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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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책의 표제작인 「필경사 바틀비」를 먼저 읽고 허먼 멜빌의 필모그라피를 읽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을 한다고, 나처럼 작가를 알기에 앞서 작품을 먼저 보고 작품에 마치 브랜드처럼 '누구누구'라고 이름붙이기도 하고 작품에서 베어난 일종의 '풍'같은 것으로 말미암아 작가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짐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심지어 대표작을 줄줄 꿰고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작가조차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경우도 있다. 


 예술가가 혼을 불어넣어 완성한 작품들은 많다. 작품이 완성된지 몇세기가 지나는동안 세대가 바뀌고 구성원들의 생각이 변했음에도 변치않고 마음을 두드리는 작품들을 우리는 클래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바틀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들이 행한 혼신을 다한 예술이 비단 작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한 편의 클래식 작품을 완성하는 동안에 '나 예술하겠다' 마음먹고 그게 아닌 생의 거의 모든 부분을 포기한채 몰입했던 작가들의 인생과 당시의 처지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주변 사람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생각을 가지고 살고 그래서 이상한 사람취급, 덜떨어진 사람 취급을 당하면서, '너는 왜 그렇게 사냐'는 질문에 그 사람들도 가끔은 '그렇게 안 하고싶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하다가 이내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런 작품을 남길 수 있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틀비 또한 '그렇게 안 하고싶은 것'을 '안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야할 때에도 그렇게 하고싶지 않으면 안하는 사람. 그렇게 하고싶지 않은 것을 그렇게 한다면 너무도 쉽게 해결될 일들을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보통이라고 말하는 쉽고 평범한것을 무너뜨리고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내모는 사람.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지 생각한다면 그건 스스로를 향한 장인정신 때문이 아닌가 한다. 쉬운길을 두고도 끊임없이 자기 안에서 귀한 가치로 여겨지는 것을 따라가고자 했던 장인정신 때문에 바틀비는 결국 잔뜩 몸을 웅크린채 아사하지만 그순간 마치 '영원한 피라미드의 심장'이 싹트듯 그렇게 하고싶지 않을 때 그렇게 하지 않은 인생이라는 작품이 완성된다. 한 순간이라도 타협했다면 불가능했을 '결코 외부와 타협하지 않은 삶'의 예술성을 혼을 불어넣어 완성시킨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예술이라는 것의 한계를 어디에 그어야할지 불분명해진다. 누군가는 작품성이 떨어지는 작품에 대해서는 '그건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반드시 아름다워야만 예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물이 어떻든 그걸 위해서 자기가 가진 또다른 것들을 희생, 헌신해가면서 완성시키려고 하는 행동 자체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런 행위로 인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작품은? 그 한계를 규정할 수는 없다고 해도 앞서 표현한 것들 또한 '예술한다' 혹은 '예술적이다'라는 표현속에 들어가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름답다'는 표현을 굉장히 좋아하고, 뭔가를 쓸 때 반드시 그렇게 쓰려고 노력하지만 내가 만들고자 하는 아름다움은 그저 모두의 눈에 보기좋고 마치 꽃발이 휘날리는 봄날같은 것이 아니다. 바틀비의 행동들처럼. 내가 읽기로 바틀비는 꽃같다기 보다는 X같은 류의 아름다움이고 그가 뭔가를 만들어 내 결과물로 완성시키지 않았어도 예술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르던 사람은 이센스라는 랩퍼였다. 지금도 이센스가 옥중에서 발표한 앨범을 들으면서 이걸 쓴다. 사실 요즘 이센스에게 푹 빠져있기 때문에 이 소설을 읽지 않을 때에도 떠오르지만, 어쨌든 바틀비의 타협하지 않는 삶은 이센스의 어느 구석과도 몹시 닮았다는 생각이다. 이센스는 약간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잘할 수 있고 하고싶은 일을 찾아 그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과 범법의 한 조각인 수식어를 뒤집어 쓰고 있다는 점이 다르지만 자기 안의 신념에 따라서만 행동했다는 점과 그것이 때로 스스로를 파괴했다는 점에서 나는 바틀비의 얼굴을 길었던 이십대의 강민호(이센스의 본명)로 상상할 수 있었다.


 이센스 얘기를 한다는 건 지금의 나로써는 몹시 벅찬 일이기 때문에 이쯤에서 관두기로 하지만 언젠가 나는 이센스의 인생이 너무 아름답고 난 결코 그런 삶을 살 수 없을 꺼란 생각을 했었다는 건 써두고 싶다. 이건 바틀비를 읽으면서도 든 생각이고 '예술'을 떠올릴 때 스스로를 자조하면서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장인정신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고, 그런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싶다. 그래서 주변의 누군가가 그 장인정신 때문에 힘들어한다면 너는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싶다. 





99p 안뜰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곳은 일반 죄수들은 들어가지 못했다. 주위를 에워싼 엄청나게 두꺼운 벽들은 모든 소음을 막아주었다. 이집트 양식의 석조물이 그 침울함으로 나를 짓눌렀다. 그러나 발아래에 부드러운 잔디가 틈새를 비집고 자라났다. 그 모습은 마치 영원한 피라미드의 심장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피라미드 속에서 새들이 쪼개진 틈새에 떨어뜨린 잔디씨앗이 어떤 이상한 마법에 의해 싹이 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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