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 필로테라피 4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지음, 이주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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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다미앵 클레르제 - 귀르노

프랑스 투르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철학자. 고전 수사학 및 논쟁에 관한 현대 이론 분야에서 훈련받았으며, 설득의 주요 수단에 초점을 맞춘 세미나를 열며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2018년에는 '철학과 자기계발'이라는 철학 워크숍을 개설해 실천적 관점에서 철학을 바라보고 삶에 적용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다. 저서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을 재조명한 '무기력한 날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목차
1. 진단하기 - 절망으로 아픈 사람들?
2. 이해하기 - 열정의 망각
3. 적용하기 - 윤리적인 삶에 깃든 고귀함을 되찾자
4. 내다보기 - 신의 진정한 존재를 인정하자

이 책의 활용법
이 책에서는 우리 삶을 바꾸기 위해 위대한 철학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 삶에 부여하는 의미까지 바꿀 수 있도록 말이다.
새로운 행동 방식과 삶의 방식에는 언제나 새로 생각하고 자기를 이해하는 방식 또한 포함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이미 우리 삶을 바꾸어주는 생각에서 가끔은 아찔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10p
1. 진단하기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규정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방황과 이런저런 착각을 정확히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 이해하기
그렇게 명확히 이해하는 데 철학은 어떤 새로운 것을 가져다줄 것인가?

3. 적용하기
인간에 대한 이런 새로운 생각은 우리가 행동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는가? 이 새로운 철학을 어떻게 일상에 적용할까?

4. 내다보기
이제 자신의 존재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한 더 전반적인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앞의 세 장에서 더 잘 살기 위한 방법과 수단을 가르쳐주었다면, 이제 이 마지막 부분에서 독자들은 삶의 목적, 삶의 ㅇ궁극적 목적에 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책 속에서

현대의 절망에 관하여
현대 의학의 발달에도 절망은 근본적으로 치유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절망을 비즈니스로 이용하는 시장만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으며 (중략) 20p
'진정으로 절망은 '질병'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21p
정확히 무엇 때문에 절망스러운 것인가 그러니까 왜 절망하는가? 23p
결국 절망은 나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이다. 26p

절망에 대한 두 가지 형태
키르케고르는 절망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위험도는 다르다고 구분한다.
하나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되고 싶으나 되지 못해 느끼는 절망이고,
또 하나는 지금의 내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느끼는 절망이다. 27p

자살시도
따라서 우리는 생각과는 달리 자살은 자신을 파괴하려는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리 애써도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자 결국 선택하는 것이 자살이다. 29p

≫ 『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는 우리가 절망을 접할 때 너무 쉽게 그것을 일반화 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앞으로도 언제나 실패할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냥 나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하고 있다. 사람들을 보면 정말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다. 전 회사에서 이 예시에 딱 맞는 사람이 있었다. 제품에 어떤 문제점이 있어 그 사람과 해결책에 논의를 하다 보면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 사람은 항상 이런 식으로 말했다. '그거 안돼요. 그걸 누가 할 거예요? 어차피 해봐도 안되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되겠어요. 답이 없어요.' 한마디도  긍정적인 대답이 없다. 뭘 해도 안된다고만 얘기한다. 이런 사람들을 유심히 보면 그 사람은 모든 행동방식이 수동적이고 비관적이다.
책에서는 자기 비해를 망상으로 보지 않고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망상의 피해자가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무엇인가 시작이 있고 그 원인을 찾아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고 싶어도 언제나 육체의 격렬한 욕망에게 방해를 받아 초연하게 순수한 정신의 삶을 살 수 없고, 이것 때문에 절망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철학자들은 인간에게는 '정신과 육체'가 같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중략) 철학자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신과 육체를 어떻게 하면 차분하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와 그 토대를 마련하는 일을 어렵게 생각했다. 개인을 완성하려면 이성과 욕망을 대립시키느 것이 아니라 균형 있게 공존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85p
따라서 우리는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이상은 실현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적어도 이상에 걸맞은 모습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아야 한다. 146p

≫서양철학의 대부분은 이렇게 무언가를 정의하고 그 확정한 이상향에 현실을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아리스토렐레스가 비판을 한 것과 같이 조금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노자가 얘기하는 '유무상생'과 같이 무언가 이론적 이상향과 관념을 확정시켜 놓고 그것에 맞추어 가면 현실은 항상 잘못된 것으로 판단 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항상 잘못된 행동과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살고 있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이론적 관념적 완벽한 모습이라는 틀을 정해 놓고 그것에 맞추어 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판단의 고정화를 가지고 올 수 있다. 정말 완벽한 이상향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닫힌 사고를 만들어 낼 수 있고 고정된 시각을 만들어 내 생각의 유연성을 떨어트릴 수 있다고 본다. 항상 자신의 돌아보며 자신이 관념이 올은 것인지 돌아보고 틀린 점이 있으면 수정할 수 있는 옳고 그름의 확정 없이 그 상황에 맞는 관념에 맞추어가는 삶과 생각이 아닌 현실 속으로 들어가 현실 안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책감은 인생의 모순을 굴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도 결국에는 실패로 끝났다는 현실을 현명하게 인정하는 태도다. 221p
신을 믿지 않겠다는 태도는 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일 뿐 여전히 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236p
믿음을 가질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왜 그럴까? 답은 하나다. 완전한 행복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죄를 인식하고 신과 관계를 맺을 때 종교적인 삶을 살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선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 기적적으로 구원이 일어나기를 은근히 꿈꾼다. 252p

≫ 『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 4장은 신의 진정한 존재를 인정하자의 내용으로 위와 같은 종교의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천주교를 10년 이상 다녔고 현재는 무교이다. 그 이유는 신이 있다는 것의 존재성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무신론자라고 함은 '미지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것을 종교라는 것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하며 그래서 무신론자 또한 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천주교를 떠나 무신론자가 된 것은 '미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종교에 대한 부정 신을 믿지 않겠다는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미지의 존재', 그리고 '신'이라는 존재성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를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믿지 않는다는 태도의 문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나는 구원이 일어나기를 꿈꾸지 않는다. 무신론자의 대부분은 구원은 전혀 꿈꾸지 않을 것이다. 너무 자신만의 억측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4장의 내용은 나와는 정말 생각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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