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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ㅣ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신기섭 시인이 적은 '이제 여름도 다갔어'라는 말을 좋아한다. 어쩐지 유작이 돼버린 시에 담겨있던 말이라 그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여름은 나에게 늘 그때의 절절 끓는 듯한 날씨처럼 열병같은 것을 가져다주곤 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늦여름에 헤어졌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어느새 날씨는 쌀쌀해져 있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제 여름도 다갔어’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끝났다는 걸 표현하곤 했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는 내가 연애를 했던 사람들 중 가장 오랫동안 끈이 계속됐고 나와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던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라고 말했던 책이다. 그래서 그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한번 읽었고 이번이 두번째다. 그때는 '네가 좋아하는 소설이 고작 사랑얘기였다니' 하는 어딘가 삐뚤어진 심정으로 읽었었는데 지금 읽어보니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읽는 동안 그사람 이후의 사랑이 떠올랐다. 나는 어쩐지 입매가 고르지 않은 남자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사람과 연애하면서 다시는 나와 비슷한 남자를 만나지 말자고 다짐했었는데 또다시 좋아하게 된 그 애는 나처럼 손가락을 뜯는 남자였다. 결론적으로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땐 그모습을 보고 나와 비슷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마음을 쏟았던 것이다.
그 애를 마주할 때 나는 내가 부끄러웠다. 내가 몹시 이상한 사람이라는 사실, 스스로 괜찮다고 타일러왔던 그것이 나를 찔렀다. 나는 초라해보이는 내 행색을 숨기려고 전에 없이 옷을 사들이고 머리를 치장하고 화장을 했다. 엄마는 이제야 네가 피나 보라고 좋아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생각만 커졌다. 나는 말수가 더욱 줄었고 결국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고 그애를 보냈다.
나는 근간이 불결한 사람인 것 같다는 문장을 그애를 있는 힘껏 좋아하던 때에 썼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쓸 건 아니었는데, 시장에서 겪었던 어떤 일을 너무 깊이 생각하다 그렇게까지 생각이 번졌었다. 아주 오랫동안 시장바닥에서 자랐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엄마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집으로 가는 대신 시장의 지하에 있는 엄마의 식당으로 가서 내가 아닌 손님들에게 마음을 퍼붓고 있는 엄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낮시간에 시장은 항상 소리들로 가득차있었다. 언어라고 할 것 없는 그저 목에서 뱉어질 뿐인 의미없는 말들이었다. 얼마에요? 얼마입니다. 어디 배달이요. 그런 물건은 없어요. 하는 소리들만 오갔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보다 금방 왔다 금방 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곳에서 모두가 바빴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저녁 시간에서야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상인들이 모여서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그 때가 돼서야 오가는, 말이라고 할 수 있는 말들은 몹시 자극적인 동시에 어딘가 뜬구름같고 미심쩍은 언어들이었다. 밥을 먹는 짧은 시간동안에 낮시간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들 중 가장 자극적인 이야기를 집어 주고받는 듯했다. 어디서 점을 봤는데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여자가 뭐라고 하더라,용하지. 요전에 요앞에 왔던 어떤 늙은이는 사실 어떤 늙은이였더라. 사람 일 정말 모르는 일이야. 시장에서 나간 그 사람네는 어디서 뭘 하는데, 옛날만큼 장사가 안되는 모양이야. 그 자리에서 다른 장사를 하는 누구네는 그렇게 손님이 끊이질 않는데. 터라는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어딜 가더라도 터를 잘 보고 가야돼. 그런 말들을 들으며 자랐다. 어딘가 오싹한 얘기들이었다. 그런 얘기들을 듣고나면 왠지 모르게 무서워서 바닥에 등을 대지 않고는 밤에 잠을 잘 수도 없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낮시간에, 그렇지만 나에게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시간에 식당의 한 켠에 앉아 나는 사람들 이면에 있을 그런 류의 이야기들을 그리며 놀았다.
지금 쓰는 소설 속을 들여다보면 그때 들었던 이야기들이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사람일이면서도 사람의 일을 초월한 어떤 일들. 몹시 파편적이고 불가해한 사건들. 실제로 일어나고야 만,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 내가 배웠던 말이라는 것이 그런 류의 것이었고 나이를 먹을수록 파편적이고 불가해한 일들은 더욱 자주 벌어져 그때 했던 생각들을 견고히 하게 됐다.
내가 가장 관심있는 것은 늘 그렇게 사람들이 자각할 수 있는 것 이면의 어떤 것들이었다. 그런 부분에서는 백의 그림자에 나온 ‘그림자가 선다’라는 표현이 나에게는 오히려 다른 어떤 것보다 와닿는 ‘죽음의 이유’다. 사람들은 느닷없이 죽고 죽은 사람들은 느닷없이 산 사람들을 찾아왔다. 그런 모습들을 그 시장에서 많이도 봤다. 시-장- 이라고 하는 단어 속에 다 넣을 수 없는 여러 일상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있듯 산-다- 라고 하는 단어 속에도 결코 ‘보통’이랄 수 없는 느닷없는 일들이 아주 많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런 느닷없음은 도대체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 중 일부에 불과하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사랑이라는 것도 그중 하나겠다는 생각. 우리가 인과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일이나 말로 전할 수 있는 것들은 몹시 적다는 걸 너무 어려서 알았다. 세상은 너무 파편적이고 굳이 보려고 하지 않으면 극히 일부분만 보여지기 일쑤다. 그것도 가끔은 영 동떨어진 부분만. 그런 걸 매일 생각하다 이젠 사람들이 말로 뱉는 것을 보는 것보다 눈짓 한번, 숨소리 한번 내뱉는 것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는게 익숙해졌다.
그런 나에게 내 정체를 들키지 않고 마음을 전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에 나혼자 사무실을 지키다 조용히 그애의 자리에 가서 그애가 벗어두었던 가디건을 만져본 일이나 그애의 차 뒷자리에 아무렇게나 쳐박힌 티셔츠를 조용히 개어두었던 일, 그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다 상사에게 혼이 났던 건 다 말로 다하지 못했던 마음의 표현이었는데, 이런 띄엄띄엄한 내모습을 그애는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어쩌다 내가 저런 걸 좋아하게 됐을까, 쟤는 어쩌다 손가락을 뜯게 됐을까, 같은 일들이 몹시 이상하게 느껴졌다.
‘낡은 상가’로 보고 만다면 알 수 없는 그 속을 채운 사람들의 이야기, 이해할 수 없는 죽음들을 그림자가 선다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시도 그리고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인 사랑까지 담겨있는 소설을 읽고 있자니 어쩐지 비슷한 쪽에 방향을 두고 앉은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띄엄띄엄'과 '느닷없이'의 세계. 그런걸 읽으면서 그런 일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오래간만에 엄청난 기억들이 나를 오갔다. 적어둬야 하는데, 적어둬야 하는데 하다 놓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