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생각의 역사 1 - 불에서 프로이트까지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피터 왓슨 지음, 남경태 옮김 / 들녘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바탕 비가 쏟아지더니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는 사이에 거리는 물이 철벅거리고 인근 숲에서는 수증기가 연신 피어 오른다.

해마다 어김없이 이맘때쯤이면 벌어지는 현상이니 특별히 신기해 할 것도 없을 터이다.

그런데 비를 저렇게 쏟아 붓고 가는 융단 같은 구름은 내 머리 위에서 불과 몇 백 미터 위의 높이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비행기를 타고서야 느낄 수 있었다. 잠깐 사이에 몸 사리게 하는 비구름을 피해 올라온 곳에서는 푸른 하늘이 늘 그렇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구름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걱정이 많았다는 사실을 꼭 눈으로 보고 느끼고서야 알았음은 어쩔 수 없는 思考의 한계일까? 하기야 어떻게 알겠는가…… 높은 산을 올라 안개구름이 산중턱에 걸려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산의 정상에서 보이는 저 먼 곳의 푸르름을 어찌 알겠는가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구름은 항상 피어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 한낮이 될수록 안개구름은 햇살에 부서지듯 사라지고 나면 저 숲의 수증기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며 그러면 또다시 새들은 울고 풀벌레는 저 할 일을 찾아 밤새 울어대는 시간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생각의 역사에서 1,000쪽이 넘는 글을 통해 설명해준 그 긴 이야기들은 수 천 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사람들이 과거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밝혀내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역사 속의 사람들은 현재가 언제나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잘잘못을 탓하고 숭배하기도 하고 그러지만, 그것은 어쩌면 시간의 흐름을 잊고 있는, 마치 구름을 통과하는 그 시간이 없이도 푸르름을 볼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이 한쪽 면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닐까?

생각의 역사를 간직한 인류의 지혜는 3천년전에서 더 이상 빠른 속도로 진화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고 있으며 심지어 문명은 발달하여 행동은 편해졌는지 모르나 문화는 퇴보하고 사람들의 사유능력은 낮아져 행동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지는 모른다고 저자는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도 그 수 천 년의 긴 이야기를 보지 않았다면 지나온 역사 속의 지식과 지혜들이 그냥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멸하는 것일 뿐 진리는 아니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과학의 발달로 불과 50여년의 시간 만에 사람들의 모든 행동과 사유는 1,500CC짜리 뇌에서 비롯되는 화학작용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여도, 그 순간의 시간에 반응한 공간적 작용에 불과한 것이 이만한 인류의, 인간의 세상을 이끌어 온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눈앞에 보고 느낀 것만을 알 수 있음이 현상의 전부라고 믿어버리는 단순함이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잊고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누가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볼 수 있는 무엇이 있을까? 점으로 이어진 시간과 공간의 흐름, 그 순간을…… 세상의 한쪽 어느 시간에 변화가 일어나 수 천 년 동안 지구를 돌아 다니며 생존을 위한 문명을 발달시켜 지금 이 시기에 세상 어느 곳에 가도 인간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지구를 정복했다는 말로 인류의 종점을 장식할 수 있을까?

생각의 역사를 통해 본 시간의 흐름은 한때는 지구의 어느 곳이 활발하게 움직였고 한때는 그곳의 인류와 다르게 생긴 민족이 지구의 다른 쪽을 변화시켰으며 그때 그 정착의 시기에는 자신들의 삶이 지상 최대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였겠지만 그 영광도 영원하지는 못하였음을 우리는 사막의 한 곳에 바위에 새겨진 흔적을 보고 짐작할 수 있고, 그들의 그런 절망이 인류에게 두려움과 불안이란 유전자로 남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시간의 속성을 직선으로 흐른다고 정한 민족이나 시간은 반복되는 것이라고 믿는 민족이나 모두 시간을 주재하는 무엇이 있다고 믿으며 그에게 자신을 투사하려는 속성을 갖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객체에 자신을 투사하여 보이지 않는 정신을 위안시키려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행위의 다양함은 문화의 다양성으로 전이되어 다시 각 개인에게 감성으로 승화된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만사개유정(萬事皆有定) 부생공자망(浮生空自汒) 이라고 김삿갓은 자신의 삶 어느 쯤에 회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도 역시 시간을 자신 본위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온 과거의 생각의 역사 어느 한 순간마다 세상은 그렇게 김삿갓과 같은 회한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책에 기록된 분명한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과거가 없었다면 현재의 우리 시간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다른 양상으로 달라졌을 수도 있다. 만사가 이미 유정일수는 있지만 부생을 공망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일 뿐이지 않을까? 인간은 혼자이지만 혼자서는 인간임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속성일 수는 있어도 구원을 받아야 할 약점이나 안타까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게 세상은 의미 없으며 인간이 없다면 구원할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들 사이에 이름을 붙이고 스스로 단죄하며 崇信하는 것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행위가 아닐까?

 

天下皆知美之爲美(천하개지미지위미)斯惡已(사악이). 皆知善之爲善(개지선지위선) 斯不善已(사불선이). 故有無相生(고유무상생) 難易相成(난이상성) 長短相較(장단상교) 高下相傾(고하상경) 音聲相和(음성상화) 前後相隨(전후상수) 是以聖人處無爲之事(시이성인처무위지사) 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가지고 못 가짐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어렵고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 길고 짧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높고 낮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 악기 소리와 목소리도 서로의 관계에서 어울리는 것, 앞과 뒤도 서로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 따라서 성인은 무위로써 이를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한다. “ <도덕경 2>

 

하지만 늙은 사람이 살던 그 시기의 시간의 흐름은 행위와 현상을 위하는 목소리에 숨어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현상도 역시 생각의 그 기나긴 역사 속에서 잡히지 않고 보이기만 하는 현재를 이루기 위한 아니 그냥 흐름일 뿐일 것 같다.

2,500년전에 만물은 유전한다. Panta rhei! 라고 한 헤라클레이토스나 50년전에 "이것이 현실이다"하고 인정할 수 있는 "생각"이란 우리에게 존재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청담(靑潭)이 한말처럼 그냥 흐를 뿐이다.

 

우리는 아무도 구름의 아래위를 동시에 바랄 볼 수는 없다. 아무도 시간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시기에 어떤 사건은 동기가 있을지는 몰라도 목적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먼 훗날 생각의 역사에서 사라진 점에 불과할지 아니면 몇 쪽에 걸친 문자로 기억에 남을지 그런 것들이 그저 사람들의 부질없는 생각의 유희에 불과한 것일지 나는 모른다.

요즘은

不尙賢(불상현) 使民不爭(사민불쟁) 훌륭하다는 사람 떠받들지 말라. 사람들 사이에 다투는 일 없어질 것이다.

不貴難得之貨(불귀난득지화) 使民不爲盜(사민불위도): 귀중하다는 것 귀히 여기지 말라. 사람 사이에 훔치는 일 없어질 것이다. 不見可欲(불견가욕) 使民心不亂(사민심불란): 탐날 만한 것 보이지 말라. 사람의 마음 산란해지지 않을 것이다.” <도덕경 3>

()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이타성은 meme의 동기일까? 결과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