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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과 종교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이은봉 옮김 / 창 / 2010년 9월
평점 :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영화 2편.
모두 재난영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의미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하는 영화.
그러나 두 영화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출연진과 이야기의 흐름이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두 영화 중 이전 96년에 개봉한 영화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면
올해의 영화는 할리우드적 유행에 편승하여 종교적 은유-최근의 2천년간은 그리스도교라는 제도가 이러한 초자연적인 힘으로부터의 영향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왔습니다. <무의식의 자율성; 융>-를 담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 영화는 인간의 광기와 폭력으로 스스로 자멸하지 말고 자연과 공생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인간의 죄를 벌받게 하는 의도라면
한 영화는 요즘 유행하는 영화의 장르를 빌어 인류의 사회적 궤멸을 보여주면서 뭔가 경각심을 갖게 하고자 하는 의도인 것 같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에서 인간은 왜 인류의 멸망을 두려워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시간의 흐름이 자연적인 것이라는 생각과 사회적인 규범과 제도가 서로 이득이라는 실천을 말하는 것이라면 언젠가 과거의 흔적처럼 인류도 소멸과 재생이라는 역사를 반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좀비와 같은 변종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인류 스스로에게 벌을 주려는 것은 모든 결과의 동기가 내게 있지 않다는, 그렇다고 타자를 지목하지도 않는 본능적인 이기심-<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관념이 와서 우리 자신이나 우리 이웃을 사로잡을지도 모를 위험을 느끼게 됩니다. ……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일은 현 순간에도 속해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특히 미래에도 속할 일일 것 같습니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이리이다.- Homo homini lupus- 라는 말은 슬프지만 영원히 타당한 말입니다. …… 그러나 한편 인간들이 모여 군중을 이루고 집단을 형성할 때에는 모든 개개인의 마음 속에 잠들어 있는 야수성이나 악령 등, 이른바 집합인의 동인이라고 할 말한 것이 그 매었던 사슬을 품고 자유롭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 (무의식의 자율성: 융)-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왜 서양인은 좀비라는 괴상한 변종을 만들어 낸 것일까?
귀신이나 유령 등의 괴물이 아닌 시체가 움직이며 사람을 공격한다는 변종 말이다.
좀비는 아메리카 서인도제도의 부두 신앙에서 주술사들이 마법으로 소생시킨 시체라고 하는데 무거운 죄를 지은 인간이 그 대가로 좀비가 된다고 한단다. 좀비는 그래서 자신을 살려낸 마법사나 주술사의 명령에만 움직인다고 하는데 그래서 영혼이 없는, 즉 썩어서 없어질 신체만을 가지고 있는 개체를 말하는 것으로 발전한 것 같다. 그것이 영혼이 오염된 악마의 후예라는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등의 비인간적 존재들과 동일시되면서 요즘 발전된 미디어기술에 의해 영화관이나 게임에서 살아나는 것 같다. 결국 그 변종들은 인간성이 없는 동물과 같은 존재로 비쳐지는 것인데 인간성이라는 것은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는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영혼이란 무엇일까?
사전에는 여러 가지 의미로서 영혼을 설명해주는데 결국은 몸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물리적인 것도 의식적인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 같다.
신체와는 별개이고 따라서 비물질적이며 신체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관계없이 불사(不死)인 정신적인 어떤 작용을 하는 실체이면서, 현실세계 밖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영혼은 종교적인 의미이다. 철학적 의미로는 실체가 아니고 내적 감각기능의 대상이라고 한다.
그렇게 사람들에게는 그 영혼이 여러 가지의 뜻으로,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가에 따라 유신론적인가 무신론적인가 아니면 불가지론자인가로 구분되는 것 같다.
그런 비물질적 형상의 존재이유가 민족마다 어떠한 배경을 가졌던 간에, 어쨌든 영혼의 유무는 그것을 믿는 자에게 무슨 의미인가.
서양인들에게 영혼은 플라톤의 개념에 따라 신체와는 별개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이 나중에 이민족의 믿음Pistis과 섞이면서 종교화한 것이고 세월이 한참 흘러 지금의 다양하고 복잡한 현대에는 심리적 불안감을 표현하는 문화의 한 형태로까지 분리된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영혼이 있건 없건 개인의 정신에 누미노즘Numinosum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라면 그 존재를 믿는 사람만 믿으면 됐지 굳이 안 믿는, 체험한 적이 없는, 그래서 부인하는 사람에게 저주와 협박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누미노즘적 체험을 객관화시킨 일부 개인들의 집합에서 벌어지는 의식화 행동의 여러 가지 형태로서 이타심을 가장한 이기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은 본질을 흐리는 일부의 집단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고 그들의 도그마에도 벗어나는 행위이지만, 믿음을 자신의 생활방식에 부수적으로 따른 지성의 액세서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배타성이 있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 때문에 몇 백 년 동안 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 아닐까? 그 비판은 의식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생각되겠지만 반대의 세력에게는 과학을 신봉하고 영혼을 부인하는 무신론자의 집단인 좀비무리로 비교될 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영혼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본인의 의지를 믿지 못하는 불안감에서 비롯되어 우연한 기회에 체험한 두려움의 회피 형태에 있다고 생각한다.
“두려움이란 개인이 직면하는 위험에 적절히 반응하는 것임에 비해 불안은 위험에 대해 부적절하고 과도하게 반응하거나 상상 속의 위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한다. <현대인의 이상성격: 카렌 호나이Karen Horney/3장 불안> 그리고 같은 장에서 “우리의 문화가 개인의 삶에 많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같은 장 61p)” 고 하며, “우리는 불안의 존재를 잘 자각하지는 못하지만 불안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어느 정도 불안에서 도망치거나 불안을 느끼는 것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고 한다. 그래서 “불안을 회피하는 데는 보통 네 가지 방법이 쓰인다. 불안을 합리화시키는 방법, 부인하는 방법, 마취시키는 방법, 그리고 불안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과 불안에 대한 생각, 감정, 충동 등을 회피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같은 장. 48P)라고 한다.
이렇게 반응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불안. –타나토스에 대한 주장까지 <Thanatos: 죽음의 본능은 파괴의 본능이라고도 불렸다. 이것은 생물체가 무생물로 환원하려는 본능이다. 그래서 인간 자신을 사멸하고, 살아있는 동안 자신을 파괴하며, 처벌하며, 타인이나 환경을 파괴시키려고 서로 싸우며 공격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 거슬러 올라가면서 인간 본성을 연구한 수많은 학자들의 전철을 밟아가야 한다. 그렇게 수 천년 동안 연구 했지만 아직도 모르는 그 죽음에 대한 답을 걱정하는 것은 공자(孔子)의 말마따나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 불신의 근거가 본인의 의지에 있다라는 것을 반대편의 입장으로는 자신들이 불신자에게 보여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상이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입장에서건 어차피 영혼을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모두 죽음 그 이후에 대하여 증명하는 것을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듣거나 볼 수 없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가장 끔직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에피큐로스Epicurus "
그러나 간혹 영혼이 신체에 부속되어서 신체가 소멸할 때 같이 소멸되는 존재로 믿는 측이 있는데 (정도전은 기가 흩어져 죽고 나면 형체도 썩고 정신 또한 흩어져 버리므로 내생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심령학적인 의미이거나 이성에만 의지하는 것과 같은 어느 형태로든 인간에게 보여지는 존재와는 다른 철학적 의미로서 영혼의 필요성을 욕구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영혼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불안에 대하여 회피하려는 어느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하더라도 개인 의지의 실현이 현상이라면 영혼의 실현 의지는 무엇인가?
영혼에게 감관(感官)에 의존하지 않는 의지란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의지의 목적이나 지향성은 무엇일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의지의 실현은 절대적으로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하도록 결정지어졌다는,
또는 나의 결정은 내가 내린 결정이 아니라 영혼이 육체에 내린 명령이므로 육체는 말하자면 의지의 실행 수단일 뿐이라는 주장.
이런 이야기들은 그 동안의 많은 인문학관련 책들에서 다룬 내용들이나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한 주제이므로 내가 정리하기에는 가당치 않은 일이다.
다만 영혼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 의미는 무엇이길래 모든 행위의 기저에 두고 행위의 최종목적으로 하려는 것일까? 이 경우 그래서 그 영혼이 받는 이익이란 무엇이란 말일까?
또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하나의 영이든 신체이든 그 둘이 연결된 의미를 지닌 존재라면 그렇게 나뉘어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은 있는가? 그런 존재는 인류에게만 있는가 아니면 지상의 모든 생물체에 존재하는 것일까?
인류에게만 해당한다면, 만약 그런 존재에게 있어서의 시공(時空)이란 영화에서 보여주는 가상의 세계 속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면 그것의 거처는 어디인가?
만약 그런 영화 속의 상상이 아닌 무색 무형의 기와 같은 존재라면 그것이 가진 시공의 기억과 현상에서의 기억이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그것 중 어느 쪽이 ‘나’인가?
내가 정리하기에는 가당치 않은 종류의 의문이 잊혀졌다가 그 영화 “월드 워Z”로 인하여 다시 살아났다.
철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정신의 본질과 마음의 형상을 생각하면 무엇인가 내게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뜻으로 이데아, 초자아, 순수의지, Ding an Sich. 도(道). 기(氣). 리(理). 무의식 등등의 지역적 민족만큼이나 많은 언어가 있지만, 모두 영혼이라는 단어로 대치될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영혼이 필요한 존재라면 그 존재의 근원이 내게 있는가 아니면 외부에 있는가, 바라보는 관점이 어느 곳을 향하여 있는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외부로 향한 관점일 때 개인의 본성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주는 것이 되고, 내부로 향한 관점은 현상의 근원이 내가 만드는 것이 된다.
그 것이 있고 없고 사실은 별 상관 없는 정신의 유희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것의 존재를 내세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방식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 겪게 되는 여러 가지의 행위들. 그리고 감관에 작용하는 외부의 자극들.
아름다움. 선에 대한 보상 욕구. 타자에 대한 야수성. 이런 것들이 엮여있는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자신의 생애에서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안타까움.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 그런 것들이 모여 영생의 의지로 표현되는 것이 영혼이 아닐까?
소멸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두려움과 욕망 그리고 희망 그런 것들이 살아있는 개인에게 자신의 도그마로 작용하여 그들이 삶을 지속시키는 동안의 근거가 될 수도 있음을……
그러나 그런 것도 개인이 가지고 태어난 성격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성격개조는 빙산이 수면 위에 드러난 일부만을 보고 깎아 조형물을 만들면 그 빙산의 전체를 개조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성격은 살아있는 동안 전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개조한 성격이란 어느 특정의 환경에서 적응된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 사람이 전혀 다른 낯선 환경을 맞닥뜨렸을 때 수면아래 잠겨있던 성격이 튀어나올지 모르지 않는가? 하다못해 꿈속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일도 알지 못하지 않는가?
좋은 환경이랄 수 있는 쾌적함과 안락함. 부유함 이런 과정에서 살아 온 사람과 투쟁. 빈곤. 억압 등의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 한가지 학문적 대상을 가지고 각기 다른 이론이 생겨 파벌이 나누어지는 것을 수 천 년의 과거에서 보았지 않은가?
가령 많은 사람들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 속의 초인에 대한 내용을 이해하기를 히틀러와 같이 비유하거나 기독교에 대응하는 이교도의 교조가 행하는 야유. 비판. 민족주의 허무주의 등으로 비유하곤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짜라투스트라의 자기변혁의 과정은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과 ‘임제록’ 속의 구도의 과정이 연상되는 책으로 니체가 만약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그를 경허선사(鏡虛禪師)로 비유하고 싶다. 이처럼 개인이 가진 성격에 따라 다르게 보여지는 대상이 보편적이지 않다고 할 때 제도에 어긋날 수는 있으나 진실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놔뒀으면 좋겠다.
영혼이란 존재가 어느 목적이 있건 없건 그 존재에 살을 붙이고 관을 씌우고 명패를 붙여 누더기를 만들어 놓고 프리즘 속의 세상을 비추는 것이 수도자의 목적일지는 모르지만 내 생각에 그는 먼저 자신을 구도하는 근원에 대하여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