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처음엔 시를 몰랐습니다 - 시가 좋아진 당신에게
김연덕.강우근 지음 / 리드앤두(READNDO)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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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가 참 좋아졌다. 그렇다고 이것이 시가 소설보다 좋다는 말은 아니지만...(어쩐지 죄송합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내가 목숨처럼 여기고 사랑하는 작가들이 소설을 쓰고 있으므로 당분간은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최근의 나는 예전의 그 어떤 때에 비해 더없이 시가 좋다. 이 말을 하기까지 망설인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제일 큰 이유는 내 주변에 시를 엄청 좋아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가 좋아서 출판사나 문창과에 갔고, 신춘문예 본심에 오르고, 진짜로 시인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시를 정말 모르고... 아니, 그들에 비하지 않더라도 시는 내게 참 어려운 장르다. 이렇게 잘 모르는데 시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물론 소설이라고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요즘 시가 좋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몇 번의 계기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최근에 김연덕, 강우근 시인이 쓴 「우리 모두 처음엔 시를 몰랐습니다」를 읽은 것이다. 시집이 아니라 시인의 산문을 읽고 시가 좋아졌다고 해도 되는 걸까? 어쩌면 난 결국 이야기가 좋은 게 아닌가? 그렇지만... 이 산문집의 전반부에 실린 김연덕 시인의 에세이가 너무 마음에 와닿았다. 특히 그가 시에 빠지게 된 시기 정서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시를 더 열심히 읽고 싶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는 늘 묘한 무력감, 수치심, 옅은 분노.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 지금 이 교실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지만 속에 답답한 게 너무 많고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얘기할 수도 없을 것 같은 기분들.

그런 마음들은 내가 겪었고 겪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시를 읽으며 '뭐야, 나만 이상한 게 아니잖아?'라고 느꼈다고 했다. 비록 나는 시가 아니라 그런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해준 김연덕 시인의 에세이를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시가 정말로 그런 순간을 줄 수 있다면 시를 더 읽어보고 싶었다.

그러다 최근에 책장 정리를 하면서 '와 진짜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어!!!'를 외치게 한 시를 만났다. 아빠의 책장에서 나온 나희덕 시인의 것이었다.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

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러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나희덕, 나 서른이 되면 中

와!!!!!! 진짜 뭐지???????

이 시를 발견하고 진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마음 속으로, 또 문자로는 이미 몇 번이고 비명을 질렀다... 정말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어... 라고. 일기장에 저 구절을 베껴쓰고 챗지피티가 된 것 마냥 **와 이거 정말 정확해** 같은 말만 우다다 적어내렸다.

너무 호들갑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러한 모순된 마음을... 시가 아니라 소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최은영의 소설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사랑과 증오를, 선망과 열등감을, 순간과 영원을 얼마든지 뒤바꿔 느끼곤 했으니까. 심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다는 마음이 모순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최은영, 애쓰지 않아도 中

나희덕의 시와 최은영의 소설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분명 나는 최은영의 소설에도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그런데 왜 시에서만 나만 이상하지 않은 거였다고 깨닫고 비명을 지른 것일까?

그것은 열여섯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뺨을 내려치고 싶다고

정말로 간절히 생각했던 적 있기 때문이다...

아 문자로 하고보니 진짜 정신뿡자 같네

그만큼 이상하지?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그런데 이런 마음, 이런 이미지 정도로도 시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희덕 시인의 시구에 어떠한 인과가 덧붙여져 소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장면이 있는 소설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어쩐지 쓸 법한 소설가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소설이 시만큼 적확하게 내 마음에 들어앉을 수 있을까? 내겐 이제 그렇게 생각하기 되기까지의 어떠한 전후 사정이 없기 때문에 단언하기 망설여진다.

소설이라면 이건 정말 이상한 이야기겠지? 이것은 내가 시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시라면... 문득 나 그 사람의 뺨을 때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라고 고백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내 눈으로 읽었으니까.

나는 소설이 좋다. 이렇게 말하기 위해 아무런 용기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너무나 좋아서 오히려 더 머뭇거린 적도 있다. 하지만 소설이 좋다는 사실과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의 의문도 망설임도 공백도 가져본 적이 없다. 단순한 재현을 넘어 현전하는 것이 소설이고, 나는 그게 좋다. 소설이 좋다고 나는 몇 번이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울컥 찾아오는 그 마음들, 이유도 전조도 없이 내게 문득 들이닥치는 기분들. 그것들은 가끔 시의 영역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래도록 망설이고 의문하면서, 시가... 좋을지도 몰라요, 라고. 아주 간신히 쓰는 것이다.

이것은 시를 좋아하고 있다기 보다는 좋아하고 싶다는 마음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가 여전히 이상하고 잘 모르겠고 어렵고 그렇다. 그럼에도 시를 좋아해보고 싶다. 어쩌면 이건 내가 세상과 나를 다루고 생각하는 방식인 것 같다.

시는 참 이상하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나만 이상하지 않다는... 또 이상한 기분인지 사실인지 모를 것을 건져 올린다.

이정도의 마음으로도 괜찮은 걸까?

그래도 언제나 얘기하듯... 더 가보고 싶다, 아직. 아직은 잘 모르는 상태로, 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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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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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shorts/js_RwrpodoY

이 영상을 지금에서야 보았어요...🥲 쬐끔 부끄럽고 정말정말 기뻐요...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먼저 읽었습니다만 저는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구매하였으므로 이 리뷰는 구매자칸에 있겠지요…



이 책, 심지어 이 리뷰까지 도달한 사람이라면 궁금하다. 고됐던 지난 겨울을, 계엄과 비상식의 순간들을 어떻게 견뎠는지.

나는… 자주 황정은을 생각했다.


2024년 12월 4일의 내 일기


나의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30분 경은 이랬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대학 동기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서 한 친구가 연락을 한다.

얘들아 뉴스 좀 봐.

당시 우리 학과는 모종의 이유로 신입생을 받을 수 있을지 그 여부가 불투명했고, 나는 그 메세지를 보자마자 드디어 이 망할 놈의 학교가 진짜 망해가는 게 동네방네 소문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입력창에 우리 학교 드디어 뉴스 나왔냐는 말을 쓰고 이어서 'ㅋㅋㅋㅋㅋ'를 연달아 치려고 했는데 손이 딱 멈췄다.


비상 계엄 선포했대.


그때도, 이 문장을 쓰는 지금도 말문이 턱 막힌다. 믿기지가 않고 어이가 없어서 채팅방에 올라오는 글자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미친놈, 하나 쓰고 거실로 나가 예능 프로그램을 보던 엄마를 툭툭 치며 함께 뉴스를 보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중고등학교 동창들과 뉴스와 정치인들의 라이브를 하나씩 맡아 상태를 중계하고 발을 구르며 새벽을 보냈다. 새벽 2시가 지나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아 출근을 해야 하는 친구를 다독이며 일단 자자고 했는데 다들 통 잠에 들지 못했던 것 같다. 나도 결국 밤을 지새웠고, 퀭한 눈으로 학교에 가는 버스에서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왜 나는 학교 가는 버스에 어제처럼 몸을 싣고 있는지…

아, 맞다. 올해 황정은 신작 나온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텄다…

정확히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 책도 2024년 12월 3일에서 시작한다.

집을 수리하고 책을 읽고 소설을 쓰는 일상이 계엄이라는 한 단어로 순식간에 뒤바뀐다. 시간이 지나 잠시 잊고 있었던 한 순간 한 순간이 황정은의 기록으로 다시 되살아난다.

다소 막막하고 답답하고 속에서 뜨거운 것이 차오르던 순간들.

동시에 막연히 잘 될 것 같기도 하고 이 사람들이 있다면 어쩐지 괜찮을 것 같던 순간들.

그런 순간들 속에서 돌아가는 일상들이 이 책에 있었다.


옮기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은데 그랬다가는 책을 다 옮겨적는 꼴이 될 것 같아 몇 개만 옮긴다.


사람들의 악함을 마음에 들여 되짚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게도 그 싹이 무성하게 있으니까. 그런 것이 자신에겐 없으며 없을 거라고 믿는 얼굴 앞에 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내게는 그런 입장 역시 악함의 기반이 되는 약함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의 악함에 내가 얼마나 분노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약함은 어느 정도가 그의 탓일까. 그리고 권력 가진 이들의 혼돈 그 자체인 악함도 약함에서 그 탓을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엔 정말 악한 게 있어.

정말 나쁜 게 있어.

(66p)


이 탄핵이 어떤 결과에 이르든 남태령에서 서로 연결되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경이로 목격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놀라운 사람이 이렇게 많다.

(59p)


우리가 서로를 목격하고 있으니 각자의 방식으로 다정해져야 해. 나의 목격과 나를 목격하는 다른 목격자를 위해서라도. 가급적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이번 한번뿐이니까 올 앳 원스.

(135p)


하지만 이대로 부서지는 게 좋겠다, 이런 사회, 하고 생각할 수가 없다. 많은 이들이 애쓰고 있고, 너무 많은 이들이 어렵고 아프다.

(153p)


-


생각해보면 지난 겨울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들이 잦았다.

나의 고향에서 서울역, 혹은 용산역을 오가는 데에 필요한 육만사천원. 아르바이트로 벌어두었던 여윳돈이 고스란히 교통비로 깨진 것을 알았을 때. 추운 날씨와 견디지 못하고 고장난, 그 전까지는 한 번 쓰고 아껴두던 두 개의 응원봉. 소리를 지르고 기침하기를 반복하다 다 쉬어버린 목.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상황.

무엇보다 견딜 수 없던 것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것 같은 순간들과 그 '아무렇지 않은' 풍경을 이루기 위해 끼어 있는 나.


그럴 때마다 부적처럼 황정은의 책을 꺼내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2월 초에는 지금까지 출간된 단행본을 다 읽어서 3월에는 올 봄호 창작과 비평에 수록된 「문제없는, 하루」를 감사히 읽었다. 「작은 일기」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단편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말할수록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가벼워지고 하찮아지는 것 같았냐고 묻자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문한다. 나도 겪곤 하니까. 그 무서운 일을. 내게 너무나 중요한 그것이 당신에겐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목격하는 일, 사람의 무언가를 야금야금 무너뜨리는 그 일을

(42-43p)

나한테 정말 중요한 일들이 있어. 내가 생각하기엔 사람들에게도 정말 중요한 일이거든. 그래서 나는 자꾸 그걸 말하는데, 말하면 시답잖은 일이 돼. 시답잖아져, 말하면서.

말하면, 내가 그걸 말하면, 사람들은 그 진부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왜 여태 하느냐는 얼굴로 나를 봐. …(중략)… 그러면 나는 사람들이 그 일을 얼마나 신경 쓰지 않는지를 알게 돼. 그게 그 사람들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돼. 내게 너무, 너무 중요한 그 일들이, 사람들한텐 중요하지 않아.

그걸 보게 돼.

그게 어떻게 나를 죽이고 있는지, 언니는 몰라.


창작과비평 207호(2025 봄),「문제없는, 하루」

-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크게 공감가기도 했고… 많이 찔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우리 과 사람들은 대체로 SKY로 불리는 국내 상위권 대학을 뒤로 하고 온 사람들이다. 나를 포함하여…)

4월 4일과 어떤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선고를 듣고 「디디의 우산」 마지막 페이지를 찍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다. (황정은의 독자라면, 혹은 「디디의 우산」을 읽은 사람이라면 쉽게 '이것으로 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공감한다고 믿는다)

그날 학교에 가서 어떤 동기들이 내게 비릿하게 웃으며 조심해야지, 무슨 뜻이냐, 깜짝 놀랐다 하하… 했던 걸 잊을 수가 없다. (왜 그들은 다 남자일까?)


수능 성적 상위 1-2%의 내 동기들 혹은 선후배들.

무관하다고 믿는 그 얼굴들.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그 얼굴들을.

그 얼굴들과 다르게 '좋아요'를 눌러준 사람들도.


-


첫 머리에 쓴 일기처럼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건 굉장히 주제넘은 일이라고,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신은 분명 여기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

찬 바람에 아린 볼을 감싸며 이런 짓 이런 생각 다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황정은이 이 깜깜한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면, 나는 최대한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나를 계속 광장으로 향하게 했다.

그가 나를 멈추지 않게 했다.


그래서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리고 동시에 대체 왜 황정은에게 서평단 모집이 필요한지… 서평단이라뇨, 황정은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근데 또 그걸 내가 갖지 못한다면 누가 나보다 먼저 읽는다면 배 아파 죽을 것 같다고 사방팔방에 난리를 치며 데굴데굴 굴렀다. 그덕인지 내 손에 가제본도 들어와 있다. 정녕 도움이 된단 말인가? 나의 이 주절거림이…


-


마지막으로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최악을 생각하는 버릇 탓에 절필한 어떤 작가들이 떠오르며 혹시 당신이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하면 나는 어쩌지… 했는데 책 곳곳에서 정말 말도 안되는 기우였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백 번 천 번 만 번 안도했다. 꾸준히 읽고 쓰는 이야기가 있어서 읽는 중간중간 행복한 마음으로 가득해졌다…

작가에게 쓰는 일이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읽혔지만… 그러므로 이런 마음을 먹은 것도 조금은 죄송스럽지만… 행복한 걸 어쩌겠어요… 난 정말 작가님이 오래오래 써주셨으면 한다…


단편 원고를 이어 썼다. (42p)

단편 원고를 보름 안에 마무리해야 한다. (69p)

독감 백신을 맞았다. 단편은 거의 끝나간다. (76p)

오전에 소설을 쓰는 동안 대화를 끝없이 쓰고 지웠다. (89p)

단편 원고를 마감했다. (99p)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거의 매일 쓰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126p)

이제 뭐가 되든 써야지. (158p)


최근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가볍게 흩뿌리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밖에 할 수 없다. 그 시간을 함께 견딘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면 대체 무엇을 건넬 수 있을까.

그래서 구태여 소리 내어 발음해보는 것이다.


내가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

(175p)


나도 이 세계를, 당신을, 깊이 사랑합니다.


-


어떤 방식으로든 유독 길고 지난했던 2024년과 2025년의 겨울을 지나온,

어쩌면 아직도 어딘가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을 모두에게.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를 그리며.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광고 #협찬 #작은일기 #황정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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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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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을 지금에서야 보았어요...🥲 쬐끔 부끄럽고 정말정말 기뻐요...
 
요나단의 목소리 1~3 세트 - 전3권 (완결) - 탑꾸 세트(포토카드 4종 + 탑로더 1종 + 스티커 1종)
정해나 지음 / 놀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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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가지 않은지 팔 년이 지났다. 보스턴 미션 홈에서의 생활을 포함하면 칠 년이다. 매일 밤 자기 전에 기도를 하는 것도 스무 살 즈음에 그만두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나를 종교인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인간이 신 없이 서로를 통해 종교적일 수 있다고 믿는 신형철의 마음도 아니고, “Spiritual but not religious”라고 말하는 곽아람의 마음도 아니다. 인간의 신 발명에 긍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나는 개신교도라고 말하는 나.(기독교라고는 하지 않는 것이 포인트다) 불량하고 물렁한 개신교도인 나.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작년에 이 책을 읽었으므로, 올 1월 1일에는 오랜만에 기도를 했다.

<요나단의 목소리>는 목사 아버지를 둔 모태신앙 ‘선우’와 선우의 룸메이트 ‘의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두 사람이 입학한 고등학교는 개신교계 미션 스쿨인데, 첫 학교 예배 도중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선우의 목소리가 의영의 인상에 남는다. 두 사람은 3년간 함께 지내게 되는데, 그러면서 의영은 선우가 중학생 시절 ‘다윗’이라는 남자아이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윗과 요나단

청소년기가 인생의 다른 시기에 비해 유독 소란한 이유는 불화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종종 친구나 가족 간의 갈등, 즉 개인 대 개인의 대립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사실 근본적인 원인은 ‘나’와 ‘세계’의 불화다. 선우의 세계는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 아버지는 목사고, 교회에 딸린 집에 살면서 꼬박꼬박 일요일마다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른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믿게 된 신의 존재, 버릇처럼 하는 기도, 성가 외의 노래는 ‘세상 음악’이라고 표현하는 가정환경이 ‘선우의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선우가 좋아하게 된 다윗 역시 목사의 아들이다. 그러나 다윗은 선우와 다르게 머리를 노랗게 탈색하고 담배를 피우며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종교를 부정한다. 다윗에게 있어 교회는 자신을 때린 후 아무렇지 않게 수요예배를 하는 부친의 공간, 거짓말과 위선의 공간이다.

선우가 다윗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원래 사랑의 순간이란 짜잔, 하고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다윗이 선우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것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부모의 종교가 자신의 종교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나아가는 삶, 새하얗게 탈색한 다윗의 머리칼처럼 눈부신 세계.

다윗과 요나단은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로, 기독교에서는 참된 우정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의 아들이고 다윗은 사울의 사위인데, 야훼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낙점 짓는다. 이에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요나단은 그를 따르지 않고 다윗을 돕는다. 둘의 관계는 종종 동성애적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보수 개신교는 이런 의견을 당연히 부정한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사무엘상 18:3)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사무엘상 18:4)


욥의 자녀들

신실한 종교 생활을 하지만 묘한 위선을 눈치채고 있는 선우, 이미 교회와 가정을 떠난 다윗, 그리고 교회의 거짓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교회에 다니는 다윗의 여자친구 주영은 빠르게 가까워진다. 주영은 꽤나 독특한 인물인데,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는 다윗을 향한 사랑 때문에 교회에 다닌다. 행실이 좋아 보이지 않는 다윗과 어울리지 말라는 어른의 말에 “예수님도 가려서 사랑하지 않으시잖아요”라고 올곧게 말하는 주영 역시 교회의 모순을 알고 있으나, 지옥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면 다윗을 그곳에 보낼 수 없기에 교회에 나간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나쁘다.”

그러다 다윗이 부활절 전날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이에 선우와 주영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당함을 느낀다. 장례식장에서 주영은 다윗의 아버지에게 욥의 자녀에 대해 묻는다.

욥 역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신을 경외하는 선한 이다. 사탄은 욥이 건강하고 풍족하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 과연 그런 조건이 사라져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지 신과 내기를 한다. 사탄은 욥의 재산을 빼앗고, 병을 주었으며, 열 명의 자녀를 앗아간다. 그럼에도 욥이 신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자 하나님은 욥에게 건강과 이전보다 더 많은 재산, 그리고 ‘새로운’ 열 명의 자녀를 준다. 그저 욥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 같은 일곱 아들과 세 딸의 개별적인 존재에 대해 물음으로써, 주영은 다윗의 아버지에게 그런 식으로 아들의 죽음을 사용하지 말라는 노골적인 원망이자 암묵적인 경고를 내비친다. 그리고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을 것을, 신을 믿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하지만 선우는 다윗이 죽었는데도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부활절 칸타타를 불러야 했다. 사랑하는 친구는 죽었는데, 예수의 부활을 찬양해야 했다. 선우는 다윗의 죽음을 노골적으로 슬퍼할 수 없다. 교인들이 보기에 다윗은 흔히 날라리라고 불리는, 교회 밖의 아이다. 선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다윗의 죽음에 선우가 그렇게까지 슬퍼하는 이유를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인들은 납득하지 못한다.


이때부터 고등학교 3년 내내, 선우는 우울증 약을 달고 살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다윗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윗의 죽음으로 선우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자신이 속한 온 공동체를 잃어버렸다. 동성애를 죄악시하도록 가르쳐 온 세상에서, 다윗을 잃은 선우의 슬픔은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회는 선우의 사랑을 함께 기뻐하지도, 선우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지도 못한다. 자신을 구성한 세상에 의해 애도는 침묵을 강요받았고, 그것은 선우의 오랜 아픔이 된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십시오”(로마서 12:15)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로마서 12:9)

고등학교에 올라간 선우의 룸메이트 의영은 선우와 사뭇 다른 삶을 살아왔다.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대척점에 있는데, 노래하는 것이 괴로운 선우의 성가를 듣고부터 의영은 채플 시간이 지루해지지 않게 된다. 줄리 앤드류스가 부른 My Favorite Things를 듣는 선우와 빅뱅의 하루하루를 듣는 의영, 찍는 문제는 전부 틀리는 선우와 찍기만 하면 전부 맞는 의영, 모범생의 표본 같은 선우와 종종 담배를 피우는 의영. 어쩌면 그런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르기 때문에 부딪히는 지점도 있다. 의영은 자기 자신에 대해 구태여 거짓말을 할 필요 없는 환경에서 자라온 반면에, 선우의 삶은 어느 순간부터 온통 살기 위해 해야 했던 거짓말들로 가득해진다. 의영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거짓말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지만, 선우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에는 ‘심장이 내려앉’았다고 표현한다. 왜 그렇게 선우가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만 하는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의영은 알 수 없다.


그 시절 자신이 갖고 있던 감정을 의영은 ‘자만심’이라고 표현한다. 선우를 만나고 읽은 몇몇 퀴어 미디어에서 접한 것처럼, 선우가 자신을 둘러싼 억압을 내던지고 개신교적 세계관을 부정하기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기를, 선우의 선택에 자신이 존재하기를. 하지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선우의 세상을 조금씩 이해해가며, 그리고 결말부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의영은 그것이 청소년기의 비대한 자의식이었다는 것을 인지해간다.

모두가 저마다의 복잡한 세계를 가지고 있기에, 타인의 세계를 오롯하게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은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종종 두려워지나, 두려움을 무릅쓰고도 누군가의 곁에 남는다. 그 마음을 사랑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한일서4:18)


요나단의 목소리

이 만화에서 표면적으로 요나단은 선우다. 다윗을 향한 사랑과, 성경을 인용한 기도, 그리고 노래를 하는 선우의 ‘목소리’. 하지만 사실 요나단은 선우뿐만이 아니라, 주영이기도 하고 의영이기도 하다. 세 사람은 저마다의 다윗을 사랑하는 요나단인 셈이다. 특히 의영이 선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했을 때, 선우에게 닿은 그 목소리가 ‘요나단의 목소리’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위협하고 두렵게 할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이다. 때문에 어른이 되어가는 일은 청소년기에 겪은 세상과의 불화를 해소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불화를 인정하면서도 세상을 향해 나아갈 다짐을 통해 가능해진다. 거짓을 물리치고 진실한 삶에 대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 타인의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바꿀 수 있다는 착각을 내려놓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도 어려운 서로의 삶에 ‘다만 눈을 돌리지 않는’ 것.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사무엘상 20:17)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요나단의 목소리> 속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선택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꼽자면 단연코 본편 뒤의 주영 외전이다. 주영의 파편은 가끔 나와 겹쳐지는 것도 같다. 교회도 가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지만 끝내 신을 믿지 않는 것에는 실패한 사람. 어떤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이 땅이 아닌 어딘가에서의 이어짐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 영원토록 함께할 천국이 절실하고, 지옥이 있을 가능성이 백만 분의 일이라도 있다면 사랑하는 이를 지옥에 보낼 수 없다는 사람. ‘정말로 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아니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렇지 않다는 걸 과거의 자신에게 알려주었다면 ‘그 애는 나를 죽이려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

주영은 신이 자신의 삶에서 멀어지는 속도와 다윗이 희미해져가는 속도가 정비례한다고 말하지만, 다윗의 흔적은 여전히 주영의 삶에 남아 그를 구성한다. 그 시절 다윗에게 일어난 불합리가 답습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암묵적인 다짐이, 구태여 의식하여 반복해 상기하지 않아도 주영의 삶에 자연스럽게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사랑스럽다.

어린 주영의 믿음은 사실 하나님 그 자체보다 다윗을 향한 사랑에서 기인한다. 다른 이들이 죽어서 어디에 가는지 주영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신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어찌 보면 불순한 마음으로 신을 믿는다. 사람이 사람을 애타게 사랑하는 마음을, 이 만화에서 가장 종교적이지 않으면서도, 신을 향한 믿음과 경애에 한없이 가까운 그 마음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이런 순간과 마음 때문에 나는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그가 종교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신이 아니더라도 믿는 것들이, 간절히 바라는 순간들이 있지 않은가. 무교인 의영이 간절하게 선우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유희경의 시처럼 ‘잠시 신이었던’ 것들이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고 믿는다.


이 시간 너의 맘속에

다만 그런 무신론적인 사고와는 별개로, 나는 여전히 신의 존재를 믿는다. 과거의 선우처럼 독실하지도, 현재의 주영처럼 신을 증오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중간 어딘가에 서서 그는 분명 거기에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해

얼마나 너를 사랑하시는지

너를 위해 세상을 만들고

저 별을 만들고

아들을,

그 아이를 보냈네


*


개신교의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주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이 선우에게 보내준 아들은, 비단 예수님 뿐만은 아닐 것이다.



1) 신형철,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

2) 곽아람, 공부의 위로

3) 황정은, 뼈 도둑

4) 유희경,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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