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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복론
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김의태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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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삶이 얼마나 길지 모르겠으나

덜 고통스럽고 싶고, 즐거운 상태가 더 길었으면 한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그런 것이다. 덜 고통스럽고, 즐거운 상태가 더 긴 것.


가톨릭의 수장이 전하는 행복에 이르는 길은 어떤 것일까.

사실 예상했던 내용과 아주 많이 다르지 않았다. 


이 책은 철학적인 담론이 담긴 책은 아니다.

행복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교황님의 강론의 일부들을 발췌해놓은 모음집이다.

그래서 짧은 글들의 모음집이고, 내용도 간결하고, 메시지는 축약되어 있다.


매일 잠시 시간을 내어 묵상을 할 때, 생각의 방향을 정하는 부표로 삼기에 적당한 글들이다. 끝까지 한 번에 읽을 필요도 없고, 소제목을 보고 발췌해서 읽거나, 끊어읽을 수도 있는 책이다.


한 페이지 정도되는 짧은 글들은 길잃은 어린 양들의 뒤에서 안전한 우리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려는 양치기의 잔소리 같다. 

"거기가 아니야. 저기 풀난 곳 쪽 방향! 맞아 거기! 아니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야 해. 저 마구간에서 나오는 불빛을 보고 가야 한다니까! 발밑에 있는 돌에 정신 팔리지 말고!!"


마구간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알지만 가는 길이 자꾸 헷갈리던 차에 뒤에서 들려오는 양치기님의 목소리만으로도 안심이 되고, 바른 방향을 되새길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다 받았다. 거저 받았으니 우리는 거저 주어야 한다."

그렇게 사랑하고, 쇄신하고, 더 좋은 것을 희망하면서 기뻐하면서 사는 방법에 대해 계속 말씀하신다.


나를 비우고, 



요즘 빠져있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에서 내가 사랑하는 귀여운 여우주인공이 토끼 주인공에게 하는 대사와 일맥상통한다. 

"No one else in the world matters more to me than you do."


여우 선생님은 행복을 향한 길을 찾은 것 같다. 

교황님 말씀이 무엇인지 이 귀여운 이야기에서 보이는 것만 같다. 

나도 여우선생님처럼 또 그녀의 토끼 파트너만큼 행복해져야지. 

내 이웃과, 내 가족들과, 또한 여기 모든 이들과 함께.

실수 할지라도, 위험을 감수하십시오. 무기력하게 근근이 살아가지 마십시오. - P123

행복해질 용기도 가지십시오. - P141

날 마다 여정의 첫걸음을 새롭게 해야 하고 첫 만남의 놀라움을 되살려야 합니다. ...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의 방법에 놀라워하도록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겸손함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 P186

사랑을 꿈꿀 때 특수 효과를 믿지 말고, 여러분 각자가 특별하다느 것을 깨달으십시오. 우리는 모두 선물이며 자신의 삶을 선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가족을 이루어 아이를 낳고 잘 키우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의 나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평생을 보내는 일을 꿈꿔 보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 P202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이 사실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 어떤 처지에 이더라도, 당신은 무한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 P351

기쁨은 만남의 무상함에서 생겨납니다. "너는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며 "너는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리고 나는 너를 믿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기쁨이 생겨납니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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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교회 우리의 교회 - 주님이 세우시고 우리가 일궈 가는 교회
손희송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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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주교님은 교회에 대한 신자들의 애증 섞인 마음을 달래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밉기도 곱기도 한 예수님의 신부, 교회는 점점 더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얻어맞고 있다. 그럼에도 미사가 이루어지는 교회의 중요성은 결코 약해지지 않는다는 점을 책 전체에서 강조한다. 더 많이 알고, 이해해서 더 사랑해달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심도있게 들어가지는 않지만, 교회사와 성서를 바탕으로 일반 신자들에게 딱 적당한 깊이로 설명해주시려고 한 점이 좋았다. 교회가 우리 신앙에서 어느 정도쯤에 위치하면 좋을지 차분하고, 담담히 설명해주신다. 나는 이런 교과서적인 느낌의 신앙서적이 잘 맞는가보다. 강론도 신앙서적도 가슴에 불꽃을 붙이려는듯한 분위기가 느껴지면 도망치고 싶어진다. 


교회.

하느님의 집이자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자칫 성전 봉헌 때까지 모두를 돈돈 거리게 만드는 빚 덩어리가 되기도 하고,

노동의 현장으로만 비쳐지기도 하며, 얄미운 사람들 때문에 문 열고 들어가기 싫어질 수도 있는 곳이다. 물리적 공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도 그렇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시고,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라는 점,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물리적 장소와 절차에 대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전승해오는 곳이다. 책은 이를 통해 '예수님의 신부' 혹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정당성을 설명한다.


"교회 제도는 단지 시대적 필요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원하신 것이다."

- P.39, 주님이 세우신 교회

"세례성사와 성체성사, 두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그분의 생명과 영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


교회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어서 받은 그대로 잘 지켜야하겠지만, 동시에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곳이기도 하다.


책은 우리가 매주 드리는 미사의 의미를 되새기며, 사제가 주재하는 미사를 교회에서 드리는 것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리고 평신도 봉사자와 수도자, 사제의 본분과 바람직한 태도가 무엇인지 되짚는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에서 유래한다. ... 동등한 푼위를 가진 성직자와 평신도가 자신의 신분에 맞게 각자 맡은 바에 충실하면서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는 교회가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한 '친교의 교회'이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시노드 교회'다."




잠잘 시간 먹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바삐 달렸던 어린 시절에는 성당에 오가는 시간조차 아까웠고, 그 곳에서의 봉사가 노동으로만 느껴져 짐스럽기도 했다. 가톨릭 교회의 부끄러운 역사를 보다 보면 이 모든 것이 한낱 인간의 욕망 덩어리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게 느껴진다.


내 몸을 이끌고 가면 항상 환영받을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안심이 된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일요일 11시에는 내가 알고 있는 방식과 내용으로 미사가 진행될 것이고, 그 사람들 무리에 어려움없이 섞여있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불안함이 많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래서 성당이라는 공간과 그 곳에 있는 인간 사회가 좋다. 

그리고 이 책으로 그 모양새가 지닌 의미를 알게 되니 더욱 좋았다.



교회는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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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힘 - 복음을 여는 레오 14세 교황의 10가지 단어
레오 14세 지음, 로렌조 파치니 엮음, 이재협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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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나처럼

평화가 모두와 함께 를 이미 읽었음에도

교황님 강론을 좀더 듣고 싶어서, 4개월 사이에 새로운 이야기가 더 있을까 싶어서 이 책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다른 책을 읽으셔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내용이 많이 겹친다.


교황님이 되시고, 1년간 대외 행사에서 하신 강론들을 엮은 것은 두 책이 같아서 결국 출처는 동일한 셈인데 이를 전문을 싣고, 교리해설과 같이 실은 책이 '평화가 모두와 함께'이고,

복음의 힘은 교황님의 사목활동에서 강조되는 10가지 키워드에 맞추어 강론들의 부분들을 발췌해놓은 책이다.


신자로서 좀더 접근하기 쉬운 것은 복음의 힘이다. 생활 중에 기억하거나 묵상하는데 필요한 좋은 '문장들'이 담겨 있어 기도 중에 떠올리기에 쉽다. 마지막 옮긴이의 글에 이재협 신부님이 남겨주신대로 "복음이 오늘 나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묻는 독자라면, 또 그 물음에 레오 14세 교황님의 답을 가까이에서 듣고 싶었던 독자라면 이 책은 더없이 좋은 동반자가 될 것이다."



관상은 우리의 교만을 잠재웁니다. <2장 마음> - P39

주님께서는 ... 자리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이 자리는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 P45

우리가 제대로 살아간다면, 시대도 올바른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우리 자신입니다. <3장 교회> - P54

교회는 도덕주의와 종교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믿음은 사랑의 시선에 대한 응답니다. - P56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각자의 삶을 간직한 채 서로 함께 걸어가도록 합시다. - P58

하느님께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7장 복음> - P113

이 조급함이 종종 연민을 가로막습니다. - P106

절망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 그 자체를 없애야 합니다. - P108

하느님께서는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용서합시다. "우리 본당과 공동체,단체와 운동, 곧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든지 자비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어야"합니다....연약함은 함께 살아갈 때 변화됩니다..
<8장 연약함> - P126

가장 큰 가난은 하느님이 필요 없다고 여기며 그분 없이 살아가려는 태도입니다.
...불의는 나눔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정의는 수고를 요구합니다...<9장 정의>

피조물에 대한 돌봄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참된 소명입니다... 환경은 우리의 정의를 요구합니다.<9장 정의>

우리가 내적으로 목마르고, 불안하며, 미완성된 존재라 느껴지고, 의미와 미래를 갈망하고 있음을 느낀다 해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는 병든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입니다! <10장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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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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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깝고도 낯선 땅 대만, 그곳에서 만난 우리의 야만

1970년대 대만의 시골 마을 '용징'. 그곳은 주류가 될 수 없었던 변두리 사람들의 거대한 무덤이다. 책을 읽으며 주인공 가족이 겪는 주변인으로서의 삶과 그들이 받는 대접이 우리나라의 그 시절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 경악했다. 대만의 근현대사가 한국의 역사와 이토록 겹친다는 사실을 나는 왜 이제껏 무지했을까.

주인공 집안의 다섯 딸은 이름도 비슷하고 중국식 발음도 낯설어 초반에는 인물 관계도를 메모해가며 읽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 아픈 사정이 이해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책장을 멈출 수 없었다. 도대체 톈홍은 왜 베를린에서 T를 죽여야만 했는가. 다른 딸들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그리고 평생을 가부장제의 폭력 속에서 한 많게 살아간 어머니 '아찬'은 왜 귀신으로도, 화자로도 등장하지 못하고 완전히 소멸해 버린 것인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추가되는 수수께끼들은 나를 용징의 한복판으로 끌고 들어갔다.

2. 용징의 귀신과 무진의 안개, 그리고 소외된 자들

처음에는 이 소설을 한국 문학의 고전 《무진기행》 속 '무진'처럼 음산한 분위기의 공간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묘사가 거듭될수록 용징은 전혀 음산한 도시가 아니었다. 그저 덜 계몽되고, 느리게 발전하는 평범한 농촌일 뿐이다. 대만의 경제 성장과 발맞추어 누군가는 성장의 단물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대적인 성장 속에서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소외되고 배격당한다. 그렇게 약하고 서러운 자들은 인간으로 살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문득 나의 유년 시절에 유독 처녀귀신 이야기나 학교괴담이 많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요즘 들어 그런 괴담들이 사그라진 이유가, 이제는 억울하고 한 맺힌 처녀와 학생들이 그 시절보다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3. 주류의 오만함과 문학의 경고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농촌 공동체에서 '여자' 혹은 '성소수자'로 태어나 산다는 것은 매 순간이 부조리다. 그 억압 속에서 인물들의 인격은 서서히 정상 궤도를 이탈해 파멸로 치달아간다. 그들을 그렇게 몰아세운 주류들의 폭력과 오만함은 역겨울 정도다. 셋째의 남편이 보여주는 뻔뻔함, 샤오왕의 거만함은 약자를 소모품처럼 다루는 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또한 어린 나이에 결혼한 며느리는 아직 형성 중이던 인격이 시어머니의 폭력 속에서 일그러져 간다. 이 모든 장면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공동체가 만들어낸 폭력의 결과다.

어릴 적의 나는 문학을 읽으며 ‘모든 주류들이 저렇게 못된 건 아니잖아. 왜 문학은 가진 자들을 이토록 악마화할까?’*라며 의문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사회 곳곳의 전장에서 승리자의 지위를 차지한 젊은이들이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악행을 어떻게 영웅화하는지 목도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전장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사건들은 아무리 이런 짓을 하는 자들이 소수라고 하여도 인간성에 대해 너무 큰 실망을 주는 사건이었다. 문학이 그려내는 권력의 야만성과 경고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어르신들이 넋두리하시듯이 현실은 때로 문학보다 더 잔인하다.

4. 나가며: 울타리는 언제든 나를 배제할 수 있다

이 소설의 귀신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이다. ‘아산’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반전은 그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사회가 만들어내는 울타리가 언제 나를 배제하고 둘러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항상 안전하게 울타리 '안'에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만이자 어리석음이다. 누구도 가여운 존재로 만들지 말아야겠다. 나 또한 언제든 울타리 밖의 '귀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대만의 천씨 집안 사람들의 기구한 팔자가 나에게 준 메시지였다. 그리고 산 귀신들과 죽은 귀신 모두 말한다. "울지 말라"고, 누구도 울타리 밖으로 내치지 말자. 그리고 울타리 밖에 있더라도 울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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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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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유난히 삶의 종결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책들에 손이 간다. 사순 시기에 이어 내게 찾아온 책은 밀란 쿤데라의 《불멸》이다.

1. 내 안의 아녜스와 로라: 더하기와 빼기의 싸움 

죽어 없어질 인간들이 마치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탐욕을 부리고, '영향력'이라는 이름의 불멸을 꿈꾸는 모습이 소설 내내 이어진다. 그 어리석음이 민망할 지경이지만, 내 안에도 아녜스, 로라, 폴, 그리고 아베나리우스의 모습이 들어앉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성당에서, 집에서, 회사에서, 그리고 소셜미디어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덧입히며 '더하기로 자아를 부풀리는' 로라가 된다. 그러다가도 한편으론 타인의 모든 평가를 거부하고 조용히 소멸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카카오톡에 생일 알림이 떴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비공개로 돌리고, 차를 고를 때면 무조건 검정이나 회색을 골라야 안심하는 나는 철저히 '뺄셈으로 자아를 지워가는' 아녜스이기도 하다. 이들이 벌이는 난리 속에서 마치 대속하는 어린양을 보듯, 내 안의 불멸을 향한 욕망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2. 거장의 '명대사 차력쇼'와 인권의 역설 

민음사 TV에서 이 책은 기억할 만한 문장이 많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스스로 거장임을 아는 대가가 우매한 민중에게 깨달음을 하사하려는 강한 열망이 느껴진다. 좋게 말하면 인간성에 대해 뼈아픈 고찰을 하게 만들고, 비뚤게 보자면 "이 노인네, 왜 이렇게 잘난 척이야?"라는 불만이 나올 법도 하다.

"인권을 위한 투쟁은 대중화될수록 점점 구체적인 내용을 상실한 채, 결국 만인에 대한 만인의 공통된 태도가 되었고, 모든 욕구를 권리로 바꿔놓는 일종의 에너지가 되어 버렸다."

불법 주차 단속을 피하려고 ‘도심에 차를 끌고 나올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브리지트의 모습에서 이 구절은 나온다. 줄거리의 핵심은 아니지만, 내게는 이 장면이 가장 오래 남았다.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할 가치라고 믿어온 것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손쉽게 휘청이는지, 그 현실을 요즘 계속 목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권이라는 불멸의 가치가 개인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공허한 수사로 변질된 모습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폴의 그 '가벼운 진지함'은 민망해진 내 속내를 사정없이 헤집어 놓는다. 사십 대에 접어든 나 역시, 브리지트 같은 젊은이들에게 인정받음으로써 나의 소멸을 조금이라도 유예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그 비겁한 욕심을 들킨 것 같아 마음이 쓰라렸다.



3. 메아리 없는 소멸을 꿈꾸며

"자기 뒤에 메아리를 끌며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나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 의해 해석되고 이미지화된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서 왜곡과 오해는 필연적이다. 100% 순도의 이해란 불가능하다. 메아리처럼, 귀신처럼 남느니 차라리 완전히 사라지고 싶다.

그런데 정작 550페이지가 넘는 소설에서 문장 차력쇼를 펼치신 쿤데라 님은 이 수많은 메아리를 남기고 얼마나 불쾌해지려 하신 걸까?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난다. 자유로워지고 싶어 완전히 잊히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완전한 소멸이 두려운 이 모순.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               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존재,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샘으로, 온               우주가 따뜻한 비처럼 내려와 들어가는 돌 수반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문득 내 수호성인인 페르마의 성녀 소피아를 생각한다. 동정녀이자 순교자라는 성스러운 타이틀을 가졌지만, 그 외의 기록은 전무하다. 생몰년도, 어록, 행적조차 남지 않았다. 와, 정말 딱 좋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남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이 또한 결국 나의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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