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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부산물이다 - 문명의 시원을 둘러싼 해묵은 관점을 변화시킬 경이로운 발상
정예푸 지음, 오한나 옮김 / 378 / 2018년 1월
평점 :
문명에 청사진은 없었다
문명은 계획된 것이 아니며 무목적적 행위 중 의도치 않게 나타난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회학자 정예푸 선생은 보수적인 인문학계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가진 학자로 유명하다. 인류학, 생물학, 고고학과 역사학을 넘나드는 방대하고도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 출처를 일일이 밝히며 인용하여, 주장하는 바에 힘을 싣고 있다.
이 책은 두 가지 큰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인류 문명의 역사를 아시아의 관점으로 재해석하였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나 나일강 등을 언급하며 시작하는 문명의 탄생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다. 다행스럽게도 중국이나 아시아를 우월하게 표현하는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할 뿐이다.
둘째, 문명을 인류가 이룩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탄생한 것이라는 시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마치 진화의 한 과정이라고나 할까. 때문에 다윈의 진화론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있다. 여태껏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 대해 주입식으로 배워온 뭇 사람들에게 굉장히 파격적인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저한 사료와 논리정연한 작가의 설명을 들어보면 반박할 여지가 많지 않음을 느낀다.
필요에 의한 선택과 소외, 필연을 가장한 우연성, 차용해 쓰던 각기 다른 문화들의 만남과 교배, 중대한 발명, 인류와 문명이 서로를 길들이는 상호작용 등으로 설명한 문화 메커니즘이 바로 문명이 부산물이기 위한 작가의 변명이다. 이로써 인류 문명의 이정표라고 여겨지는 족외혼제, 농업의 시작, 문자의 개발, 제지술 및 인쇄술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다각도로 비추어 이 모든 것이 서로 연계되는 부산물들의 연속임을 증명하고 있다.
빈곤한 상상력을 가지고 세습된 교육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준데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책을 편찬하여 나처럼 무지한 이에게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감사할 따름이다. 조금 더 나아가 건방을 떨어 작가에게 반박을 해볼 수도 있겠다. 생명의 진화 과정과 인류 문명의 발생에 있어 목적성을 완전히 배제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의도된 목적이나 계획적 발명은 없었다는 작가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반면에 이 책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 책들이 나오기를 바래본다. 활발한 논쟁이 관심의 증거일테고, 이것이 바로 정예푸 선생이 진정 원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