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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비움 공부 - 비움을 알아간다는 것
조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1년 1월
평점 :
장자에 대하여
중국 최고의 학자를 꼽으라고 하면 누구를 뽑겠는가?
공자? 우리나라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공자를 최고의 학자로 꼽는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유교의 철학을 중요시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발생한 학문은 유교 외에도 여러 가지 학문이 있다. 단지 우리나라가 유교를 국가 철학으로 받아들이고 신봉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유교 외에도 다른 철학이 많은 것처럼 성인들 중에는 공자 말고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 도교로 대표되는 성인의 반열에 오른 두 사람이 있다. 바로 노자와 장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공자와 자주 비견되는 인물이 장자이다. 그 철학이 공자와는 너무나 상반되기 때문이다.
공자는 틀을 중요시했던 사람이었다. 프레임이 있고, 하늘이 있기에 땅이 존재하며, 모든 만물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 있고, 지켜야 할 도리가 있으며, 자신이 해야 하는 책무와 의무, 그리고 역할이 있다고 얘기했다. 내가 위치한 그 자리에서 충실할 것, 내가 현재 해야 하는 일을 할 것,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 것, 서로의 위치에서 규율과 의무를 다하면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다. 모두가 자신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얘기했다.
장자는 달랐다. 공자와는 너무도 다르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존재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얘기했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자신의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형상을 만들고, 존재하는 것처럼 바라보는 것이라고 여겼다. 잠을 자고 일어나 내가 나비꿈을 꾼 건지 나비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현재는 그리고 보이는 것은 보고 싶은 것일 수 있다고 얘기했다. 우리가, 그리고 공자가 틀이라고 부르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맞고 틀림의 얘기는 공자이다. 장자는 그런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름도 의미가 없는 상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며, 그것에는 이름도 형태도 주어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그것에 아무것도 없는 그것에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전부터 궁금했었다. 대략적인 관념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아직은 잘 모르는 장자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네이버에 찾아보니 장자의 설명이 너무 잘 돼있는 곳이 있었다. 장자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아래 링크의 글을 읽어보길 바란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39318&cid=47323&categoryId=47323
나의 삶은 나비의 꿈이 아닐지?
장자의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이다. '물아일체'의 사상이 너무 잘 드러난 글이다. 우리가 믿는 것, 그것이 바로 나를 만들 수 있다. 내 삶이 나비의 꿈이라고 믿으면 우리 삶은 어떻게 보일까?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지금 보이는 것처럼 보일까?라는 질문을 던져준다. 우리는 지금 보이는 것 이상의 것들을 만들어 보는 것일 수 있다. 보지 않아도 되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 우리의 사고 속에서 만들어 내어 그 안에 갇혀 사는 것일 수 있다. 어쩌면 힘들다고 생각하는 세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단지 내가 그 힘든 세상을 만들어낸 장본인일 수 있다. 내가 만들어낸 그 세상 속에 갇혀 존재하지도 않는 세상이 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옭아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힘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정말 힘든 상황인지 다시 한번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은 나비가 꿈을 꾸고 있는 그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꿈에서 깨어나면 힘든 꿈을 꾸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지나보니 있지도 않은 세상에 나를 옭아매 식은땀을 흘렸노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현재에 나를 매이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일 수도 있다. 내가 지금의 상황을 만들고 그 안에 나를 가두어 놓은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나비의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상이다.
몇 년을 살고 죽으면 호상인가? 90년? 80년? 70년? 60년? 이렇게 크게 보지 않는다면 85년은? 86년은 87년은? 88년은? 98년은 90년은?
호상은 없다. 잘 살다 간 것도 없다. 8백 년 산 팽조도 요절한 것이다. 일찍 죽은 아이도 오래 산 것이다. 호상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이름 붙인 것밖에 없다. 그마저도 따지기 시작하면 경계선도 없다. 그저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 약속에는 절대성은 없다. 상대성만 있을 뿐이다. 그 상대성은 옳고 그른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결정한 것일 뿐이다.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그 누구를 판단할 수는 없다. 판단이라는 것은 잣대가 필요하고 그 잣대는 판단을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잣대는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다. 100년 전에는 50살에 죽으면 호상이었다. 28청춘, 2X8인 16살이 꽃다운 나이였다. 지금은 미성년자일 뿐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것이 옳다고 아는 것은 어떻게 아는 것일까? 아는 것을 정의하기 이전에 모르는 것을 정의해야 한다. 맞는 것을 정의하기 이전에 좋아하는 것을 정의해야 한다.
오늘 나는 좋아하는 것을 하나 찾았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낸 것이다. 맞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만 존재할 수 있다.
겸손해라
오늘 내가 가진 것에 대해 뽐내지 마라. 누가 오늘 내가 가진 것에 모라란다고 얘기해도 노여워하지 말라. 내가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다면 내가 뽐내기 전에 그 사람이 나를 알아볼 것이다. 만일 누가 나에게 내가 가진 것이 모자란다고 한다면 감사히 여기고 그 사람이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더 정진하면 될 일이다. 자만하지도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말라. 우리는 그저 나아갈 뿐이다. 내가 더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사람에게 감사할 뿐이고 내가 가진 것을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 감사할 뿐이다. 아직 아무도 몰라준다면 나는 아직 더 배움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충분히 가지고 있다면 꽃이 벌을 부르듯 내가 세상을 부를 것이다.
마음을 크게 가져라. 무위를 실천하면 만물의 조화는 절로 이루어진다. 존재를 잊고, 지혜를 닫고, 주변 존재들을 의식하지 않으면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는다면, 만물은 절로 번성해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더욱이 돌아간 사실조차 깨닫지 못해야 차별이 없는 본래의 세계에 머물 수 있다. 하지만 만일 깨닫게 된다면 자연의 본성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알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으면 만물은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113p
산과 흙과 돌이 층층이 쌓여 생겨나고 시내가 합쳐져 강을 이루는 것이네.
사람의 경우에도 이와 다를 바 없어. 대인은 작은 일에도 성의를 다해 큰일을 이룬다네. 그러므로 대인은 자기의 주장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마음에 다짐한 바가 있어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무시하지 않는다네. 168p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마라
모든 일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작은 일이라도 성의를 다하지 않고, 큰일에만 성의를 다한다면 작은 일들이 문제가 될 것이고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언젠가부터 작은 일들을 할 기회조차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큰일을 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작은 일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큰일인 경우도 있고, 나의 작은 도움이 누군가에게는 큰 울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작은 일에도 성의를 다하는 사람은 그 자세를 사람들이 보고 알아봐 줄 것이다. 작은 일을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은 주위의 사람이 하나둘 사라질 것이다. 나의 주변을 살피고, 아주 작은 것부터 집중하고 성의를 다 해야 한다. 그 작은 행동이 조금씩 커져 큰일이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큰일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모두 작은 일들이 모여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작은 일에 성의를 다 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일을 함에 성의를 다하는 나의 자세가 될 것이다.
공자는 슬픈 기색으로 나이 지긋한 어부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저는 노나라에서 두 번 추방되었고, 위나라에서는 왔다 간 흔적조차 없어지는 치욕을 겪었으며, 송나라에서는 살해 위협을 받았고 진나라와 채나라에서는 불량배들에게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잘못을 저지른 일도 없는 제가 네 번씩이나 이런 일을 당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노인은 말했다.
"그대는 지금 인과 의를 내세우고 같음과 다름의 차이에 집착하며 움직임과 고요함 사이를 적당히 오가며 좋아하고 싫어하고 화내고 기뻐하는 감정을 조화시키지만 화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양에 힘쓰고 신중하게 본성을 지켜 외부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얽매임이 없을 터인데 여전히 남에게서 깨달음을 구하면서 어찌 화가 피해 가기를 바라는가?" 184p
이 글에서 노인은 장자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는 이렇게 인위적인 행동과 정치 부정했다. 자연의 순리에 따른 무위에 따라야 한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공자는 자신의 위치에 맞는 도리를 다할 것을 얘기했다. 내 위치에서 해야 하는 일이 정해져 있고 그 일을 하는 것이 도를 다하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나는 장자, 그리고 노자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공자에게는 신하가 정해져 있었고, 하인이 정해져 있었고, 노예가 정해져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도를 다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얘기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직장인으로써의 도리를 다 해야 한다. 그 이상을 넘어서 행동하는 것은 도에 그릇되는 것이다. 여자와 남자 사이에 차이가 있는데 남자가 해아한다고 정해진 일을 여자가 하려고 하는 것은 도에 그릇된 것이다.
하지만 장자가 얘기하는 무위는 다르게 얘기하고 있다. 그 어느 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오로지 그것을 정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에 의해 정해진 것은 자연의 섭리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여자와 남자의 할 일 구분은 사회가,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들이 정한 것이다. 이것이 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 안에서의 도가 되는 것이다. 장자는 자연의 섭리대로, 우주의 섭리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우주와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수양을 통해 내적 본질을 지키고, 외부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행함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데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데로, 태양이 비치면 비치는 데로 그렇게 자연의 상황에 맞게 행동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노자가 좋고 장자가 좋다. 정해진 것, 인위적인 것은 언제나 바뀐다. 그리고 2000년 전에 정한 그 인위적인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건 그 당시에나 맞는 것이었다. 아니 그 당시에도 맞지 않던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자연스러움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