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절대온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날보다 얼마나 추운지가 중요한 거지. 그게 바로 체감온도라는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내가 죽고 싶다고, 죽어야겠다고 느끼는 이 체감이 중요한 거라고. 김성곤은 생각했다. 말마따나 그의 체감온도는 몸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그 어느 때보다도 낮았다. - P17
어쨌든 이날 그를 다리 위에서 끌어내린 건 누군가의 격려도 위로도 아닌, 매섭도록 차가운 칼바람이었다. 많은 사람에겐 그 밤의 갑작스러운 추위가 감기를 유발했지만 적어도 김성곤 안드레아에게만큼은 때 아닌 칼바람이 삶의 방패가 되어준 셈이다. - P18
그러나 빛이 꺼진 것처럼 보이는 인생에도 기회가 다가와 문을 두드릴 때가 있다. 그 두드림은 너무 작고 은근해서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놓치고 만다. 김성곤 안드레아의 경우 기회의 속삭임은 그날 한강에서 나와 서울역에서 들은 ‘변화‘라는 단어였다. 수없이 들은, 흔하다 못해 귀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발에 챌 만큼 평범한 단어는 그날 밤, 왜인지 족쇄처럼 그의 귀 안에 철썩 들러붙어 작은 뿌리를 내렸다. - P51
그땐 그저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고 생각했었다. 완벽한 순간은 평범한 일상 속에 녹아 있다는 걸 몰랐으니까. - P58
성곤은 고개를 저었다. 과거와 현재의 ‘처지‘를 비교하는 대신 그는 사진 속의 ‘표면적 사실‘만 비교하기로 했다. 실험 결과를 살피는 연구원처럼 김성곤은 두 사진을 번갈아 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P60
성곤은 그 영상을, 12년 전의 어떤 날을 보고 또 봤다. 인생을 통틀어 단 하루를 고른다면 이날을 택하고 싶었다. 이런 날이라면 영원히 반복해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엎드려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겨우 지금 같은 상황에 이르기 위해 이 삶을 관통해온 걸까. 오로지 애통할 뿐이었다. - P66
신호 대기로 서 있다가 녹색불이 켜지고 모든 이들이 일제히 부르릉 앞으로 나갈 때 김성곤 안드레아는 두 다리를 놀려 페달을 밟았다. 거리의 동료, 혹은 경쟁자인 라이더들이 낡은 자전거를 탄성곤을 때로는 안쓰럽게, 때로는 자신들의 값비싼 애마와 비교하며 으쓱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성곤은 묵묵히 자신만의 속도로 달렸다. 가진 자산이 없다면 몸이라도 움직여 느리게라도 나아가야 했다. - P73
어떤 생각은 깊이 하면 해롭다. 어떤 고뇌는 곧장 절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때때로 나쁜 생각이 몸에 스며들기 전, 성곤은 속으로 이렇게 외치곤 했다. -허리는 위로. 어깨는 아래로. 등은 그 사이에. 백 투 더 베이직! 이 혼자만의 외침이 김성곤 안드레아의 매일매일을 지탱하는 짧은 기도가 됐다. 그리고 삶은 그를 잊고 있던 인연과의 재회로 안내하는 중이었다. - P76
‐ 이 자식은 불씨 하나가 없어. 아니, 아예 없진 않은것 같은데, 그게 아직 켜지질 않았지. 커다란 엄지척 이모티콘을 남긴 성곤이 중얼거렸다. 진석은 켜지지 않은 성냥 같았다. 작은 불씨만 한번 탁 켜주면 밝게 빛을 뿜어낼 텐데 그 한방이 없는 아이였다. 그렇지. 성곤은 포기하듯 뇌까렸다. 우리 모두 그 한방이 없기에 다들 이렇게 평범하게,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 P102
단 하나의 목표만 있는 삶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성곤은 자전거로 바람을 가르며 음식을 배달하고 허겁지겁 밥을 먹고 머릿속에 많은 걸 품지 않으려 때론 일부러 더 고되게 일했다. 지금 그가 살아내는 삶은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삶이었다. 살아 있기만 하면 되니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자괴감에 젖을 일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살아보니, 살기 위해 살아내는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 막 지나가고 봄의 기운이 느껴질 무렵, 김성곤은 과거의 사진과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을 햇빛에 대고 겹쳤다. 전에는 충격적으로 차이가 났던 두 남자의 실루엣이 언뜻 비슷해 보였고 그걸 확인한 김성곤 안드레아의 얼굴에는 아주 오랜만에 만족의 미소가 떠올랐다. - P110
얘기를 마치고 난 성곤의 혀끝에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실천하긴 어려워도 조언하는 건 쉽다. 세상을 조금 더 멀찍이서 바라볼 수 있으니까. - 제 생각엔 말이죠, 사장님이 지금 하시는 의미 없는 시도에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진석이 말했다. - 그런 거 없어. 의미가 없는 게 의미라니까. - P122
~ 성곤은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오더니 가슴 한구석에서 미세한 기쁨이 느껴졌다. 확실하고 순수한 기쁨이었다. 투자한 주식의 가치가 올라갔을 때 느끼는 미칠 듯한 흥분 같은 게 아니라, 작은 사탕 꾸러미를 받은 어린아이가 온몸과 마음으로 느낄 것 같은 충만한 기쁨이었다. 그 기분은 그날 오전 내내성곤의 입가에 웃음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그를 채웠던 감정은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한순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성곤은 그얘기를 진석에게 털어놨다. - 당연하죠. 경비아저씨가 사장님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니까. 진석이 간단한 답을 내놨다. - 그런가...... - 가족의 칭찬이었다면 달랐을 거예요. 왜 가까운 사람에게 표현하고 인정받는 게 제일 어려울까요. 누가 그거 논문으로 쓰면 좋겠어. - P125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 주는 건 인간의 보편적 특징이기라도 한 걸까. 그건 어디서나 목격할 수 있는 비일비재한 풍경이었다. 겉에서 보면 멀쩡한 사람들이 한꺼풀 걷어내면 다들 곪아 있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비슷했다. 제일 소중하게 여기고 조심해야 할 사람에게 그러지 못해서 할퀴고 긁고 모독하느라고. - P126
- 뭐든지 한번에 한가지씩만 하는 겁니다. 밥 먹을 땐 먹기만, 걸을 땐 걷기만, 일할 땐 일만. 그렇게 매 순간에 충실하게 되면 쓸데없는 감정소모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그 말은 성곤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등을 쭉 펴고 어깨를 여는, 목적 없는 단순함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비결이었다는 걸 김성곤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만으론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박실영이 말을 이었다. - 마지막으로 하나. 생각의 스위치는 끄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세요. 우린 항상 무언가를 판단하느라 에너지도 감정도 너무 많이 쓰고 있잖습니까. 그러다보면 자꾸만 소모적인 생각이 날아들고 세상을 그대로 바라보거나 이해하지 못하게 돼요. 생각이란 건 자신만의 선글라스 같은 거니까요. 그러니까 생각의 스위치부터 꺼야 하죠. 그다음은 쉽습니다. 낙엽은 낙엽으로 보고 전봇대는 전봇대로 보는 겁니다. 빨간 건 빨갛게 노란 건 노랗게 받아들이면 되죠.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어요. 저기 가로등 보이시죠. 무슨 색 같습니까. - P144
- 자세히 보면 위쪽 구석은 불처럼 새빨갛고 중간의 오렌지빛에 이르기까지 색의 스펙트럼이 펼쳐져 있죠. 간간이 검은 점들도 찍혀 있어요. 그리고 저기, 한구석에 파랗게 반짝이는 빛도 아주 작게 보이네요. 성곤은 박실영의 말에 동의했다. - 아시겠습니까. 물론 말로는 붉은 가로등이라고 하겠지만 볼 때는 그렇게 보면 안 돼요. 붉은 가로등,이라고 말하는 순간 잘못 보는 게 됩니다. 분명히 눈은 여러가지 색을 보고 있는데 입이 나서서 한가지 색만 보고 있다고단정 짓는 게 되니까요. 정말 보이는 그대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 느껴야 해요. 그러면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죠. 온 세상이 신기한 것투성이이고 예쁜 것투성이라는걸 알게 되는 거예요. - P146
란희는 보글거리며 끓고 있는 감자탕을 바라봤다. 왜 삶은 이리도 인색하고 궁색하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형광등 아래 빛바랜 앞접시 안의 배추겉절이처럼 멋없는 민낯인 걸까, 생각하는 순간 아영이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 엄마, 우리가 인생이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왜 그런 게 궁금해진 거냐고 물으려다가 란희는 말을 바꿨다. - P181
- 사람은 자꾸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거든요. 돌보다 더 단단하고 완고한 게 사람이죠. 바뀌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 원래 모습대로 되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왜? 그게 편하니까. 그 단계에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은 정말 드물죠. 그 시간까지 온전히 겪고 나서야 비로소 원래의 자기 자신에서 한발자국쯤 나아간 사람이 되는 겁니다. - P192
- 성공이 꼭 대단한 결과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우린 성공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그러다보면 지레 겁을 먹게 되죠. 작은 한걸음을 내딛고 거기서부터 힘을 얻어 걸어가면 됩니다. 그 자체가 이미 성공일 수 있어요. 사실 여기까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제안하는 건, 함께하자는 겁니다. 어떤 인생이든 그 안엔 절망과 희망이 함께 깃들어 있고 작든 크든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게 도와줄 지푸라기를 잡고 싶어하는 건 모두가 똑같아요. 하지만 어떤 지푸라기를 쥘 건지는 스스로 정해야 하죠. 누군가가 대신 만들어 내미는 지푸라기는 잡아봤자 금세 가라앉을 테니까요. 이 프로젝트는여러분이 스스로 만든 지푸라기에 바람을 넣어줄 겁니다. 지푸라기가 엄청나게 커다란 튜브가 될 때까지, 그래서 여러분이 당당하게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말입니다. - P200
복지시설에 도움을 요청해 집 안 가득 쌓인 물건을 모두 정리 정돈하고 사람들의 손을 잡고 외출을 한 적도 있고요.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해낸 게 아니라서였을까요.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다시 잡동사니로 가득한 어두운 방 안에 숨어 지내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도, 전 여전히 나가고 싶어요. 다시 전처럼 세상이 살만한 곳이란 걸 느끼고 싶어요. 변화라뇨. 말은 안 해도 누구나 원하는걸요. 너무나 떨리고 두려워서, 또다시 실패가 될까봐 바뀌고 싶다는 말을 할 용기가 없어서 시도조차 포기해버리는 것뿐이죠. 제 목표는 소박해요. 하루에 딱 세걸음씩만 걸어보고 싶어요. 그 걸음이 모여 언젠가 저를 세상 속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까요?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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