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 완역본 하서 완역본 시리즈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남준 옮김, 이기식 해설 / (주)하서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연극으로 상영하는 파우스트를 보러갔던적이 있다. 이 책은 그때 사두고 여태까지 미루던 책으로, 그때 이 책을 살 때 마음먹었던 대로 책을 먼저 읽고 연극을 봤다면 연극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됐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때 보았던 파우스트 연극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고 어쩐지 사랑얘기가 주축이라 별로 좋다는 느낌없이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만 있다. 파우스트 만큼은 책을 먼저 읽고 연극을 봤어야 했는데. 그래야 파우스트에 적힌 시적인 대사와 비현실적인 공간을 어떻게 구현했는지 보였을텐데.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하며 읽었다. 어디선가 파우스트로 연극을 올린다고 하면 당장 가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때 봤던 파우스트 연극은 아무래도 괴테의 <초고 파우스트>를 연극으로 올린 것이 아니었나 생각 해본다. 괴테가 썼던 초기의 파우스트는 학자의 고뇌, 그레트헨과의 이야기가 두개의 축으로 서있다고 한다. 21살때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초기의 파우스트는 정열적인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이후 단편 파우스트를 거쳐 죽기 8개월 전까지 퇴고해 완성한 지금의 파우스트에는 광범위한 세계에 대한 괴테의 고뇌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또 초고 파우스트에 산문과 시문이 함께 있었는데 단편으로 넘어가면서 산문을 모두 삭제했다고 하니 내가 지금 읽은 파우스트에서 보이는 산문들은 번역때문에 어쩔수 없이 풀어놓은 문장들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분명 산문으로 번역된 글을 읽으면서도 문장이 시적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희곡의 언어는 그것이 대화체이고 스토리를 가지기에 소설과 비슷한 장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오히려 시와 가장 가깝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그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또 구구절절 맞네, 그랬네 하며 공감할만큼 파우스트의 언어는 몹시 시적이었다. 나는 보통 책을 읽으며 오래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이나 책의 핵심, 인물의 핵심이 되는 문장 같은 것들을 휴대폰 사진으로 찍어두는 편인데 파우스트는 매 페이지마다 사진을 찍고 싶었다. 사진을 찍어두고 위기의 순간에 꺼내보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았다. 그것도 한문장 한문장 오랜 고민이 없으면 쓰기 힘든 인생을 간파하는 철학적인 문장들이. 


 그런데 파우스트에서 시적인것은 문장만이 아니다. 책 한권이 거대한 한편의 시 인것처럼 전체적인 내용이 하나의 거대한 상징성을 이룬다. 읽는 동안 이게 희곡이야? 싶을 만큼 상징적인 부분들이 많았다. 도저히 연극으로 올리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장면이나 출연자의 움직임, 공간 등이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다. 앞서 연극으로 상영하는 파우스트를 한번 꼭 보고싶다는 말을 했던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체 이 희곡으로 어떻게 연극을 올리지? 그런 부분에서 파우스트는 연극을 위한 희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써 완성도를 가지는 예술 작품으로 읽어야 옳을 것이다. 시, 소설과는 다른 희곡의 정수를 끝까지 끌어올린 작품이다. 스토리를 가지되 시적인 언어로 쓰였고 그러면서도 인물간의 대화체이기 때문에 완전한 함축은 아닌 문장들은 희곡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이유들로 책을 펼치고 앞부분을 읽는 데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특히 무대에서의 앞놀이 부분은 거의 세네번 읽으려고 시도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거의 외울 지경이 되었다.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한문장 한문장을 쉽게 읽고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어느정도 페이지가 넘어간 이후에는 정신 못차리고 읽게되는 매력이 분명히 있다. 현실과 비현실이 모호하게 섞여서 판타지를 읽는 기분이 약간 들기도 하고 그 속에 녹아있는 신화나 성경구절을 찾아나가는 재미도 있었다.


 인용구절이 많은 점은 읽기에 흥미롭기도 하지만 괴테의 지식 탐구적인 측면을 잘 드러내기도 한다. 괴테의 관심사가 얼마나 다양한 분야로 뻗어 있으며 그것을 얼마만큼의 깊이로 공부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내것처럼 표현하는 경지에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가 필요했는지 감탄하면서 읽게 된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부분들이나 전혀 흥미가 없는 부분들을 나도 더 공부해보고 싶게 만든다. 아마도 그 모든 걸 이해한 후에 파우스트를 다시 읽으면 파우스트는 훨씬 더 깊이있고 흥미로울 것이다. 그제서야 파우스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지. 


 사실 파우스트라고 하면 우리와 굉장히 멀고 또 어려운 책으로 인식되지만 집필 배경은 우리에게 좀 친숙한 면이 있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집필하던 시절, 독일에 파우스트 라는 실존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의사이며 점성술사, 마술사였고 인문학, 자연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 갑자기 죽은 탓에 사람들 사이에 악마가 그의 영혼을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수많은 문학에서 인물 파우스트를 다뤘고 멀리 영국에서도 파우스트의 이야기가 쓰였다고 하니 당대의 대단한 이슈였나 보다. 괴테는 어린 시절에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접했고 청년 시절 파우스트를 쓰기 시작했으니 그간 파우스트를 다룬 많은 문학들또한 접했을 것이다. 이런 접근은 우리에게 몹시 익숙하다. 우리나라에도 민담이나 전설을 작품화한 문학들이 많고 사실 TV에 방영하는 수많은 드라마들이나 영화, 만화 혹은 어떤 노래의 가사 등 우리가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스토리성을 가진 작품들이 같은 접근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괴테가 파우스트를 집필했을 당시의 접근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러나 보통보다는 좀 특이한 경우의 케이스를 한번 다뤄보자는 취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우스트와 그런 여타의 작품은 분명히 다르다. 그런 차이점은 근본적으로 얼마나 깊이 있게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는 지에서 갈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사실 괴테는 파우스트의 인생을 거의 씹어먹(?)다 못해 그의 인생 속으로 첨벙첨벙 들어가서 심해어를 낚아 온 수준. 인물 파우스트도 죽을 때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멈춰라 순간이여,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라는 괴테가 끌어올린 희곡 파우스트의 구절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다. 


 내 주위의 누군가 카카오톡의 상태메세지에 "멈춰라 순간이여,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라는 문구를 걸어둔 것을 발견했을 때는 파우스트의 아주 초입부를 읽고 있을 때였다. 그 구절이 파우스트에 단 두번 나오는데 초입에서 처음 메피스토펠리스와 계약을 할 때, 또 한번은 거의 마지막 파우스트가 죽기 직전이다. 초입의 구절은 파우스트가 청년 시절이었고 마지막은 파우스트가 나이들어 노쇠했을 때라는 차이점도 있다. 내가 누군가의 카카오톡 상태메세지를 읽었을 때는 청년의 파우스트가 악마와 계약을 하면서 만약 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를 데려가도 좋다! 라고 말했던 부분을 읽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아 이사람은 파우스트를 읽지 않았구나, 파우스트는 그 말을 몹시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라고 생각했었다. 앞부분에 쓰인 구절은 '그 말을 내가 한다면 내 인생은 끝난 것이나 다름 없으니' 그러므로 '그 말은 하는 인생은 종결된 인생이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랬다. 


 그러나 책장을 덮을 때는 파우스트의 태도와 더불어 그 메세지를 걸어둔 사람에 대한 나의 시각도 달라졌다. 마지막에 적힌 구절은 앞부분의 그것과는 반대로 죽기 직전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마지막 희망의 땅에 대한 묘사로 그 구절을 사용한다. 그러니까 지혜의 최종점으로 '아름다운 순간에 머무는 일'을 언급하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런 괴테의 태세전환(?)에 파우스트 전반에 걸쳐 괴테가 담으려고 했던 인생의 가치관과 통찰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 말을 진심으로 뱉기 직전에 악마와 영혼을 거래했던 파우스트는 구원받는다. 구원의 이유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결과가 어떻든, 그 과정에 있어서 파우스트는 끊임없이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인간으로써 존엄할 수 있는 그 길을 선택했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괴테의 시각이 담겼다.


 과정을 중요시한다는 것이 나에게 더 절절히 와닿았던 이유는, 괴테가 파우스트를 전생애에 걸쳐서 완성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21세에 집필을 시작했다는 것은 몰랐으나 청년시절부터 시작해 사망 직전까지 파우스트를 만지고 또 만졌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괴테가 파우스트에 담고자 했던 그 철학, 통찰, 가치관 그대로 파우스트는 집필되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도 몹시 아름다운 작품이 되었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도 전생애에 걸쳐서 계속해서 한 편의 문학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쓰고 또 쓰고 다듬고 또 다듬었다는 점, 그와 동시에 책 속의 파우스트는 자꾸만 인생의 참된 가치를 향해 삶을 개척하고 또 개척했다는 점이, 그 모든 것들이 섞여 나에게는 괴테와 파우스트가 이미 한몸이 되어 책이 진행되면서 같은 목적지를 향해 계속 걸었다는 느낌을 드는 것이다. 뭔가를 자꾸만 추구하는 삶. 그런 가치를 지닌 사람. 그 사람이 쓴 책. 아아


 시적인 언어로 쓰였음에도 책 자체가 워낙 두껍고 그리고 문장이 아닌 내용에도 함축이 몹시 많은 밀도 높은 책이기 때문에 오래 읽었음에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파우스트는 나의 어떤 부분을 또다시 확장시킬 수 있는 책이었다. 사람들이 많이들 이야기하는 '한 사람의 인생이 오는 일'같은. 대단한 발명으로 인해 또다른 세계를 발견한 느낌. 지금처럼 매일 공부하면서 열심히 지내다 아주 어른이 된 어느날, 다시한 번 읽어보고 싶다. 그때 파우스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과정이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391p "세계의 고귀한 한 사람이 악의 손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누구든 줄곧 노력하며 애쓰는 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에겐 천상으로부터의 사랑까지 더하였습니다. 축복받은 무리들이 진심으로 반가이 이 분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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