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단지 물건을 줄이고 버리기만 한다면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넘치지 않음‘의 개념을 패션에 적용시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것만으로 행복이 완성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핀란드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 ‘진짜 넘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핀란드인들은 애당초 물건을 많이 사지 않습니다. 대신에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을 소중하게 사용하려고 하죠. 가구도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오랫동안 써오신 것을 물려받습니다. 오래된 물건에 스며 있는 ‘추억‘과 ‘가치‘를 높게 사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가족을 위해 많은 시간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하루에 할 일이 끝나면 무조건 가족과 함께 보냅니다. 밤낮 없이 일에만 빠져지내지 않고, 요리, 육아, 휴가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해 일상적인 생활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죠.
또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것을 편하게 여기고 좋아하는지 알고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취향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좋아하는 물건 한두 가지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죠. 어쩌면 이런 성향과 가치관 덕분에 핀란드인의 행복지수가 전 세계에서 언제나 상위에 속하고, 핀란드를 ‘행복의 나라‘라고 칭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핀란드에서 나고 자란 제가 심플한 핀란드의 이모저모를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소개하고픈 마음으로 적어보았습니다. 핀란드는 패션과 인테리어가 유명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뿐 아니라 행복한 삶을 사는 핀란드인들만의 ‘진정한 심플라이프‘를 느낄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는 핀란드 사람들의 삶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를 조금만 바꿔도 우리 주변에 이미 행복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깨닫게 되기를 바라봅니다.

- 들어가며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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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아홉 살 때의 기억이 영원하리라 여긴다. 그때 아이는 모든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중요하고 크고 충만하고 ‘시간‘을 채운다.
마치 나무 주위를 빙빙 돌며 나무를 바라보기라도 하듯 만사가 확실하다.
아이는 시간이 흘러가는 걸, 시간 안에 시간 그 자체가 아닌 어떤 움직임이 있다는 걸 의식한다. 그 즈음 시간은 어떤 움직임이나 흐름이나 바람이 아니라,
차라리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기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그 일은 ‘시간‘ 안에서 생명을 지니고 줄곧 살아남아 단단해져서, 마치 나무 주위를 맴돌듯 그 주위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된다.

로버트 펜 워런 (1905~1989), 『블랙베리 윈터 - P18

열다섯 살 때 삶은 나에게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적시에 항복하는 것은 저항만큼이나 명예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특히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는 말이다.

마야 안젤루 (1928~2014),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 - P30

열여섯 살이 된 아이는 고통이 뭔지 안다. 그에게는 이미 고통당한 경험이 있으므로.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 역시 고통당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장자크루소 (1712~1778), 『에밀』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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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그대로 바라보고 조금 더 나은 상태, 기존의 상태에서 벗어난 단계로 이동하는 변화.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변화의 시도와 기록 그 자체였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지만,
변화의 반대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스스로가 만든 지푸라기를 잡고 떠오릅시다!

그게 성곤의 채널에 쓰인 프로젝트 홍보 문구였다. - P212

전에는 자신의 삶만 잘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는 누군가의 삶을 바꾸게 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을 꿈꾸고있었다.
김성곤 안드레아는 한때 자신이 정했던 성공이라는 기준에 아직도 한참 미치지 못했다. 좌절감과 불안함이 엄습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어깨를 폈고 세상을 충실하고 온전하게 감각하려 애썼다. 그런 태도가 내면의 근육을 단련시켰다. - P213

적어도 그가 운전하는 차는 직진하고 있지 않은가. 그 운전대를 쥔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고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그는 자기만의 길을 달리는 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미소 지을 이유는 충분했다.
- P220

그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지쳐 있었다.
- 겁나?
- 네. 실수하고 실패할 것 같아서 겁나요. 사람한테서 다시 상처받을까봐 두렵고요.
진석이 실토했다. 성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잘 들어. 딱 한번만 말할 거니까 기억해두는 편이 좋을 거야. 넌 절대로 원하는 만큼 한번에 이룰 수는 없어. 세상이 그렇게 관대하고 호락호락하지가 않으니까. 근데 말이지. 바로 그만두는 건 안 돼. 일단 안 돼도 뭔가가 끝날 때까지는 해야 돼.
- 언제까지요?
- 끝까지.
- 끝이 언젠데요.
- 알게 돼.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상황이 끝나든 네마음이 끝나든, 둘 중 하나가 닥치게 돼 있으니까.
-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 다시 시작해야지. 네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 뭘요?
- 되는 것부터 너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중 되는 것부터, 운동이든 공부든, 책을 읽는 거든. 하다못해 나처럼 등을 펴는 게 됐든. 너 혼자 정해서 너 스스로 이뤄낼 수 있는 것부터.
진석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피스텔을 쓱 둘러봤다.
- 그동안 고마웠어요. 여긴 제 둥지 같은 곳이었어요. - P224

삶의 가장 큰 딜레마는 그것이 진행한다는 것이다. 삶은 방향도 목적도 없이 흐른다. 인과와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종종 헛된 이유는 그래서이다. 찾았다고 생각한 정답은 단기간의 해답이 될지언정 지속되는 삶 전체를 꿰뚫기 어렵다. 삶을 관통하는 단 한가지 진리는, 그거이 계속 진행된다는 것뿐이다.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김성곤의 행운도 삶의 진행 속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구름이 우연히 빚어낸 신의 형상을 바람이 금세 뭉개버리는 것처럼, 짧고 허망하게 모든 것이 사라졌다. - P237

- 그거 알아? 정말 어려운 건 힘든 상황에서도 어떤 태도를 지켜내는 거야. 난 당신이 그걸 해낸 줄 알고 응원했어. 진심으로 노력해서 결국 바뀌었다고 생각했지. 근데 당신은 허영에 빠져 자만한 거였고 나도 내가 믿고 싶은 대로 착각한 것뿐이었어. 잠깐은 모든 게 잘돼간다고 생각했겠지. 상황 좋고 기분 좋을 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쉬워.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데 바쁘고 여유없고 잘 안 풀리니까, 당신은 바로 예전의 당신으로 되돌아갔지. 그러니까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은 거야. 넌 끝까지 그냥 원래의 너 자신일 뿐이라고. - P252

- 세상에 던져졌으니 당연하지요. 태어나길 원하지도 않았는데 좁은 배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가 갑자기 발가벗겨진 채로 세상에 던져졌잖아요. 인간은 탄생부터가 외롭고 불안한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무슨 수로 알겠어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일단 쥐어보는 거지요. 쥐었던 게 운 좋게 잘 풀리기도 하고, 이건 아닌데 싶지만 쥐었던 걸 놓을 용기는 없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꼭 쥐고 있기도 하죠. 그러다가 누군가가 그걸 빼앗아 가면 다시 세상에 던져진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불안해하는 겁니다. 손에 잡히는 것도, 의지할 데도 없이 발가벗겨진 채로 버둥거리고 있으니까. 다들 그러고 삽니다. - P258

박실영은 삶을 적으로 만들지도, 삶에 굴종하지도 않았다. 인생이라는 파도에 맞서야 할 땐 맞서고 그러지 않을때는 아이의 눈으로 삶의 아름다움을 관찰했다. 어떤 삶을 겪어내야 그의 얼굴에 새겨진 단단한 평화로움을 가질수 있는 것인지 김성곤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 P259

- 그리고 내 보기에 당신은 잘 살아온 것 같아요. 계속 삶에 대해 알아내려고 애쓰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잘했어요. 아주, 잘했습니다.
박실영이 성곤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그의 등을 꽤 세게, 두드려주었다. 그의 거친 듯 다부진 손과 등을 두드리는 적당한 힘이 커다란 이불처럼 성곤의 상처를 헤아리고 어루만졌다.
잘했다. 아주 잘했다. 잘 산 인생이다.
가슴에 꽉 들어찬 박실영의 말에 성곤은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자신은 잘하지 못했다. 실수도 많았다. 잘못 산 인생이었다. 그런데도 잘했다는, 잘 살았다는 그 말이 너무 고마워서, 그 말을 혼자만 담아두기엔 너무 버겁고 부끄러워서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두 남자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김성곤은 굳이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을 보는 그들의 생경한 눈빛마저 고마웠다. 잘했다. 참 잘했다.
그 말이 가슴속을 계속 맴돌았다. 그 말을 다시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런 목적으로 사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P260

때로 삶을 지탱하는 기둥은 이토록 작은 단서에서부터 출발한다.
김성곤은 이해할 수 없는 삶 앞에 겸허히 머리를 숙였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삶에 대적하거나 삶을 포기하려 하는 대신에, 삶과 동등한 입장에서 악수를 나누기로 했다. - P261

언젠가 내게도 모든 게 침잠되고 고통이 점점 커져간다고 느껴지던 시간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를 견디게한 건 가까운 사람들이 주는 위안과 위로의 말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괜찮다거나, 이 정도면 충분하다거나, 이대로도 좋다는 말은 눈물을 그치게 했으나, 냉정히 말해 그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곧 그런 말들은 공허하게 휘발됐다. 나를 다시 일어서 걷게 한 건 언제나 다시 해보라거나 응원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혹은 내 내면의 담담한 어조였다.
응원을 받으면 아무것도 아닌 시도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바뀌었고, 다시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 작가의 말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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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절대온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날보다 얼마나 추운지가 중요한 거지. 그게 바로 체감온도라는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내가 죽고 싶다고, 죽어야겠다고 느끼는 이 체감이 중요한 거라고. 김성곤은 생각했다. 말마따나 그의 체감온도는 몸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그 어느 때보다도 낮았다. - P17

어쨌든 이날 그를 다리 위에서 끌어내린 건 누군가의 격려도 위로도 아닌, 매섭도록 차가운 칼바람이었다. 많은 사람에겐 그 밤의 갑작스러운 추위가 감기를 유발했지만 적어도 김성곤 안드레아에게만큼은 때 아닌 칼바람이 삶의 방패가 되어준 셈이다. - P18

그러나 빛이 꺼진 것처럼 보이는 인생에도 기회가 다가와 문을 두드릴 때가 있다. 그 두드림은 너무 작고 은근해서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놓치고 만다.
김성곤 안드레아의 경우 기회의 속삭임은 그날 한강에서 나와 서울역에서 들은 ‘변화‘라는 단어였다. 수없이 들은, 흔하다 못해 귀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발에 챌 만큼 평범한 단어는 그날 밤, 왜인지 족쇄처럼 그의 귀 안에 철썩 들러붙어 작은 뿌리를 내렸다. - P51

그땐 그저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고 생각했었다. 완벽한 순간은 평범한 일상 속에 녹아 있다는 걸 몰랐으니까. - P58

성곤은 고개를 저었다. 과거와 현재의 ‘처지‘를 비교하는 대신 그는 사진 속의 ‘표면적 사실‘만 비교하기로 했다. 실험 결과를 살피는 연구원처럼 김성곤은 두 사진을 번갈아 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P60

성곤은 그 영상을, 12년 전의 어떤 날을 보고 또 봤다. 인생을 통틀어 단 하루를 고른다면 이날을 택하고 싶었다. 이런 날이라면 영원히 반복해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엎드려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겨우 지금 같은 상황에 이르기 위해 이 삶을 관통해온 걸까. 오로지 애통할 뿐이었다. - P66

신호 대기로 서 있다가 녹색불이 켜지고 모든 이들이 일제히 부르릉 앞으로 나갈 때 김성곤 안드레아는 두 다리를 놀려 페달을 밟았다. 거리의 동료, 혹은 경쟁자인 라이더들이 낡은 자전거를 탄성곤을 때로는 안쓰럽게, 때로는 자신들의 값비싼 애마와 비교하며 으쓱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성곤은 묵묵히 자신만의 속도로 달렸다. 가진 자산이 없다면 몸이라도 움직여 느리게라도 나아가야 했다. - P73

어떤 생각은 깊이 하면 해롭다. 어떤 고뇌는 곧장 절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때때로 나쁜 생각이 몸에 스며들기 전, 성곤은 속으로 이렇게 외치곤 했다.
-허리는 위로. 어깨는 아래로. 등은 그 사이에. 백 투 더 베이직!
이 혼자만의 외침이 김성곤 안드레아의 매일매일을 지탱하는 짧은 기도가 됐다. 그리고 삶은 그를 잊고 있던 인연과의 재회로 안내하는 중이었다. - P76

‐ 이 자식은 불씨 하나가 없어. 아니, 아예 없진 않은것 같은데, 그게 아직 켜지질 않았지.
커다란 엄지척 이모티콘을 남긴 성곤이 중얼거렸다. 진석은 켜지지 않은 성냥 같았다. 작은 불씨만 한번 탁 켜주면 밝게 빛을 뿜어낼 텐데 그 한방이 없는 아이였다. 그렇지. 성곤은 포기하듯 뇌까렸다. 우리 모두 그 한방이 없기에 다들 이렇게 평범하게,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 P102

단 하나의 목표만 있는 삶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성곤은 자전거로 바람을 가르며 음식을 배달하고 허겁지겁 밥을 먹고 머릿속에 많은 걸 품지 않으려 때론 일부러 더 고되게 일했다. 지금 그가 살아내는 삶은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삶이었다. 살아 있기만 하면 되니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자괴감에 젖을 일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살아보니, 살기 위해 살아내는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 막 지나가고 봄의 기운이 느껴질 무렵, 김성곤은 과거의 사진과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을 햇빛에 대고 겹쳤다. 전에는 충격적으로 차이가 났던 두 남자의 실루엣이 언뜻 비슷해 보였고 그걸 확인한 김성곤 안드레아의 얼굴에는 아주 오랜만에 만족의 미소가 떠올랐다. - P110

얘기를 마치고 난 성곤의 혀끝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실천하긴 어려워도 조언하는 건 쉽다. 세상을 조금 더 멀찍이서 바라볼 수 있으니까.
- 제 생각엔 말이죠, 사장님이 지금 하시는 의미 없는 시도에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진석이 말했다.
- 그런 거 없어. 의미가 없는 게 의미라니까.
- P122

~ 성곤은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오더니 가슴 한구석에서 미세한 기쁨이 느껴졌다. 확실하고 순수한 기쁨이었다. 투자한 주식의 가치가 올라갔을 때 느끼는 미칠 듯한 흥분 같은 게 아니라, 작은 사탕 꾸러미를 받은 어린아이가 온몸과 마음으로 느낄 것 같은 충만한 기쁨이었다. 그 기분은 그날 오전 내내성곤의 입가에 웃음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그를 채웠던 감정은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한순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성곤은 그얘기를 진석에게 털어놨다.
- 당연하죠. 경비아저씨가 사장님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니까.
진석이 간단한 답을 내놨다.
- 그런가......
- 가족의 칭찬이었다면 달랐을 거예요. 왜 가까운 사람에게 표현하고 인정받는 게 제일 어려울까요. 누가 그거 논문으로 쓰면 좋겠어. - P125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 주는 건 인간의 보편적 특징이기라도 한 걸까. 그건 어디서나 목격할 수 있는 비일비재한 풍경이었다. 겉에서 보면 멀쩡한 사람들이 한꺼풀 걷어내면 다들 곪아 있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비슷했다. 제일 소중하게 여기고 조심해야 할 사람에게 그러지 못해서 할퀴고 긁고 모독하느라고. - P126

- 뭐든지 한번에 한가지씩만 하는 겁니다. 밥 먹을 땐 먹기만, 걸을 땐 걷기만, 일할 땐 일만. 그렇게 매 순간에 충실하게 되면 쓸데없는 감정소모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그 말은 성곤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등을 쭉 펴고 어깨를 여는, 목적 없는 단순함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비결이었다는 걸 김성곤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만으론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박실영이 말을 이었다.
- 마지막으로 하나. 생각의 스위치는 끄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세요. 우린 항상 무언가를 판단하느라 에너지도 감정도 너무 많이 쓰고 있잖습니까. 그러다보면 자꾸만 소모적인 생각이 날아들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거나 이해하지 못하게 돼요. 생각이란 건 자신만의 선글라스 같은 거니까요. 그러니까 생각의 스위치부터 꺼야 하죠. 그다음은 쉽습니다. 낙엽은 낙엽으로 보고 전봇대는 전봇대로 보는 겁니다. 빨간 건 빨갛게 노란 건 노랗게 받아들이면 되죠.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어요. 저기 가로등 보이시죠. 무슨 색 같습니까. - P144

- 자세히 보면 위쪽 구석은 불처럼 새빨갛고 중간의 오렌지빛에 이르기까지 색의 스펙트럼이 펼쳐져 있죠. 간간이 검은 점들도 찍혀 있어요. 그리고 저기, 한구석에 파랗게 반짝이는 빛도 아주 작게 보이네요.
성곤은 박실영의 말에 동의했다.
- 아시겠습니까. 물론 말로는 붉은 가로등이라고 하겠지만 볼 때는 그렇게 보면 안 돼요. 붉은 가로등,이라고 말하는 순간 잘못 보는 게 됩니다. 분명히 눈은 여러가지 색을 보고 있는데 입이 나서서 한가지 색만 보고 있다고단정 짓는 게 되니까요. 정말 보이는 그대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 느껴야 해요. 그러면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죠. 온 세상이 신기한 것투성이이고 예쁜 것투성이라는걸 알게 되는 거예요. - P146

란희는 보글거리며 끓고 있는 감자탕을 바라봤다. 왜 삶은 이리도 인색하고 궁색하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형광등 아래 빛바랜 앞접시 안의 배추겉절이처럼 멋없는 민낯인 걸까, 생각하는 순간 아영이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 엄마, 우리가 인생이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왜 그런 게 궁금해진 거냐고 물으려다가 란희는 말을 바꿨다. - P181

- 사람은 자꾸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거든요. 돌보다 더 단단하고 완고한 게 사람이죠. 바뀌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 원래 모습대로 되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왜? 그게 편하니까. 그 단계에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은 정말 드물죠. 그 시간까지 온전히 겪고 나서야 비로소 원래의 자기 자신에서 한발자국쯤 나아간 사람이 되는 겁니다. - P192

- 성공이 꼭 대단한 결과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우린 성공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그러다보면 지레 겁을 먹게 되죠. 작은 한걸음을 내딛고 거기서부터 힘을 얻어 걸어가면 됩니다. 그 자체가 이미 성공일 수 있어요. 사실 여기까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제안하는 건, 함께하자는 겁니다. 어떤 인생이든 그 안엔 절망과 희망이 함께 깃들어 있고 작든 크든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게 도와줄 지푸라기를 잡고 싶어하는 건 모두가 똑같아요. 하지만 어떤 지푸라기를 쥘 건지는 스스로 정해야 하죠. 누군가가 대신 만들어 내미는 지푸라기는 잡아봤자 금세 가라앉을 테니까요. 이 프로젝트는여러분이 스스로 만든 지푸라기에 바람을 넣어줄 겁니다. 지푸라기가 엄청나게 커다란 튜브가 될 때까지, 그래서 여러분이 당당하게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말입니다. - P200

복지시설에 도움을 요청해 집 안 가득 쌓인 물건을 모두 정리 정돈하고 사람들의 손을 잡고 외출을 한 적도 있고요.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해낸 게 아니라서였을까요.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다시 잡동사니로 가득한 어두운 방 안에 숨어 지내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도, 전 여전히 나가고 싶어요. 다시 전처럼 세상이 살만한 곳이란 걸 느끼고 싶어요. 변화라뇨. 말은 안 해도 누구나 원하는걸요. 너무나 떨리고 두려워서, 또다시 실패가 될까봐 바뀌고 싶다는 말을 할 용기가 없어서 시도조차 포기해버리는 것뿐이죠. 제 목표는 소박해요. 하루에 딱 세걸음씩만 걸어보고 싶어요. 그 걸음이 모여 언젠가 저를 세상 속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까요?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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