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 미국 민주당의 실패에서 배우기
토마스 프랭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1. 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는지 여전히 궁금하다면
2. 미국 정치의 현실을 알고 싶다면
3. '진보' 정치세력이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면

세 줄 요약

중하층 미국인들에게는 더 이상 정치적 대변자가 없다. 
오죽했으면 트럼프에게서 대안을 찾았을까.
능력주의에 대한 종교적 광신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지.


1. 내가 망해봐서 아는데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세계의 수많은 정치 전문가들은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을 당연시했다. 감히 트럼프처럼 정치를 희화화하고 격하시키는 후보를 유권자들이 선택할 리 만무하다고 ‘믿었다.’ 그 ‘배운 사람들’의 의견이 정말 헛된 ‘믿음’에 불과했음은 금세 드러났지만, 그 이후에도 이러한 ‘트럼프 신드롬’은 포퓰리즘, 미국의 쇠락, 자살적인 선택과 같은 부정적인 평가로 덧칠되었다.

그러나 대선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토마스 프랭크는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이라는 책을 통해 그처럼 대중을 내려다보고 계도하려는 소위 전문가들의 오만한 태도, 그리고 갈수록 그러한 엘리트주의에 영합하는 민주당의 노선 변경이야말로 사태의 근본원인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트럼프 현상이 미국 정치에 내재된 ‘잭슨주의적 속성’이며 나아가 엘리트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에 대한 대다수 중하층 유권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나의 분석과도 맥이 닿아 있다. (주간경향 2016.11.12.)

많은 평론가들이‘중산층의 몰락’ 혹은 중간소득의 붕괴라고 쉽게 일반화하는 현상은 프랭크가 지적하다시피 그렇게 단순하지도, 추상적이지도 않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직장이 문을 닫고, 자식의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고, 돈이 없어 아프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빚 때문에 말 그대로 집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는 일들이 이웃들에게, 옆집에,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산층의 붕괴가 뉴스 기사 제목 정도로만 생각된다면 당신에게 그 여파가 미치지 않을 만큼 아직 운이 남았기 때문이다.)

아사히 신문의 미국 특파원인 가나리 류이치가 2016년 대선 기간 쇠락한 미국 제조업의 대표 지역인 미국 중서부, 이른바 러스트 벨트(rust belt) 주민들을 취재한 기록인 “르포 트럼프 왕국”을 보면 심지어 수십 년간 민주당원이었고 4년 전만 해도 오바마에게 표를 던졌던 사람들마저 왜 트럼프를 지지하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배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어리석고 감정적이고 ‘못 배워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충분한 논리와 상황이 있었고 트럼프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건드린 것이다. 반면 민주당은,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은 그들의 논리와 상황을 이해하려하기는커녕 ‘좋은 말 대잔치’로 일관했다.

아니, ‘좋은 말 대잔치’뿐이었다면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른다. 프랭크가 지적하고 있듯이, 미국 유권자들은 클린턴 이후 민주당 정권이 어떻게 전통적 노동계급, 중산층 계급을 배반하고 그들의 삶의 기반을 잠식하는 정책을 펼쳤는지를, 비록 정확하게 집어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되었다. 그 정책들이 자신들의 삶을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망가뜨리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프랭크가 민주당에게 “제발 들어라.”라고 외치고 있는 것은 민주당 지도부가 그런 실패조차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감의 발로다. 자신들이 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패배한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민주당의 정체성이 표변한 것이다. “문화적인 쟁점에 대해서는 그토록 거리낌이 없는 민주당의 지도자들이지만 기본적인 경제 민주주의 문제에만 직면하면 한순간에 행동하길 멈”추는 첫 번째 원인은 주지하다시피 민주주의의 금권정치화에 있다. 갈수록 선거는 ‘쩐의 전쟁’이 되어가고 있고 선거법조차 이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전통적으로 ‘노동자의 친구’였던 민주당도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따라서 친기업적이고 부자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랭크가 보기에 이는 반쪽짜리 설명에 불과하다. ‘돈의 정치’만큼이나 민주당의 성격을 변질시킨 것이 바로 ‘학력의 정치’ 혹은 ‘능력주의 정치’라고 프랭크는 일갈한다. 즉, 고학력 전문직에게 대부분의 정치 의제와 정강을 잠식당한 것이 민주당의 현 상황이라는 것이다. 공화당이 ‘1퍼센트의 정치’라면 민주당은 ‘10퍼센트의 정치’가 되어버렸다고 그는 한탄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능력 있는 사람,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사람이 그에 걸맞은 일을 하고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능력주의는 그야말로 최선의 이념 아닌가?

2. 운칠기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즉 현대(modernity)의 속성을 탐구한 것으로 유명한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모더니티의 본질이 유동성(liquid-ness)에 있다고 보았다. (지그문트 바우만 2009 “액체 근대”)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할 수 있으며, 변해야 한다는 것이 근대를 규정하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변화는 좋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나아지고 진보할 수 있다! 반면 어제와 같다는 것은, 한결같다는 것은, 변치 않는다는 것은 나태와 무지와 등치된다. 정체는 죄악과 동일시된다.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아무튼 진보와 발전은 좋은 것 아닌가? 

물론 추상적인 의미에서 개선, 진보, 발전은 긍정적 의미를 함축한다. 어제보다 더 지혜로워지고, 지식이 늘고, 더 좋은 삶을 살고, 더 나은 환경을 누리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항상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우리가 추상적으로 말하는 진보, 개선, 발전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물, 생활양식 그리고 제도와 연관되느냐가 우리의 정체성을, 그리고 정신을 더 정확히 규정한다. 더 많은 지혜와 지식은 더 높은 학력, 더 고급의 학위로 대치되고, 더 나은 환경과 더 좋은 삶은 결국 더 큰 집, 더 안락한 자동차, 더 쾌적하고 안전한 동네, 그러니까 더 많은 경제력으로 치환된다.

물론 모두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최선일 것이다. 유동적 근대의 또 다른 면은 신분이나 인종, 성별과 같은 어떠한 제약도 없이 그러한 ‘발전’과 ‘진보’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원론적으로는 말이다. 능력주의는 바로 이러한 사상적 토대에서 출발한다. 누구에게나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이라면 결과가 어떻든 승복하지 않겠는가? 네 결과가 안 좋다면 결국 그것은 네 능력 부족 혹은 노력의 부족이다. 이 얼마나 공정한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의 능력(merit)은 능력주의(meritocracy)가 전제하고 있는 것만큼 그렇게 순수하거나 진공상태에 있지 않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사회학과 스티븐 맥나미와 로버트 밀러 교수가 “능력주의는 허구다(The Meritocracy Myth).”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는 개인에게 귀인할 수 있는 능력의 영향은 과대평가하고 비능력적 요인은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이미 우리 모두는 출발점, 그러니까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것들의 양과 질에서부터 다르기 때문에 애초에 동일한 능력을 갖고 평가될 수 없다. 

게다가 그 상속은 단순히 물질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인맥, 학력, 그리고 부르디외의 용어로 유명한 문화자본과 같은 비물질적 요소들까지 포함하는 광범한 차원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보면 오바마와 민주당이 그렇게 강조하는 ‘양질의 교육’은 평등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사회적 계층을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저커버그와 빌 게이츠,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과연 이 시대에 하류계급에서부터 잔다리를 밟고 올라와 자수성가한 사업가와 고학력 전문직 가정에서 태어나고 명문 대학을 졸업한 사업가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면 ‘보이지 않는 상속’의 힘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3. 민주당의 전향

그렇다면 미국 민주당은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프랭크가 2장에서 미국 국내 정치의 이른바 탈뉴딜화(de-NewDealization) 과정, 한 마디로 공적 영역의 축소가 대세가 된 과정을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기도 하지만 좀 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노선 변경은 국제정치적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전략적 선택이었다. 즉, 베트남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반전사상의 만연이 초래한 애국심과 공적 가치의 절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의 실패로 인한 정부 능력에 대한 불신 증가, 그리고 일본 등 신흥 산업국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는 경제적 위기감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탈물질주의, 개인주의, 민영화, 경제 우선주의라는 기묘한 조합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일견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이념들의 공통분모는 바로 정치, 그리고 공적 영역의 축소다. (개인과 기업을 포함하는 모든 사적 주체들은) 각자가 각자의 자유를 최대한 누릴 때, 즉 (보조든 규제든)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할 때, 각자 최대한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공산권의 붕괴는 이러한 시대 조류의 화룡점정이었다. 정부와 관료라는 공적 기구가 계획을 통해 사회적으로 최적의 분배를 달성한다는 공산국가의 이상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이는 공공 영역에 대한 시장의 승리로 간주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풍요로운 삶을 약속했던 대안적 이념이 패배하면서 시장-자유주의는 이제 유일한 게임의 법칙(The only game in town)이 되었다. 동시에 각국의 전통적인 좌파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90년대 중후반에 유행했던 이른바 ‘제3의 길’에 대한 논쟁 역시 ‘역사의 종언’ 이후 진보 혹은 좌파의 존재이유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미국 민주당의 행보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시장기제가 모든 공적, 사적 영역에 지배적이고 무오류적인 규칙으로 수용되면서 모든 것은 효율성 제고, 경쟁의 승리, 성장과 팽창이라는 기준에서 평가받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인 삶에서의 평등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은 전통적 좌파가 이러한 상황에서 제안할 수 있었던 유일한 비전이 결국 능력주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기준이 객관적이고 기회가 동일하게 주어진다면 충분히 평등하지 않겠는가? 경쟁을 통한 성장이 결국은 모든 배를 띄워주지(float everyone’s boat) 않겠는가? 

4. 능력주의의 무능력

그러나 문제는 객관적 기준은 그렇게 객관적이지 않으며 동일한 기회는 그렇게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출발선의 아주 작은 차이도 엄청난 결과의 격차를 초래할 수 있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연구 “교육-일자리 격차(Education-Jobs Gap)”에 따르면 재능이 고르게 분배되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부유한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학 학위를 취득할 가능성은 나머지 인구에 비해 두 배 이상 크다. 결국 노동 인구에 편입되기 전부터 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차별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개인의 잠재력은 충분히 발휘되기도 전에 매장되는 것이다. 

심지어 언제 태어나고 언제 노동시장에 처음 진입했느냐도 이후의 경력과 삶에 지대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사회학자 아네트 베르나르의 연구를 위시한 여러 유사한 연구들은 사회생활 시작 단계에서의 임금 격차와 고용안정성에서 나타난 작은 불평등이 장기적인 임금증가율에 영향을 미치면서 심각한 불평등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밝혔다. 능력보다 타이밍이라는 말이다. 젊은 세대가 “지금 같으면 취직도 못할 멍청이들”이라고 상사들을 ‘까는’ 것은 그저 치기어린 불평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능력주의의 본질적인 한계와 모순을 더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준과 절차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켰다. 정신분석학자 파울 페르하에허는 규제 완화와 자유화를 모토로 삼은 기제가 공정한 평가를 명분으로 수많은 규제를 만들어내고 미궁과 같은 법규와 규칙에 따라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평가절차를 수행하는 거대한 관료제를 만들어내는 역설적인 상황을 언급한다. 병원에서 끊임없는 평가의 대상이 된 의료진들은 팀원 의식이나 협력, 무엇보다 환자의 안위에조차 무심해진다. 오로지 행동을 평가의 기준에만 맞추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평가를 (받기) 위한 행정과 관리 업무가 원래 업무 시간까지 잡아먹는다.

게다가 ‘객관화된 수치’에 따른 평가는 그 평가대상의 원래 존재 목적마저 왜곡시킨다. 병원에서 사망하는 환자 수가 많아져서 평가가 나빠진다? 중환자나 긴급환자는 이제 받지 않으면 된다. 이윤이 줄어든다? 더 싼 재료를 쓰면 된다. 품질이 나빠진다고? 수치로 드러나는 부분만 챙기면 된다. 이러한 현상은 심지어 학계에서조차 보편적으로 일어난다. ‘객관화된’ 업적 평가를 받기 위해, 매년 정해진 논문 발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누구도 읽지 않는 논문이 양산된다. 그저 품질만 나쁘다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좋은 ‘객관적’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위조와 사기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전염병학자 존 아이오애니디스(John Ioannidis)는 “왜 출판된 연구 결과들은 대부분 위조인가”라는 획기적인 논문을 썼고, 2011년 강연에서는 6년이 지났지만 전혀 변한 것은 없다고 한탄했다. 그로부터 6년도 더 지났지만 와셋(WASET) 스캔들과 이른바 ‘제2의 소칼 사태’ 등을 보면 여전히 상황은 그대로다. 

결국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서는 최고의 능력자들을 선발해 최선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게 하면 된다는 능력주의의 이상은 애초에 능력과 성과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지조차 불분명했고, 평가의 기준을 객관화하고 계량화할 수 있는 영역으로 축소함으로써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상황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능력이라는 요인이 (개인과 조직의) 성과와 성공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함으로써 그 외의 우연적, 환경적 요인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과 격차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했다. 그럼에도 ‘공정한 능력주의’라는 지배적 서사는 여전히 진리의 자리를 독점하고 있다. 올 초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을 두고 벌어진 이른바 ‘공정의 역습’(시사in, 2018.3. 5.), 그리고 그에 앞서 나타난 ‘일베식 공정성’ (시사in, 2014.9.29.)은 능력주의가 지금보다 더 엄격하고 ‘공정하게’ 적용되기만 하면 사회가, 그리고 내 삶이 나아지리라는 강력한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5. 능력주의: 제2의 우생학

권력과 금전적 보상이 큰 자리가 더 능력 있는 사람들로 채워지면 자연스럽게 사회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더 높은 자리가 더 능력 있는 ‘인종’으로만 채워지면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할 사람이 있을까? 이 지점에서 능력주의와 사회진화론은 명백히 다르다며 펄쩍 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해보면 둘의 유사점은 금세 드러난다. 둘 모두 궁극적 목표는 적자생존이다. 강하고 유능한 자는 보상받고 나머지는 도태된다. 또 다른 유사성은 바로 유전적(생물학적) 요인에 대한 강조다. 사회진화론이 타고난 ‘인종’에 따라 순위가 매겨진다고 보았다면 능력주의는 순수하게 타고난 ‘능력’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사회는 이들이 사다리 위쪽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 논리의 치명적 약점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어차피 성공할 사람(인종)이라면 왜 굳이 사회가 나서서 이들을 뒷받침해주어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사회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적자(the fittest)’는 가장 강하거나 능력이 있다는 뜻도 아니거니와 오로지 사후적으로만 확정될 수 있는 개념이다. 말 그대로 주어진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가 더 높은 확률로 자기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전혀 다르다. 사회진화론도 능력주의도 무엇을 적자로 볼지, 어떻게 적자를 판별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습게도 적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적 승자’를 돕는다고 우기면서 ‘적자’들이 도태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한다. 2008~2009년 금융위기를 예측하지도, 제대로 대처하지도 수습하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이해조차 제대로 했는지 의심스러운 ‘최고의 인재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두둑한 보수를 받고 민간 부문의 높은 자리로 ‘영전’하는 상황에 관한 토머스 프랭크의 분노에 찬 서술이야말로 이러한 ‘작위적 적자생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 큰 문제는 ‘적합성(fitness)’의 기준이 너무나 획일화되고 단순화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결국 지금의 능력주의는 ‘경제적 능력주의’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경제적 가치-라고 쓰고 ‘돈’이라고 읽는다.-를 창출하지 못하는 모든 활동은 무능함으로 해석된다. 민주당 정권이 강조하는 ‘교육 능력주의’도 결국 ‘경제 능력주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지적 업적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한다. 이에 대해 파울 페르하에허는 “오늘날 ‘지성적’이라는 말은 욕이나 진배없다. “그렇게 똑똑한데 왜 돈을 못 버니?”라는 물음은 현실을 비판하는 논문의 농담 섞인 제목으로 그치지 않는”다며 냉소한다. 

6. “아아, 사적인 세계에 소비자만 가득해.”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시민으로서 마땅히 공유해야 할 덕성, 보다 쉽게 말해 다른 시민들과 조화롭게 어울려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 되어야 할 교육이 개인의 시장 경쟁력, 구체적으로는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는 기술과 능력(이 있다는 인증)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변해버린 상황은 마이클 영이 1958년 집필한 풍자소설 “능력주의의 출현(The Rise of Meritocracy)”에서 예견한 것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공적 주체로서 동등한 동료 시민은 사라지고 경제력, 더 정확히는 소비력으로 환원된 ‘능력’에 따라 서열화된 여러 소비자 계급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는 근대 민주주의가 어렵사리 달성한 ‘모든 이들의 정치적 평등’이라는 원칙, 즉 1인 1표의 가치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유대(bond)를 실종시킨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하다. 주권자로서 시민들이 정부와 공공기관에 요구하던 정치적 활동은 이제 기업에 대한 소비자의 불매운동과 소송으로 대체되었다. 존스홉킨스 대학 정치학 교수 매튜 크렌슨과 벤저민 긴스버그는 이러한 현상을 “대중민주주의에서 개인민주주의로의 전환”으로 칭한다. 이제 국가가 시민에게 제공하는 것들마저 이제는 행정 ‘서비스’가 되어버렸고 그마저도 상당부분 민영화되어버리면서 시민이 정부에 직접적으로 항의하고 정치적 해결을 요구하는 과정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그 대표적인 예가 다양한 공공서비스 제공에 사용되는 바우처(voucher)이다. 바우처를 통해 시민은 일순간 소비자로 역할이 바뀌면서 집단행동의 기회를 상실한다. 예를 들어, 공공 주택 프로젝트를 주거 바우처로 대체하면 임차인 위원회가 공공 주택 당국(정부)에 집단적 요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진다. 대신 당국으로 향했던 공동의 요구는 집주인에 대한 임차인의 개인적 불만으로 해체되는 것이다. 즉, 정부가 시민의 요구를 직접적으로 응대하고 해결해주는 역할에서 물러나 돈이나 그에 준하는 것을 이전(transfer)하고 나머지는 개별 소비자가 시장에서 알아서 해결하게 하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행정과 시장만 있을 뿐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전통적으로 ‘사회 문제’로 간주되는 빈곤과 재분배의 문제조차 이제는 시장이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프랭크 토머스가 10장과 11장에 걸쳐 서술하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의 ‘연민사업’이 정확히 이에 부합한다. (이미 혁신적이고 유능한 부자들이 제공하는) 교육과 금융 서비스를 통해 빈곤계층이 스스로 창업한다면 빈곤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토머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소액대출, 정보화 사업 등은 빈곤해결에 기껏해야 미미한 효과만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긴스버그가 ‘자선자본주의(philanthro-capitalism)’라고 부르는 이러한 움직임은 원조, 개발, 자선, 나눔이라는 명목 하에 경제적 위계를 고착화시키고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을, 때로는 정치적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을 탈정치화(de-politicize)한다. 동시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앤젤 투자, 임팩트 투자 등의 이름으로 기업의 이윤 창출은 공적 서비스와 혼동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이윤 추구를 조금이라도 포기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오히려 그들이 서서히 잠식해들어가는 공공 서비스의 품질이 나빠질 뿐이다.

미국 정치의 맥락에서 요약하자면 공화당은 사적 영역을 지키기 위해 공적 영역의 확대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제한하고 반대로 축소시키려고 한 반면, 민주당은 공공 영역을 보다 ‘능률적으로’ 지켜내겠다는 명목으로 사적 주체들의 잠식을 허용하고 어느 순간은 둘 사이의 경계를 분간조차 할 수 없도록 뒤섞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의 핵심에 능력주의와 선부(善富)에 대한 이상적 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학벌주의, 전문가에 대한 맹신, 인맥, 그리고 스스로 선하다는 자기 최면에 지나지 않았다고 프랭크는 일갈한다.

7. 더럽고 치사해도

하지만 시민에 대한 소비자의 승리, 정치에 대한 시장의 승리는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정책을 ‘쇼핑’하고 정치인의 ‘오디션’을 본다는 한국 사회의 논의 역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인들 중 경제적 담론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 바탕에는 시장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깔끔’한 반면, 정치는 더럽고 비효율적이고 당파적이며 감정적이라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원래 정치가 그런 것이다. 시장이 이미 가치 있다고 규정된 것들-즉, 돈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을 견주고, 교환하는 곳이라면 정치는 대체 아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가치를 설득하고, 반박하고, 판정하는 가치 판단의 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치 판단은 결코 합리와 이성만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 아니다. 모리치오 비롤리가 지적하고 있듯, 성공적인 정치적 설득은 로고스(logos)만이 아니라 파토스(pathos)와 에토스(ethos)를 반드시 수반한다. 결국 사적 영역(시장)이 깔끔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만큼 공적 영역(정치)에서 격렬하고 때로는 추잡하기까지한 싸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몇 세대 전만 해도 정치란 문자 그대로 피와 살이 튀는 활동이었고,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정권 교체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음을 생각하면 그나마 지금의 정치가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트럼프 신드롬을 포함해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주의와 포퓰리스트의 득세 현상은 결국 ‘깔끔해진’ 정치가 포섭하지 못한 공중(public)의 정치적 의사표출, 공중의 귀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공적 영역이 해야 할 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역기능적 상황에서 각 정체(政體, polity)가 겪고 있는 열병과 같은 것이다. 열을 낮추는 대증요법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나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에 존재했던 공과 사의 엄격한 분리가 로마 시대에 소키에타스(societas)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인해 혼재되고 변질되었다며 현대사회는 이를 명확히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적 영역이 맡아야 할 재분배, 복지, 기간시설 개보수의 역할을 영향력 있고 부유한 소수의 개인들에게 위임해버림으로써 모든 시민이 공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가 사적 시혜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 공동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것을 대체할 사회(society)는 사실상 시장이나 기업과 구별되지 않은 채로 개인은 소비자로서, 노동자로서 뿔뿔이 이산된 지금의 상황은 개인이란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던 고대 로마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귀결은 비슷하다. 우리 삶의 어떤 영역도, 심지어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조차 공과 사는 함께 존재한다. 국가가 우리 삶을 속속들이 통제해야 한다는 파시스트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차원에서 우리의 ‘사적’ 행위가 공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적인 것(res publica)의 편재성(어디에나 있음, ubiquity)을 망각한다는 것은 결국 그 자리를 사적인 것들이 장악하고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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