라는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인구의 증가와 노동량의 증가가 낳은 산업화의 과정을 지나면서 종교적 비합리성에 회의를 가진 이성주의자들이 관념을 벗어버리고 경험과 증명의 과학에 힘을 보태면서 이분법으로 세상을 평가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시기적으로 볼 때는 갈등과 질서의 파괴의 시기였다고 할지 모르지만 지나온 역사를 한 장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과정으로써 겪게 되는 당연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에 따르면 정신의 모든 심상들은 자유로이 흘러가는 주변의 물속에 잠겨 들면서 물든다정신적인 사건들은 저마다 그 이전과 그 이후 혹은 그것의 근거리나 원거리와 연결되어 왔다.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들은 정신적 사건 주변에서 달무리가장자리 술 장식(Fringe)’처럼 작동한다. ……. “의식은 단편적으로 조각난 의식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연쇄열차같은 말로는 의식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결합된 어떤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표현하려면 강물이나 흐름 같은 비유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78P 시간의 성질)

 

그런데 그렇게 세상과 정신을 양분화하려는 시기가 지나자 Belle Époque 시대가 20세기의 전후에 도래하였던 것은 양분법에 의한 결과로 얻어진 전쟁이라는 것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전쟁을 통하여 세상과 정신은 양분할 수 없음을 알리고자 하였던 것이 아닐까?

누가? 시간과 공간이……

 

지구의 서쪽에서는 종교적인 시대에서 새로운 개념으로 무장한 과학이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나서 시공의 범위가 좁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귀족과 자본이 양분된 세상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우리는 그런 인간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역사의 피해자가 되어 버린 것도 시간의 흐름이 주는 과정의 하나라고 받아들여야 했을까?

 

어쩌면 온 세상이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오만이라고 불리는 제국주의는 자기들 나름으로는 인류애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한 국가의 공간은 문화의 성장과 함께 확대된다. 국가의 성장은 생산, 상업 같은 여타 발전 지표를 따른다. 한 국가의 성장은 좀더 작은 단위들의 혼합에 의해 진행된다. 국경은 국가의 주변기관이다. 성장하는 국가는 해안선, 하상, 천연자원 같은 값진 부분들을 취하기 위해 애쓴다. 영토 확장에 대한 최초의 자극은 외부, 더 고등한 문명에서 하등한 국가 쪽으로 가해진다. 영토를 확장하려는 경향은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거쳐가는 과정에서 점점 더 강화된다. [Friedrich Ratzel: 국가의 공간적 성장법칙 1896] 8 543P>

 

자전거가 만들어져서 이동이 빨라지면서 공간에 대한 개념이 줄어들고, 그것은 자동차로, 비행선으로, 비행기로 발전하면서, 세상을 좁다고 생각하게 된 결과를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물리적인 공간과 시간의 개념이 줄어들었다고 인간의 정신이 그에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아야 했다. 제국주의가 팽창주의를 업고 국경을 필요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면 그런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최전방에는 문화적 충돌과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전쟁을 통해서였을 것이 라첼의 개념을 바로 해체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제국주의는 오만으로 불리는 것이 맞는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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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세상을 지배해왔다
알랭 소랄 지음, 이현웅 옮김 / 갈라파고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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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기억과 장기기억

가끔 집안의 물건이 사라지는 일은 무엇 때문일까? (패드용 터치 펜이 감쪽같이 사라졌음)

매일 쓰던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좁은 집구석에 난쟁이들이 내가 쓰던 물건을 말도 없이 빌려가고는 그들도 깜빡 해서 반납하는 것을 잃어버렸거나, 집안의 도깨비가 장난을 하려고 숨겨 놓고는 내가 찾아내지 못하자 싱거워져서 까먹고 도로 내놓지 않았다는…… 설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머리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요정들이 살면서 기억의 시냅시스(synapsis)를 연결시키는 일을 하는데 잠시 그 일을 까먹었거나 너무 많은 정보의 입력에 파업이라도 한다는……. 그것도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아직 유 튜브에 물건을 집어가는 난쟁이나 도깨비들의 장난이 담긴 동영상이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 이것은 사람의 단기기억 상실의 일부분을 동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우겨도 되지 않을까?

 

불과 백여 년 만에 인간은 참 많은 일을 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내일이면 잊어버릴 단기기억으로 갑자기 떠오른다.

1915년 완성한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만유인력의 이론적 실험적 한계를 모두 해결하고 우주로 인간의 시선을 옮기게 한 Albert Einstein

그리고 인간은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우주의 한 부분에 위치한 은하계 속에서도 한 구석에 속한 태양계 중에서도 한 별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 Edwin Hubble

그리고 인간의 몸 속을 들여다 본 Wilhelm Röntgen

또 지구를 물리적 공간을 넘어 동시간대로 가깝게 만들도록 컴퓨터를 만든 Konrad Zuse

그 외 여러 과학자들과 인류를 지구에만 머물지 않고 드넓은 우주로 나아가게 하여 다양한 세상을 알게 하여준 사람들.

그들이 일구어 낸 노력으로 지금 한 화면으로 음악도 들으며 Google Map으로 유럽사진여행도 하고 아프리카나 유럽의 친지에게 실시간으로 연락도 할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수천 년의 인류의 역사를 볼 때 현재의 시간 속에 사는 나의 관점으로 보는 시각의 한편일지 모르겠지만, 기록에 의한 면면을 정리한다고 하여도 획기적이랄 수 있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과학자들의 훌륭한 발견 중에서도 인간이 누군가에 의하여 조종당하는 기계와 같은 고기덩어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는자아라는 단단하고 확고한 실체 대신 차마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 Sigmund Freud Gustav Jung의 무의식과 종교에 대한 개념이 가장 인간정신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학문이 아닐까 한다.

 

누군가는 인류의 정신은 기원전500년전에 꽃피운 이후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하지만 물리적인 변화가 인류의 정신을 퇴회시키고 있을 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과학이-심리학을 포함해서- 인간의 생활에서 떨어질 수 없는 분야로 성장한 것은 맞는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나 공자가 윤리를 논한 그 시점부터, 아니면 더 오래 전부터 유전자에 새겨진 장기기억이 만들어낸 진화의 결과라고 우겨도 뭐라 할 것 같지는 않다.

 

집안의 물건이 사라지면 난쟁이들의 소행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이었으면 하는 것처럼 수세기가 지나오면서 사람들에게 장기기억의 힘으로 진화하는 동안 끊임없이 퇴화하는 정신 속에 자리잡은 이상향들도 사실로 존재했으면 좋겠다.

한동안 조미료 광고만 하던 여배우가 신도시에 가보면 마치 딴 세상에 와있는 것 같다면서 대한민국에게 잘 부탁한다고 하는데 그 여배우나 광고주의 개념으로서의 물리적인 존재이든 동화나 영화에 나오는 환상 속의 존재이든, 다르게 말하자면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능력은 그 이상향을 현실 속에서 찾기 위해 지구를 샅샅이 뒤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태양계를 너머 은하계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언젠가는 정말로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다. Goldilocks Zone이라고도 하는 생명체 거주영역이 우주에는 수백만에 이른다고 하는데 어딘가에는 분명 있다고 희망해도 되지 않을까? 희망인데 굳이 이직 우리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은 어디에 있지?”라고 인간만의 관점으로 딴지 걸 필요야 있겠는가?

어쨌거나 나는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우주가 아닌 기억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우주 속에 존재할 이상향. 그곳에 영혼이 있든 유령이 있든 가 있든 무언가가 인생을 구분 지어서 또 다른 무언가를 보며 느끼며 살 수 있는 그 세상에서는 제발 요즘 연일 뉴스를 통해 보고 있는 탐욕의 인간들(물론 탐욕이 아닌 욕망이 그런 과학을 이루어냈다고도 할 수 있지만)이 없거나 다른 모습으로(가급적이면 지구와는 반대의 모습으로)사는 상황을 볼 수 있으면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없음을 이미 수천 년 전에 깨달은 인간은 현실의 불만으로 인한 전이와 억압된 마음속의 을 투사하는 방법으로 위안을 주는 대상을 만들어 냈다.

언제쯤인가 측두엽에 충격을 받은 어떤 先祖가 환상을 현실인 것처럼 상징화하는 재주가 있었고, 사냥능력과 힘이 있는 부족의 우두머리가 공동의 이익을 위해 같이 협동하여 조직을 끌어가는 수단으로 발전시킨 것이 오늘날의 종교가 아닐까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으며, 고립되지 않고 더욱 큰 전체의 일부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을 생각하려고 한다. 열망하지만 결국은 성취 불가능한 윤리적 질서나 생활 방식의 근거(authority)로 신을 찾는다" <Stephen William Hawking>

 

그 속에서 둘을 연결 시킨 사람은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뜬다는 것을 발견한 말 재주꾼으로 훗날 정치가로 발전했다는……

 

그렇게 또 한참의 세월이 흘러 인간은 서로 다름을 넘어서지 못하고 서로를 없애기 위하여 이념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종교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네트워크를 만들어 그 교차되는 회로를 장악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어느 한편의 종교가 진실이고 이념이 진리이고 제도가 옳고 그들 한쪽의 네트워크만이 진실이라고 한다고 해도 그것이 영겁의 시간 속에 얼마간이나 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간이라는 개념은 중요치 않다고 할 것인가? 그저 단 한 순간이라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인가?

 

천년 전에는 지구가 중심이었고 그것은 불변의 진리인 것으로 알고 있었음을 비교한다면 지금의 네트워크가 진실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가? 20여년전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고 마르크시즘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으며, 종교적 터부가 사라졌다고 그 종교의 근본주의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는가? 萬事皆有定 옳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浮生空自汒은 아니다.

인간은 영원을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개인은 그럴 수 없지만……

그렇다면 인간의 입장으로 진리란 현실에만 적용되는 일종의 신기루와 같은 현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다른 생각과 다른 이념 다른 종교는 영원을 향해 진화해가는 진취적인 또 다른 수단일 수도 있다.

그런 면으로 생각한다면 현실에 충실한 것이 지금 진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마치 딴 세상에라는 표현에서 보지 않은 것을 본 것과 같이 동일시한다는 희망일 뿐이라고 한다면 지금 충실이라는 표현도 지극히 자의적인 해석에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다름아닌 성공이 신의 선택으로 보일 수 있다. 경제적인 것으로 거의 모든 것을 평가하게 될 시대에는 신의 선택이란 부와 번영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앞서 언급한 타락한 전도 현상의 여러 모습 가운데 하나가 매우 명확하게 나타난다. 사실상 칼뱅의 이론은 승리라는 고대의 신비주의 이론을 물질주의적이고 이교도적인 방식으로 모방한 것임이 드러난다. 한동안은 상인 집단이 부상할 때 그 이론이 윤리적. 종교적 정당성을 제공할 것이다.

3신분인 그 집단은 스스로가 만든 서클 내에서 활동하는데 그 서클이란 현대의 거대한 민주정체들과 자본주의다. < Julius Evola: The Revolt against the Modern World /율리우스 에볼라. 현대 세계에 대한 반항 216p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면 서로 다른 무엇은 대치하여 없애야만 하는 개념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그 서로 다른 것 때문에 각각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로 만들고 하나의 맨 위에 존재하려고 하는 인간들은 무엇을 얻으려고 서로를 삭제하려고 하는 것일까?

현실의 불만으로 인한 전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종교라면 그런 인간은 스스로가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고자 노력하는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하여도 그 네트워크에서 하부의 조직일 수 밖에 없는 존재는 무엇 때문에 충성하는가?

그들도 신의 대열에 속한다면 네트워크의 수장은 존재이유가 없을 것이다. 유일해야만 하므로……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로 통합된 세상에서도 현실에서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할 텐데 왜일까?

노예근성 때문에? 그 유전자의 흔적 때문에?

 

뇌 속에 정보가 많이 들어갈 때…… 집안의 물건이 흔적 없이 살라지는 것처럼, 갑자기 친구의 전화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을 때처럼, 난쟁이가 반납을 까먹었듯이, 요정이 연결버튼을 누르지 않은 것처럼, ……난쟁이가 나타나는, 도깨비가 나타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게 그런 때가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고민이 많은 부세에서 잠시나마 떠나고 싶었는데 잘못 진화되었음이 틀림없을 노예근성의 유전자의 흔적이 남아있는 네트워크의 움직임이 눈에 거슬렸다.

 

보수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받아 보도했고, 노무현 정부 시절 탄생한 '뉴라이트'는 이를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2005 '교과서포럼'이 출범했다. 경제단체들에게 '좌 편향 교과서' 공격 논리를 제공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것과 맞물려 "잃어버린 10"을 주장한 새누리당은 이명박이라는 스타 정치인을 대선 후보로 내세웠다. 정권이 교체되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 3, 뉴라이트는 '대안 교과서-한국 근 현대사'를 출간하고 강도 높은 공세에 나선다.” <프레시안 2013년 2월 22일자>

 

 

김씨는 지난 714일 자신의 `'시조새 관련 진화론을 삭제시키려고 한 교과부의 음모'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이 글에서 김 씨는 "교과부가 종교단체의 집요한 청원에 밀려 교과서에서 진화론 관련 내용을 삭제하려 한다" "삭제 방침을 명백하게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경제 2012.10.15일자>

 

 

어떤 것의 원인을 검증 불가능한 초자연적 힘으로 돌리는 반증 불가능한 주장을 하게 되면

자연적 설명들을 계속 찾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우리는 항상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 중부 미국연방 지방법원 판결문 발췌>

 

더구나 이는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아론 루소(Aaron Russo) 도 인정한 끔직한 진실이다. 아론 루소는 죽기 몇 달 전 용기를 내어 자신의 고백을 담은 유명한 비디오에서 이야기를 폭로했다. 譯註』 아론 루소에게 그들의 최종 목표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이크로 칩을 장착시켜 전 세계를 통제하고 은행가와 엘리트들이 세계를 통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그는 엘리트그룹에 의해 인류가 통치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세계인구를 절반으로 축소시켜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닉 록펠러 한 개인의 의견만 듣고 현재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전략이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품거나 부분적으로 실천하는 부나 권력을 지닌 개인과 조직들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세상을 지배해왔다. 113P>

 

이 책은 제국주의, 자본주의, 금권주의의 뒤에는 프리메이슨이 다른 이름, 다른 네트워크로 존재하여 지구를 정복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그에 따른 과정의 일부일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프리메이슨 조직은 문명의 변화와 인구의 증가 이동. 통신의 발달로 구시대와 같이 좁은 공간이 아니기에 인종과 공간의 Mason Lodge를 인정하였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백인 우월주의에 근거하여 일부 양보하였을 뿐인 것이고, 만약 그런 다수의 로지를 인정한다고 하여도 그들은 결국 서로에게 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상관 없다. 영화 속에 나오는 미래의 인간들처럼 머리에 모두 칩을 심어 가상의 세계에서 산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그들, 즉 서양인의 세계에서 바라본 저들만의 오만이며 배타성을 버리지 못한, 사라져야 할, 사라질 수 밖에 없는 네트워크라고 하고 싶다.

그런데 그런 배타성을 기본으로 하는 네트워크에 기생한 이 땅에 사는, 저들의 야욕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저들의 개념으로는 불완전한 유전자를 가진 야만족에 속하였던, 인간들의 네트워크는 뭐란 말인가? 아이들에게 지구의 역사는 6,000년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가르치고 진화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하여서 얻어낼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시간에 한정된 진리?

그것도 저들의 배려로 인정받는다고 하여도 서로 이단이라고 싸워대는 인간들이 잠시 연합한 그 네트워크의 종말이 어떨 것인가는 짐작할 수 있는 수준 아닐까?

제국주의가 승리하고, 일신교 중에 백인의 종교가 지배하고, 자본주의가 Globalization의 이념을 이룩한다고 하여도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저마다 나는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착각처럼 결국 제국이던 자본이던 누군가를 밟지 않고는 높은 곳에 서있을 수 없다. 하다못해 단테에 의하면 천국을 받치고 있는 것도 지옥이다.

 

누구나 나는 거기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이 단기기억과 같은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고자 한다. 그러면 영원을 보지 못하는, 개인은 인류의 한 부분에 속하였을 뿐이라는,

그 점은 버리지 못할 무엇일까?

 

근래에 읽은 여러 책들이 인류의 기원은 모든 인간이 같고 그러므로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가 주장하는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인가? 그의 예언은 거짓으로 인정하고 스스로 심판자가 되고자 하려는 것일까?

모두 다 내 머리는 다른 새가 쪼아서 긁어주기를 바라는 새와 다름없다.

 

그런데 어찌할 것인가?

세상은 변화하여 저들만의 세상이 아니며 지구의 어느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시대가 되었고 현대 과학이 저들만의 것이 아니며 자본도 저들만의 세상이 아님을 증명해가고 있다. 일신교도 같은 아버지를 가진 세 형제가 서로 물고 뜯을 뿐이며 그것을 하나로 만들지 못한 것이 저들의 역사이다.

 

이념이 희미해진(이 땅은 아직 아니라고 우겨대는 인간들이 있지만)세상에서 만들어지는 S.F영화에서 인간의 적은 인간의 머리 속에 칩을 심은 인간이거나, 인간을 복제하여 가상의 세계에서 살게 하는 컴퓨터로서 소수의 네트워크가 다수의 인간을 조작하지만 그 소수의 지배집단인 네트워크를 파괴하여 인간성을 지속시키는 것도 결국 소수의 탄압받는 인간이다. 

 

국가는 조국이 아니다. 그것은 조국을 추상화한 것이며 조국을 형이상학적으로 신비주의적으로, 정치적으로, 사법적으로 구성한 픽션이다. 어느 나라의 대중이든 자신들의 조국을 깊이 사랑한다.

그런데 그 사랑은 실재하는 자연스런 사랑이다. 사고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사실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명백히, 그리고 항상, 나 자신을 모든 탄압받는 조국들의 동포라고 느낀다. –미하일 바쿠닌- 계급을 혼란 시켜 현실을 은폐하다. 1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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