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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엮음.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한 인간이, 일개의 생을 갖고 이렇게 많은 책들을 어떻게 읽었을까.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처음 서두에서 헤세가 3천여권의 책의 서평을 썼다고 했을 때, 3천권의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고 ‘와 엄청난 독서광이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읽어보니 ‘3천여권에 대한 서평’을 쓴 것이었다. 즉, 헤세는 최소 3천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책은 그 중 73편의 에세이 및 서평을 기고한 책이고 그 내용만으로 책 한권의 분량이 너끈히 나온다. 여간 대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잔뜩 찾아볼 수 있다. 진짜 전설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느새 전체를 향한 그리움을 품고 결국은 책을 사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하루만에 다 읽어버릴 수 있지만, 여러 주가 지나도 완전히 음미할 수 없다.” p.157
이는 켈트 전설의 <마비노기의 나뭇가지 네 편>에 대한 헤세의 서평이다. 한국인이라면 아니, 적어도 내 또래의 나이를 가진 학생들이라면 마비노기는 게임으로서 꽤나 친숙한 언어이다. 류트를 치는 음유시인, 양 떼를 모는 목축업자, 풍요롭고 환상적인 세계. 내가 기억하는 마비노기란 딱 그 세계이다. 실제의 마비노기는 켈트 음유시를 배우는 학생 ‘마비노그’에서 파생되어 그들이 배우는 내용을 가리키는 명칭이라고 한다. 어설프게 알고 있던 지식과 온전한 정보와의 만남. 이 하나만으로도 뭔가 충만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 위의 문장이 좋았던 점은 그가 책에 대해서 어떤 마음가짐과 사랑을 갖고 있었는지를 대변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저런 책들이 있다. 술술 읽혀 어느덧 책의 끝자락을 넘기게 되는 책들. 나에게 데미안이 그랬고, 상실의 시대가 그랬고, 대부분의 추리소설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은 정해져 있었고, 그 기대를 반하지 않듯 대부분 읽을 때마다 색다른 문장이 샘솟아 매번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부분에서 저 문장은 ‘어서 당장 저 책을 사서 읽어’정도로 들렸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
“어떤 평론가가 <데미안>의 문체를 헤세의 작품과 비교해 •••<중략>••• 헤세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기가 작가임을 인정했다. •••<중략>••• 그는 다른 맥락의 글에서 ‘잘 알려진 이름을 통해 젊은이들이 불신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p. 193
앞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서문에 헤세는 전쟁 직후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 세대를 위해 꾸준히 독서 안내자 역할을 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는 젊은이들이 같은 세대의 젊은이가 대단한 문학작품을 써낼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잠깐 설명을 하자면 <데미안>의 출품 당시의 필명은 주인공 이름과 동일한 ‘에밀 싱클레어’였고 위의 논란 이후, 4판부터는 헤세의 이름으로 출간 되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헤세는 얼마나 따뜻한 인간이었고, 타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나는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책에서 대부분은 헤세의 서평을 위주로 다루고 있지만, 중간중간 마치 삽화처럼 당시의 배경이나 헤세에 관한 설명들이 들어간 것이 작가의 서평뿐 아니라 헤세라는 한 명의 인간을 좋아한 나로서는 상당히 좋았던 부분이었다.
“이 낯선 인물 공자의 본질에서 가장 깊은 핵심은, 서양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에게서 본 것과 동일한 것임을 알아채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로테스크한 일그러짐처럼 보인던 것들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고, 처음에 놀라 뒤로 물러서게 했던 것들이 매력적이라고 ,심지어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p.307
흥미롭다. 소위 공동체 사회로 집단주의를 추구하는 동양사회와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서양사회. 결코 섞일 수 없다고 생각한 가치가 뭉그러져 한 명의 머릿속을 메운다. 헤세는 위 문단에서 그가 얼마나 열린 사람인지를 증명했다. 타 이념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깊게 이해하고 종래에는 체득하여 결론을 내렸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대략 책의 4분의 1분량이 동양의 문학에 대한 서평들로 가득하다. 별 것 아니지만 새삼스레 반가웠다. 헤세는 나보다 훨씬 동양의 철학책을 많이 탐독했으며, 중국, 인도, 불교, 힌두교. 국가와 종교를 넘어서는 근본의 이해가 있었다. 다름을 틀림이라 주장하지 않고 거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하는 것. 어렵고도 중요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헤세가 시종일관 그의 서평에서 취하고 있는 태도는 다름을 인정하는 방식에 대해 알려주는 지침서 같은 느낌이었다.
적어도 내가 읽은 이 73편의 서평에는 헤세가 허투루 읽어 넘긴 책은 단 한 권도 없다는 느낌을 준다. 처음 읽기 어려웠던 점은 나름 고전문학 애독가라고 생각했던 내가 읽은 책은 채 10권이 되지 않으며, 생소한 국가의 생소한 책들이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을 대하는 그의 자세, 애정 어린 단어들의 나열들은 모르는 책들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의 눈을 잡아 끌기에 충분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솔직하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공자의 책등에 대한 서평들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기억에 남기 때문일까. 대신 머리가 아닌 공책의 한 구석에는 앞으로 읽고 싶은 문학작품들이 가득해지는 그런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