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반역실록 - 12개의 반역 사건으로 읽는 새로운 조선사
박영규 지음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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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 반역, 나라와 겨레를 배반함. 역사에 대해 공부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반역도 역사에 일부지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관점의 역사는 오직 승자 위주의 기록이라는 것을. 때문에 오늘은 짧게 배워왔던, 혁명과 반역의 기로에서 반역 이라는 이름을 걸게 된 인물들의 역사를 담은 책. “조선반역실록에 대해 짧게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변화에 피가 필요한 것인지 피가 변화를 부르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적어도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마음은 그러했다. 물론 역사엔 다양한 변화에 대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선한 정책으로 백성을 구휼하고자 했던 왕의 기록, 악한 정책으로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들의 기록. 하지만 그런 국지적인 변화가 아닌 세대를 뛰어 넘거나 새로운 이름을 시작하는 역사에는 꼭 피가 따랐다. 왕건이 고려를 세울 때 궁예를,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공양왕을.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피를 기꺼이 수반했다. 더 큰 역사적 흐름을 보았을 때,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반역을 다룬 조선반역실록을 읽은 후에 그 피는 좀 더 오롯한 색으로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성계로 시작한다. 첫 문장에서 작가는 화두를 던진다. “이성계는 역적인가? 혁명군인가?” 단순한 관점의 차이다. 조선사엔 혁명가로 기록되었을 것이고, 고려사엔 역적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소한 질문은 다소 일방향적인 역사만 배워왔던 나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질문이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 자본주의에서의 논리와 아주 비슷하다. ‘승자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것이 승자인 것처럼 기록된다. 때문에 이성계도, 이방원도 살아남았기 때문에 승자로서 역사의 일면을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반역실록에는 다양한 인물들의 반역이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를 시작해 우리가 익히 아는 수양대군, 이시애의 난은 물론 충직한 장군의 상으로 살았지만 죽어간 남이. 정여립등의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다.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인물은 아무래도 허균이다. 보통의 역사에서 기록된 허균에 대한 지식 및 알고 있던 기억은 홍길동전’. 최초의 한글 소설을 쓴 작가로서이다. 하지만 조선반역실록에선 그의 정치꾼으로서의 면모와 인물상등에 대해 면밀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가 홍길동전 같은 글을 쓰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그의 관직이나 지위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반역. 매혹적이면서도 위태로운 단어이다. 위를 꿈꾸고 개선을 꿈꾸는 야심가들과 그의 세력. 달콤한 권력의 맛과 수많은 밀고 당기기들. 3자의 눈에서 바라본 반역은 단순히 그 단어로서 치부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반역사라고 일컫고 싶을 정도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정사의 담백함도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정사의 이면에서 바라보는 반역의 역사는 탄산이 잔뜩 들어간 음료처럼 달콤하면서도 짜릿하다. 역사와 인간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꼭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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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역실록 - 12개의 반역 사건으로 읽는 새로운 조선사
박영규 지음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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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은 위험한 단어로 항상 생각해왔다. 피를 수반하고 수 많은 사람들이 이념아래 스러진다. 하지만 과연 반역이 없었다면 세상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적어도 지금의 모습은 아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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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엮음.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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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이, 일개의 생을 갖고 이렇게 많은 책들을 어떻게 읽었을까.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처음 서두에서 헤세가 3천여권의 책의 서평을 썼다고 했을 때, 3천권의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고 와 엄청난 독서광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읽어보니 ‘3천여권에 대한 서평을 쓴 것이었다. , 헤세는 최소 3천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책은 그 중 73편의 에세이 및 서평을 기고한 책이고 그 내용만으로 책 한권의 분량이 너끈히 나온다. 여간 대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잔뜩 찾아볼 수 있다. 진짜 전설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느새 전체를 향한 그리움을 품고 결국은 책을 사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하루만에 다 읽어버릴 수 있지만, 여러 주가 지나도 완전히 음미할 수 없다.” p.157

 

이는 켈트 전설의 <마비노기의 나뭇가지 네 편>에 대한 헤세의 서평이다. 한국인이라면 아니, 적어도 내 또래의 나이를 가진 학생들이라면 마비노기는 게임으로서 꽤나 친숙한 언어이다. 류트를 치는 음유시인, 양 떼를 모는 목축업자, 풍요롭고 환상적인 세계. 내가 기억하는 마비노기란 딱 그 세계이다. 실제의 마비노기는 켈트 음유시를 배우는 학생 마비노그에서 파생되어 그들이 배우는 내용을 가리키는 명칭이라고 한다. 어설프게 알고 있던 지식과 온전한 정보와의 만남. 이 하나만으로도 뭔가 충만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 위의 문장이 좋았던 점은 그가 책에 대해서 어떤 마음가짐과 사랑을 갖고 있었는지를 대변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저런 책들이 있다. 술술 읽혀 어느덧 책의 끝자락을 넘기게 되는 책들. 나에게 데미안이 그랬고, 상실의 시대가 그랬고, 대부분의 추리소설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은 정해져 있었고, 그 기대를 반하지 않듯 대부분 읽을 때마다 색다른 문장이 샘솟아 매번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부분에서 저 문장은 어서 당장 저 책을 사서 읽어정도로 들렸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

 

어떤 평론가가 <데미안>의 문체를 헤세의 작품과 비교해 •••<중략>••• 헤세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기가 작가임을 인정했다. •••<중략>••• 그는 다른 맥락의 글에서 잘 알려진 이름을 통해 젊은이들이 불신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p. 193

 

앞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서문에 헤세는 전쟁 직후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 세대를 위해 꾸준히 독서 안내자 역할을 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는 젊은이들이 같은 세대의 젊은이가 대단한 문학작품을 써낼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잠깐 설명을 하자면 <데미안>의 출품 당시의 필명은 주인공 이름과 동일한 에밀 싱클레어였고 위의 논란 이후, 4판부터는 헤세의 이름으로 출간 되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헤세는 얼마나 따뜻한 인간이었고, 타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나는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책에서 대부분은 헤세의 서평을 위주로 다루고 있지만, 중간중간 마치 삽화처럼 당시의 배경이나 헤세에 관한 설명들이 들어간 것이 작가의 서평뿐 아니라 헤세라는 한 명의 인간을 좋아한 나로서는 상당히 좋았던 부분이었다.

 

이 낯선 인물 공자의 본질에서 가장 깊은 핵심은, 서양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에게서 본 것과 동일한 것임을 알아채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로테스크한 일그러짐처럼 보인던 것들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고, 처음에 놀라 뒤로 물러서게 했던 것들이 매력적이라고 ,심지어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p.307

 

흥미롭다. 소위 공동체 사회로 집단주의를 추구하는 동양사회와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서양사회. 결코 섞일 수 없다고 생각한 가치가 뭉그러져 한 명의 머릿속을 메운다. 헤세는 위 문단에서 그가 얼마나 열린 사람인지를 증명했다. 타 이념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깊게 이해하고 종래에는 체득하여 결론을 내렸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대략 책의 4분의 1분량이 동양의 문학에 대한 서평들로 가득하다. 별 것 아니지만 새삼스레 반가웠다. 헤세는 나보다 훨씬 동양의 철학책을 많이 탐독했으며, 중국, 인도, 불교, 힌두교. 국가와 종교를 넘어서는 근본의 이해가 있었다. 다름을 틀림이라 주장하지 않고 거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하는 것. 어렵고도 중요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헤세가 시종일관 그의 서평에서 취하고 있는 태도는 다름을 인정하는 방식에 대해 알려주는 지침서 같은 느낌이었다.

 

적어도 내가 읽은 이 73편의 서평에는 헤세가 허투루 읽어 넘긴 책은 단 한 권도 없다는 느낌을 준다. 처음 읽기 어려웠던 점은 나름 고전문학 애독가라고 생각했던 내가 읽은 책은 채 10권이 되지 않으며, 생소한 국가의 생소한 책들이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을 대하는 그의 자세, 애정 어린 단어들의 나열들은 모르는 책들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의 눈을 잡아 끌기에 충분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솔직하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공자의 책등에 대한 서평들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기억에 남기 때문일까. 대신 머리가 아닌 공책의 한 구석에는 앞으로 읽고 싶은 문학작품들이 가득해지는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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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특별판)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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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없는 질문에 답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편지

이번 책 역시 한줄 로 짧게 생각을 요약하자면 그렇다. 많은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혹은 글은 써보지 않았지만 대단한 어떤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은 사람이 느끼는 글의 방법론에 대한 현존하는, 그 것도 최고로 대우받는 사람의 비밀을 몰래 엿 볼 수 있는 책. 그러한 느낌이었다.

 

유혹하는 글쓰기”. 나는 스티븐 킹의 글은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단숨에 제목에 매혹되고 말았다. 유혹한다라. 이거야말로 진짜 모든 글을 쓰기 위해 펜을 쥔 투사들의 목적이 아니겠는가. 미약하지만 작가라는 다소 황당하고 추상적인 직업을 갖길 원하는 나로써는 가슴이 벅차오를 수 밖에 없는 제목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집어 든 책의 첫 챕터에서 나는 다소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유인즉슨, 첫 챕터는 바로 스티븐 킹 자신의 이력서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헤세나 하루키, 혹은 밀란 쿤데라등등의 작가였다면 아주 흥미롭게 봤겠지만, 언급했듯, 스티븐 킹의 글을 처음 접한 나였기 때문에 그닥 크게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한 장 두 장, 무겁던 페이지는 어느새 가벼워졌다. 오히려 방법론에 대한 언급이 우선되지 않고 그 자신의 스토리가 마치 소설처럼 진행되었기 때문에 느끼는 편안함 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력서의 챕터가 끝나자 창작론. 원하던 내용이 시작되었다.

낱말들이 모여서 문장을 이룬다. 문장들이 모여서 문단을 이룬다. 때로는 문단들이 살아나서 숨을 쉬기 시작한다.” -p165

이 문장 하나는 아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리가 모두 아는 보편적인 사실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된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것들이 살아 숨쉰다면? 그게 실제로 내 앞에서 탄생하는 장면을 목격한다면? 세상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내가 처음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림도 못 그리고 노래도 못 부르는 내가 유일하게 남은 창작의 혼으로 만들 수 있는 결과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관점에서 이 문장은 살아있는 문장이 되어 어딘가 내 안에서 조용히 똬리를 튼 것만 같았다.

 

뮤즈는 땅에서 지낸다. 그는 지하실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오히려 여러분이 뮤즈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내려간 김에 그의 거처를 잘 마련해줘야 한다.” -p 175

 

최근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이 대 유행을 맞았다. 멤버 중에서는 내가 한국 작가분들 중 손에 꼽게 좋아하는 작가인 김영하 소설가가 나왔다. 어느 화에 창작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김영하씨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뮤즈(뮤즈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여신이다)가 언제 찾아오길 기다리지 말고 뮤즈가 몇 시에 널 찾아와야 되는지 알려줘라,” 알고 보니 이 이야기의 원작자가 스티븐 킹이었다. 이 문장은 결국 영감을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으면 어느 순간 영감이 떠오른다는 것을 아주 위트 있게 표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전에 학교를 쉬면서 글을 쓸 때의 나도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마음으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냥 규칙성을 부여하고 왠지 한량 같아 보이는 이 행동을 합리화 시키고자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잘 수행하고 있었던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작가도 직업이다. 글을 쓰고 소명을 다하는 영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아메리칸 항공사의 칵테일 냅킨에 써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p203

습관의 중요성. 단지 글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중요한 약속. 순간적인 창의력. 강렬하고 짧은 순간에 스쳐 지나간 사건. 나는 대부분 이러한 모든 것을 적기 위해 노력한다. 글을 쓴다는 것, 혹은 일을 한다는 것, 혹은 살아간다는 것. 결국 삶은 어느정도 습관에 의해서 좌지우지 된다고 생각한다. 습관이란 어떤 인간이 살아온 과정이며 과거이고 그 것으로 앞으로의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휴대폰이 보급화 되어 언제나 아이디어를 적고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세상에 사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런 이유로 스티븐 킹이라는 한 명의 인간이 얼마나 글이라는 행위를 고결하게 느끼며 습관을 만들고 삶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는지 느낄 수 있는 문장이었다.

 

글쓰기는 마술과 같다. 창조적인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생명수와도 같다. 이 물은 공짜다. 그러니 마음껏 마셔도 좋다. p.332

황홀한 말이다. 생명수가 공짜라니, 그 것도 원없이 마음껏 마셔도 좋다니. 현대인들은 모두 갈증을 느낀다. 인간 관계의 갈증, 물질의 갈증, 행복의 갈증. 나는 이들의 공통점이 신기루라고 느낀다. 끝이 없고 보이지 않는, 실존하지도 않는 어떤 것들을 찾아 끝없이 찾아 헤맨다. 그런데, 적어도 글로써 성공한 예술가가 생명수를 마음껏 마셔도 좋다고 한다. 자기 앞에 주어진 삶에 생명수가 있는데 물 한 번 안 마셔 보는 삶은 조금 아쉽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글 쓰는 것의 중요성과 성취감을 전파하고 싶은 욕심을 이 문장에서 느꼈다.

 

그러나 때로는 그래 봤자 소용 없다. 그때는 울어버릴 수밖에“ p 324

마지막 챕터에서 스티븐 킹은 그가 당했던 끔찍한 사고를 소설의 한 장면처럼 묘사한다. 얼마의 인고가 지나야 그런 문장을 쓸 수 있는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수술이후 그는 재활치료를 꾸준히 한다. 고되고 힘들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 문단의 끝에 위엣말이 써 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여기며 했던 노력조차 소용없을 때. 아득한 절망이 심연까지 치달았을 때의 아픔. 나는 지하철에서 저 구절을 읽다 그 어떤 일련의 몰입 과정없이 울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다. 내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또는 티비를 통해 접하는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지고 사는 사람들. 그들이 꾹 참고 살아가는 눈물을 저 한 문장이 대변해 주는 것 같아서 나도 결국 울 수 밖에 없었다.

다루다 보니 항상 챕터나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니라 전형적인 감상문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조금은 아쉽다. 분명히 내용에는 스티븐이 살면서 겪은 글쓰기의 팁이나 방법들이 나와 있다. 하지만 그걸 다루어 버리기엔 그의 삶은 너무 길었고, 요약하기엔 너무 중요하며, 다 쓰기엔 조금 길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은 내가 생각한 글쓰기의 본질과 사상에 대해 중요한 지침서로서 기억될 법한 책이다. 그렇다고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읽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은 글쓰기의 내용에 관한 책이지만 스티븐 킹이라고 제목을 지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훌륭한 한편의 소설이기 때문에. 나는 감히 이 책을 추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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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사랑의 대화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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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말들로 씌여진 쉬운 책

 

책장의 마지막을 넘기며 문득 든 생각이다. 김형석 교수님의 책은 쉬운 단어로만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영존성, 신앙에 관한 내용, 철학자 개인들의 철학. 다양한 사고와 표현이 망라 된 인생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을 수 있던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인본주의적, 인애주의적 사랑 때문이었다. 또한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행복을 찾고 불을 밝히며 나아갔던 한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책의 서사구조는 단순하다. 작가는 말하고 나는 듣는다. 덤덤한 문체와 표현들로 나를 위로한다. 98세의 작가가 가져온 인생은 차라리 한 세기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로서는 결코 경험해 볼 수 없었던 시대와 그 시대를 겪은 자의 이야기. 이는 단순한 서사구조를 떠나, 어떤 몽롱한 감각들을 일깨워주는 요소로서 작용했다.

 

나는 결코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어떤 에세이는 너무 희망적이며, 어떤 에세이는 매우 모호하다. 겪은 일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와 같기도 하지만 먼,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조금 다른 에세이었다. 담담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듯 읊조린다.

 

사람은 왜 사는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83p-

 

조금만 철학의 역사나 스스로의 본질에 다가가야겠다고 생각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한 두 번쯤은 자신에게 던졌을 법한 질문이다. 나 또한 항상 묻는다. “나는 왜 살아야 하며, 어떻게 내가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나아가야 하는가막막하다. 존재의 본질을 알기엔 가진 지식이 얕고, 사고는 편협하며, 인지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궁금하다. 항상 왜 이렇게 다르게 주어진 삶 속에서 고통받고 고난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살아야 하는가. 문득, tv프로그램에서 박신양씨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박신양씨가 러시아 유학을 가 있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삶이 너무도 괴롭고 외로워 병원을 찾았다. 그렇게 찾은 병원에서 그는 의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왜 저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하는 걸까요?” 그러자 의사는 대답했다. “왜 당신의 삶이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작가도, 의사도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단서를 던질 뿐이다. 영원하지 않은 인간의 삶. 불완전하게 설계된 인간.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탐구하고 맞서 싸우며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 와중에 좌절과 실망 불행을 겪고,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인내하고 즐기며 토로할 수 있을 때 인생은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거기서 깨닫는다. 내가 가는 길이 결코 잘 못 되지 않았음을. 이미 이 것을 생각하고 더 나은 인간을 지향하며 걷는 내 모습이 어쩌면 꽤나 아름답고 멋있는, 내가 나아가야할 맞는 길일 것이다라고.

 

 

이렇게 해서 나는 남이 소유하는 것은 다 버려도, 남이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내 것으로 하자고 마음에 타일렀다” -164p-

 

얼마 전 내 머릿속에 가득 들었던 생각이다. 소유의 본질. 자본주의에서 물건을 소유하는 것. 그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지에 대해 깊게 파고 들었었다. 작가는 한 때 내가 가졌던 생각. 물질이야 내 한 몸 누일 공간과 허기를 유지 하지 않을 정도의 식량. 그 정도 외에는 별반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인간으로서, 부모로써 해야 하는 역할에는 깊게 책임을 지고 행동한다. 현실과 이상사이의 모호한 경계에서 그 만의 잣대를 세우고 행동했다는 것은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 동안 생각했을 때 돈에 대한 나의 정의는 돈이 많은 사람이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하다.” 정도였다. 때문에 어느 정도의 돈이 나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도와주고 그 삶 속에서 내가 원하는 방향을 지향할 수 있을 정도의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의 근간에는 돈을 탐하는 순간 이상과 멀어지고 현실과 타협하게 될 나의 모습이 두려워서였다. 그런 시각에서 작가가 취해온 삶의 태도나 방식은 신선하면서도 반대로 열망하는 미래의 모습에 가까웠다.

 

진리가 영원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변성이 아니라 근원성에 있다. -219p-

 

진리란 무엇일까. 내용을 읽으며 안을 깊게 들여다본다. 불변성. 변하지 않는 성질이다. 진리란 답인가? 진리란 수학 문제처럼 명확한 공식과 풀이로 인해 나아가야할 어떤 지향점에 끝에 있는 것일까. 작가는 불변성이 아니라 근원성을 논한다. 근원적이라는 것은 뿌리에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근원성이란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를 찾아 전진하는 것이라고. 그가 신을 대하는 입장에서 입각해 본다면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이다. 그에게 신은 진리이며 진리는 근원적으로 인간을 구원하고 사랑받게 하며 충만하게 하는 주체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진리의 참 뜻이 뭐기에 저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찾아본 결과 진리란 인식에 관한 초월적인 가치이며, 지성(知性)이 노리는 목적으로서의 초월적인 대상이다.” 읽고 보니 좀 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무신론자의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진리는 오직 초월적 대상을 목적 삼을 때만 찾을 수 있는 것인가. 때문에 사고를 바꿨다. 무신론자의 진리는 그 스스로가 갈구하고 찾아나아가야할 그 자체라고 말이다.

 

영원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던들, 누가 내 발을 일보라도 옮겨 놓을 수 있었을까? -320p-

 

마지막 챕터는 작가가 알던 한 교수의 일기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가장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또한 충격을 받았는데, 이는 그 일기의 내용이 어느 수행자가 고통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며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원한다. 사랑은 어떤 이에게는 정열적으로 타오르는 장미 같은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하고 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마치 우주나 우주너머의 블랙홀처럼 모호한 세계의 이야기 일 수도 있다. 나는 사랑을 많이 해보지 못했다. 심지어 대부분 결실을 맺지 못했거나, 결실을 맺기 위해 물을 주는 노력조차 안 해 본 경우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나는 늘 사랑을 갈망했고 염원했다. 그런 나의 관점에서 사랑은 너무나 모호했지만 우주처럼 멀다기 보다는 아름다운 외국의 풍경처럼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이유로 책에서 교수나 타인들이 취했던, 그 당시에만 존재할 수 있었던 감성이나 감정, 상황들은 너무나 천천히 느긋하게 흘러들어와 눅눅하고 끈적하게 가슴에 내리 앉았다.

 

소유와 영원과 사랑의 본질에 대해 적힌 노래

 

정리를 하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사실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약간 억지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전혀 기대하지 않고 봤던 에세이가 가져다 준 가슴의 파장은 결코 적지 않기에 저렇게 적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끝없이 존재를 찾고, 사랑을 갈고하며, 소유에 집착한다. 나 역시 그렇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그 근원에 대해 스스로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면, 그 지침서로써 오랜 세월과 풍파를 맞서 싸워온 이의 역사를 한 번쯤은 읽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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