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 미국 민주당의 실패에서 배우기
토마스 프랭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1. 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는지 여전히 궁금하다면
2. 미국 정치의 현실을 알고 싶다면
3. '진보' 정치세력이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면

세 줄 요약

중하층 미국인들에게는 더 이상 정치적 대변자가 없다. 
오죽했으면 트럼프에게서 대안을 찾았을까.
능력주의에 대한 종교적 광신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지.


1. 내가 망해봐서 아는데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세계의 수많은 정치 전문가들은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을 당연시했다. 감히 트럼프처럼 정치를 희화화하고 격하시키는 후보를 유권자들이 선택할 리 만무하다고 ‘믿었다.’ 그 ‘배운 사람들’의 의견이 정말 헛된 ‘믿음’에 불과했음은 금세 드러났지만, 그 이후에도 이러한 ‘트럼프 신드롬’은 포퓰리즘, 미국의 쇠락, 자살적인 선택과 같은 부정적인 평가로 덧칠되었다.

그러나 대선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토마스 프랭크는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이라는 책을 통해 그처럼 대중을 내려다보고 계도하려는 소위 전문가들의 오만한 태도, 그리고 갈수록 그러한 엘리트주의에 영합하는 민주당의 노선 변경이야말로 사태의 근본원인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트럼프 현상이 미국 정치에 내재된 ‘잭슨주의적 속성’이며 나아가 엘리트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에 대한 대다수 중하층 유권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나의 분석과도 맥이 닿아 있다. (주간경향 2016.11.12.)

많은 평론가들이‘중산층의 몰락’ 혹은 중간소득의 붕괴라고 쉽게 일반화하는 현상은 프랭크가 지적하다시피 그렇게 단순하지도, 추상적이지도 않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직장이 문을 닫고, 자식의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고, 돈이 없어 아프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빚 때문에 말 그대로 집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는 일들이 이웃들에게, 옆집에,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산층의 붕괴가 뉴스 기사 제목 정도로만 생각된다면 당신에게 그 여파가 미치지 않을 만큼 아직 운이 남았기 때문이다.)

아사히 신문의 미국 특파원인 가나리 류이치가 2016년 대선 기간 쇠락한 미국 제조업의 대표 지역인 미국 중서부, 이른바 러스트 벨트(rust belt) 주민들을 취재한 기록인 “르포 트럼프 왕국”을 보면 심지어 수십 년간 민주당원이었고 4년 전만 해도 오바마에게 표를 던졌던 사람들마저 왜 트럼프를 지지하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배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어리석고 감정적이고 ‘못 배워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충분한 논리와 상황이 있었고 트럼프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건드린 것이다. 반면 민주당은,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은 그들의 논리와 상황을 이해하려하기는커녕 ‘좋은 말 대잔치’로 일관했다.

아니, ‘좋은 말 대잔치’뿐이었다면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른다. 프랭크가 지적하고 있듯이, 미국 유권자들은 클린턴 이후 민주당 정권이 어떻게 전통적 노동계급, 중산층 계급을 배반하고 그들의 삶의 기반을 잠식하는 정책을 펼쳤는지를, 비록 정확하게 집어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되었다. 그 정책들이 자신들의 삶을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망가뜨리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프랭크가 민주당에게 “제발 들어라.”라고 외치고 있는 것은 민주당 지도부가 그런 실패조차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감의 발로다. 자신들이 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패배한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민주당의 정체성이 표변한 것이다. “문화적인 쟁점에 대해서는 그토록 거리낌이 없는 민주당의 지도자들이지만 기본적인 경제 민주주의 문제에만 직면하면 한순간에 행동하길 멈”추는 첫 번째 원인은 주지하다시피 민주주의의 금권정치화에 있다. 갈수록 선거는 ‘쩐의 전쟁’이 되어가고 있고 선거법조차 이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전통적으로 ‘노동자의 친구’였던 민주당도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따라서 친기업적이고 부자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랭크가 보기에 이는 반쪽짜리 설명에 불과하다. ‘돈의 정치’만큼이나 민주당의 성격을 변질시킨 것이 바로 ‘학력의 정치’ 혹은 ‘능력주의 정치’라고 프랭크는 일갈한다. 즉, 고학력 전문직에게 대부분의 정치 의제와 정강을 잠식당한 것이 민주당의 현 상황이라는 것이다. 공화당이 ‘1퍼센트의 정치’라면 민주당은 ‘10퍼센트의 정치’가 되어버렸다고 그는 한탄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능력 있는 사람,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사람이 그에 걸맞은 일을 하고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능력주의는 그야말로 최선의 이념 아닌가?

2. 운칠기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즉 현대(modernity)의 속성을 탐구한 것으로 유명한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모더니티의 본질이 유동성(liquid-ness)에 있다고 보았다. (지그문트 바우만 2009 “액체 근대”)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할 수 있으며, 변해야 한다는 것이 근대를 규정하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변화는 좋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나아지고 진보할 수 있다! 반면 어제와 같다는 것은, 한결같다는 것은, 변치 않는다는 것은 나태와 무지와 등치된다. 정체는 죄악과 동일시된다.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아무튼 진보와 발전은 좋은 것 아닌가? 

물론 추상적인 의미에서 개선, 진보, 발전은 긍정적 의미를 함축한다. 어제보다 더 지혜로워지고, 지식이 늘고, 더 좋은 삶을 살고, 더 나은 환경을 누리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항상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우리가 추상적으로 말하는 진보, 개선, 발전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물, 생활양식 그리고 제도와 연관되느냐가 우리의 정체성을, 그리고 정신을 더 정확히 규정한다. 더 많은 지혜와 지식은 더 높은 학력, 더 고급의 학위로 대치되고, 더 나은 환경과 더 좋은 삶은 결국 더 큰 집, 더 안락한 자동차, 더 쾌적하고 안전한 동네, 그러니까 더 많은 경제력으로 치환된다.

물론 모두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최선일 것이다. 유동적 근대의 또 다른 면은 신분이나 인종, 성별과 같은 어떠한 제약도 없이 그러한 ‘발전’과 ‘진보’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원론적으로는 말이다. 능력주의는 바로 이러한 사상적 토대에서 출발한다. 누구에게나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이라면 결과가 어떻든 승복하지 않겠는가? 네 결과가 안 좋다면 결국 그것은 네 능력 부족 혹은 노력의 부족이다. 이 얼마나 공정한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의 능력(merit)은 능력주의(meritocracy)가 전제하고 있는 것만큼 그렇게 순수하거나 진공상태에 있지 않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사회학과 스티븐 맥나미와 로버트 밀러 교수가 “능력주의는 허구다(The Meritocracy Myth).”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는 개인에게 귀인할 수 있는 능력의 영향은 과대평가하고 비능력적 요인은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이미 우리 모두는 출발점, 그러니까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것들의 양과 질에서부터 다르기 때문에 애초에 동일한 능력을 갖고 평가될 수 없다. 

게다가 그 상속은 단순히 물질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인맥, 학력, 그리고 부르디외의 용어로 유명한 문화자본과 같은 비물질적 요소들까지 포함하는 광범한 차원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보면 오바마와 민주당이 그렇게 강조하는 ‘양질의 교육’은 평등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사회적 계층을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저커버그와 빌 게이츠,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과연 이 시대에 하류계급에서부터 잔다리를 밟고 올라와 자수성가한 사업가와 고학력 전문직 가정에서 태어나고 명문 대학을 졸업한 사업가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면 ‘보이지 않는 상속’의 힘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3. 민주당의 전향

그렇다면 미국 민주당은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프랭크가 2장에서 미국 국내 정치의 이른바 탈뉴딜화(de-NewDealization) 과정, 한 마디로 공적 영역의 축소가 대세가 된 과정을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기도 하지만 좀 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노선 변경은 국제정치적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전략적 선택이었다. 즉, 베트남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반전사상의 만연이 초래한 애국심과 공적 가치의 절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의 실패로 인한 정부 능력에 대한 불신 증가, 그리고 일본 등 신흥 산업국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는 경제적 위기감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탈물질주의, 개인주의, 민영화, 경제 우선주의라는 기묘한 조합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일견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이념들의 공통분모는 바로 정치, 그리고 공적 영역의 축소다. (개인과 기업을 포함하는 모든 사적 주체들은) 각자가 각자의 자유를 최대한 누릴 때, 즉 (보조든 규제든)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할 때, 각자 최대한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공산권의 붕괴는 이러한 시대 조류의 화룡점정이었다. 정부와 관료라는 공적 기구가 계획을 통해 사회적으로 최적의 분배를 달성한다는 공산국가의 이상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이는 공공 영역에 대한 시장의 승리로 간주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풍요로운 삶을 약속했던 대안적 이념이 패배하면서 시장-자유주의는 이제 유일한 게임의 법칙(The only game in town)이 되었다. 동시에 각국의 전통적인 좌파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90년대 중후반에 유행했던 이른바 ‘제3의 길’에 대한 논쟁 역시 ‘역사의 종언’ 이후 진보 혹은 좌파의 존재이유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미국 민주당의 행보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시장기제가 모든 공적, 사적 영역에 지배적이고 무오류적인 규칙으로 수용되면서 모든 것은 효율성 제고, 경쟁의 승리, 성장과 팽창이라는 기준에서 평가받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인 삶에서의 평등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은 전통적 좌파가 이러한 상황에서 제안할 수 있었던 유일한 비전이 결국 능력주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기준이 객관적이고 기회가 동일하게 주어진다면 충분히 평등하지 않겠는가? 경쟁을 통한 성장이 결국은 모든 배를 띄워주지(float everyone’s boat) 않겠는가? 

4. 능력주의의 무능력

그러나 문제는 객관적 기준은 그렇게 객관적이지 않으며 동일한 기회는 그렇게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출발선의 아주 작은 차이도 엄청난 결과의 격차를 초래할 수 있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연구 “교육-일자리 격차(Education-Jobs Gap)”에 따르면 재능이 고르게 분배되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부유한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학 학위를 취득할 가능성은 나머지 인구에 비해 두 배 이상 크다. 결국 노동 인구에 편입되기 전부터 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차별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개인의 잠재력은 충분히 발휘되기도 전에 매장되는 것이다. 

심지어 언제 태어나고 언제 노동시장에 처음 진입했느냐도 이후의 경력과 삶에 지대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사회학자 아네트 베르나르의 연구를 위시한 여러 유사한 연구들은 사회생활 시작 단계에서의 임금 격차와 고용안정성에서 나타난 작은 불평등이 장기적인 임금증가율에 영향을 미치면서 심각한 불평등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밝혔다. 능력보다 타이밍이라는 말이다. 젊은 세대가 “지금 같으면 취직도 못할 멍청이들”이라고 상사들을 ‘까는’ 것은 그저 치기어린 불평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능력주의의 본질적인 한계와 모순을 더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준과 절차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켰다. 정신분석학자 파울 페르하에허는 규제 완화와 자유화를 모토로 삼은 기제가 공정한 평가를 명분으로 수많은 규제를 만들어내고 미궁과 같은 법규와 규칙에 따라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평가절차를 수행하는 거대한 관료제를 만들어내는 역설적인 상황을 언급한다. 병원에서 끊임없는 평가의 대상이 된 의료진들은 팀원 의식이나 협력, 무엇보다 환자의 안위에조차 무심해진다. 오로지 행동을 평가의 기준에만 맞추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평가를 (받기) 위한 행정과 관리 업무가 원래 업무 시간까지 잡아먹는다.

게다가 ‘객관화된 수치’에 따른 평가는 그 평가대상의 원래 존재 목적마저 왜곡시킨다. 병원에서 사망하는 환자 수가 많아져서 평가가 나빠진다? 중환자나 긴급환자는 이제 받지 않으면 된다. 이윤이 줄어든다? 더 싼 재료를 쓰면 된다. 품질이 나빠진다고? 수치로 드러나는 부분만 챙기면 된다. 이러한 현상은 심지어 학계에서조차 보편적으로 일어난다. ‘객관화된’ 업적 평가를 받기 위해, 매년 정해진 논문 발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누구도 읽지 않는 논문이 양산된다. 그저 품질만 나쁘다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좋은 ‘객관적’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위조와 사기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전염병학자 존 아이오애니디스(John Ioannidis)는 “왜 출판된 연구 결과들은 대부분 위조인가”라는 획기적인 논문을 썼고, 2011년 강연에서는 6년이 지났지만 전혀 변한 것은 없다고 한탄했다. 그로부터 6년도 더 지났지만 와셋(WASET) 스캔들과 이른바 ‘제2의 소칼 사태’ 등을 보면 여전히 상황은 그대로다. 

결국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서는 최고의 능력자들을 선발해 최선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게 하면 된다는 능력주의의 이상은 애초에 능력과 성과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지조차 불분명했고, 평가의 기준을 객관화하고 계량화할 수 있는 영역으로 축소함으로써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상황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능력이라는 요인이 (개인과 조직의) 성과와 성공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함으로써 그 외의 우연적, 환경적 요인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과 격차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했다. 그럼에도 ‘공정한 능력주의’라는 지배적 서사는 여전히 진리의 자리를 독점하고 있다. 올 초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을 두고 벌어진 이른바 ‘공정의 역습’(시사in, 2018.3. 5.), 그리고 그에 앞서 나타난 ‘일베식 공정성’ (시사in, 2014.9.29.)은 능력주의가 지금보다 더 엄격하고 ‘공정하게’ 적용되기만 하면 사회가, 그리고 내 삶이 나아지리라는 강력한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5. 능력주의: 제2의 우생학

권력과 금전적 보상이 큰 자리가 더 능력 있는 사람들로 채워지면 자연스럽게 사회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더 높은 자리가 더 능력 있는 ‘인종’으로만 채워지면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할 사람이 있을까? 이 지점에서 능력주의와 사회진화론은 명백히 다르다며 펄쩍 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해보면 둘의 유사점은 금세 드러난다. 둘 모두 궁극적 목표는 적자생존이다. 강하고 유능한 자는 보상받고 나머지는 도태된다. 또 다른 유사성은 바로 유전적(생물학적) 요인에 대한 강조다. 사회진화론이 타고난 ‘인종’에 따라 순위가 매겨진다고 보았다면 능력주의는 순수하게 타고난 ‘능력’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사회는 이들이 사다리 위쪽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 논리의 치명적 약점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어차피 성공할 사람(인종)이라면 왜 굳이 사회가 나서서 이들을 뒷받침해주어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사회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적자(the fittest)’는 가장 강하거나 능력이 있다는 뜻도 아니거니와 오로지 사후적으로만 확정될 수 있는 개념이다. 말 그대로 주어진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가 더 높은 확률로 자기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전혀 다르다. 사회진화론도 능력주의도 무엇을 적자로 볼지, 어떻게 적자를 판별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습게도 적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적 승자’를 돕는다고 우기면서 ‘적자’들이 도태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한다. 2008~2009년 금융위기를 예측하지도, 제대로 대처하지도 수습하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이해조차 제대로 했는지 의심스러운 ‘최고의 인재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두둑한 보수를 받고 민간 부문의 높은 자리로 ‘영전’하는 상황에 관한 토머스 프랭크의 분노에 찬 서술이야말로 이러한 ‘작위적 적자생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 큰 문제는 ‘적합성(fitness)’의 기준이 너무나 획일화되고 단순화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결국 지금의 능력주의는 ‘경제적 능력주의’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경제적 가치-라고 쓰고 ‘돈’이라고 읽는다.-를 창출하지 못하는 모든 활동은 무능함으로 해석된다. 민주당 정권이 강조하는 ‘교육 능력주의’도 결국 ‘경제 능력주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지적 업적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한다. 이에 대해 파울 페르하에허는 “오늘날 ‘지성적’이라는 말은 욕이나 진배없다. “그렇게 똑똑한데 왜 돈을 못 버니?”라는 물음은 현실을 비판하는 논문의 농담 섞인 제목으로 그치지 않는”다며 냉소한다. 

6. “아아, 사적인 세계에 소비자만 가득해.”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시민으로서 마땅히 공유해야 할 덕성, 보다 쉽게 말해 다른 시민들과 조화롭게 어울려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 되어야 할 교육이 개인의 시장 경쟁력, 구체적으로는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는 기술과 능력(이 있다는 인증)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변해버린 상황은 마이클 영이 1958년 집필한 풍자소설 “능력주의의 출현(The Rise of Meritocracy)”에서 예견한 것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공적 주체로서 동등한 동료 시민은 사라지고 경제력, 더 정확히는 소비력으로 환원된 ‘능력’에 따라 서열화된 여러 소비자 계급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는 근대 민주주의가 어렵사리 달성한 ‘모든 이들의 정치적 평등’이라는 원칙, 즉 1인 1표의 가치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유대(bond)를 실종시킨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하다. 주권자로서 시민들이 정부와 공공기관에 요구하던 정치적 활동은 이제 기업에 대한 소비자의 불매운동과 소송으로 대체되었다. 존스홉킨스 대학 정치학 교수 매튜 크렌슨과 벤저민 긴스버그는 이러한 현상을 “대중민주주의에서 개인민주주의로의 전환”으로 칭한다. 이제 국가가 시민에게 제공하는 것들마저 이제는 행정 ‘서비스’가 되어버렸고 그마저도 상당부분 민영화되어버리면서 시민이 정부에 직접적으로 항의하고 정치적 해결을 요구하는 과정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그 대표적인 예가 다양한 공공서비스 제공에 사용되는 바우처(voucher)이다. 바우처를 통해 시민은 일순간 소비자로 역할이 바뀌면서 집단행동의 기회를 상실한다. 예를 들어, 공공 주택 프로젝트를 주거 바우처로 대체하면 임차인 위원회가 공공 주택 당국(정부)에 집단적 요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진다. 대신 당국으로 향했던 공동의 요구는 집주인에 대한 임차인의 개인적 불만으로 해체되는 것이다. 즉, 정부가 시민의 요구를 직접적으로 응대하고 해결해주는 역할에서 물러나 돈이나 그에 준하는 것을 이전(transfer)하고 나머지는 개별 소비자가 시장에서 알아서 해결하게 하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행정과 시장만 있을 뿐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전통적으로 ‘사회 문제’로 간주되는 빈곤과 재분배의 문제조차 이제는 시장이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프랭크 토머스가 10장과 11장에 걸쳐 서술하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의 ‘연민사업’이 정확히 이에 부합한다. (이미 혁신적이고 유능한 부자들이 제공하는) 교육과 금융 서비스를 통해 빈곤계층이 스스로 창업한다면 빈곤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토머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소액대출, 정보화 사업 등은 빈곤해결에 기껏해야 미미한 효과만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긴스버그가 ‘자선자본주의(philanthro-capitalism)’라고 부르는 이러한 움직임은 원조, 개발, 자선, 나눔이라는 명목 하에 경제적 위계를 고착화시키고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을, 때로는 정치적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을 탈정치화(de-politicize)한다. 동시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앤젤 투자, 임팩트 투자 등의 이름으로 기업의 이윤 창출은 공적 서비스와 혼동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이윤 추구를 조금이라도 포기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오히려 그들이 서서히 잠식해들어가는 공공 서비스의 품질이 나빠질 뿐이다.

미국 정치의 맥락에서 요약하자면 공화당은 사적 영역을 지키기 위해 공적 영역의 확대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제한하고 반대로 축소시키려고 한 반면, 민주당은 공공 영역을 보다 ‘능률적으로’ 지켜내겠다는 명목으로 사적 주체들의 잠식을 허용하고 어느 순간은 둘 사이의 경계를 분간조차 할 수 없도록 뒤섞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의 핵심에 능력주의와 선부(善富)에 대한 이상적 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학벌주의, 전문가에 대한 맹신, 인맥, 그리고 스스로 선하다는 자기 최면에 지나지 않았다고 프랭크는 일갈한다.

7. 더럽고 치사해도

하지만 시민에 대한 소비자의 승리, 정치에 대한 시장의 승리는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정책을 ‘쇼핑’하고 정치인의 ‘오디션’을 본다는 한국 사회의 논의 역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인들 중 경제적 담론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 바탕에는 시장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깔끔’한 반면, 정치는 더럽고 비효율적이고 당파적이며 감정적이라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원래 정치가 그런 것이다. 시장이 이미 가치 있다고 규정된 것들-즉, 돈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을 견주고, 교환하는 곳이라면 정치는 대체 아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가치를 설득하고, 반박하고, 판정하는 가치 판단의 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치 판단은 결코 합리와 이성만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 아니다. 모리치오 비롤리가 지적하고 있듯, 성공적인 정치적 설득은 로고스(logos)만이 아니라 파토스(pathos)와 에토스(ethos)를 반드시 수반한다. 결국 사적 영역(시장)이 깔끔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만큼 공적 영역(정치)에서 격렬하고 때로는 추잡하기까지한 싸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몇 세대 전만 해도 정치란 문자 그대로 피와 살이 튀는 활동이었고,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정권 교체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음을 생각하면 그나마 지금의 정치가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트럼프 신드롬을 포함해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주의와 포퓰리스트의 득세 현상은 결국 ‘깔끔해진’ 정치가 포섭하지 못한 공중(public)의 정치적 의사표출, 공중의 귀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공적 영역이 해야 할 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역기능적 상황에서 각 정체(政體, polity)가 겪고 있는 열병과 같은 것이다. 열을 낮추는 대증요법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나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에 존재했던 공과 사의 엄격한 분리가 로마 시대에 소키에타스(societas)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인해 혼재되고 변질되었다며 현대사회는 이를 명확히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적 영역이 맡아야 할 재분배, 복지, 기간시설 개보수의 역할을 영향력 있고 부유한 소수의 개인들에게 위임해버림으로써 모든 시민이 공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가 사적 시혜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 공동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것을 대체할 사회(society)는 사실상 시장이나 기업과 구별되지 않은 채로 개인은 소비자로서, 노동자로서 뿔뿔이 이산된 지금의 상황은 개인이란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던 고대 로마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귀결은 비슷하다. 우리 삶의 어떤 영역도, 심지어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조차 공과 사는 함께 존재한다. 국가가 우리 삶을 속속들이 통제해야 한다는 파시스트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차원에서 우리의 ‘사적’ 행위가 공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적인 것(res publica)의 편재성(어디에나 있음, ubiquity)을 망각한다는 것은 결국 그 자리를 사적인 것들이 장악하고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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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민주주의 - 새로운 위기, 무엇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야스차 뭉크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누구에게 추천?
1) 지금 각국의 정치 상황이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2) 민주주의가 과연 '좋은' 정치체제인지 한 번이라도 의심해보았다면
3) 민주국가에 사는 시민이라면

1. 알고보니 조건에 맞춘 결혼

일상 대화에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는다. 마치 냉장고라고 하면 당연히 냉동실과 냉장실이 함께 있는 제품을 생각하듯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단단히 융합된(amalgamated) 정치사상이 되었고 다수결 선거제도에 기반을 둔 대의제와 삼권분립을 통해 제도로 구현되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고 믿었다. 야스차 뭉크의 탁월함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러한 결합이 강력하거나 안정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자연스럽지도 않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켰다는 점에 있다. 즉, 20세기 자유민주주의가 세계적 추세가 된 것은 후쿠야마의 표현처럼 ‘역사의 종언’으로서 보편적인 귀결이 아니라 이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문화적 조건들이 (운 좋게) 맞아떨어지면서 가능했던 특수한 상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특수한 상황이란 우선 경제적으로 고도의 성장이 지속되면서 인구 전반의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향상되(리라는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고 그에 따라 국내의 빈부 격차 또한 심화되지 않는 조건을 가리킨다. 대량생산 체제 하의 공장과 기업, 그리고 이들이 고용하는 대규모의 인력을 통해 완전고용에 근접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내일은  오늘보다 더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이 약속되어 있다는 믿음은 대중이 위정자, 통치제도, 법률에 대한 신뢰를 품게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각국 정부는 독자적인 재정과 통화정책의 재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나라의 안과 밖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분명한 경계선을 그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 역사적으로 비교적 균일한 하나의 ‘주류 집단’이 한 국가를 대표하는 국민국가(nation state)가 이 시대의 보편적인 정치단위가 되면서 앞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야기했던 분리주의나 식민지와 같은 국내정치적 원심력 또한 줄었다. (물론 인종 갈등과 인권 문제를 겪은 미국, 알제리 독립으로 국가 분열 위기까지 갔던 프랑스 등이 있으나 이들은 이전 시대의 유산 혹은 해소되지 못한 잔재였을 뿐, 이민 규모는 세계적으로 이 시기에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안정 요인을 공고하게 만들면서 화룡점정을 한 것이 바로 이 시대의 정보통신기술이었다. TV, 신문, 라디오로 대표되는 대중매체는 계급, 지역 등을 막론하고 한 국가 안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 여론, 의견을 수렴시키는 역할을 했다. 뭉크의 표현처럼 이들은 뉴스와 정보를 중요도, 의미, 파급력에 따라 1차적으로 걸러내는 문지기(gatekeeper)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국민 간의 결속과 단합을 유지하고 적어도 다양성(이질성)이 보편성(동질성)을 넘어서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2.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본질적 긴장: 누구의 권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기술문화적 조건은 사실 매우 이질적인 두 정치적 충동(drive)을 억지로 끌어모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권력의 일원화와 집중, 전횡을 거부하기 위한 사상이다. 즉, 전제적인 주권자 개인이 폭정을 저지를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권력기구를 쪼개고 서로 견제하고 이를 법과 제도로 명문화하는 것, 즉 입헌주의로 대표되는 법치와 분권이 자유주의자들의 최대관심사다. 

20세기 초 래스키(Harold J. Laski)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정치적 다원주의=자유주의=입헌주의의 전통은 권력 집중을 막는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해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기득권, 즉 기존의 권력관계를 법과 제도로 고착시킨다는 점에서 문제를 드러낸다. 즉, 주권의 폭력성과 자의성을 폭로하고 이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훌륭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그러한 비판의 대상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다. 한 국가 내에서 소수의 계층 혹은 집단이 전문성, 문화자본, 인적 네트워크, 법적 지식을 갖추고 분권화된 권력 기구들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 집단에 속하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체제가 1인 독재와 얼마나 다르게 느껴질지 의문이다. 뭉크가 언급하고 있는 대표성의 약화로 인한 비민주적 자유주의(undemocratic liberalism)가 이러한 상황에 다름 아니다.

반면,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분권이나 법치와는 무관하다. 다만 어떠한 통치자(집단)이든 대중(인민, 조직 구성원)의 뜻을 최대한 널리 수렴하고 반영하여 정책으로 시행하느냐, 그리고 무엇보다 그 뜻에 맞는 결과를 내느냐에 따라 통치자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정치체제일 뿐이다. 물론 여기에서 대중의 ‘뜻’을 어떻게 종합할 것이며, 그 뜻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는 또 어떻게 판정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여기에서 자연스럽게나온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기준의 모호성 혹은 부재야말로 민주정의 본질이다. 즉, 민주정이 어떠한 정치이념을 표방하는 제도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판단기준은 얼마든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엄밀히 말해 민주정(democracy)은 주의(-ism)가 아니라 정체(政體, cracy)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민주정은 독재정(autocracy), 귀족정(aristocracy)과 같이 권력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중요할 뿐 그것이 제도로 구현되는 방식과는 무관하다.  자유주의적 제도와 결합하면 자유민주주의가 되고 1인에게 대중의 뜻을 위임한다면 전제적 민주주의, 즉 대중독재가 될 수도 있다. 애초에 과정(제도)보다 결과(성과)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뭉크가 적절히 지적하고 있듯이 자유주의가 없는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가 곧 포퓰리즘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It’s economy, stupid!),” “먹고사니즘,”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와 같은 구호가 각국의 정치판에 등장할 때부터 이미 포퓰리즘이 부활할 토양은 마련되고 있었다. 민주정의 충동을 제어하던 자유주의적 정치제도가 이제는 속박과 억압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3.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결국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조건부 결혼을 가능케 했던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기반은 냉전의 종식과 세계화의 물결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선 자본의 세계적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기업의 생산, 판매, 유통이 국경을 초월하는 상황이 보편화되면서 국민국가는 경제적으로 안과 밖을 구분하기 어려워졌고 ‘국민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결과적으로 재분배 정책 또한 약화되었다. 우리가 GNP(국가총생산) 대신 GDP(국내총생산)을 더 많이 듣고 말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문제는 자본(화폐, 상품)의 이동이 자유로워진 것에 비해 노동(인간)의 이동은 여전히 제한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화의 이득이 불균등하게 분배되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재분배 정책 효과의 약화와 함께 국내적으로 빈부 격차를 심화시켰다. 프랑코 밀라노비치가 제시한 그 유명한 
‘코끼리 그래프’는 세계화의 과실이 선진국의 최상위층과 개도국의 중산층에게 집중적으로 돌아가는 반면, 선진국의 중산층 이하는 오히려 실질소득이 악화되는 양극화가 뚜렷이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참조)

자유주의-민주주의 결합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한계에 봉착했다. 앞서 언급했던 경제정책을 위시해 환경, 에너지와 같은 초국가적, 범세계적 문제들이 등장하면서 어떤 정부도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현안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이러한 새로운 이슈들은 모든 국가들의 동참과 협력에 대한 확약(commitment)과 조정(coordination)이 필요하지만 이탈하는 국가가 최대의 이득을 보면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 상황을 유발하면서 결과적으로 각국 위정자들을 딜레마에 몰아넣었다. 즉, 자국에 (단기적으로) 최선이 되는 정책이 아님에도 채택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을 유권자들에게 설득해야 하지만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반대로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런 상황의 반복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성과와 대표성에 대해 유권자들이 의구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럽연합(EU)과 각국 중앙은행의 사례는 이러한 대표성(representativeness)의 위기를 교과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게다가 이러한 초국가적, 세계적 이슈들은 단기적 해결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단기적으로 개인과 개별 국가에 (이전에 부담하지 않았던) 상당한 제약과 비용을 부과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문제가 단적인 사례다. 문제는 이러한 조정과정에서 (선진국의) 저소득층, 빈곤층, 덜 교육받은 계층이 상대적으로 가장 큰 비용과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의사결정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성과(performance) 측면에서도 각국 정부는 과연 대중의 이익을 대표하고 있느냐는 지탄을 받기 십상인 구도다.

이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 전문가에 대한 불신과 반지성주의 풍조와도 연관된다. 뭉크도 언급하고 있듯 선거비용이 극적으로 증가하면서(104-115쪽) 사실상 금권정치화가 진행되고 학력, 재산, 인맥의 관점에서 특정 집단, 심지어 소수의 특정 가문이 정치계를 과점하는 정치계급화는 이들을 ‘대중(the public)’과 유리시키면서 ‘정치전문가 집단’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증폭시켰다. 한편으로는 정치를 혐오하면서도 ‘기존 정치’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정치인(아웃사이더)에 열광하는 세계적 흐름은 이러한 정서와 완벽히 부합한다. 

또한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지성을 ‘위임’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사실은 자기 집단의 이익 추구에만 몰두해 거짓 정보를 전파하고 있다는 (과장된) 두려움과 믿음은 더욱 ‘평평한(level)’ 정보통신기술의 확산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The Death of Expertise> 참조.)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면서 오히려 전문가에게 판단을 믿고 맡길 수 있었던 시대는 가고 매번 모든 정보를 의심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국민국가 체제의 약화, 경제적 세계화가 초래한 불평등, 정보통신기술의 변화에 따른 정보의 무차별적 유통,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결합되면서 벌어진 대표성의 위기와 전문성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집약되어 나타난 현상이 바로 반이민 운동이다. 이민의 규모나 추세를 보면 (아마도 미국을 제외한) 어느 나라에서도 기존의 인종/문화적 주류 집단이 그 지위를 위협받을 가능성은 낮음에도 미래의 삶에 대한 불안이 대중의 감정을 지배하면서 작은 위협도 크게 다가온다. 

이는 경제학적, 뇌과학적으로도 설명가능한 현상이다. 인간은 이득보다 손실에 민감하며 인간의 뇌는 현재 상태의 절대적 수준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즐거움, 두려움)에 따라 만족하거나 불만을 품는다.(<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 참조.) 또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성취지위를 잃거나 애초에 획득에 실패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귀속지위(인종, 언어, 국적, 성별)에 집착하고(298쪽) ‘좋았던 옛날’과 ‘불안한 미래’를 대비시키게 한다.

4. 민주주의 4.0, 멋진 신세계, 혹은 1984?

그렇다면 주류 집단의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공포와 분노를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고 이들을 교화하고 계몽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까? 아니면 뭉크나 잉글하트가 해결책으로서 제시하고 있듯이 조세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해 빈부 격차를 완화하고 계급의 고착을 억제하면 자유민주주의에 충분한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는 그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문제해결 이론(problem-solving theory)만으로 미봉할 만한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잉글하트와 뭉크도 인정하듯이, 자동화의 확대와 더욱 강력한 인공지능의 출현은 경제적 세계화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파급효과를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이득은 (정치적으로 적절히 조정되지 않으면) 더욱 불균등하게 분배될 가능성이 크다.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보급은 본질적으로 더 많은 노동을 자본으로 대체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공유경제가 붕괴된 기존 공동체를 대체할 새 공동체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도 시기상조다. 뭉크가 우버(Uber)의 사례를 통해 지적하고 있듯이(300쪽) 공유경제는 오로지 경제적 동기에 따라 한시적으로 연결된 수많은 공동체들을 만들었다가 해체할 뿐이며 오히려 장기적이고 지속성 있는 유대를 형성하는 기존 생활공동체(그것이 가구(household)이든 직장(company)이든)를 잠식하고 대체한다.

그렇다고 소수자 집단 보호와 개별성 존중에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는이른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답이 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뭉크 역시 이러한 ‘신좌파’ 중에서도 극단적인 측에서 강조하는  ‘문화적 전유의 전면적 거부’가 결국은 극우적 순혈주의와 동전의 양면임을 이론적으로 명확히 드러내고 있으며(261-263쪽), 현실 세계에서도 정체성 정치에 함몰된 정치 세력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는 지난 대선 미국 민주당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어주었다(<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참조). 개별성에 대한 존중은 결국 공동체성을 약화시킨 대가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안적인 공동체성을 제시하지 못하면 이 방향의 운동 역시 역사상 수많은 급진 운동처럼 단명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뭉크가 제안하고 있는 ‘포용적 애국주의’가 한 가지 답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기 위해서는 강렬한 공유 기억(shared memory)이 필요하다. 집단(에 속한 다른 구성원)과 나의 경계를 흐릴 수 있는 경험과 기억, 즉 ‘우리’의 관념을 강화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일시(identification) 혹은 경계의 모호함이 없어지면 근본적으로 가정도, 국가도, 공동체도 성립할 수 없다. 뭉크도 지적하듯이 이 부분에서는 교육 또한 큰 역할과 책임이 있다. 단지 사물에 대한 판단력만 있는 기술자를 길러내는 교육이 아니라(313쪽) 인간에 대한 판단력 또한 갖춘 철학자를 길러내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실의 모순에 대한 치열한 비판은 공화주의적 덕성에 대한 강조, 그리고 모든 인간과 세계의 숭고함에 대한 존중과 경외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매트릭스 속에 들어가지 않는 한 생각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라는 관념을 가진 물리적 실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또한 그에 걸맞은 호구지책이 따라야 한다. 다만 그것이 뭉크나 잉글하트가 제시하는 조세제도의 개편이나 조세회피처에 대한 추적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세계경제는 있지만 세계정부는 없고, 자본 이동은 자유롭지만 노동 이동은 제약받는 근본적인 불균형 상황이 교정되어야 한다.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정치체가 등장해야만 해결될 문제다.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이 언급했듯 20세기 동안 민주주의는 세 차례의 부침(wave)을 겪었다. 민주주의 첫 물결(대중 민주주의)은 고전적 자유주의를 무너뜨렸지만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대두와 함께 잦아들었고 그와 함께 제국주의도 함께 몰락했다. 두 번째 물결(반공산 민주주의)은 자유주의-민주주의-시장경제가 결합된 형태로 세계의 수많은 신생 국가들에 이식되었지만 일련의 군사 쿠데타와 공산화로 무너지거나 사실상의 독재로 변질되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도래한 가장 최근의 세 번째 물결(반독재 민주주의)이 자유주의와의 결별과 함께 스러져가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러운 소식은 불꽃이 꺼져가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민주주의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 목도하고 있는 변화가 <시작된 미래>에서 피터 프레이즈가 예견하고 있듯이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라면, 우리가 기대하고 구상해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 4.0’이 아니라 전혀 다른 정치체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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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관사를 설명합니다
Benjamin McBride 지음 / 사람in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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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꽤 한다고 자타가 인정하지만, 매우 더 잘하고 싶은 사람

새해 들어 처음 다 읽은 책이다. 유익한 내용과 깔끔한 설명에 연초 벽두부터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일설에는 서울대 언어교육원 영어 관련 질의응답 게시판에는 "관사에 대한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라는 공지글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관사, 그 중에서도 정관사 the는 체계적이고 일괄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한마디로 "왜 거기에서 그렇게 쓰나요?"라는 질문에 "그냥"이라고 답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품사이고 단어다.

이 책은 그 "그냥"을 뛰어넘어 외국인으로서 영어를 배우는 한국인들이 관사를 좀 더 정확하게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침서이자 교본이다. 관사로 고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의 전반부에, 그리 길지 않은 관사 사용의 원칙 부분만 읽어도 감탄할 정도다.

이어지는 책의 8할은 글의 종류별로 관사 사용의 사례를 연습할 수 있는 예문 모음이다. 앞에서 배운 원칙을 기억하면서 예제문의 빈칸들에 정관사/부정관사/무관사를 골라서 넣어보고 답과 해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문제를 풀다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부분도 있고 해설을 읽어도 애매한 곳들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기 전에는 관사에 대한 이해가 30%였다면 정독하고 문제를 열심히 풀고나면 적어도 60% 정도까지는 이해가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책에서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듯이 남은 40%는 정말로 영어라는 언어와 그 문화, 그리고 그 사용자들 사이의 관습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영역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을 배우면서 언어는 사실의 객관적 반영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임을 절절히 깨닫게 된다. 애초에 정관사를 쓸지 말지를 판단하는 가장 큰 기준이 화자와 청자의 '공유지식'이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이 대상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화자는 the를 쓰고 그렇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런 점에서 the는 대화하는 사람들 사이에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이 한 마디로 처리되는 '거시기'와도 닮아있다. '우리의 거시기는 거시기가 뭐시기 헐때꺼정 거시기하는 것'이라는 문장을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 사람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거시기하겠는가. the도 그렇다.

좀 더 연구해서 나도 나만의 관사 설명법을 만들어봐야겠다.

P.S. 79(mechanic), 173(error), 273(only) 페이지 정답에 the가 빠져있다. 이어지는 해설에는 제대로 the가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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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전쟁 -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
그레이엄 앨리슨 지음, 정혜윤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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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 (2018) 

책의 흥미로운 내용에 관한 평을 쓰기에 앞서  
화려한 오역의 향연을 먼저 감상해보자.

전문서 번역은 전공자한테 맡기지는 못할지언정 감수라도 받자. 
제발.

1. 리하르트 노이스타트(Richard Neustadt) 

-> 리처드 뉴스타트
미국 출생, 미국인이다. 
아니면 리하르트 노이슈타트라고 하든가.

2. 매슈 페리와 그의 함대 블랙십(Black Ship) 

-> '구로후네' 또는 '흑선' (黒船) 
페리가 잭 스패로우도 아니고 함대명이 블랙십인가?

3. 프랑수아가 동맹국들을 카를을 자극할 졸로 삼아

-> pawn '앞잡이', '장기말', 하다못해 '졸개' 정도로 옮겼으면

4. 새로 만든 15인치짜리 총 

-> 15인치 포(gun)
15인치 구경 총 쏴보셨습니까? 키야 손맛이 아주 그냥!!(쥬금)

5. "그러나 우리도 이제 아늑한 양지 쪽 자리를 요구합니다."

-> "허나 이제 우리도 양지에 한자리를 잡으려 한다."

"a place in the sun"의 번역은 그렇다치고 당당하게 강대국 반열에 들겠다는 선언을 하는 제국 수상의 말투치고는 너무 얌전하지 않은가? 

제가 영국 아바탑니까? 갑독일입니까?
독일의 위상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 누굽니꽈아아아!

6. 빌헬름은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런 뒤에 루스벨트를 향해 강하게 힘주어 말했다. "저는 영국을 흠모합니다."

-> 이것 또한 말투 문제. 카이저가 (당시) 2류 국가 대통령에게 쓸 말투는 아니지 않은가? 

"짐은 영국을 흠모하오." 까지는 아니라도 
"나는 영국을 흠모하오." 정도는 되어야.

7. 새 해군제독 존 '재키' 피셔 장군은...에드워드 왕에게 처음으로 건의했을 때 왕의 반응은 이랬다. "세상에, 피셔 장군, 당신 미쳤군요!"

-> 원문 어디에도 장군(general)은 없고 제독(admiral)만 있다. 

-> 또한 보통 서양의 왕을 지칭할 때는 구분을 위해 '에드워드 7세'라고 하지 '에드워드 왕'이라고 하지 않는다. 앞서 '빌헬름'도 마찬가지. 

->그리고 왕이 자기 신하인 제독에게 저렇게 말할 리가. "세상에, 피셔 경, 자네 미쳤구만!(My God, Fisher, you must be mad!)"이라고 하든지.

8. 그는 한때 자신의 조카에 대해서 "윌은 불량배같은 놈이야. 불량배들은 반격을 당하면 대부분 겁쟁이가 되지.".

-> 유럽 왕실에서 빌헬름 2세의 애칭은 빌리(Willy)였다. 왜 제멋대로 y를 삭제하나? 

그리고 most bullies, when tackled, are cowards 는 "대개 깡패(불량배)들은 제대로 붙어보면 겁쟁이지."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9. 1815년 이후 9년 동안 이어졌던 프랑스와 영국 간의 해군 경쟁이었을 것이다. 

-> 9년이 아니라 90년(ninety years)이다.

10. 금은 캐나다에 있었지만 미국이 바다에서 육로로는 대체로 접근이 불가능한 클론다이크 강으로 가는 중요한 통로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 대체 무슨 말인가??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gold was in Canada but the US controlled the critical routes from the ocean into the Klondike, which was largely inaccessible by land."

(금은 캐나다에 있었지만 바다에서 클론다이크 강으로 들어가는 요로[중요한 길]는 미국의 차지였고 육로는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11. 중심부에서 '두툼한 꼬리' 부분이 남쪽으로 500미터쯤 뻗어...

-> 500 미터가 아니라 500마일("fat tail" extends some five hundred miles south)이다. 500미터면 세계지도에서 보이지도 않는다.

12. 그는 유라시아를 세계도(世界島)라고 이름붙이고

-> 그냥 매킨더가 썼더 원어 그대로 'world island'라고 써줬으면 이해하기 수월했을 것이다. 왜 굳이 어색한 한자를 썼는지 도무지...

유라시아를 지정학적 관점에서 하나의 거대한 섬으로 본다는 뜻이다.

13. 손자의 전통에서는 전략적 상황이 발생하는 맥락의 흐름이 중요하다. 그게 그 상황의 '시時'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 치명적인 오역. 시가 아니라 '세(勢)'다. 

손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시간인가? 
원문은 Shi라고 되어 있고 뒤에 프랑수아 줄리앙의 언급 등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분명히 세(勢)를 가리킨다.
 
14. 방화범에 의한 화제 

-> 화재
방화범이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심지어 같은 페이지에 동일한 오역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

15. '전쟁에 낀 안개' 

-> 전장(전쟁)의 안개(fog of war) 
(혼란한 전투 상황에서의 불확실성과 혼돈, 상충하는 정보의 범람을 가리키는 군사 용어다.) 

16. 미 국축함 

-> 미국 구축함 또는 미 구축함

17. 타이완 대통령 

-> 타이완 총통
타이완에 대통령이 계신 줄은 처음 알았읍니다.

18. 호위 작전을 수행하는 미국 전함들은 

-> 미국 군함(warships)들은 

전함(battleship)은 군함의 한 종류(class)다. 
전함은 죽었어! 이젠 없어!
전함이 살아돌아오다니 타임머신인가?

19. 민족주의자들의 행동에 쐬기를 박는다 -> 쐐기

이말년 화백과 함께 뻐카칩에 쐬주를 먹고 싶어진다.

20. 국경 근처에 놓아둔 수천 개의 포
->휴전선 인근에 배치된 수천 문의 포

번역을 보고 있으면 대포 장난감 같은 어감이고 그렇다.
무엇보다 북한 장사정포 얘긴데 휴전선을 국경이라고 하다니 어느 나라에서 오셨는지?

21. 장 모네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 같은 현명한 

-> 로베르 슈망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은 작곡가다. 
로베르 슈망은 프랑스 사람이다. (이마짚)

22. 냉전은 최후의 격돌이 아니라 낮은 훌쩍거림으로 종말을 맞았다. 
(thus ended with a whimper) 

-> with a whimper는 '맥없이', '어이없이'라는 뜻의 관용구다.

23. 독자들 중에는 비스카운트 에셔 같은 고위직 관리들도

-> 에셔 자작子爵 이다. 비스카운트가 이름이 아니다.
발음조차 틀렸다. 바이카운트다.

24. 사실상 '하늘로부터 받은 권한' 

-> mandate from heaven 천명天命
중국 얘기면 당연히 이렇게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25. 우겨넣으려는 -> 욱여넣으려는

26. '새로운 형태의 강대국 관계'를 만들어내자고 제안한 적이
-> '신형대국관계(new form of great Power relations)' 

시진핑 주석이 했던 제안의 원래 명칭이 '신형대국관계'다.

27. 레이건의 말을 오해한 러시아 통역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 raised eybrows는 (놀라거나 거부감에) '눈을 휘둥그레 뜨다'라는 뜻이다. 눈썹을 치켜올렸다는 표현은 한국어에서는 분노의 표현으로 더 많이 쓰인다.

28. 아키라 이리에入江昭 

-> 이리에 아키라 
일본인 이름이면 성-이름 순서로 써야.
심지어 한자는 제대로 써놓고...

29. 국무장관 존 헤이는 스스로 '개방 규칙'이라고 부른 것을 발표하여

->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이라고 해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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