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집 짓기 - 이별의 순간, 아버지와 함께 만든 것
데이비드 기펄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줄 평 : 항상 멀리하고 싶었던 죽음을 곁에다 두고 내 관을 내가 짜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책



요즘 '레트로'라는 단어에 한참 빠져 생각하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이 책 표지가 너무 멋지다. 나는 사실 레트로보다는 항상 새롭고 신선한 것, 새것이 멋져 보였지만 익숙한 것 손 때가 묻은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 표지 소개

책의 내용은 토목기사 아버지와 아들이 아들의 관을 직접 만드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된 공구와 꽃을 표지로 장식한 듯하다. 그리고 밑부분의 띠지는 관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나무의 모양을 넣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첫 표지에 있는 글귀들

'이별의 순간, 아버지와 함께 만든 것'

'삶뿐 아니라 죽음도 함께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책'

이런 글들이 들어 있다.

뒤표지에는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이자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찾아가는 이야기'

라는 글귀도 들어 있다.


작가 소개

데이비드 기펄스

기자, 작가, 교수. 미국 오하이오의 애크런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애크런 비컨 저널Akron Beacon Journal〉의 기자이자 칼럼니스트였으며 MTV 만화시리즈 〈비비스 앤 버트헤드Beavis and Butt-Head〉의 작가로도 활동했다. 그의 글은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에스콰이어〉 등 다양한 매체에 실렸다. 현재 애크런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며 글을 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애크런을 떠나 대도시로 향했지만 그는 태어나서 줄곧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이곳에 남아 집을 고치고 일하고 가정을 꾸리며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 더 많이 머물 수 있는 도시를 만드는 것에 진정한 가치를 느꼈다. 그는 애크런의 독특하고 따뜻한 정서를 배경으로 한 회고록을 다수 펴냈다. 저서로 오하이오 북 어워드 수상작 『집으로 가는 길All the Way Home』, 『어려운 길을 가다The Hard Way on Purpose』, 『영혼의 집 짓기Furnishing Eternity』가 있다.

역자 : 서창렬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면』, 『아메리칸 급행열차』, 『보르헤스의 말』, 『축복받은 집』, 『저지대』, 『모스크바의 신사』, 『밤에 들린 목소리들』, 『그레이엄 그린』, 『에브리데이』, 『엄마가 날 죽였고, 아빠가 날 먹었네』, 『토미노커』,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라도』, 『제3의 바이러스』, 『암스테르담』, 『촘스키』, 『벡터』, 『쇼잉 오프』, 『마틴과 존』, 『구원』 등이 있다.


이 책은 이런 책이다?

죽음을 이해하는 에세이 정도면 소개가 될까?

그냥 하루하루의 삶을 잔잔히 써 내려간 글이다. 그 얘기가 가장 적당할 것 같다. 근데 그 소재가 '관'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일반의 잔잔한 에세이 글들과는 차별화가 시작된다.

이 책을 보면서 계속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빅피쉬'였다. 물론 책에서는 판타지적인 요소도 없고 여행이라든지 갈등이라는 그런 내용은 없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대화들과 서로 이해해가는 모습들, 그리고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빅피쉬'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뭐라고 딱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책을 읽고 있으면 '빅피쉬'의 잔잔하면서도 따뜻했던 감성이 느껴진다.

잔잔한 에세이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책도 맘에 들 것이다.

물론 소재는 '관'그리고 부자의 관계이지만 죽음을 중점을 두고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저 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가지고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이다. 그 나무로 만드는 것은 '관'이었을 뿐이다. 이 책은 그렇게 죽음의 얘기가 아닌 가족의 이야기고,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이야기고,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해에 대한 이야기이다.


삶과 죽음, 가족과 친구

이 책은 이런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아버지는 토목 기사로 평생을 나무로 무언가를 해 온 사람이다. 주인공이 중년이 되고 아버지는 노년이 되었지만 아버지의 이런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상 나무를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고 그때도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 집에 들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다음 프로젝트로는 관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라고 얘기하게 된다. 그 일을 계기로 아버지와 아들은 아들의 관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관을 만드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야 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그냥 관이 만들고 싶어졌을 뿐이고 조금씩 관에 대해 배워나가고 조금씩 서로에 대해 배워 나가고 삶에 대해 배워 나가게 있었다.

주인공과 그의 아버지는 관을 만들기로는 했지만 관을 어떻게 제작해야 되는지 어떤 관이 좋을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시작을 했다. 죽음도 그러하리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죽음이 어떤 것인지, 어떤 죽음이 나에게 맞는 죽음인지에 대해서 바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듯이 하기로 마음먹었어도 바로 명확해질 수는 없는 것들이 있다. 너무나 사전 지식이 없고 어쩌면 관심을 일부러 두고 싶지 않았던 것들은 처음부터 하나씩 알아나가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을 만들기로 했지만 그 관이 완성되기까지는 3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이 책은 관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3년의 시간 동안 주인공에게 일어난 일들을 있는 그대로 잔잔히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죽음의 소재로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삶이라는 것 속에서 그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친한 친구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암에 2번이나 걸리기도 했다. 다시 삶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죽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우리의 삶 근처에 있는 것이었다.

나도 어린 시절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인지 몰랐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에는 죽음은 다시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어렸기 때문에 내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어렸기 때문이다. 사고를 당하지 않는 이상 내 주위의 사람들이 병으로 죽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가장 가까운 죽음이라는 것이 아는 사람의 부모 정도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죽음이 나의 근처에 와있는 나이가 되었다. 나도 작가와 같이 중년이 되었고, 이제는 내가 직접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꽤나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지금부터 나도 죽음을 가까이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영혼의 집 짓기'를 통해 가까지 있어도 외면하고 싶었던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그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삶은 매일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 얘기를 들어도 그때뿐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본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그렇지만 그래도 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에 집중하며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는 죽음보다는 삶이라는 것이 더 간절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집중을 하고 있다. 이 순간뿐만이 아니라 나는 항상 삶에 집중을 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책들을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분명 죽음을 가까이한다면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은 바뀔 것이라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조금은 화를 덜 내고, 조금은 너그러워질 것이고, 조금은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삶에 집중할 테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죽음을 선택할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나도 관에 들어가 땅에 묻히는 것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화장? 결론을 내리고 싶은 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잠시나마 생각하지 않은 생각을 해봤다는 것, 나는 그것만으로도 이 책이 나에게는 의미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나는 다시 나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책 속에서

내가 아는 한 어머니가 옆에 두고 싶어 했을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정말 잘 준비되었는지도 모른다. 전날 밤엔 묵주 기도를 했고 어머니의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았다.

다음은 탁 트인 바깥 공간. 그리고 또 한 번의 애절한 슬픔의 기도, 그런 다음....

그게 우리들 사이에 걸려 있었다.

놀라운 것이 하나 있다면, 우리 한가운데에 있는 죽음을 함께 나누는 것의 묘한 아름다움이었다.

조용히 집중하고 있던 우리는 각자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어깨를 늘어뜨리거나 고개를 떨구거나 괜히 손을 움직였다. 어머니 옆에서 약간 물러나기도 했다. 109p

아버지는 보통 다른 사람이 없는 데서 슬퍼했다. 아버지의 마음속에 휑뎅그렁한 허전함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아버지의 허전함은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 없는 어머니에게 종종 말을 건다는 것을 우리에게 얘기할 정도로 컸다. 114p

아버지의 집 테라스 바닥에 죽은 시신의 자세로 누운 나는 난도 모르게 오싹함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나 자신의 관을 만들고 있다고 말할 때마다 사람들이 언급하곤 했던 그 오싹함을 나도 접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 사람들을 비난할 수 없게 되었다. 나도 오싹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으니 123p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점점 더 커져서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더욱 절박하고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관 프로젝트의 진행을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125p

처음으로 내 관 속에 들어가 본 경험은 상사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작업장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쪼그려 앉아 톱질 모탕 위에 거꾸로 놓인 미완성 목ㄷ재 관 속으로 목을 길게 빼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못 박는 기계의 방아쇠를 위에서 아래로 당겨 합판으로 된 관의 바닥면을 틀에 고정시키는 일을 하다가 못 몇 개를 잘못 조준하는 바람에 그것들이 합판을 뚫고 관 바닥으로 돌출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못뽑이를 들고 밑으로 기어들어가 잘못 박힌 못 들을 뽑아냈다. 자기 자신의 관을 짠다는 것도 섬뜩한 일이겠지만, 미래의 어느 날 자신이 엉성하게 박은 못들이 튀어나와 있는 침대로 들어가 눕는 것은 훨씬 더 섬뜩한 일일 테니까. 286p

"그래? 그 안은 어떻든."

"요란했어요" 내가 말했다.

"죽은 사람도 깨울 만큼?"

"거의 그 정도로요." 287p


아이들이 병원놀이를 좋아하는 이유가 병원이 무서운 곳이라 놀이를 통해서 두려움을 해소하는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죽음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근처에 두고 있으면 아이들이 병원에 대한 두려움을 놀이를 통해 해소하듯 우리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익숙함으로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