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아리차 #4(고소한 맛)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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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시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는 산미네요. 고소한 맛이라고 해도. 산미를 좋아하지 않아서 어떨땐 그런데로 괜찮게 느껴지고 어떨땐 산미때문에 조금 별로고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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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실패 - 정우성 요가 에세이
정우성 지음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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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칼로 쓰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때 정확히 알았다.
글에 베인 상처의 회복에는 기약이 없었다.
마음의 상처를 심하게 입으면 몸이 반응하게 됐다.
말이 안나오거나 손이 떨리거나 머리가 멍해졌다.
하지만 호소하지는 않았다.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악의에는 메시지가 있었고 이해했으니 괜찮다고 여겼다.
좋아하는 일이니까 일만 할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
다소 순진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선배 요즘 괜찮으세요?"
"응, 그럼. 왜?"
"눈이 운 것 같은데. 혹시 울었어요?"
"아닌데? 피곤해서 하품했는데?"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내 속을 헤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는 이해, 상처는 상처. 아침엔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생각보다 일찍 깨서 생각보다 오래 뒤척였다.
그즈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서 허송세월 하는 시간이 많이 있었다. 눈은 늘 조금씩 울고 있었다. 일에 효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그 사실 자체로 또 괴로웠다.
해야 할 일이 밀리고, 밀리면 조바심이 나고, 그런 리듬으로 기약없는 야근에 시달리는 악순환이었다.
혼자서 별말 없이 괴로워하다가 그 괴로움, 비효율, 우울의 근원에 분노가 있다는 걸 알아채는 데 2개월 정도가 걸렸다.
(p.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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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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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는 역사,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증언 평화 발자국 19
김금숙 지음 / 보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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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위안소‘나 ‘위안부‘라는 용어는 여성차별용어이긴 하지만
오히려 가부장제적인 제국주의 군대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고, 일본 공문서에도 실려있어 역사학계에서도 역사용어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국제적으로는 ‘Sexual Slavery‘라고 쓰고 있고 국내에서는 이것을 번역해 위안부와 함께 ‘성노예‘라고 쓴다. 위안부가 본질적으로 성노예였다는 설명으로 쓰기도 한다.

이 작품이 지금까지의 많은 문학작품에서 위안부로 끌려가는 방식과 다르게 그려진 점은, 일본병사가 총검을 앞세워 끌고가는 장면이 아니라 계급문제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것이다.
실제 위안부 징모현장에 병사나 경찰이 직접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었고 한국정부에 등록한 피해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업자에 의한 취업사기나 인신매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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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07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문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저 영어권의 성노예가 가장 적당한 말일 수 있지만 저 말이 주는 어감이 너무 안좋아서 위안부 할머님들 당사자분들이 너무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본군 ‘위안부‘>라는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위안부라는 칭호가 일본군 입장의 용어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딱히 적절한 용어가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위안부라는 용어에 따옴표를 부텨 할머니들의 의지가 아닌 강압적 동원이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자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나타난 현상은 업자에 의한 취업사기나 인신매매 형태를 띄었지만 실제 그 배후에 그런 취업사기와 인신매매를 방조하고 돕고 최종적으로 그들을 전선으로 배치한 것은 결국 일본정부와 군대였다는 것을 보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 루이스 세풀베다 산문집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p.85
누군가요즘 뭘 쓰느냐고 물어보기에, 난 이렇게 대답했다.
「응, 우리들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다네.」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는 저마다 깊은 상처를, 어떤이들은 육신에, 또 어떤 이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헤어질 무렵, 우리는 모처럼 행복에 겨워 벅차오르는가슴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빛나는 눈빛으로 서로를바라보면서 힘차게 포옹을 나누었다. 우린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아니,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힘차게포옹을 나누는 것은 우리에겐 하나의 원칙과도 같은것이었다. 그 원칙을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되고, 당당하게 우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 결코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그 원칙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잊지 말라, 용서하지도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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