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브레인 - 수전 그린필드가 들려주는 뇌과학의 신비 사이언스 마스터스 6
수전 그린필드 지음, 박경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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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나 운동에 각각 하나의 실행 중추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골상학의 머리뼈 융기와 대동소이하다. 또 정신과학이나 도덕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최상위의 초자아 개념에 상응하는 형이하학적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작동을 지시하는 소형 슈퍼 뇌는 뇌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휴먼 브레인. 1장 뇌 안의 뇌/32)

 

어제인가 미국의 MIT연구진들이 주의 뇌에 가짜 기억을 심는 실험에 성공했다밝혔다는 뉴스가 있었다. 마치 대단한 SF영화의 시나리오를 예고하는 듯한 반응들을 기대한듯한 뉘앙스를 엿보인다. 하지만 엊그제 읽은 책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던 것이 내 기억에 있다. 외과의사인 펜필드Wilder Penfield 1900년대 중반에 캐나다에서 뇌의 표면이 드러난 상태에서 환자의 여러 피질 부위를 전기로 자극한 후 환자가 무엇을 경험했는지 말하게 하는 기억의 저장에 관해 조사했다

기억이 단순히 저장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하는 펜필드Wilder Penfield의 임상 실험 결과도 레슐리Karl Lashley의 동물 실험 결과를 뒷받침한다. 즉 기억은 뇌에 직접 쌓이지 않는다. 펜필드의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기억이란 일련의 몽롱한 꿈에 가깝다. 따라서 기억 자체는 비디오 테이프에 저장된 고도로 정확한 기억이 아니며, 컴퓨터 메모리와는 전혀 다르다는 문제 에 봉착하게 된다. 또 다른 문제는 펜필드가 동일 부위를 자극해도 매번 다른 기억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 펜필드의 실험 결과로 미루어, 기억은 중복된 신경회로들과 어떤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신경세포가 서로 다른 수많은 신경회로의 일원일 수 있다. 즉 신경회로 사이의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신경세포의 구체적인 조합일 것이다. 각 회로마다 한 가지 기악 현상에 기여하기 때문에 한 신경세포나 한 가지 목적을 가진 신경세포 집단만이 기억의 전체과정을 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은 분산되어 있다. (5장 마음의 주춧돌/ 204~205) –

이렇게 보면 MIT의 실험결과는 비록 쥐에 대한 실험이기에 펜필드가 실험한 인체와의 결과와 비교하거나 진전이 있는 것이다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전환점이 될 수는 있다는 것일까? 이렇게 확실히 결정되지 않은 과학자들의 실험결과를 밝히는 과정과 목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실험의 동기는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결과는 동기보다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SF 시나리오일 것 같다. 그린필드의 책에서 느낀 기억의 저장과 작용에 관한 그림은 마치 거대한 우주를 연상하게 한다. 사람의 뇌에는 약 천억 개의 신경세포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것을 연결하는 신경망은 성냥 머리만 한 뇌 조직 표면에만 10억개의 연결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뇌의 바깥 층인 피질에만 존재하는 신경세포들 사이의 연결을 1초에 하나씩 세려면 3,200만년이나 걸린다. 인류가 약 700만년전에 진화했음을 감안하면 인간이 진화하는데 걸린 시간보다 네 배 더 오래 세야 한다는 이야기다. 피질에서 신경세포 연결이 이루어지는 서로 다른 조합의 수만 계산해도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 양성자의 수를 넘어선다. (3장 흥분과 흥분파/133)

이렇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그 세포들이 하는 일이란 인간이 겪게 되는 자극 하나하나가 각기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각 개별 세포들이 저장한 기억들이 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 기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어의적 기억 삽화적 기억 암묵적 기억 명시적 기억과 같은 여러 양상의 기억들이 행위에 존재하는 것 아닐까 한다. , 그 조합을 통해 꿈을 꾸고 환상을 통해 자아의 욕구를 만족해하기도 하는 것 아닐까? 사람이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REM수면상태에서는 꿈을 현실로 착각하는 행동을 지속시키려는 것 때문에 몸이 경직된다고 한다. (2장 시스템의 시스템/96) 그처럼 외부의 자극에 대한 기억을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불안감정을 해소하려는, 또 외로운 낯섦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시키려는 감정에 익숙해지고자 하는 욕망충족도 하려는 것 아닐까 한다. 사람이 만약 어디에선가 혼자인 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면, 타잔의 환경과 로빈슨 크루소의 환경을 섞어 놓은 경우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에게서 기억이란 어떤 의미로 작용하게 될까? 또는 사람에게 시각이 없다면? 청각이 없다면? 손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면? 그런 상태에 혼자라면?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이 환경이라는 현상이라면 결코 인간의 기억은 혼자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 동기가 삶의 이유일 수 있다. 내 기억만을 위하여 타인에게 나쁜 기억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멍게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움직이는 생물에는 뇌가 존재하고, 정착해서 살아가는 생물에게는 뇌가 필요 없다. 움직이는 동물은 끊임없이 바뀌는 환경과 접촉하기 때문에 뇌가 필요하다. 동물에게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며, 동시에 그 상황에 반응 할 수 있는 장치도 매우 중요하다.” (2장 시스템의 시스템/63)

그래서 나의 기억을 즐거움으로만 채우려는 노력은 희망일 뿐이지 실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고 실제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고 보여진다. 아마 아무 곳도 가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으며 그저 주변의 환경에 적응하고 주변의 자극만 받아들이며 살 수 있다면 비록 기억은 암묵적 기억만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그에게는 자신만의 행복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불행과 비교할 수 없는데 어찌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따라서 비록 고난과 불행으로 얽힌 삶일지라도 수백 만년간 이어져 온 인류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는 불필요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내가 세상을 버리고자 하여도 세상은 나를 품고 있기에 벗어날 수 없다. 한참을 머물던 의문이 지금 해결된듯한 생각 때문에 머리 속이 텅 빈 느낌이라 그 동안의 기억에 비하면 낯설기만 하고 어색하여 뭘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스쳐가는 환경의 자극이 나타나면 또 다른 화두가 내 머리 속을 채울지도 모른다. 그때 그 시간이 되면 처음 가는 여행길에서 새로운 터널을 만날 때처럼 외로운 낯섦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나이가 많아지는 그 시기를 위하여 寒山詩를 외워 두고자 한다.

欲得安身處 寒山可長保 욕득안신처 한산가장보 = 몸 둘 곳을 찾으려는 욕망이 있다면 한산이 제일 보존하기 좋을 것이다.

微風吹幽松 近聽聲愈好 미풍취유송 근청성유호 = 가녀린 바람이 소나무를 안고 그윽하게 불어대고 가까이 들을수록 그 소리는 더욱 아름답다. 

下有斑白人 喃喃讀黃老 하유반백인 남남독황로 = 소나무 그늘에서 머리카락이 반백인 노인이 황노를 소리 내어 읽고 있다.

十年歸不得 忘却來時道 십년귀부득 망각내시도 = 얻은 바 있어 십 년 동안이나 집에 돌아가지 않았으나 올 때의 길조차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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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생각의 역사 1 - 불에서 프로이트까지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피터 왓슨 지음, 남경태 옮김 / 들녘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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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비가 쏟아지더니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는 사이에 거리는 물이 철벅거리고 인근 숲에서는 수증기가 연신 피어 오른다.

해마다 어김없이 이맘때쯤이면 벌어지는 현상이니 특별히 신기해 할 것도 없을 터이다.

그런데 비를 저렇게 쏟아 붓고 가는 융단 같은 구름은 내 머리 위에서 불과 몇 백 미터 위의 높이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비행기를 타고서야 느낄 수 있었다. 잠깐 사이에 몸 사리게 하는 비구름을 피해 올라온 곳에서는 푸른 하늘이 늘 그렇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구름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걱정이 많았다는 사실을 꼭 눈으로 보고 느끼고서야 알았음은 어쩔 수 없는 思考의 한계일까? 하기야 어떻게 알겠는가…… 높은 산을 올라 안개구름이 산중턱에 걸려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산의 정상에서 보이는 저 먼 곳의 푸르름을 어찌 알겠는가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구름은 항상 피어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 한낮이 될수록 안개구름은 햇살에 부서지듯 사라지고 나면 저 숲의 수증기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며 그러면 또다시 새들은 울고 풀벌레는 저 할 일을 찾아 밤새 울어대는 시간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생각의 역사에서 1,000쪽이 넘는 글을 통해 설명해준 그 긴 이야기들은 수 천 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사람들이 과거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밝혀내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역사 속의 사람들은 현재가 언제나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잘잘못을 탓하고 숭배하기도 하고 그러지만, 그것은 어쩌면 시간의 흐름을 잊고 있는, 마치 구름을 통과하는 그 시간이 없이도 푸르름을 볼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이 한쪽 면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닐까?

생각의 역사를 간직한 인류의 지혜는 3천년전에서 더 이상 빠른 속도로 진화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고 있으며 심지어 문명은 발달하여 행동은 편해졌는지 모르나 문화는 퇴보하고 사람들의 사유능력은 낮아져 행동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지는 모른다고 저자는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도 그 수 천 년의 긴 이야기를 보지 않았다면 지나온 역사 속의 지식과 지혜들이 그냥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멸하는 것일 뿐 진리는 아니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과학의 발달로 불과 50여년의 시간 만에 사람들의 모든 행동과 사유는 1,500CC짜리 뇌에서 비롯되는 화학작용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여도, 그 순간의 시간에 반응한 공간적 작용에 불과한 것이 이만한 인류의, 인간의 세상을 이끌어 온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눈앞에 보고 느낀 것만을 알 수 있음이 현상의 전부라고 믿어버리는 단순함이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잊고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누가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볼 수 있는 무엇이 있을까? 점으로 이어진 시간과 공간의 흐름, 그 순간을…… 세상의 한쪽 어느 시간에 변화가 일어나 수 천 년 동안 지구를 돌아 다니며 생존을 위한 문명을 발달시켜 지금 이 시기에 세상 어느 곳에 가도 인간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지구를 정복했다는 말로 인류의 종점을 장식할 수 있을까?

생각의 역사를 통해 본 시간의 흐름은 한때는 지구의 어느 곳이 활발하게 움직였고 한때는 그곳의 인류와 다르게 생긴 민족이 지구의 다른 쪽을 변화시켰으며 그때 그 정착의 시기에는 자신들의 삶이 지상 최대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였겠지만 그 영광도 영원하지는 못하였음을 우리는 사막의 한 곳에 바위에 새겨진 흔적을 보고 짐작할 수 있고, 그들의 그런 절망이 인류에게 두려움과 불안이란 유전자로 남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시간의 속성을 직선으로 흐른다고 정한 민족이나 시간은 반복되는 것이라고 믿는 민족이나 모두 시간을 주재하는 무엇이 있다고 믿으며 그에게 자신을 투사하려는 속성을 갖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객체에 자신을 투사하여 보이지 않는 정신을 위안시키려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행위의 다양함은 문화의 다양성으로 전이되어 다시 각 개인에게 감성으로 승화된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만사개유정(萬事皆有定) 부생공자망(浮生空自汒) 이라고 김삿갓은 자신의 삶 어느 쯤에 회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도 역시 시간을 자신 본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온 과거의 생각의 역사 어느 한 순간마다 세상은 그렇게 김삿갓과 같은 회한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책에 기록된 분명한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과거가 없었다면 현재의 우리 시간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다른 양상으로 달라졌을 수도 있다. 만사가 이미 유정일수는 있지만 부생을 공망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일 뿐이지 않을까? 인간은 혼자이지만 혼자서는 인간임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속성일 수는 있어도 구원을 받아야 할 약점이나 안타까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게 세상은 의미 없으며 인간이 없다면 구원할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들 사이에 이름을 붙이고 스스로 단죄하며 崇信하는 것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행위가 아닐까?

 

天下皆知美之爲美(천하개지미지위미)斯惡已(사악이). 皆知善之爲善(개지선지위선) 斯不善已(사불선이). 故有無相生(고유무상생) 難易相成(난이상성) 長短相較(장단상교) 高下相傾(고하상경) 音聲相和(음성상화) 前後相隨(전후상수) 是以聖人處無爲之事(시이성인처무위지사) 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가지고 못 가짐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어렵고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 길고 짧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높고 낮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 악기 소리와 목소리도 서로의 관계에서 어울리는 것, 앞과 뒤도 서로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 따라서 성인은 무위로써 이를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한다. “ <도덕경 2>

 

하지만 늙은 사람이 살던 그 시기의 시간의 흐름은 행위와 현상을 위하는 목소리에 숨어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현상도 역시 생각의 그 기나긴 역사 속에서 잡히지 않고 보이기만 하는 현재를 이루기 위한 아니 그냥 흐름일 뿐일 것 같다.

2,500년전에 만물은 유전한다. Panta rhei! 라고 한 헤라클레이토스나 50년전에 "이것이 현실이다"하고 인정할 수 있는 "생각"이란 우리에게 존재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청담(靑潭)이 한말처럼 그냥 흐를 뿐이다.

 

우리는 아무도 구름의 아래위를 동시에 바랄 볼 수는 없다. 아무도 시간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시기에 어떤 사건은 동기가 있을지는 몰라도 목적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먼 훗날 생각의 역사에서 사라진 점에 불과할지 아니면 몇 쪽에 걸친 문자로 기억에 남을지 그런 것들이 그저 사람들의 부질없는 생각의 유희에 불과한 것일지 나는 모른다.

요즘은

不尙賢(불상현) 使民不爭(사민불쟁) 훌륭하다는 사람 떠받들지 말라. 사람들 사이에 다투는 일 없어질 것이다.

不貴難得之貨(불귀난득지화) 使民不爲盜(사민불위도): 귀중하다는 것 귀히 여기지 말라. 사람 사이에 훔치는 일 없어질 것이다. 不見可欲(불견가욕) 使民心不亂(사민심불란): 탐날 만한 것 보이지 말라. 사람의 마음 산란해지지 않을 것이다.” <도덕경 3>

()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이타성은 meme의 동기일까? 결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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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과 종교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이은봉 옮김 / 창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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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영화 2.

모두 재난영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의미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하는 영화.

그러나 두 영화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출연진과 이야기의 흐름이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두 영화 중 이전 96년에 개봉한 영화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면

올해의 영화는 할리우드적 유행에 편승하여 종교적 은유-최근의 2천년간은 그리스도교라는 제도가 이러한 초자연적인 힘으로부터의 영향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여 왔습니다. <무의식의 자율성; >-를 담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 영화는 인간의 광기와 폭력으로 스스로 자멸하지 말고 자연과 공생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인간의 죄를 벌받게 하는 의도라면

한 영화는 요즘 유행하는 영화의 장르를 빌어 인류의 사회적 궤멸을 보여주면서 뭔가 경각심을 갖게 하고자 하는 의도인 것 같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에서 인간은 왜 인류의 멸망을 두려워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시간의 흐름이 자연적인 것이라는 생각과 사회적인 규범과 제도가 서로 이득이라는 실천을 말하는 것이라면 언젠가 과거의 흔적처럼 인류도 소멸과 재생이라는 역사를 반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좀비와 같은 변종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인류 스스로에게 벌을 주려는 것은 모든 결과의 동기가 내게 있지 않다는, 그렇다고 타자를 지목하지도 않는 본능적인 이기심-<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관념이 와서 우리 자신이나 우리 이웃을 사로잡을지도 모를 위험을 느끼게 됩니다. ……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일은 현 순간에도 속해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특히 미래에도 속할 일일 것 같습니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이리이다.- Homo homini lupus- 라는 말은 슬프지만 영원히 타당한 말입니다. …… 그러나 한편 인간들이 모여 군중을 이루고 집단을 형성할 때에는 모든 개개인의 마음 속에 잠들어 있는 야수성이나 악령 등, 이른바 집합인의 동인이라고 할 말한 것이 그 매었던 사슬을 품고 자유롭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 (무의식의 자율성: )-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왜 서양인은 좀비라는 괴상한 변종을 만들어 낸 것일까?

귀신이나 유령 등의 괴물이 아닌 시체가 움직이며 사람을 공격한다는 변종 말이다.

좀비는 아메리카 서인도제도의 부두 신앙에서 주술사들이 마법으로 소생시킨 시체라고 하는데 무거운 죄를 지은 인간이 그 대가로 좀비가 된다고 한단다. 좀비는 그래서 자신을 살려낸 마법사나 주술사의 명령에만 움직인다고 하는데 그래서 영혼이 없는, 즉 썩어서 없어질 신체만을 가지고 있는 개체를 말하는 것으로 발전한 것 같다. 그것이 영혼이 오염된 악마의 후예라는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등의 비인간적 존재들과 동일시되면서 요즘 발전된 미디어기술에 의해 영화관이나 게임에서 살아나는 것 같다. 결국 그 변종들은 인간성이 없는 동물과 같은 존재로 비쳐지는 것인데 인간성이라는 것은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는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영혼이란 무엇일까?

사전에는 여러 가지 의미로서 영혼을 설명해주는데 결국은 몸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물리적인 것도 의식적인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 같다.

신체와는 별개이고 따라서 비물질적이며 신체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관계없이 불사(不死)인 정신적인 어떤 작용을 하는 실체이면서, 현실세계 밖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영혼은 종교적인 의미이다. 철학적 의미로는 실체가 아니고 내적 감각기능의 대상이라고 한다.

그렇게 사람들에게는 그 영혼이 여러 가지의 뜻으로,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가에 따라 유신론적인가 무신론적인가 아니면 불가지론자인가로 구분되는 것 같다.

그런 비물질적 형상의 존재이유가 민족마다 어떠한 배경을 가졌던 간에, 어쨌든 영혼의 유무는 그것을 믿는 자에게 무슨 의미인가.

서양인들에게 영혼은 플라톤의 개념에 따라 신체와는 별개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것이 나중에 이민족의 믿음Pistis과 섞이면서 종교화한 것이고 세월이 한참 흘러 지금의 다양하고 복잡한 현대에는 심리적 불안감을 표현하는 문화의 한 형태로까지 분리된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영혼이 있건 없건 개인의 정신에 누미노즘Numinosum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라면 그 존재를 믿는 사람만 믿으면 됐지 굳이 안 믿는, 체험한 적이 없는, 그래서 부인하는 사람에게 저주와 협박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누미노즘적 체험을 객관화시킨 일부 개인들의 집합에서 벌어지는 의식화 행동의 여러 가지 형태로서 이타심을 가장한 이기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은 본질을 흐리는 일부의 집단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고 그들의 도그마에도 벗어나는 행위이지만, 믿음을 자신의 생활방식에 부수적으로 따른 지성의 액세서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배타성이 있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 때문에 몇 백 년 동안 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 아닐까? 그 비판은 의식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생각되겠지만 반대의 세력에게는 과학을 신봉하고 영혼을 부인하는 무신론자의 집단인 좀비무리로 비교될 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영혼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본인의 의지를 믿지 못하는 불안감에서 비롯되어 우연한 기회에 체험한 두려움의 회피 형태에 있다고 생각한다.

 두려움이란 개인이 직면하는 위험에 적절히 반응하는 것임에 비해 불안은 위험에 대해 부적절하고 과도하게 반응하거나 상상 속의 위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한다. <현대인의 이상성격: 카렌 호나이Karen Horney/3장 불안> 그리고 같은 장에서 우리의 문화가 개인의 삶에 많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같은 장 61p)” 고 하며, “우리는 불안의 존재를 잘 자각하지는 못하지만 불안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어느 정도 불안에서 도망치거나 불안을 느끼는 것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고 한다. 그래서 불안을 회피하는 데는 보통 네 가지 방법이 쓰인다. 불안을 합리화시키는 방법, 부인하는 방법, 마취시키는 방법, 그리고 불안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과 불안에 대한 생각, 감정, 충동 등을 회피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같은 장. 48P)라고 한다.

 

이렇게 반응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불안. –타나토스에 대한 주장까지 <Thanatos: 죽음의 본능은 파괴의 본능이라고도 불렸다. 이것은 생물체가 무생물로 환원하려는 본능이다. 그래서 인간 자신을 사멸하고, 살아있는 동안 자신을 파괴하며, 처벌하며, 타인이나 환경을 파괴시키려고 서로 싸우며 공격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 거슬러 올라가면서 인간 본성을 연구한 수많은 학자들의 전철을 밟아가야 한다. 그렇게 수 천년 동안 연구 했지만 아직도 모르는 그 죽음에 대한 답을 걱정하는 것은 공자(孔子)의 말마따나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 불신의 근거가 본인의 의지에 있다라는 것을 반대편의 입장으로는 자신들이 불신자에게 보여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상이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입장에서건 어차피 영혼을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모두 죽음 그 이후에 대하여 증명하는 것을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듣거나 볼 수 없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가장 끔직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에피큐로스Epicurus "

 

그러나 간혹 영혼이 신체에 부속되어서 신체가 소멸할 때 같이 소멸되는 존재로 믿는 측이 있는데 (정도전은 기가 흩어져 죽고 나면 형체도 썩고 정신 또한 흩어져 버리므로 내생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심령학적인 의미이거나 이성에만 의지하는 것과 같은 어느 형태로든 인간에게 보여지는 존재와는 다른 철학적 의미로서 영혼의 필요성을 욕구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영혼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불안에 대하여 회피하려는 어느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하더라도 개인 의지의 실현이 현상이라면 영혼의 실현 의지는 무엇인가?

영혼에게 감관(感官)에 의존하지 않는 의지란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의지의 목적이나 지향성은 무엇일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의지의 실현은 절대적으로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하도록 결정지어졌다는,

또는 나의 결정은 내가 내린 결정이 아니라 영혼이 육체에 내린 명령이므로 육체는 말하자면 의지의 실행 수단일 뿐이라는 주장.

이런 이야기들은 그 동안의 많은 인문학관련 책들에서 다룬 내용들이나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한 주제이므로 내가 정리하기에는 가당치 않은 일이다.

다만 영혼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 의미는 무엇이길래 모든 행위의 기저에 두고 행위의 최종목적으로 하려는 것일까? 이 경우 그래서 그 영혼이 받는 이익이란 무엇이란 말일까?

또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하나의 영이든 신체이든 그 둘이 연결된 의미를 지닌 존재라면 그렇게 나뉘어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은 있는가? 그런 존재는 인류에게만 있는가 아니면 지상의 모든 생물체에 존재하는 것일까?

인류에게만 해당한다면, 만약 그런 존재에게 있어서의 시공(時空)이란 영화에서 보여주는 가상의 세계 속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면 그것의 거처는 어디인가?

만약 그런 영화 속의 상상이 아닌 무색 무형의 기와 같은 존재라면 그것이 가진 시공의 기억과 현상에서의 기억이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그것 중 어느 쪽이 인가?

 

내가 정리하기에는 가당치 않은 종류의 의문이 잊혀졌다가 그 영화 월드 워Z”로 인하여 다시 살아났다.

 

철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정신의 본질과 마음의 형상을 생각하면 무엇인가 내게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뜻으로 이데아, 초자아, 순수의지, Ding an Sich. (). (). (). 무의식 등등의 지역적 민족만큼이나 많은 언어가 있지만, 모두 영혼이라는 단어로 대치될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영혼이 필요한 존재라면 그 존재의 근원이 내게 있는가 아니면 외부에 있는가, 바라보는 관점이 어느 곳을 향하여 있는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외부로 향한 관점일 때 개인의 본성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주는 것이 되고, 내부로 향한 관점은 현상의 근원이 내가 만드는 것이 된다.

 

그 것이 있고 없고 사실은 별 상관 없는 정신의 유희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것의 존재를 내세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방식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 겪게 되는 여러 가지의 행위들. 그리고 감관에 작용하는 외부의 자극들.

아름다움. 선에 대한 보상 욕구. 타자에 대한 야수성. 이런 것들이 엮여있는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자신의 생애에서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안타까움.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 그런 것들이 모여 영생의 의지로 표현되는 것이 영혼이 아닐까?

소멸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두려움과 욕망 그리고 희망 그런 것들이 살아있는 개인에게 자신의 도그마로 작용하여 그들이 삶을 지속시키는 동안의 근거가 될 수도 있음을……

그러나 그런 것도 개인이 가지고 태어난 성격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성격개조는 빙산이 수면 위에 드러난 일부만을 보고 깎아 조형물을 만들면 그 빙산의 전체를 개조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성격은 살아있는 동안 전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개조한 성격이란 어느 특정의 환경에서 적응된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 사람이 전혀 다른 낯선 환경을 맞닥뜨렸을 때 수면아래 잠겨있던 성격이 튀어나올지 모르지 않는가? 하다못해 꿈속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일도 알지 못하지 않는가?

좋은 환경이랄 수 있는 쾌적함과 안락함. 부유함 이런 과정에서 살아 온 사람과 투쟁. 빈곤. 억압 등의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 한가지 학문적 대상을 가지고 각기 다른 이론이 생겨 파벌이 나누어지는 것을 수 천 년의 과거에서 보았지 않은가?

가령 많은 사람들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 속의 초인에 대한 내용을 이해하기를 히틀러와 같이 비유하거나 기독교에 대응하는 이교도의 교조가 행하는 야유. 비판. 민족주의 허무주의 등으로 비유하곤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짜라투스트라의 자기변혁의 과정은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임제록속의 구도의 과정이 연상되는 책으로 니체가 만약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그를 경허선사(鏡虛禪師)로 비유하고 싶다. 이처럼 개인이 가진 성격에 따라 다르게 보여지는 대상이 보편적이지 않다고 할 때 제도에 어긋날 수는 있으나 진실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놔뒀으면 좋겠다.

 

영혼이란 존재가 어느 목적이 있건 없건 그 존재에 살을 붙이고 관을 씌우고 명패를 붙여 누더기를 만들어 놓고 프리즘 속의 세상을 비추는 것이 수도자의 목적일지는 모르지만 내 생각에 그는 먼저 자신을 구도하는 근원에 대하여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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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진화한다 - 자유의지의 진화를 통해 본 인간 의식의 비밀
대니얼 C. 데닛 지음, 이한음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상영했던어벤져스, 2012 The Avengers. 2012는 만화 속 영웅 캐릭터들의 장기자랑을 보여주는 것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자유의지는 진화한다]라는 책 속의 내용 중에 법과대학원의 고전적인 수수께끼라는 사례를 영화 속 인물들을 모아서 임의대로 수정하여 상상해본다. -< 3장 결정론에 관한 생각 115P>

동면에서 깬 캡틴 아메리카‘S.H.E.I.L.D’라는 국제평화기구에 합류하게 되자 그를 좋아하게 된 블랙 위도우는 의 아이언 맨과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고, 그 사실을 질투한 아이언 맨캡틴 메리카가 다시 영원한 동면에 들게 하려고, 그의 장비 중 하나인 물통에 자신의 가슴에 박혀 있는 원자로에 쓰이는 방사능 물질을 몰래 넣었다. 그런데 그를 질투한 영웅은 아이언 맨뿐만이 아니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의 위치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한 토르는 치사량의 오염물질이 섞인 그의 수통에 영원히 잠드는 시간의 모래를 잔뜩 채워 놓는다. 하지만 연인인 블랙위도우를 잃게 된 호크 아이도 그 수통에 화살로 구멍을 내 결국 서서히 그의 수통을 빈 것으로 만들고 만다.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채 외계인의 침입을 막으려 출동한 캡틴 아메리카는 전투 중에 물을 마시려 하였으나 수통이 그 지경인 것을 알게 되었고, 오랜 동면에서 깬 그는 수분 부족으로 결국 사망하게 된다는 가상을 제시한다. 그리고는 묻는다. 이럴 경우 누가 그를 살해한 것인가라고…… 법률적으로 살인의 죄를 퍼센트로 나누게 될 때 현행 법으로 어느 누구에게 얼만큼의 죄가 있음을 나눌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결국 캡틴 아메리카는 죽을 운명이었는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인생에 어느, 무언가, 나 이외의 무엇이 개인의 삶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개입할 수 없으며, 자신의 행위의 결과는 그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고 해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봐야 한다,

 

딜레마. 어원은 그리스어의 di(두 번) lemma(제안 ·명제)의 합성어로, 진퇴양난 ·궁지라는 뜻이 있다는 딜레마.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이런 저런 동기와 목적을 가진 행위의 매 순간마다 펼쳐지는 상황과 그에 따르는 선택을 하는 것은 누구 또는 무엇에 의한 결과인가. 순전히 나의 결정에 의한 것인가, 트롤리 딜레마. 죄수의 딜레마 등등. 인간이 결코 의지가 강하거나 도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딜레마들.

책에는 (교착상태가 반드시 타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탐색하든 간에, 때로 한 사건의 은밀한 진정한 원인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잇다는 생각을 갖고 침착하게 대해야 한다. –3장 같은 부분)고 말한다.

 

<일부 사상가들은 결정론의 진실이 다음과 같은 낙심시키는 주장들 중 하나 이상을 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모든 추세들은 영구적이며, 성격은 대체로 불변이고, 사람이 자신의 방식이나 운명이나 미래의 기본 특성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 열린 미래를 지닌 존재가 되는 것과 닫힌 미래를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의 구분은 결정론과 전적으로 무관하다. (……) 고정된 즉 결정된 개인적 미래가 자신의 활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변화무쌍한 본성이라는 축복을 포함할 수도 있다. ‘고정된혹은 그렇지 않은 개인적 미래들의 전체집합은 역경에 맞선 승리, 약함에 따른 굴복, 성격 교정, 심지어 행운의 뒤바뀜을 담은 수긍할 만한 온갖 시나리오들을 포함한다. (……) 우리가 자신의 과거의 패턴을 반복할지 확실치 않은 미래 궤적을 지닌 부류인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며, 결정론이라는 일반 주제는 그런 문제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 – 같은 책; 137P>

 

인간이 어떤 문제에 닥쳤을 때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것이 내부의 원인 때문이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 방어기제, 불안감으로부터의 회피를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그럼 왜 인간은 그런 갈등을 야기시키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을까? 카렌 호나이Karen Horrney 현대인의 이상성격에는 불안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성향중의 하나이며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따라 신경증적인가 아닌가가 된다고 말한다. (첫째로 모든 문화에서 삶의 조건은 어떤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둘째로 주어진 문화에 존재하는 불안들은 어떤 방어장치 가령 의식이나 전통, 제도 등-에 의해 방어된다. 1장 신경증의 문화적. 심리학적 의미 27P) 그렇다면 인간이 갈등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결정론이든 그 반대의 의견에서든 갈등을 불러오는 그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조건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학문적인 이유로 이렇게 장황하게 주장하는 것에 별로 흥미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게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서양학자들의 의견인 듯하며-내가 그런 책들만 봐서 그렇겠지만- 그 바탕에는 언제든 종교적인 교리가 깔려있다고 본다. 그것은 다시 수천 년, 수만 년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다른 학문에서의 주장도 함께 고려해봐야 할 텐데 그런 모든 각기 다른 주장을 뒤집는 고집스러운 주장은 그런 모든 것들이 결정되도록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으로 마치게 된다. 그것은 내가 그런 종류의 탐구에 흥미를 잃은 계기이기도 하다. 그 의문은 끝이 없는 순환주장을 편다 해서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증명할 수 없는, 마음에만 의존하는 그 주장은 근본주의적인 색과도 맞지 않고, 영지주의적인 의견이라면 그런 의견은 서양뿐 아니라 지구상의 어떤 문화에서도 찾을 수 있는 주장이므로 독립적이지 못하다고 보여진다. 그런 생각의 과정을 통해 변형되어 퍼져나가는 생각 중에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쪽의 의견은 내가 보기에는 이렇다. 인간은 다른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과 비교하여 우수하다. 우수하기에 모든 생물의 먹이사슬에서 최고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며 다른 생물들은 보여주지 않는 언어나 문자 등을 통하여 서로 교류하고 발전하여 인간의 활동 범위를 지구를 넘어 광활한 우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인간은 불안을 가질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을 갖춘 존재임에도 불안으로 인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그 인간이 가진 열등성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인간의 세계에 개입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을 두어 스스로의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는 심리적 수단임을 부정하려는 것이거나, 인간보다 더 우수한 존재에 자신을 전이시켜 자신의 능력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으로, 그런 모든 현상을 다른 관점으로 객관화하여 바라 본다면 죽음의 공포에 불안에 하며 자신을 숨기려 하는 모습임을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이 기능적인 면으로 다른 생물보다 우수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기능적인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미생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개미의 뇌에 기생하여 그 숙주의 신경을 조종하여 나무를 기어오르게 한 후 나무를 핥는 소의 간에 기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창협흡충이라는 존재처럼 인간이 갖지 못한 생명유지 수단을 가진 생물들이 언어나 문자 등을 갖지 못한 것은 인간의 관점으로서 보는 단편적인 주장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그런 생물들이 자신들의 의사교류를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때 인간처럼 발전하지 못한 것은 그런 생활방식으로서 만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유전적인 요소일지라도 그 생물들은 인간과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진화의 방식을 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식의 내 생각은 신비주의라고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우수하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필요 없는 결정된 운명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결정론이 참이면 당신의 미래도 고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결정론이 참이면 당신의 본성도 고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나머지 세계와의 상호작용에 반응하여 본성을 변화시키도록 설계된 실체가 되도록 진화했기에 우리 본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결정론에 대한 잘못된 걱정이 야기되는 것은 고정된 본성을 지닌다는 것과 고정된 미래를 지닌다는 것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그 혼동은 우주에 대한 두 관점을 동시에 고수하려고 할 때 생긴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펼쳐보는 신의 눈관점과 우주 안에 살아가는 행위자의 관점이 그것이다. 142p

 

이런 것을 혼돈케 하는 것은 뇌가 선택을 하고 근육이 또는 신체가 반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300밀리세컨드라는 시간. 그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바로 이 300밀리초의 도덕적 공백이 문제다. 마치 당신의 뇌가 당신이 행동을 하기 전에 결심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8장 당신은 무지한가? 316P >

 

일부 생물학자들의 의견은 자극에 반응하기까지 그만큼의 공백이 있으므로 사람의 심신에 관한 모든 것은 인간의 뇌가 결정하는 것이 전부인 듯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럼으로써 일부는 자아의 결정에 대한 모든 것은 외부에 있는 무엇으로부터 명령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는 것이며 인간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종교적인 상황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하지만 꼭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달라지는 것은 그 사람의 유전적 요소와 그가 살아온 문화적 환경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웨그너Daniel Wegner가 말한 것처럼 사람은 눈덩이처럼 계속 증가하는 타협 과정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런 존재가, 즉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존재가 된다.” 349P

신경과학자 라마찬드란은 그 점을 이렇게 조롱한바 있다. “이것은 우리 의식적 정신이 자유의지(Free Will)가 아니라, 오히려 안 할 자유(Free won’t)를 지닌다고 시사한다.” 322P  

 

하지만 문제가 되는 그 공백의 시간은 뇌의 신경이 반응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최소한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 같다. 공백의 시간이 뇌 속에 존재하는 호문쿨루스가 레버를 움직이는 반응의 시간인가 아니면 외부의 명령을 교차통신이라는 기술로 받아 적는데 걸리는 시간인가. 그것도 아니고 뇌가 순전히 생물학적 반응으로 움직이는데 걸리는 시간에 불과하다고 해서 주위의 자극에 감각이 반응하고 신체가 결정에 따른다고 해서 인간에게 있는 의지는 온전히 자신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인가?

 

어쨌든 그것은 그 간격이 착각임을 보여줌으로써 자유의지를 구할 수 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당신은 뇌의 일부가 까딱거리기로 결정할 때 의식적으로 까딱거리기로 결정을 하지만(준비전위가 생성될 때 그것을 타고 거기에 있었다.), 그 뒤에 당신이 시각중추로 가서 최신 글자판을 포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그 결정의 객관적인 시각을 잘못 판단한다. 327P 

 

그렇다면 뇌신경이 보편적이지 않아 질병으로 분류 되는 장애를 가진 뇌가 결정을 했다고 보여지는 행위에 대하여는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규범에서 예외로 해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의 뇌에 대하여 벌을 내려야 하는가? 그 뇌는 나의 자신 자아 초자아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내가 아닌 무엇인가? 결정되어있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운명이라면 그 시점은 어디서부터인가? 시기를 어느 시간이라고 가정한다고 하여도 인간의 행위에 개입할 수 있는 인간에 의한 여러 상황들, 또는 좁아진 공간에 의한 주변인들과의 관계에서 얽히고 설킨 어디 부분이 나에게 결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이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고 소멸하는 독립적인 무엇이라고 하거나, 자신의 존재를 불안감의 노예로 만들어 스스로의 창조물에게 복종적이고 환경에 적응하려는 힘을 잃어 방황하는 무엇으로써 죽음의 과정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형태라도 생명을 이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약하고 외로워하는 존재라고 한들 이득을 보는 것은 무엇이고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미래가 있다고 해서 달라지고 변화한다고 하는 것은 시간을 단편적인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내게 있어서 이런 생각 끝에 머무는 곳은 항시 동양의 사유방식에 있다.

그런 형태는 서양의 심리학자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우리 인생에는 삶이 줄 수 있는 행복들도 많지만 또한 회피할 수 없는 비극들이 있다. 특별한 고통이 없더라도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보다 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유한하고 고립되어 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 성취하거나 즐길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우리는 모두 고유한 실체이기 때문에 고립되고 분리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추구의 보다 격렬하고 아름다운 표현이 우파니샤드에서 발견된다. 우파니샤드에는 강은 흘러서 바다로 사라지면서 그 형상과 이름을 잃는다고 씌어 있다. 보다 큰 것을 위해 자기를 해체시킴으로써 보다 큰 실체의 일부가 되며 그렇게 함으로서 인간은 그의 한계성을 극복하게 된다. 현대인의 이상성격; 카렌 호나이 14장 신경증적인 고통의 의미 250p

그러나 이와 같은 추구도 말과는 다르게 그 책의 앞부분에서는 세상사에 초연하고 스스로 만족하려는 불안에 대한 방어 수단의 하나인 초연함이다라고 했다. 5장 신경증의 기본적인 구조 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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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속의 불만 프로이트 전집 12
프로이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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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고, 모든 것을 성욕과 관계 지으려는 그런 해석에 도덕적 윤리를 보탠 학자들도 있지만, 부자간에서 발생되는 대부분의 갈등은 쌍방이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성장통 혹은 인생의 교훈이랄 수 있겠다. 부건 자건 인생을 한번만 살아보는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 경험이 없는 것으로서는 양쪽 모두에게 교훈으로 남겨져야 하는 기록이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오를 자식에게 전이시켜 그들로 하여금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고,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을 미리 예비한다는 핑계를 두어 자신의 인생을 대리로 살게 하려는 의도로 인하여 마찰을 빚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적인 도덕과 규범으로 포장된 교육이란 방식으로 주입되는 결과로서, 가족이라는 구성의 시간성으로 놓고 본다면 문명 이후에 이어져 온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지나지 않으므로, 가족이라는 군집에서 사회와 국가라는 집단으로 이어질 사회의 집단 심리가 나중에 다른 어떤 방식으로 변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일 것 같다. 그렇다면 결코 같은 시간과 환경으로 되돌릴 수 없는 자신의 희망 또는 과오를 자식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재연하도록 요구하거나 또는 희망이라거나, 사회적인 완성도라는 이름으로라도 얻고자 하는 것은 일방적인 이기심이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부자간에 있어서 정신의 상속은 마치 달과 손가락의 관계처럼, 혹은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고기를 잡아 주는 것보다는 낫다는 이야기처럼 삶의 도구를 쥐어주는 것 보다는 도구를 만들거나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뭔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할리우드의 영화배우 Will Smith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아이를 영화에 출연시키더니 이제는 그 아이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영화를 제작해 공급 상영케 했다, 제작 예산이 130,000,000 $ 이라는 거액 정도는 자신들의(부부가 제작에 참여) 아이의 희망을 위하여는 과감하게 투자를 해도 좋다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과연 그 아이에게 도구로 작용할지 아니면 허망한 꿈에 불을 지핀 꼴이 아닐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영 아니올시다 였다고 하겠다. 영화 평론가들은 이미 자식도 자리를 잡았다고 하지만…… 내가 본 이 영화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따르는 듯 보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영상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자아와의 싸움을 과거의 기억이 무의식으로 잠재되어 있음을 영상화. 그리고 공포란 뇌의 사물에 대한 기억의 착각일 뿐 사실이 아닌 환상일 뿐이라고 주입시키는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를 영상화.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 긍정적인 관람태도라고 보여질 것이며 투덜거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뭐 그런 의미에서 가정내의 가훈이라든가 삶의 지침을 보여주는 의미라면 막장드라마나, 그저 피 튀기는 좀비 류의 영화나, 성적인 영상만을 다룬 영화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지만, 어쩌면 자기들이 소파에 앉아 해결할 수도 있는 일을 거액을 들여 영화로 만들다니…… 돈은 역시 만능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이 그 사정을 이해할까?

영화의 제작노트에는 부자간의 아이디어로 스토리가 만들어졌고 그것을 다듬어 시나리오화 한 결과라지만 그것을 실행했을 때 과연 현실적인 의견이 가족애를 누를 만큼 돈의 힘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을까 의문스럽다.

압축시킨 도입부를 풀어 본다면 나는 전설이다가 될 것 같은 느낌의 영화의 시작 부분에는 지구에 살던 인간의 파멸과정을 짜깁기 영상으로 대체한 것은 그렇다 치고, 지구를 떠난 인간들이 또 다른 세계에서 자신들의 적을 스스로 만들어 위험을 자초한다는 이야기는 무엇에 대한 함축성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인간을 죽이는 방향으로 진화하였다는 지구상의 동물들의 모습은 굳이 진화라는 표현을 하지 않아도 1천년동안 자신들의 천적이 사라진 환경에서 살아온 것이라면 인간을 죽이라는 유전화의 동기가 어딘가에 도입부의 영상처럼 설명화 되어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의 테마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면, 요즘 인문학의 하나인 심리학과 뇌 생리학이 떠오른다. 프로이트가 이론으로 내세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전제적인 아버지상을 넘어서는(살해한다는 표현으로……)자식들의 성장이 문명과 인간 자아의 성장 모습이라고 하였듯이, 영화 속에서도 부친은 전제적이며 아들은 부친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며, 달리기에서 부친의 기록을 넘어서는 것으로 콤플렉스를 넘어선다. 프로이트의 표현이라면 부친을 죽이는 것이 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부친이 전제적인 것은 나르시시즘을 의미하기 때문에 집단의 존경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복종을 요구할 뿐이라고 했는데, 그 이론 그대로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부하들의 조언을 무시한 채, 시공의 터널을 잘못 들어서 지구로 추락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영화의 주제는 이미 거기에서 끝이며 관람자로 하여금 그럴 듯한 영상을 보여주어 주제를 더 미화하던가, 암시 속으로 묻어버리는 그림은 없다. 자식이 스스로 세상에 맞서기 위해 도구를 쥐어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끝없이 간섭하려는 부자 관계, 그 모습이 그대로 보여진다. 마지막에 이르러 영화 300의 성인식과 같은 인상을 주는 Ursa와의 싸움은 표절 같아 보인다. 그는 그렇게 하여 자신의 부친을 완전히 넘어서고 성인으로서 자아를 찾는다고 봐야 한다. 영화를 긍정적으로 보려면……

 

영화 속의 부자가 실제로 얼마나 인정을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인한 부대에서 우수한 성적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징징대는 모습이라던가, 부대의 특급전사과정에서 탈락하는 과정부터 지구로의 추락 과정을 거쳐 조난 신호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부친의 조언에서 벗어나려는 이유까지 내 생각으로는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고, 공포의 대상과 맞서는 장면이나,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소년 판 “Sucker Punch”와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내게 있어서는 ‘Sucker Punch”가 더 기억에 남는다. 심리학적인 면에서의 설명은 나의 이해가 부족했다고 보여지지만 그 영화에서는 음악이 영상과 잘 맞았다고 생각되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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