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 사랑의 시작을 위한 서른아홉 개의 판타지 - 이제하 판타스틱 미니픽션집
이제하 지음 / 달봄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앞뒤가 빌딩으로 꽉막힌 도시에서 학교 학원을 오가며 개성이 싹잘리듯 잘려나간 세대의 애환에 대해 참 힘들겠구나 생각만 했었지 그렇지 않았던 세대와의 비교를 해본적은 없었다. 자유롭게 들판을 뛰어놀면서 자연을 접하고 긴 하루를 즐거운 놀이를 하며 보냈던 세대들의 상상력은 이런 것일까. 아니면 시를 쓰고 그림도 그리는 작가가 그동안 확장시켜놓았던 상상력이 그만큼 넓어졌기 때문일까. 책을 읽는 내내 내용이 신선해서 몇번이나 작가의 탄생년도를 확인했다. 


 37년생의 화가겸 시인겸 소설가인 작가의 미니픽션집에는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 써낼 수 없는 인생 전반에 걸친 통찰도 담겨 있다. 정말로 어쩔수 없다는 듯(마치 골치를 붙잡은 것처럼) 철학이 버무려져 있고 요즘 젊은 사람들이나 학생들, 아이들이 결코 겪지 못할 경험들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예를 들면 '아내'라는 사람의 등장과 '포커판'이라는 공간, '고향' 혹은 중년의 연애와 어른이 바라보는 젊은 사람들의 삶에 태도에 대한 관점 같은 것들. 열이 펄펄 끓는 뛰어난 두뇌를 가진 어떤 상상력좋은 작가가 이와 비슷한 깊이의 상상력을 가진 소설을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자연스럽게 묻어날 수 없을 경험들이 담겨 있었다. 


 소설들은 역시 미니픽션답게 술술 읽히고 한편한편 강렬했다. 재미있었던 점은 시를 쓰시는 분이라 그런지 내용, 형식에 더해 전개 방식에도 함축이 들어있다는 것. 하루키의 엽편집과 온다리쿠의 엽편집에서 내가 놀랐던 것은 그 내용이 엽편에 걸맞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더욱 기가막히게 재미있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그 길이에 딱 알맞을 강력하고 입맛을 돋우는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집에는 전개 방식에도 함축이 있어 불필요한 부분들을 생략하고 공간과 시간을 자유롭게 뛰어넘는다. 공간과 시간을 자유롭게 뛰어넘는 다는 것이 보통의 문학작품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소설들에서 주인공이 길을 걷다가 안개 장막 뒤편에 갑자기 나타난 계단을 타고 어찌된 영문인지 모를 새 옷이 벗겨져 포박되어 있고 하는, 그러니까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한 장면 내에서 부지불식간에 생략이 이루어지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시」


 문장이나 소재들 또한 굉장히 시적인데 문장은 그렇다치고 소재가 시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최근 읽었던 황인찬 시인의 시와 어느구석 닮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소설화 작업을 통해 변환 시킨것이 아니라 그저 길이만 늘려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긴 시 같다는 말. 


 미니픽션은 아무래도 길이가 짧기 때문에 시와 소설의 중간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나는 그 형식에 있어서의 파격을 화두로 삼았었는데, 이런 방식으로도 쓰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해준 소설집이었다.


 더불어 요즘 어르신 작가들의 작품들을 접하고 놀라지 않았던 적이 없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든다. 어르신들이 쓴 수필집, 시집, 소설집이 왠만한 젊은작가들의 상상력에 못지 않는다. 긴 시간동안 사회라는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음에도 그 상상력이 꼭 어린애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더 깊은 곳에 도착할 수 있었겠구나. 나는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이니 남은 날들 중 가장 생생한 글은 지금이나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정말 착각이다. 하기야 여러방면으로 파격적인 글들을 열심히 읽어내고 또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나다운 것을 계속해서 써나가다 보면 단 1년만에도 불쑥 늘어있는 것이 글이고 아무생각 않고 허송세월 보내다보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전혀 진보가 없는 것도 또 글이다. 다듬기에 따라 다르게 변모할 수 있는 어떤 것이 항상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있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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