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국내 출간 30주년 기념 특별판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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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원한 회귀는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9)“네가 너의 삶을 살고자 원하느냐? 그런데 너의 삶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처럼 무거운 인식이 없다. 니체의 철학이 정말 어려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삶을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더라도 너무 무겁게 대하지는 말라는 의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철학적 사상으로 시작해서 역사의 시간과 개인의 시간, 철학적 명제 등이 서술되어 읽는 이에게 당혹감과 호기심을 선사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밀란 쿤데라의 조국 체코의 68년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치, 혁명, 이데올로기 등 무거운 것들에 비해 인간 개개인의 삶이란 얼마나 가볍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인가. 그는 소설에서 지식인들이 겪는 수난과 좌절,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을 가벼움과 무거움을 빗대어 역사 그 자체보다는 역사의 수면 밑에서 움직이는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육체와 영혼, 집단과 개체, 삶의 의미와 무의미,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우연과 운명 등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곳곳에서 번뜩인다.
토마시 ‘ 가벼움속의 무거움’, 테레자 ‘무거움 속의 욕망’, 사비나 ‘배반된 세계를 갈망하는’, 프란츠 ‘무거움에 던져진 실존’. 소설 속의 4명의 등장인물의 삶을 보고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해 본다. 개인의 삶 속에 내재 된 가벼움과 무거움을 철학적이고 문학적으로 표현한 생존 작가의 작품은 이 소설일 것이다,

1

“아빠, 연산이 너무 싫어, 단순 반복 계산만 하잖아?” 딸이 나에게 초등 수학 연산을 매일 하면서 한숨을 쉬며 불평을 늘어 놓는다. 딸은 4년째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단순하게 계산기처럼 계산만 무한 반복한다. 동일한 것의 반복, 반복된 연산이 딸에게 무거움으로 작용했다. 익히고 배워야 할 학습에는 무언가의 새로움은 전혀 없었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9) 소설 속에서도 현재 겪고 있는 생이 동일하게 무한히 반복되는 것에 의문을 품는다.
연산을 무한히 반복하면서 엄마에게 못한 말을 용기 내어 말한다. “연산, 그만하고 싶어.” 순간 정적이 흐른 후 나는 말했다. “그만하자.”
우리는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떠올릴 때가 있다. 놀이나 일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묻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놀이나 일이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계속해서 그 놀이나 일을 해야 할 때이다.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나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다.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무거움으로 느껴질 때이다. 딸은 연산을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면서 ‘왜 이 짐을 짊어져야 하지?“라고 묻게 된 것이다. 동일한 것의 재미없는 반복, 딸에게는 연산이 무거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연산을 그만 시켰지만 연산을 다른 방식으로 변화 시켜 놀이로서 만들어 보도록 했다. 곱셈, 나눗셈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 낸 문제집을 채택해 연산의 무거움을 보완해 나갔다. 니체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말하며, “영원히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으며, 생성과 소멸의 운동만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것이 영원회귀의 세계상이라고 설파했다. 수학 문제를 풀어내는 형식을 변경해 수학이 무겁지 않도록 생성했고, 이전 형식을 소멸 시켰다. 수학 공부 방식의 생성과 소멸을 통해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변용했다. 또한 딸은 긍정하며 수학문제를 풀어 나가고 있다. 그만하고 싶다며 용기를 내어 준 딸에게도 고맙다.

2

만약, 토마시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베토벤의 4중주를 몰랐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토마시에게 <오이디푸스>는 그의 삶에 결정적 무거움을 선사한다. 폴리보스가 아기 오이디푸스를 줍지 않았다면, 소포클레스는 그의 가장 아름다은 비극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토마시가 <오이디푸스>를 읽지 않았으면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는 테레자를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버려진 아기로 생각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336)
“토마시는 영혼의 순수함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의들이 악쓰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의 무지 탓에 이 나라는 향후 몇세기 동안 자유를 상실했는데 자신이 결백하다고 소리칠 수 있나요? 자, 당신 주위를 돌아보셨나요? 참담함을 느끼지 않나요? 당신에겐 그것을 돌아볼 논이 없는지도 모르죠! 아직도 눈이 남았있다면 그것을 뽑아 버리고 테베를 떠나시오.”(289) 토마시는 체코 작자 동맹이 발간하는 주간지에 글을 투고한다. 오이디푸스가 죽인 사람이 아버지이고 동침을 나누었던 여자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고 눈을 찌르고 테베를 떠낫듯이 체코의 공산주의자들을 위와 같이 표현하며 지식인의 변절을 적나라게 표현했다. 자신이 투고했던 글 때문에 그는 결국 의사의 그만두고 프라하를 떠나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토마시에게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토마시는 ‘에로틱한 우정’을 나누기를 선호했고 구속되는 삶을 싫어했다. 하지만“여섯 우연의 소산인 그녀, 외과 과장의 좌골신경통에서 태어난 꽃 한 송이, 모든 ‘es muss sein!‘의 피안(彼岸)에 있던 그녀, 유일하게 그가 진정으로 애착을 갖는 그녀“가 되었다. (353) “그를 필연으로 내몬 것은 우연도, 외과 과정의 관절염도 아니며 외부에서 유래한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314) 또한, 토마시가 의학에 이끌린 것은 가슴속 깊이 뿌리내린 이 ‘es muss sein!’이었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끌어당김은 6번의 하찮은 우연의 연속 때문이고, 그 우연은 더 이상 빠져 나갈수 없는 필연으로 변했다. 의사라는 직업도 그러했다. 삶은 우연의 우연을 통해 이어지고 동일한 우연이 같은 시간 동안 일어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우연의 마주침에서 토마시는 하필이면 2번의 필연이 그를 무거움의 소용돌이로 들어가게 했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357) 결국 선택 이후의 결과에 따라 좋은 선택인지 알 수 있다.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행위의 과정에서 의미를 부여를 통해 결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임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리스본행 야간열차> (116) 인간은 우연의 사건에 ‘es muss sein!’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필연으로 우연의 사건을 필연으로 만든다. 필연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며 후회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우연은 우리를 삶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토마시는 테레자와의 6번의 우연이 그의 삶을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옮겼다. 생의 마지막에는 농촌 전원생활을 하면서 테레자를 만나기전의 가벼움과 다른 가벼움으로 삶을 마무리하고 있다. 생의 마지막 가벼움을 단순한 가벼움으로 말하고 싶다.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중략)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506) 이곳은 테레자와 카레닌이 그와 함께한 행복이고, 자신이 어떤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 일을 했다. 그는 내면적 ”es muss sein!“에 의해 인도되지 않은 직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이다.

3

전통적으로 서구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영혼(정신)과 신체(육체)로 나누어서 이해해왔다. 그들은 영혼에는 불명성과 완전성의 지위를, 신체에는 유한성과 불완전성의 지위를 부여했다. 영혼과 신체에 대한 그들의 비유를 보고 있으면, 영혼은 마치 하늘에서 죄를 짓고 지상에 내려왔다 깨달음을 얻어 다시 천국으로 돌아갈 고뒤한 운명의 존재이고, 신체는 영혼으로부터 생명력을 잠시 얻었지만 영혼이 떠나자마자 다시 대지로 돌아가야 하는 천한 운명의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에서 데카르트, 그리그 현대 의학에 이르기까지 영혼과 신체는 철학자와 과학자의 오랜 관심사였다. 물론 아직까지 합의된 결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가 키스를 했을 때, 그녀의 입술은 호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성기가 젖어 있는 것을 느끼고 그녀는 당황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흥분했고 그 때문에 흥분이 더욱 고조된 것을 느꼈다. 254
“그녀는 처음으로 그녀 눈에 비친 육체에 매료되었다. 그녀 육체의 개성, 흉내 낼 수 없는 단일성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모든 육체들 중에서 가장 범상한 것(지금까지 그녀는 그렇게 보아 왔다)이 아니라 가장 비범한 육체였다.” (254)
“두뇌 속 시계 장치에는 반대 방향으로 도는 톱니바퀴가 두 개 있다. 하나에는 눈이 있고, 다른 쪽에는 육체 반응이 있다. 나체 여자를 보는 시작이 새겨진 톱니는 발기 명령이 새겨진 반대편 톱니와 맞물려 있다.” (379) 남성들의 내 의지와 관계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신체,
영혼과 육체를 둘러싼 논란은 앞서 말했듯이 오랜 관심사이다.
테레자가 신체에서 느꼈던 것은 영혼과 신체의 별개의 것이라는 이원론(Dualism)과 하나라는 일원론(Monism) 중 무엇일까? 화자는 또 하나의 예화를 제시한다. 니체의 토리노의 말이다.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중략)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471) 데카르트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사유하는 것’과 ‘공간을 차지하는 것’, 즉 정신과 신체라는 두 실체로 나누어진다. 정신은 주체적, 능동적으로 활동하지만 물질은 기계적 인과 법칙에 따른다. “그는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름 아닌 그가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는 사실에는 필경 심오한 물리적 일관성이 있다. 인간은 소유자이자 주인인 반면, 동물은 자동인형, 움직이는 기계, 즉 Machina Animata에 불과하다고 데카르트는 말한다.”(468)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에 따라 인간 역시 ’생각하는 주관으로서의 정신과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몸‘을 가진 이원적 존재로 파악했다. 신체가 기계와 같이 같은 작용을 한다고 보면서 동시에 정신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송과선이라는 작은 부위를 통해 정신과 신체가 상호작용한다고 여겼다. 영혼이 신체를 지배한다는 생각이었다.
테레자는 기술자와의 정사를 보내면서 영혼의 문제를 깨달았다. 신체는 그녀의 영혼이 아니라 오로지 그녀의 신체임을 깨달았다. 신체는 그녀를 배신했다. 근대까지 지배했던 영혼과 신체의 세계관을 테레자와 니체는 거부했다.


4
소설의 또 다른 남성 주인공, 프란츠는 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에서 사는 몽상가이다. 그는 사비나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어 소련의 제국주의가 침략한 캄보디아까지 이끌려왔다. 그에게 비친 사비나는 하나의 ’키치‘이자 무거움이었다. “키치의 원천은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다. 하지만 존재의 근거는 어떤 것일까? 신? 인류? 투쟁? 사랑? 남자? 여자? 여기에 대해선 각양각색의 의견이 있으며 또한 각양각색의 키치도 있게 마련이다.” (417) 프란츠에게 ’키치‘는 대장정을 위한 신념이었다. “프란츠가 미치도록 좋아했던 대장정이라는 개념은 모든 시대와 모든 성향의 좌익 인사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정치적 키치였다. 대장정이란 멋진 전진, 장정이 대장정이기 위해서 필요했던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우정, 평동, 정의, 행복을 향해 멀리 나아가는 노정이었다.”(417) 키치는 사회 집단에 있어서 사상, 행동, 생활 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를 말한다. 키치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제약하는 체계이기에 오히려 더 맹목적이고 위험히며 무거움으로 대변될 수 있다.
“강한 신념이야말로 거짓말보다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신념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신념은 말 그대로 ’굳게 믿는 마음‘으로 굳게 믿기에 쉽게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신념은 무엇인가를 향하게 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엇인가를 놓치게도 만드는 양날의 검이다. 사람이 키치를 갖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415) 생각의 체계가 키치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스탈린 아들의 똥에 관련한 예화는 ’똥‘을 가벼움의 상징으로 나타낸다.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399) 키치는 무겁고 폐쇄적이다. 원래 목적을 훼손한다는 의미에서 자기 파괴적이기도 하다. 키치가 전체주의나 군중심리와 결합하면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된다. 인간은 이런 과정을 통해 초래된 비극을 드물지 않게 목격했다. 키치를 갖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키치는 절대적 신념이 아니다. 역사적, 사회적 입장을 반영한 사상과 의식체계일 뿐이다. 따라서 절대적이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프란츠는 대장정으로 일컫어 지는 키치의 무거움에 던져진 실존이다.니체의 주장처럼 때로는 신념이 거짓말보다 더한 진리의 적이 되어 죽음으로 이르게 된다. 소설 속의 프란츠를 보며 삶에서 나의 키치는 무엇이고 그것으로 인한 삶의 무거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결국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단 하나의 믿음은 경계해야 한다.

5
소설 속에 가벼움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여자 주인공 사비나. 그녀는 자신의 세계관으로 삶을 펼치고 삶을 예술로 만드는 사람이다.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156) 그녀는 배신을 즐기고 배신을 삶의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실존이다. 1968년 ’프하라의 봄‘의 시기의 여성의 삶이 순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경제적 자립과 예술적 독립 공간을 가진 주체적 여성이다. 그녀는 키치를 경멸했다. “키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은 삶으로부터 추방당하기 때문이다.”(407)
그녀의 예술세계는 기존 관념이나 전통을 부정하는 다다이즘과 닮았다. '다다이즘(dadaism)'은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말부터 프랑스, 독일, 스위스, 미국의 미술가와 작가들이 본능ㆍ자발성ㆍ불합리성을 강조하면서 기존의 관습적인 예술에 반발한 종합예술운동이다. 사비나는 자기 그림의 의미를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 명명했다. 다다이즘의 작품 중 하나인 '게오르게 그로스'의 사진를 보면, 게오르게 그로스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미술 비평가를 뜻한다. 작품에서 비평가의 눈과 입은 대충 그린 종이로 덮여 있는데, 이는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이다. 비평가 목 뒤의 지폐조각은 작품의 비평가가 돈을 밝힌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비평가가 들고 있는 창의 모습을 한 연필은 그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사비나의 세계와 유사한 작품이다. 다다이즘의 '다다'란 원래 프랑스어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다다이즘에서는 다다이즘의 본질인 무의미함을 뜻하는 단어이다. 무의미함과 가벼움은 일맥상통 하지 않는가. 사비나의 배반된 세계는 무의미이자 가벼움, 아름다움이다.
“지금까지는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뜨게 했고, 그녀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배반의 모험이 펼쳐지는 즐거움을 그녀의 가슴에 가득 채워 주곤 했다.사비나는 그녀를 둘러싼 공허를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허가 그녀가 벌인 모든 배신의 목표였다면?”(202) 배반은 그녀에게 새로움과 즐거움을 주었다. 하지만 배반된 세계에 남아 있는 것은 공허의 상태이다. 그녀가 말한 ‘공허의 상태‘는 무엇일까? ’가벼움‘이다. 사비나는 키치를 부정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벗어나는 것을 즐겼다. 만약 그녀가 키치를 수용하고 사람들과 지속적 관계를 가졌으면 그녀의 성향상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무거움‘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무너지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결여된 상태를 두고 니힐리즘(허무주의)이라 명명하며, 이러한 니힐리즘의 상태야말로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가장 큰 고통이라고 했다. 나는 사비나의 공허의 상태를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국은 죽는 ’니힐리즘‘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동묘지를 거닐며 죽음이라는 필연 앞에서 사색하는 예술가이다. 인상에 남는 등장인물이 있다. 활자를 읽으면서는 토마시였다. 하지만 활자를 쓰면서 인상에 남는 인물은 사비나였다. 소설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인물은 사비나 뿐이다. 테레자와 토마시는 무거움의 분위기 속에서 죽었다. 프찬츠 또한 무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사비나는 배반의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찌보면 가벼움이 삶의 생성과 변화, 소멸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니체의 춤추추는 자는 가벼운 자이고 어린아이처럼 노는 아무런 목표나 의미 없이 기쁨 속에서 파괴와 창조를 거듭하는 ’디오니소스‘가 아닐까.

6
밀란 쿤데라가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4인의 주요 등장인물과 카레닌 그리고 국가, 전쟁, 똥 등 가벼움과 무거움일 것이다. 이 소설을 덮으며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어떤 문장으로 표현할지를 생각해 본다. 한 문장은 “einmal ist keinmal, 한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358)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사형선고를 받는다. 삶은 단 한번 쁜 유일회성을 갖는다. 이 순간은 아름답다. 이 순간은 우연의 시작이다. 하지만 죽음은 필연이다. 우리는 가벼움으로 태어나서 무거움으로 일생을 마친다. 이 소설은 니체의 철학적 식견으로 쓰인 작품이다. 그만큼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니체적으로 표현해 주었다. 주요 등장인물 4명 중 3명은 무거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테레자의 반려견 카레닌도 죽음을 맞이했다. 니체는 죽음의 고통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또렷하게 깨어 있는 정신으로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삶을 긍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자고 했다. 그는 또한 그가 보기에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가장 경멸할 만한 조건들 아래에서의 죽음이며, 자유롭지 않은 죽음, 제때에 죽지 않는 죽음, 비겁한 자의 죽음”이라 했다. 니체는 삶을 사랑하는 자라면 자유로우면서도 의식적으로 죽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해 당당해지려면 삶 앞에서도 당당해야 한다. ’einmal ist keinmal‘ 내 삶은 단 한 번뿐이다. 매일 이어지는 우연 속에서 당당히 순간을 긍정하고 삶을 사랑하자. 아모르 파티(Amor 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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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 문서정 소설집
문서정 지음 / 강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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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문서정, 강,2020

소설 <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화자인 ‘나’와 친구들이 ‘S의 눈물’을 매개체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난 ‘S’와 ‘나’ 그리고 친구들. 대학 졸업 이후 친구 ‘K’의 장례식에서 ‘S’를 다시 만나게 된다. 장례식장에서 ‘나’와 남자 친구들은 ‘S’의 눈물과 관련 이야기를 쏟아낸다. ‘S의 눈물’은 소설의 매개체이다. ‘S’의 눈물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가 ‘S’의 눈물을 소설의 제목으로 설정한 것처럼 ‘S’의 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sein,be)와 존재자(존재하는 것,seiendes,is-ness)를 구별했다. 철학은 존재자만을 사유할 뿐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다며 존재는 존재에 입각해서 사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존재(sein)란 어떤 것의 존재, ‘있음’을 의미했고, 존재자(seiendes)란 존재하는 ‘그 무엇’,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는 어떤 것, 존재자였고, 존재자는 단지 주어져 있을 뿐, 무엇을 설명하든지 결국은 우연한 것 이상으로 나갈 수 없었다. 소설은 ‘S’의 눈물에 대한 의미보다는 ‘S’가 눈물을 흘리는 상황을 주로 묘사한다. 동아리에서 아무말 못하고 눈물을 보이는 일, 술값을 못내 모두가 안절부절 했지만 ‘S’의 눈물로 인해 외상으로 처리한 일 등이다. ‘S’의 눈물에 대해 화자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야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물론 전부를 다 안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예전에 수시로 흘렸던 모호한 눈물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는 말이다.” (P101) 눈물은 그 무엇의 존재자이다. 화자 ‘나’는 눈물의 ’존재‘(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눈물이라는 물질이 아닌 ‘눈물’이라는 물질의 ‘존재’라는 점을 이해한다. 눈물의 의미를 파악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작품 <구두>에서 ‘존재자’와 ‘존재’는 다르다고 했다. 고흐의 구두가 바로 구두 주인의 삶의 궤적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본다. 구두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그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할 뿐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구두의 존재란 어느 누군가가 실제로 신고 다닐 때 발생하는 사건과도 같은 것이다. 고흐의 <구두>는 고단하지만 소박한 농촌의 삶을 묘사한 것으로 설명했다. S가 근무하는 병원 장례식장에서 흘린 눈물은 그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었다, 하이데거가 말한 ‘있음’에 대한 물음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불편했던 점이 있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난 ‘S’와 친구들. 대학교 졸업 후 장례식장에서 S를 마주치고 서로가 S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두들 S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 아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들이 고작 아는 건 그녀가 시시때때로 잘 우는 여자라는 것뿐이었다.”(P88) ‘누군가를 안다는 것’에 관한 물음이 생긴다. 류시화 시인은 ‘누군가를 아는 것’에 대한 물음에 관하여 알한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북인도 바라나시를 여행하며 즐겨 마시는 짜이(인도식 밀크티)를 끊여 파는 노인이 있다. 노인의 차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차이다. 어느 날 시인은 우연히 노인이 주전자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 재빨리 갠지스 강물을 떠오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동안 마신 짜이가 더러운 강물로 끓인 것이었다. 이후 노인이 권하는 짜이를 거절할 수 없어서 차라리 그곳에 가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냥 재빨리 지나치거나 외면하면서 다른 가트로 걸어가곤 했으며, 노인은 갑자기 멀어진 나를 서운하게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좋아한 장소를 잃은 아쉬움이 컸다. 어느 해 겨울 다시 바라나시에 갔다. 이른아침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고, 노인과 마주쳤다. 노인은 반갑게 포옹까지 하면서 "언제 왔느냐? 얼마나 있을 거냐?" 물으며 짜이를 권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갠지스 강물 짜이 한 잔에 죽진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계단에 앉았다. 역시 그의 생강 짜이는 맛이 있었다. 혹시 내가 갠지스 강물 체질이 아닌가 생각하며 남은 짜이를 마시는 순간, 노인이 또다시 주전자를 들고 계단을 달려내려가 강물을 길어오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서 노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의 짜이를 좋아하고 이 장소가 좋긴 하지만 더러운 강물로 끓인 짜이까지 좋아할 순 없다고. 매우 비위생적이며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지 않느냐고. 그러자 노인은 강물로 짜이를 끓인 적이 없다며 펄쩍 뛰는 것이었다. 내 눈으로 분명히 목격했는데도 부인을 하니 인격이 의심스러웠다.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짓는 내게 노인은 계단 아래를 가리키며 그곳에 가서 확인해 보라고 했다. 영문을 몰라 하며 계단을 내려가서 살펴보니 강 바로 위쪽에 파이프가 있고 물이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십 미터 땅속에서 솟아나오는 지하수였다. 그런 지하수가 몇 군데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지역 사람들이 믿고 마시는 청정수였다. 수돗물은 낡고 부식된 수도관 때문에 신뢰하지 않는다고 노인은 말했다. 나쁜 물은 짜이 맛을 떨어뜨린다고.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갠지스 강변에서 짜이 장사를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인했다. 그들 모두 지하수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물로 짜이를 끓이진 않았다. 강 쪽에서 물을 떠오는 것을 보면 나처럼 외국인이나 외지인들이 강물로 짜이를 끓인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여행 안내 책자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고 했다. 이야기에서 ‘누군가를 안다 것’에 대한 소회를 밝힌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잘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일 때가 많다. 누군가를 안다고 믿지만, 그 사람을 향한 기대와 감정을 믿는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편견을 신뢰하는 것이다.” 나는 많은 관계 속에서 나만의 판단과 편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 한 일화에서 깨달았다. 상대방의 평판, 말, 행동으로 그 사람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대화를 했다. 상대는 굉장히 불편하다는 기색으로 지위의 우월함으로 ‘나’를 비난했다. 내가 알고 있던 인식의 ‘그’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태도가 ‘잘못되었을까’ 하고 주변 동료에도 물어보았다. 동료의 답은 기존의 나의 방식과 태도로 상대를 대했지만, 상대는 ‘우리가 알던 그’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상대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그’는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사람으로 내 편견과 판단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의 문제는 상대방에 대한 내 인식의 문제이다. 자기가 인식한 내용만 가지고 ‘ 이 사람은 분명 이런 사람이다’ 생각하며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상대방을 모르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해보자. 자신의 편견과 판단으로 상대를 지레 짐작하고 상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안에 각인된 상대를 지워야 하고 또한, 내안에 정형화된 나도 지워야 한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소설 속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고작 그녀를 잘 우는 여자일 뿐이다.” 우리는 과거의 모습과 얕은 인식으로 상대를 판단할 뿐이다. 이것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눈물을 담고 있는 S. S도 눈물을 거두거나 참는 경우가 있다. “울고 싶은데 말이야 마음 놓고 울 데가 있어야지. 집에서 아픈 딸애 앞에서 울까? 병원 사무실에서 울까?”(P100) 학부생 때, 동아리 모임이나 식당에서 잘도 울던 S. 그녀가 변했다. 눈물에도 상대방을 가려가며 나오는 것이다. 본인이 아끼는 딸과 사회적 관계가 있는 직장에서는 눈물을 삼키거나 참는 것이다. S는 왜 변했는가. 여성의 눈물은 있다. 모성(엄마역할)의 눈물과 사회적 역할의 눈물은 없다. 눈물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들에게는 눈물을 삼킨다. 누가 S의 눈물을 가져갔는가? 엄마와 직장인 S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불완전한 존재이고 ‘함께’라는 관계로 맺어지고 있다. 또한, 관계에서 제도 속 존재로 나아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관계와 제도에서 역할이 생긴다. S는 역할갈등으로 그들 앞에서 눈물을 삼킨다. 본인의 감정은 절제된다. 절제된 감정은 결국 쌓이고 앃인다. 소설에서는 S의 이후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S를 보며 생각이 잠긴다. 역할갈등으로 무수히 삼킨 눈물들을. 앞으로도 숱한 사연으로 눈물을 삼키지 않을까. 그리고 역할에 따른 S의 눈물의 성격도 변했다. 화자가 본 마지막 장례식장에서 흘린 S의 눈물은 자본이었다. 그 동안 S가 보인 눈물과 결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무수한 역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역할에 따라 눈물의 성격도 변한다. 눈물을 삼키기도 한다. 눈물은 감정의 표현이다. 지금의 눈물들이 감정이 아닌 가치척도로 여겨지는게 씁씁하다. S님, 마지막 장면의 장례식의 눈물은 자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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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기억의 연대
<체르노빌의 아이들>, 히로세 다카시 ,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9 With
<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김은혜 옮김, 새잎, 2020 <체르노빌>, HBO,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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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황홀했다! 봄의 초원에 꽃이 폈고, 숲의 녹음은 부드러웠으며 봄 향기를 내뿜었다. 모든 것이 되살아나고, 자라며 노래하며.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바로 름아움과 두려움의 어울림이었다. 두려움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에서 두려움을 구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반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대였다. 죽음의 낯선 얼굴이었다(203).<체르노빌의 목소리> 체르노빌의 봄과 일상은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6분 이후로 일상의 시계는 멈추었다. 이후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로 피폭된 사람, 그들의 아이, 미래의 태어날 생명 모두 피폭 이전의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체르노빌레츠(원전 사고로 피폭된 사람)’로의 삶을 시작 하였다. 삶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변하지 않은 것은 인간의 고통뿐이었다. 5월이면 장미꽃이 만발했던 프리프야트에서 장미꽃 향이 가득한 정원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흘렀고, 그들은 삶과 자연의관객이 되었다. 르포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원전 피폭 이후 일상이 멈춰버린 체르노빌레츠의 이야기이고, 무기력하게 우리의 삶이 국가에 의해 짓밟힌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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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대가는 무엇일까요?” 미국 HBO의 5부작 <체르노빌>의 첫 대사이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거짓의 대가를 ‘체르노빌레츠’라는 용어로 알 수 있다. 누가 거짓을 말하는가. 누가 거짓을 믿었는가.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국가주의와 국가를 너무 믿어 벌어진 하나의 전체주의적 사고의 인재이다. ”발전소는 (중략) 착실히 진화작업을 진행중이라는 연락이 왔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길 바랍니다. 이곳에서 되돌아간 결사대원들은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열심히 임무에 충실하고 있습니다.(54) 국가는 온 힘을 다해 여러분을 도울 것이니, 앞일에 대한 불안일랑 떨쳐 버리고 당국의 지시대로 따라 줄 것을 거듭 당부하는 바입니다.(70) 사고 당시 소비에트 연방은 조지 오웰의 <1984>의 닮음꼴이었다. 소설은 전체주의의 어리석음을 고발한다. 소설 속에서는 오브라이언을 통해 “당이 진실이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든 진실이고, 당의 눈을 통해 보지 않고서는 실제를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당에 의해 국가 통제가 이루어졌다. 그들이 선전하는 것이 사실이었고 당원들은 믿었다. ”텔레비전을 켜니 고르바초프가 국민을 안심시키는 중이었다. (중략) 나는 믿었다. (중략) 우리는 믿는 데 익숙했다. (중략) 그게 당의 기강이었고, 나는 공산당원이기 때문이었다.(중략) 이런 믿음이 깨지면 많은 이들이 뇌졸중에 걸리거나 자살을 한다. 학자 레가소프처럼 심장에 총알을 박는다.“(279) 시민들은 국가를 믿었다. 원전 사고로 소방관과 군인들이 동원되었고 그들이 이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믿었다. 평화적 핵이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시민들은 정부에서 반복하는 ‘안전하다’라는 말을 믿었다. 사고 후에 맞이하는 메이데이를 경축함으로써 지금의 공포를 잊고자 노력했다“(143) 그들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바이오로봇(인간)이 되어 제대로 된 보호장비 없이 ‘핵을 삽으로 퍼는’ 기이한 일을 하였고, 국가는 그들에게 영웅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리고 원전 사태가 해결되어 가고 있다며 거짓 선동을 하였다. ”푸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하라고 하니 해야 되는 것이었다. 조국이 부르고 조국이 명령했다. 우리는 그런 민족이다“(270) 타냐가 말한 정말 이상한 나라였다. 공개 정책이라는 말을 전 세계에 선전하면서도 뒤로는 진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해 독일 한 사회학자는 출판 계획을 앞당겼다. 그는 21세기 사회를 ‘위험사회’라고 명명한 ‘울리히 벡’이다. 그가 책의 제목으로 삼은 위험사회란 위험이 중심으로 작용하는 사회이며 위험을 결정하기 위해 늘 점검해야 하는 사회다. 다가올 미래는 ‘안전’의 가치가 ‘평등’의 가치보다 중요해질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 위험은 지역과 계층에 관계없이 평준화가 되고 있어 “부에는 차별이 있지만 스모그에는 차별이 없다”고 했다. 그는 위험사회의 인자와 배경으로서 윤리성을 상실한 과학기술과 금용자본, 무절제한 환경 파괴, 억압당한 개인과 집단의 반발, 정보사회의 위험성 등을 지적했다. 21세기의 위험은 ‘danger’가 아니라 ‘risk’다. 자연재해나 전쟁 같은 불가항력 재난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인 환경과 결합되어 나타난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위험을 ‘생산된 위험’, 생산된 불확실성‘이라고 불렀다. 과학과 기술발전, 환경훼손, 경제사회 발전에 따른 의도되지 않은 부작용이거나, 별 위험이 아니지만 그 대처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이나 행동이 개입해 재앙이 되고 마는, ’인위적 위험‘이라는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무리한 원전 가동으로 인한 원자로 폭발로 일어난 ’인위적인 위험‘이다. 원전사고 당시의 당직자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생산한 위험이다. 그토록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은 인간의 잘못이었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 대한 대책으로 ’성찰적 근대‘를 말한다. 성찰적 근대란 위험을 포함한 모든 준비를 국가와 전문가만 독점하지 말고 시민들이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공론의 장을 만들어 해결에 동참하는 사회다. 지식과 과학기술 전 과정을 시민이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위험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정부와 시민과의 성실한 소통이다. 우리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가에서 발표하는 정보를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시스템에 따라 행동하여야 한다. 단, 정보제공은 거짓이 아닌 사실에 기반한 진실이어야 한다. 거짓의 대가는 참혹했다. 정부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서로 간에 어떤 위험을 참아낼 수 있는가, 어떤 위험을 우선 관리할 것인가’ 하는 합의를 도출하고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 해야한다. 진실의 대가는 최소한의 피해와 안전한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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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바로 저 폭발 때문에 생긴 거야. 그래, 난 절대 잊지 않겠어. 모든 것을 다 기억할 거야.(72) 이반 세로프는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인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잊지 않겠다고 한다. “원전 부근의 자연은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었고 체르노빌레츠은 고통을 받고 있다. 인재(人災)로 인한 사고는 당시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을 통해 기억하고 보존되어야 한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고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에 대한 책임소재를 밝히고 앞으로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대형 사건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은 정확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사후대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피해자 실태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사회불안을 낳고, 개인의 상처는 트라우마가 된다. “증언하고 싶다. 내 딸은 체르노빌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침묵하기를 원한다.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됐다고, 정보가 충분히 수집되지 않았다고 한다.(중략) 적어두었으면 한다. 당신들이라도 적어두었으면” <체르노빌의 목소리> 사건이 발생한 초기 국가권력에 의한 거짓 선동으로 체르노빌에서는 방사능 피폭이 있었다. 방사능 피폭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피폭된 주민, 현장에 투입된 인력, 과학자를 통해 이 사건의 참혹한 실상을 기록하고 보존했다.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재검토와 피해가 발생된 지역과 주민을 위한 안전장치가 마련되고 있다. 기억과 기록 그리고 보존의 힘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사고의 기억과 기록이 보존되어야 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국가권력에 의해 부서져 버린 이루진 못한 꿈을 기억하게 하는 사건이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 바다에서 대형 선박이 침몰한다. 이 사건으로 304명의 희생이 생겼고 그날 이후 그들의 꿈과 삶은 이어나가지 못했다. 이 사건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비슷한 맥락이 있다. 국가형 인재(人災)이다. 4월 16일 오전 10시 31분 세월호는 완전히 전복된다. 최초 사고 신고는 오전 8시 52분. 9시 30분 해경 헬기가 도착하고 주변 어선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선체가 침몰하기까지 1시간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배에 탑승해 있던 304명의 단원고 학생과 승객들은 구조되지 못했다. 세월호의 선장과 승무원들은 학생들을 안에 남겨두고, 그들만 탈출했다. 해경은 하선 유도 방송조차 하지 않았다. 총력을 다해 주조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도되었지만, 지휘체계도, 책임도 사라진 현장에서 모두 우왕좌왕하며 손을 놓고 있었다. 그날 국민들이 목격한 것은 국가 시스템의 몰락이자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국가 가치의 붕괴였다. 우리는 세월호 현장의 장면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그 기억을 누군가 지우려 했고, 지우려 할수록 음모론과 유언비어가 세상을 휩쓸었다. 상처는 상처대로 곪아 가고, 기억은 더 생생해 졌다. 사회는 잊을려고 했고 회복과 치유과정은 없었다. 모두가 아팠고 세상은 진실을 외면해 갔다. "흔적이 사라지면 기억에서 멀어집니다. 잊혀지는 순간 참사는 반복됩니다. 역사의 가르침입니다. 교실을 보존해야 합니다." <경기도 교육청 앞 피켓 中> 사건을 기억하고 보존하지 않으면 사건은 되풀이된다. 생생하고 절실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기록하고 보존 되어야 한다. “적어 두세요.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이해 못했지만 그렇게라도 남겨두세요. 누군가 읽고 이해하겠죠. 나중에, 우리가 죽은 후에.”(13) “기억도 우리가 사는 만큼 살 것이오(318) <체르노빌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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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진실을 파헤쳤던 핵물리학자 레가소프.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게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위험한 건 거짓을 계속 듣다 보면 진실을 보는 눈을 완전히 잃는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진실에 대한 일말의 희망마저 버리고 지어낸 이야기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체르노빌> HBO. 이 둘은 거짓의 위험성을 알린다. 거짓을 알기 위해서는 사실과 진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사실(fact)과 진실(true)은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럼, 언론이 보도하는 건 다 사실인가, 진실인가, 아니면 거기에 가까운 것인가? “내 딸은 체르노빌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우리가 침묵하기를 원한다.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됐다고, 정보가 충분히 수집되지 않았다고 한다.”(69) <체르노빌의 목소리> “이곳에서 내 이름은 이반 세로프가 아니고 미콜라 네드바이로래. 명부에 가짜 이름으로 씌어 있는 거지. 그러니까 날 만나려면 미콜라네드바이로를 찾아야 하는 거야. 정말 지독한 놈들이야” (130)
국어사전은 ‘사실’에 대해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 정의한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3호기 원자로 화재는 사실이다. 사고 당일 당직자 중 책임자 다를로프는 죽는 순간까지 본인의 잘못으로 원자로가 폭발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사고가 난 이후 핵물리학자 레가소프는 원자로의 폭파된 원인을 분석한다. 원인은 사고 발생 당일, 당직자의 무리한 원자로 가동이었다. 사실 뒤의 진실이 레가소프에 의해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다.
진실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거짓 없는 사실‘이다. 사실은 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 셜록 홈즈는 “명확한 사실만큼 기만적인 것은 없다” 어떤 사건이나 사안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판단해선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사실과 진실은 동일하지 않다. 사고 난 후 고르바초프는 TV 연설에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동무들,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냥 불이에요, 불. 걱정할거 없습니다. 아직 거기서 사람이 살면서 일하고 있어요.”(251)<체르노빌의 목소리> 국가를 신뢰해 달라고 했다. 언론에 나온 고르바초프의 말은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거짓이었다. 국가는 질병에 대한 모든 자료가 ‘기밀’ 또는 ‘고급 기밀’이라는 도장 아래 감추었다. 의학과 학문을 정치로 끌어들여 진실을 보는 눈을 잃도록 했다. 진실이 점점 피해 당사자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사실은 이미 무수히 존재했지만 사실 아닌 거짓이 존재했다. ‘사실이 밝혀진다’란 말은 쓰이지 않는다. 밝혀지는 건 사실이 아닌 진실이다. 시간이 지나 갈수록 체르노빌 사고는 진신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우리가 대적 해야 할 것은 진실이다. 진실을 위해 우리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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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수난이나 비극을 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신체적 어려움을 딛고 살아갈 의욕을 다지게 된다. “이네사, 어깨를 꽉 잡아, 그래도 정 걷기 힘들면..아냐, 당장 내 등에 업혀. 이반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이네사를 등에 업었다. 이반은 바람과 개울의 소곤거림을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네사는 등에 업힌 채 오빠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서 방향을 가르쳐 주었고, 타냐는 아들의 오른팔을 꼭 잡은 채 따라가고 있었다.”(96) 눈이 먼 이반이 다리가 불편한 이네사를 업고 가는 모습은 체르노빌의 아이들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특히, 이 장면은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서로의 신체적 불편함을 채워가며 힘들지만 원전에 피폭된 위태로운 현실을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것이다. 앞으로 체르노빌의 아이들이 살아가게 될 삶의 모습을 예견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과정이 험난하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사실에서 아이들의 삶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힘을 합하여 이 고난을 개척해 나갈지도 모른다. 체르노빌 아이들의 행복은 그 의미가 국가의 힘에 의해 규제된다. 국가가 앗아간 개인의 행복. 개인의 행복을 돌려줘야 한다, 국가의 구성은 사람이 함께하기에.


“아이들이 체르노빌을 그렸어. 그림 속 나무는 뿌리가 하늘을 향해있어. 강이 빨간색 아니면 노란색이야. 그렇게 그려 놓고 울었어 (298) <체르노빌의 목소리> “먼저 나온 아이들이 산다고 나간게 아니라 아이들 끌어올려주고 먼저 나온 아이들이 밀어주고 질서 지키면서 나와서 누구 한명 나올 때까지 계속 이름 부르고 그랬어요”<세월호 생존 아이의 증언> 4월은 봄을 여는 계절이자 T.S. 엘리엇이 노래한 잔인한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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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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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출간 이후 세계적인 고전이 되어버린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은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 후보가 되었지만 그 해 문학상은 알베르 카뮈에게 수여됐다. 사후 알베르 카뮈는 “카잔차키스야말로 나보다 백번은 더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다”며 그를 칭송했다. 실존주의자 카뮈가 그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는 것은 카잔차키스의 글쓰기는 실존의 글쓰기였다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뫼르소’와 그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를 비교해보면서 읽어보면 실존에 대한 그의 개성 있는 주인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니체의 사상을 만나것은 중요한 성장점이었다. <영혼의 자서전>에서 그는 “니체는 새로운 고뇌로 나를 살찌게 했고, 불운과 괴로움과 불확실성을 자부심으로 바꾸도록 가르쳤다”고 쓰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볼 수 있었다. 조르바는 영원한 자기창조와 영원한 자기파괴를 반복하는 디오니소스이며 선악의 저편에 있는 짜라투스트라다.

매력적인 이 소설은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탄생했다. 1917년 작가 카잔차키스는 고향인 크레타 섬에서 갈탄 사업을 벌였고, 당시 실제로 만나 함께 일했던 요르고스 조르바(1869~1941)가 바로 그 조르바다. 일종의 자전적인 소설인 셈이다. 소설 속 ‘나’, 조르바가 두목으로 부르는 젊은 청년이 카잔차키스다. 소설 속 나이마저 35세로 작가가 실제 조르바를 만난 때와 같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그의 고향인 크레타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고, 열정적이고 테스토스테론이 물씬 풍기는 두 남자 주인공의 우정, 사랑, 여행의 여정을 보았다.

자유는 현재를 사는 것이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보다 좀 길 거예요. 그것뿐이오.(중략)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중략) 당신한테는 무식이 좀 필요해요. 무식, 아시겠어요? 모든 걸 걸고 도박을 해야 합니다. (P427)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쇠사슬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존의 가치, 질서, 자본 등이 속한다. 조르바는 “두목은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줄을 자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머리가 힘이 센 두목은 항상 그 머리가 먼저 작동해 아주 좀상스러운 소매상이다. 앞에서 말한 쇠사슬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쇠사슬은 미래를 향한 길과 과거로부터 이어진 길이다. 머리로 사고하면 쇠사슬에 익숙해 진다. 두목, 아니 현대의 인간은 머리가 힘이 세다. 쇠사슬, 줄을 잘라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를 즐길려면 머리의 힘이 약해야 한다. 조르바는 쇠사슬을 끊어낸 자유인이다. 그는 과거, 미래 따위에 머리가 먼저 가지 않는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p389) 조르바는 이 순간에 충실하다. ‘내일은 달라지겠지, 내일은 조금 나아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을 살고 있지 않다. 머리가 중심이 되어 현재 아닌 미래를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은 매번 건너띤다. 내일이 되어도 현재는 없다. 오늘이 없다. 내일은 다시 모래를 본다. “미래를 향한 길과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길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두 모순이 만나는 곳에 바로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우리의 삶은 현재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만약 현재의 삶을 다시 태어나서 산다면, 다시 살 수 있을 것인가?”현재를 다시 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해본다. 지금의 대답은 ‘No’ 그럼, 다시 태어나서 지금의 삶을 다시 살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의 상황을 긍정하고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그러면 내 삶은 변할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삶을 살아싶을 것이다.

또 다른 자유, 인문정신

조르바는 인문정신이다. 조르바는 본인 그대로 날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기 이름에 걸맞은 스스로의 향기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강물은 어제의 강물과 다르듯이 어제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다. 조르바는 현재를 살며 자신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안 하려고 한다.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당당한 열정이 있다. 자신의 삶은 하나 밖에 없다는 소중함을 인식하고 자본이든 권력이든 여자든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조르바는 인문정신이다. 인문정신은 자기 자신을 되찾는 것이다. 자유정신인 것이다. 누가 나를 죽인다 해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매순간 죽음을 생각해요. 죽음을 보는 거지, 무서워하는 건 아니예요.”(p387) 두려움보다 내가 당당하게 사는데 “내가 죽는다고 해서 무슨상관인가. 그는 국가, 종교, 윤리 등에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렸다면 여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선택에 타인이 관여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삶을 살았다. 그의 자유는 조르바 그 자신의 고유명사인 인문정신이다.

운명을 사랑하면 춤을 춘다

갈탄광 사업의 핵심인 목재를 나르는 케이블이 실패한 후 조르바와 ‘나’는 해변에서 잘 익은 양고기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 조르바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춤이라고요, 두목? 정말 춤이라고 했소?”(P413) 조르바는 본인의 삶을 음악과 춤으로 표현하는 자이다. ‘나’는 ‘조르바’가 춤을 추는 모습만 보다가 갈탄광 사업의 실패 후 함께 춤을 추게 된 것이다. 그 때, 조르바의 춤에서 인간이 자신의 무게를 이기기 위해 펼치는 그 환상적인 몸부림이 처음으로 이해되었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게 된 짜라투스트라의 하산을 서술하면서 “그는 춤추는 자처럼 걷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춤을 춰본 사람들은 춤을 잘 추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이 가벼워하는 것을 안다. 어떻게 몸을 가볍게 만들 수 있을까. 조르바는 중력의 힘을 거스르듯이 몸이 가벼웠다. 일에 있어서는 두목에게 구속되어 있지만 삶 자체를 무겁게 만들지 않았다.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더라도 너무 무겁게 대하지 않았다. 자기 삶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삶의 움직임에 귀에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자기 육체와 영혼이 교감하게 된다… 자기 몸과 영혼이 소통하면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며, 욕망을 다스리고 질서를 세울 수 있게 된다. 삶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보다 행하게 된다.“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불과하다.” 조르바는 몸과 함께 영혼에도 먹을 것을 주라고 한다. 짜라투스트라처럼 몸과 영혼을 동일시 했다.

조르바의 말하기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피로 쓴 것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사유하며 깨달은 바를 글로 쓰는,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녹여 그 안에 자신의 넋을 담은 글을 말한다.”조르바의 말은 오롯이 그에게서 비롯된다. 그의 말은 그와 분리될 수 없다. 조르바의 말은 삶과 체험이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다. 온 세계를 그대로 겪어온 그의 말은 사람의 온기를 간직하고 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왔다. 우리는 살아내지 못한 글들, 머리로 짜낸 글들을 읽고 공부했다. 그가 말하는 것과 우리가 말하는 것의 차이가 크다.
좋아하는 인문학자 중 고전 인용을 잘하는 한 인문학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2할, 인용을 8할을 할 만큼 지식 소매상이다. 한창 인문학에 관심이 있을 때 그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들을 때마다 나는 지적으로 한층 성숙해 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용문을 외우고 주변에 활용할 때의 쾌감은 정말 좋았다. 인문학을 배울 때의 초기 증상이 나타났다. 그는 변치 않고 인용문을 소개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데 갑가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왜,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만 할까, 자신의 경험을 그럴싸한 문장으로 포장하는 지식 소매상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왜, 남의 말만 할까,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 하고 속으로 외쳤다. 결국 그는 자기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이 글을 쓰면서 인용과 그간 읽어왔던 텍스트 중심으로 써 내려가고 있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말, 조르바의 말하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는 이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땅이 되고 물이 되고 동물이 되고 신이 되어 살았다.(p198) 조르바는 자신의 심장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진인 대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위대한 환상가이자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살아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사물이 낯설고, 주변이 아닌 그 사람만 보이는 경험을 해 본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가는 길, 직장에 가는 길이 너무 익숙하여 도중에 마주치는 사물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사랑을 하는 순간 우리에게 낯설고 새로운 빛으로 다가온다. 나는 출근길 지하철 플랫폼에 섰을 때 익숙함이 아닌 낯설음과 호기심.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눈길도 주지 않던 그림도 응시한다. 지하철 플랫폼은 새로운 공간이 창조된다. 사물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 있다. 내가 변화함으로써 세계가 달라졌다. 이러한 경험을 지속하고 차츰 늘려가면 조르바의 말하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피의 말하기이자 창조의 말하기를.

만약 내가 조르바가 된다면

매달 중순이 회사에서 계획한 사업계획 진척도를 보여준다. 회사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한결같다. 회사가 바라는 것은 더 많은 화폐를 얻는 것이다. 화폐가 모든 가치의 척도이므로 더 많은 화폐를 얻는 것이 곧 더 많은 가치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열정적으로 화폐가치를 올리고 더 획득하기 위해 나와 주변을 채근하며 신나게 목표달성을 부르짖는다. 시장(고객이 있는 곳)은 가치가 규정되는 장소이다. 시장에서 회사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화폐와 교환될 수 있으냐가 중요하다. 이곳에서 사업계획을 달성해야 한다. 사업계획은 직장인의 모든 가치척도의 기준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행동한다.“행동의 가치는 어떤 보편적인 잣대(기업은 화폐)에 의해 정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행동이란 능력이나 지식, 욕망의 복합체로서, 그것이 구성되는 방식과 양상에 다라 가치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떤 효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만,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얼마나 많은 화폐를 획들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만 가치를 정한다. 자본주의에서 지배적인 유형의 행동이 된 노동은 바로‘화폐로 표현된 활동’, 다시 말해서 ‘상품화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생활 10년 이상이 되면 아래와 같은 고민을 한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부속품이 되어가는 나의 모습에 자괴감, 권력에의 의지 때문에 무참히 밟아 버리는 인간성 등. 회사의 기준이 나의 가치척도가 되어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조르바를 보며 생각해 본다. 회사의 굴레 벗어나고 싶은 강한 충동이 생긴다.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 살기 쉽지 않은 세상이라 충동적인 선택은 할 수 없다. 조르바도 두목의 갈탄광에서 임금을 받으며 일하지 않았는가.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 조르바나 ‘나’는 비슷한 상황이다. 조르바의 일과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지만.
우선, 나는 스스로 삶의 목표를 정하지도 못했다.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회사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믿고, 회사가 원하는 방식으로 화폐를 벌어들이기만 했다. 나는 점점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 가고 있다. 자본의 용어로 말하면 나의 노동력이 화폐의 가치로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의 절반 가까이 직장생활에 쓰고 있는데 자본의 가치가 떨어지니 이후의 상황은 예상할 수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기가치’를 만들지 못하고 ‘회사의 가치’만을 생산효율에 따라 재생산하고 있다. 조르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신, 만약 당신이 조르바가 된다면 직장생활 아니, 삶을 어떻게 사시겠소?”기존의 틀과 사고방식을 깨며 생산효율을 높여 봤지만, 틀에 벗어난 삶의 양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해보지 않았다. ‘정말, 조르바처럼 살 수 있을까’ 하는 주저함이 먼저 일어난다. 소설 속의 조르바의 일대기를 보면 , 조르바는 카사노바다. 나는 수줍음이 많다. 조르바는 몸의 반응속도가 빠르다. 나는 자본 사회의 교육을 받아와 머리와 먼저 간다. 조르바는 현재를 산다. 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과거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다. 조르바는 날 것 그대를 보여준다. 잃을게 없다. 나는 날 것 그대로 보여 주다가 된통 당한적이 수회 있다. 그리고 잃을게 많다. 잃을게 많다는 것은 책임질 일이 많아 선택을 즉각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술하다보니 난 조르바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읽으며 조르바의 삶을 분석했다. 짜라투스트라와 조르바는 닮은 사람이었고, 짜라투스트라가 말한 ‘위버멘쉬’가 현실에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으로 ‘짜라투스트라’의 잠언으로 마무리하고자 했다. “나는 너희에게 위버멘쉬(조르바)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아니었다.(니체 전문가는 동일한 인물로도 볼 수 있다) 조르바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보다 ‘내 삶이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산투르 연주만 봐도 알 수 있다.“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p24)“두목, 내가 이미 이야기하지 않았소? 산투르를 치려면 행복한 마음이 필요합니다.”(p426) 오르탕스 부인이 행복한 마음이 들 수 있도록 달콤한 거짓말도 한다.
내 삶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을 행복한 마음으로 했을 때의 자유.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미래에 대한 생각이 하지 않아 두렵지가 않다. 현재를 즐기기 때문이다. 좋아는 것을 하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 상태가 충만하기에 더욱 바라는 것이 없다.
작가의 묘비명“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행복한 마음으로 현재를 즐기면 무엇을 바라지도, 두렵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 자유로운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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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선집 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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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쓰기는 낯설다’
<일방통행로, 사유 이미지> 발터 벤야민, 길, 2007


‘일방통행로’에서 역주행한 경험은 운전자 중에는 누구나 경험하는 한 사건이다. 낯선길에서 시간에 쫓기면 우리는 목적지와 가까운 일방통행로로 접근한다. 교통질서 위반, 이와같이 글쓰기와 사유의 위반을 <<일방통행로>>에서 읽고 배울 수 있다. 도로 위 일방통행로를 역주행 하는 마음가짐으로 읽어 보기를 권한다. 그의 사유는 우리의 질서, 사유의 프레임을 걷어낸 지적 사유의 글쓰기, 일방통행로였다. 일방통행로에서의 생명의 아찔함이 아닌 사유의 아찔함. 낮설음과 글쓰기. 의심의 눈길, 예민함의 눈길,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닌 걷고, 사유하고 먹고, 마시고, 대화하고, 때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글쓰기. 일방통행로에는 사유의 발자국, 아사 라치스를 그리워하는 마음, 글쓰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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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과 사유의 쓰기가 생략된 우리

소화물 운송 및 포장 “나는 아침 일찍 마르세유를 지나 역으로 간다. 가는 도중에 내가 잘 알고 있는 장소들, 그리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장소들 혹은 흐릿하게만 기억나는 장소들을 마주치면서 그 도시는 손에 들려 있는 한권의 책이 된다. 나는 재빨리 몇 번인가 더 그 책을 들여다본다. 보관소에서 박스에 포장되어 언제 다시 이 책을 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일방통행로>> P140

벤야민은 파리의 거리인 마르세유를 지난다. 이른 아침, 그가 가는 목적지와 내가 가는 목적지는 목적성을 가진 장소일 것이다. 벤야민은 도시를 거닐며, 관찰하고, 사유하고 쓴다. 이른 아침, 나는 평일이면 가야 할 목적지에 가기 위해 도시를 걷는다. 목적지를 다다르기 전 수많은 직장인, 상점, 사물, 교통수단, 주변의 대화를 보고 듣는다. 새로운 것이나 특이한 것, 필요한 것을 보면 구글링으로 가격, 위치, 간단한 글을 읽는다. 기능적이고 단편적인 사고와 쓰기를 하고 있다. 관찰하고 사유하는 쓰기는 생략 되어 있다.
우리와 달리 벤야민의 지나간 흔적들은 기억되고 쓰기를 통해 이미지적 사유로 재창조 되었다. 도시의 풍경, 사물들이 익숙함을 떠나 낯설음으로 되살려지고 있다.
‘중국산 진품들’에서 읽기와 베껴 쓰기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텍스트를 읽은 사람은 새로운 풍경들을 알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자아의 움직임을 따라갈 뿐이지만, 텍스트를 베껴 쓰는 사람은 텍스트의 풍경들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일방통행로>> P77
도시와 책 속에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행위는 쓰기이다. 쓰기를 통해 나의 사유는 이전의 나와 달라진다.”말은 생각을 정복하지만 글은 그 생각을 지배한다.“<<일방통행로>> P100. 독창적인 사유를 갖기 위해서는 관찰의 글쓰기가 필요하다. 쓰기를 통해 사유는 다듬어지고 근육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이미지와 영상, 읽기에 길들여진 눈. 눈은 뇌가 보는 것이다. 뇌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펜을 들고 써야 한다. 쓰면 뇌를 지배하는 것이다. 쓰는 것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사유를 지배한다. 내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익숙함으로서의 거부, 낯설어지게 하는 힘

<<상대성 이론>>은 이번 생에서 이해가 어려워 읽지 못할 것이다. 문학의 상대성 이론에 비유되는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시작은 마르쉘이 마들렌과자를 먹다 과거를 떠올린다.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에 과거가 ‘이미지’로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가 섬광처럼 만나는 ‘순간’이다. 익숙한 것이 낯설어 지는 순간, 벤야민은 ”내가 개입할 수 없는 온전한 역사는 이미지로 보여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벤야민의 과거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은 역사의 파편들을 주워 담아 거기서 새로운 가치들을 발견하는 넝마주이를 하는 것이다. <<일방 통행로>> 역시 도시의 파편적인 사물, 길거리의 모습, 다양한 공간을 벤야민의 이미지적 사유로 풀어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은 우리 눈에 ‘있는 그대로’ 인식되기 보다는, 머릿속의 프레임(어떤 가치나 지식)에 의해 재해석된 모습으로 인식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건, 사고를 실제와는 다르게, 프레임에 갇혀 사물, 사건 등을 본다. 그의 책 속 글감인 ‘유실물 보관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낯설음이다. ”어떤 마을이나 도시를 처음 볼 때 그 모습이 형언할 수 없고 재현 불가능하게 보이는 까닭은, 그 풍경 속에 멂이 가까움과 아주 희한하게 결합하여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P120. 공명을 다른 용어로 지칭하면 울림이다. 멂이 가까움과 부딪쳐 되울려 나오는 현상으로 새로운 풍경(이미지)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순간의 낯설은 풍경(파편)을 벤야민은 글로 표현했다. 그의 글은 몽타주기법으로 작성되기도 했었다. 낯설음에서 ‘다르게 보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기존의 생각을 비틀고 분석도 해 보고 새로운 이미지로 변형도 해 보아야 한다. 나만의 독창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일상의 파편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사람과 사물의 매력은 낯설음에서 온다. 익숙함의 거부, 매력 포인트를 발견하는 것은 기존 프레임에 의해 재해석하는 모습을 거부하는 것이다.

벤야민적 글쓰기

지금 수집하고 정리하고 있는 단편적인 글들과 자료들이 언제 작품으로 모아질지 알 수 없고 언제 죽음이 비수처럼 자신에게 찾아올지 모르지만, 작가는 그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미완의 원고를 늘 지니고 있는 사람, 사소한 글 재료들과 콘텐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죽음이 자신을 멈추게 할 때까지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 벤야민은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작가라고 보는 듯하다. <<철학자의 글쓰기>> 황산, 북바북,P142~143
벤야민은 편집광적인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이 책을 보면 주유소, 우표, 세계 지도 등 일상생활을 하면서 접하는 소재거리로 다양하다. 지나가는 풍경을 파편의 이미지로 환원하여 본인만의 글쓰기로 만들어버린다. 작가의 창작 정신이 돋보인다. 그 창작의 시발점이 사소한 글 재료들과 콘텐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수 많은 글 재료들이 sns로 뱉어지고 있다. 글 재료는 몽환적, 지적, 편안함, 선동적이다.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들의 글 재료는 파편적인 한 장면을 설명한다. 사진과 그림처럼 눈에 선명하게 사유하고 쓰기로 전환된다.
계단주의,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산문을 작곡하는 음악의 단계, 그것을 짓는 건축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것을 엮는 직조의 단계가 그것이다. <<일방통행로>> P93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 세 단계가 소개되어 있다. 철학자의 시선으로 쓴 글이라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음악 – 건축 –직조, 글 재료를 모으기 위해 듣고, 감상하고, 배열, 배치를 한다. 씨줄과 날줄이 엮어져 옷감이 되듯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기 위한 작업은 계단을 오르면서 가지는 목적인식을 가지고, 오르고 난 후 내려오면서 전체를 조망하며 하나 하나의 문장를 퇴고하고 새로운 창작물로 만드는 작업이다. 음악이 흘러 나오는 카페에 앉아 사유하면서 쓰면 좋다. 단, 음악은 “피아노 연습곡 소리나 사람들이 일하면서 지르는 소리들은 유난히 고요한 밤의 정적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P99
글을 쓰기 위한 공간과 시간 확보, 필기구와 노트. 깊은 사유와 노트의 관리 그리고 매일 써라. 글을 써 보고 싶고 글을 쓰는 작가는 벤야민의 13가지 명제를 주의 깊게 볼 이유가 있다. 13가지를 하나씩 보면 그의 작가다운 프로의식을 알 수 있다. 이 중 나에게 해당되는 항목은 전혀없다. 글을 쓰지를 못하는 이유를 13가지 명제(P98~100)에서 알 수가 있었다. 명제 중 “글쓰기를 하루도 거르지 말라.”는 글을 쓰는 사람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항목이다. 3일전 페이스북에서 2명의 글쓰기를 보았다. 그들의 특징은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1인은 전문 작가였고 다른 1인은 에세이스트가 되고 싶은 젊은 주부였다. 두 분 모두 페이스북에 매일 글을 게재하고 있었다. 전문작가 한 분은 수 년째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글은 점점 깊이를 더해 가고 있었고 일상 소재의 글들은 독자의 공감을 쉽게 얻고 있었다. 그에 대해 알아보니 첫 출간한 책이 고전을 읽고 서평한 것이다. 이후 사회비평과 일상적인 글쓰기로 옮겨진 것이다. 깊이있는 글이 써 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분은 에세이스트를 꿈꾸는 젊은 주부였다. 일상 소재를 쉬운 단문으로 구성하여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글쓰기의 내공이 쌓이지 않으면 읽기 쉬운 글을 쓰기가 어렵다. 그녀의 내공은 매일 글쓰기로 보였다. 그녀의 페이북 글쓰기는 ‘매일 글을 쓰라’는 메세지를 주었다. 쓰다 보면 글쓰기가 늘 것이다. 단, 벤야민의 이말은 새겨야 한다. “어떠한 생각도 자기도 모른 채 흘려보내지 말 것이며, 외국인 등록 일을 담당하는 관청처럼 자신의 노트를 엄격히 관리 할 것.

‘아사 라치스의 거리’, 사유의 발자국

벤야민의 연인, 아사 라치스. 벤야민은 라치스를 바로크 비극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갔던 이탈리아 카프리 섬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 만난 라치스를 통해 파시즘의 ‘배경음악 속에서 ”급진적 공산주의의 현재성“에 대한 통찰들을 그녀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한다. 그가 야치스를 만날 때, 그는 자신을 찾아내고,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는 호기심이 가득찬 작가였다. 서로가 바라보는 세계와 지식, 생각을 교류하면서 사유의 폭과 깊이는 나날이 달라지고 있었다. 라치도 또한 그를 통해 <<혁명가의 직업>>을 펴내기도 했다. 지식과 경험에 대한 존중, 나아가 서로에 대한 존경이 두 눈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은 지식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며, 사랑은 합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사랑하는, 곧 나 자신을 주는 행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침투하는 행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아내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인간을 발견한다.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두 사람 모두 에리히 프롬이 말한 사랑의 행위, 합일의 경험을 하고 있다. 아쉽게도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최고의 관심이 유지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와의 교류에서 얻은 경험이 곳곳에 녹아 있는 <<일방통행로>>의 거리를, ”작자 속에서 이 거리를 뚫은“ 그녀의 이름을 따 ’아샤 라치스 거리‘라고 불렀다. 파리의 지명이 아닌 아사 야치스로 명명했다 그의 ’사유의 발자국‘은 책이 되었다. 지명, 사물, 상점, 관공서, 풍경, 어린아이, 도로 등 아사 라치스의 거리는 글의 소재가 되었다. 그는 이 거리를 걸으며 그녀를 회상하고 그녀의 사유를 복기하며 자신만의 사유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나만의 공간에서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읽기와 듣기 중심의 생활에서 글쓰기가 하고 싶어졌다. 쓰기란 작가의 영역이라 생각했다. 독자는 쓰여진 글을 열심히 잘 읽고 많은 책을 섭렵하면 되는 줄 알았다. 페이스북에 쓰여진 글을 보며 자극을 받았다. 주변(지인, 패북 친구)에 몇 분은 작가로 등단도 하셨다.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쓰고 싶다. 독자는 언젠가는 작가가 된다. 어느 거리를 걸으며 벤야민처럼 사유도 해 보고 싶다. 페북 친구들처럼 일상 속의 이야기도 써 볼려고 한다. 벤야민의 아사 라치스 거리처럼 나만의 공간에서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필기구(PC,노트,펜), 음악, 나만의 글쓰기 장소, 사유를 흘러 보내지 않도록 글을 써야 한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매일. 써 놓고 보니 다 미래형이다. 하지만 지금 쓰는 글은 현재형이다. 현재형으로 계속 남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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