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피천득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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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rever young 이라는 용어를 좋아하는 래퍼의 노래 속에서 들은 뒤에 한동안 그것을 삶의 모토로 삼고자 했었다. 삶의 기로에 설 때마다 그것을 따르는 선택을 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나 자신이 세상과는 영영 섞이지 않는 색이 되어간다고 여겼었다. 큰 불편이 따르는 일이었고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오래전의 일이다. 이제 forever young 같은 건 저 뒤에 두고 살게 되었다. 예전보다 마음이 편하고 머리가 덜 아팠다. 그런데 피천득의 인연을 읽으면서 그 용어가 저 먼 곳에서부터 다시 삶으로 튀어나왔다. 골치아픈 일이다. 


 "피천득 이후의 수필은 수필이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교수님이 계셨다. 늘 웃는 얼굴이었고, 그러면서도 학생들을 난처한 분량의 과제로 괴롭히는 분이셨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조커'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분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분으로썬 온갖 쉬운 일을 뒤로하고 선택한 최선이었구나 싶다. 학생들 앞에서도 "어떻게 하면 너희를 공부하게 할 수 있겠니"라는 말을 달고 사셨으니까. 학생들이 뒤에서 뭐라고 떠들지를 알면서도 교수로써 학생들을 학습시키는 것이 맞는 방향이므로. 쉬운 길은 언제나 가까이에 너무 편리하게 나있고 어려운 길은 언제나 저 멀리에서 불편과 두통을 수반한 채 기다리고 있다. 교수님은 어려운 길을 굳이 선택하셨고, 그 교수님의 인생 수필가가 피천득이며, 피천득은 이런 수필을 쓴다. 이것도 골치아픈 일이다. 여담이지만, 언젠가 교수님께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고 대뜸 메일을 드렸을 때, 교수님은 '나도 다시 학교에 가고싶다. 한 2년동안 거기서 푹 쉬면서 재밌게 놀고 싶어'라고 어린아이같은 말씀을 하셔서 참 교수님 답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다. 


 동심을 잃지 않는 자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외부의 모든 것들을 맑은 눈으로 받아들이고 그 자체를 기쁘고 충만한 일로 여기며 사는 일을. 그리고 그런 자세를 잃을 수밖에는 없었다고 말 할, 핑계에 불과한 순간들을 생각해 본다. 동심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길은 내가 섰던 기로에서처럼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꼭 어딘가에 문제가 있어 무리에 끼워주고 싶지 않아 하는 달갑지 않은 대접을 받아가면서도 맞다고 생각하는 길을 찾아 들어간 길일 것이다. 책의 표지에 적혀 있는 '천진하고 소박한'이라는 수식어가 시대를 넘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부적합한 일인지. 피천득의 수필들이 모두 그렇기에, 심지어 문장이 간결하고 큰 치장도 없어 말그대로 꾸밈없이 적어내린 일기같기 때문에 실제로도 글과 닮았을 피천득 선생의 삶을 생각해보게 된다. 


 글을 읽으면서는 민망하리만치 솔직한 속내이자 불편하기까지 할 정도로 속의 것을 그대로 게워낸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오랫동안 읽다가 책장을 덮은 뒤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문득 어차피 모두에게 시간은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삶이 좀 홀가분해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공간이나 물건에 대한 나의 집념에 가까운 애착도 일종의 사랑이 될 수 있다는 변명을 얻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는 sns 같은 곳에서 단편으로 우연히 마주했으면 더 여운이 길었을 수도 있었겠다 생각했었지만 한 권의 책으로 집약한 작품집만이 줄 수 있는 또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필집 한 권이 어떤 향이나 기온 같은 것처럼 삶의 한 부분에 스며드는 느낌이 든다. 교수님의 "피천득 만이 수필이다"라는 말씀이 어떤 말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아직 나도 forever young할 가망이 있는지도 모른다. 


 응용구는 책에 두 번이나 반복돼 나올 만큼 피천득 선생이 좋아하는 구절.


+ 다시 읽어볼 부분 


64p, 77p, 79p, 86p, 226p 


오동은 천 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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