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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처음엔 시를 몰랐습니다 - 시가 좋아진 당신에게
김연덕.강우근 지음 / 리드앤두(READNDO)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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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가 참 좋아졌다. 그렇다고 이것이 시가 소설보다 좋다는 말은 아니지만...(어쩐지 죄송합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내가 목숨처럼 여기고 사랑하는 작가들이 소설을 쓰고 있으므로 당분간은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최근의 나는 예전의 그 어떤 때에 비해 더없이 시가 좋다. 이 말을 하기까지 망설인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제일 큰 이유는 내 주변에 시를 엄청 좋아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가 좋아서 출판사나 문창과에 갔고, 신춘문예 본심에 오르고, 진짜로 시인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시를 정말 모르고... 아니, 그들에 비하지 않더라도 시는 내게 참 어려운 장르다. 이렇게 잘 모르는데 시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물론 소설이라고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요즘 시가 좋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몇 번의 계기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최근에 김연덕, 강우근 시인이 쓴 「우리 모두 처음엔 시를 몰랐습니다」를 읽은 것이다. 시집이 아니라 시인의 산문을 읽고 시가 좋아졌다고 해도 되는 걸까? 어쩌면 난 결국 이야기가 좋은 게 아닌가? 그렇지만... 이 산문집의 전반부에 실린 김연덕 시인의 에세이가 너무 마음에 와닿았다. 특히 그가 시에 빠지게 된 시기 정서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시를 더 열심히 읽고 싶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는 늘 묘한 무력감, 수치심, 옅은 분노.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 지금 이 교실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지만 속에 답답한 게 너무 많고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얘기할 수도 없을 것 같은 기분들.

그런 마음들은 내가 겪었고 겪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시를 읽으며 '뭐야, 나만 이상한 게 아니잖아?'라고 느꼈다고 했다. 비록 나는 시가 아니라 그런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해준 김연덕 시인의 에세이를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시가 정말로 그런 순간을 줄 수 있다면 시를 더 읽어보고 싶었다.

그러다 최근에 책장 정리를 하면서 '와 진짜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어!!!'를 외치게 한 시를 만났다. 아빠의 책장에서 나온 나희덕 시인의 것이었다.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

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러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나희덕, 나 서른이 되면 中

와!!!!!! 진짜 뭐지???????

이 시를 발견하고 진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마음 속으로, 또 문자로는 이미 몇 번이고 비명을 질렀다... 정말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어... 라고. 일기장에 저 구절을 베껴쓰고 챗지피티가 된 것 마냥 **와 이거 정말 정확해** 같은 말만 우다다 적어내렸다.

너무 호들갑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러한 모순된 마음을... 시가 아니라 소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최은영의 소설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사랑과 증오를, 선망과 열등감을, 순간과 영원을 얼마든지 뒤바꿔 느끼곤 했으니까. 심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다는 마음이 모순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최은영, 애쓰지 않아도 中

나희덕의 시와 최은영의 소설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분명 나는 최은영의 소설에도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그런데 왜 시에서만 나만 이상하지 않은 거였다고 깨닫고 비명을 지른 것일까?

그것은 열여섯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뺨을 내려치고 싶다고

정말로 간절히 생각했던 적 있기 때문이다...

아 문자로 하고보니 진짜 정신뿡자 같네

그만큼 이상하지?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그런데 이런 마음, 이런 이미지 정도로도 시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희덕 시인의 시구에 어떠한 인과가 덧붙여져 소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장면이 있는 소설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어쩐지 쓸 법한 소설가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소설이 시만큼 적확하게 내 마음에 들어앉을 수 있을까? 내겐 이제 그렇게 생각하기 되기까지의 어떠한 전후 사정이 없기 때문에 단언하기 망설여진다.

소설이라면 이건 정말 이상한 이야기겠지? 이것은 내가 시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시라면... 문득 나 그 사람의 뺨을 때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라고 고백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내 눈으로 읽었으니까.

나는 소설이 좋다. 이렇게 말하기 위해 아무런 용기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너무나 좋아서 오히려 더 머뭇거린 적도 있다. 하지만 소설이 좋다는 사실과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의 의문도 망설임도 공백도 가져본 적이 없다. 단순한 재현을 넘어 현전하는 것이 소설이고, 나는 그게 좋다. 소설이 좋다고 나는 몇 번이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울컥 찾아오는 그 마음들, 이유도 전조도 없이 내게 문득 들이닥치는 기분들. 그것들은 가끔 시의 영역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래도록 망설이고 의문하면서, 시가... 좋을지도 몰라요, 라고. 아주 간신히 쓰는 것이다.

이것은 시를 좋아하고 있다기 보다는 좋아하고 싶다는 마음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가 여전히 이상하고 잘 모르겠고 어렵고 그렇다. 그럼에도 시를 좋아해보고 싶다. 어쩌면 이건 내가 세상과 나를 다루고 생각하는 방식인 것 같다.

시는 참 이상하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나만 이상하지 않다는... 또 이상한 기분인지 사실인지 모를 것을 건져 올린다.

이정도의 마음으로도 괜찮은 걸까?

그래도 언제나 얘기하듯... 더 가보고 싶다, 아직. 아직은 잘 모르는 상태로, 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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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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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파티>를 읽자마자 너무너무 좋아서 다음 단편으로 넘어가기 쉽지 않았다. 읽으면서 이게 내가 사랑하던 김애란이라는 말을 입 속에서 계속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단편 읽는 재미를 제대로 느끼게 해준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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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생각 사는 핑계 매일과 영원 11
이소호 지음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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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호는... 나와는 너무 다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나를 떨리게 만드는 사람
그래서 새로운 책을 계속 기다리게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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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 발칸 여행에 다녀왔다.

분명 유럽에 있었는데 다시 내 방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으니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어쩐지 거짓말 같다…


아래는 여행 기간 동안 읽은 책들
















괴테 『이탈리아 기행1』

공항까지 가는 버스에서 읽었는데, 사실 1/3 정도 읽고 졸려서 포기한 후에 열지 않았다… 다음에 이탈리아를 다시 갈 때 읽는 것으로…ㅎㅎ















문보영,『일기시대』

기내에서 읽었다. 일기도 일기지만… '시인기期'가 수록된 2부를 특히 즐겁게 읽었다. 내 주변엔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 많고 그들의 열렬함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머쓱해진다. 나는 시가 어렵고 알쏭달쏭하고, 좋은 것 같기도 한데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고… 그런데 이 책의 2부를 읽으면서 시의 세계로 한 발 더 내디뎌보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그리고 동시에 난 역시 소설이 참을 수 없이 좋다는 생각…














같은 매일과 영원 시리즈에 있는 정용준『소설 만세』

소설이 좋아서 괴롭거나 미운데 역시 좋다는 생각이 들때마다 이 책을 한 번씩 들춰본다. '소설 만세'라는 제목부터 어쩐지 든든하고.

비엔나에서 그라츠로 이동할 때 후루룩 읽었다.
















신이인 『검은 머리 짐승 사전』

이번 여행에 들고 간 유일한 실물 책. 아침마다 이동하는 스케줄이어서 매일 아침 버스에서 조금씩 읽었다. 시 참 어려운데 좋고 좋아하고 싶고 그렇네…















여름과 유럽이라면 뭔가 백수린이라고 생각하여… 『폴링 인 폴』의 단편들은 다소 아쉬웠는데 이 단편집은 너무 좋아서 한 편 한 편 꼭꼭 마음에 새겨가며 읽었다. 내 맘에 꼭 들어맞지는 않는데 이상하게 그럼에도 정말 좋다는 감각… 실물책으로도 소장을 고민 중이다.
















시를 읽고 싶어졌으므로… 돌아가는 기내에서 읽었다. 김연덕 시인의 에세이들이 특히 좋았다. 모두가 태연히 앉아 있는데 그게 이상하다는 느낌이 내게도 불쑥불쑥 찾아왔었으니까. 무엇보다 나도… 모 일본 아이돌을 애타게 좋아했고 지금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그를 이제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런 경험에 쓴 웃음을 지으며 읽었다. (설마 같은 사람일까?ㅋㅋ 궁금하지만 지나간 아이돌에 대해 묻는 것이 마냥 유쾌한 경험이 아님을 나도 알고 있으므로 가슴 속에 묻어두는 것으로… 그러고보니 최근에 다른 시인의 시집에서 내가 좋아했던 아이돌이 등장하는 시를 읽었고 그의 어떤 점이 사람을 글로 이끄는지 잠시 생각했다…)

후반에는 시를 읽고 함께 고민해볼만한 질문들이 있는데 고등학생 때 국어 교과서 생각나고ㅋㅋ 좋았다. 책을 쓴 두 시인의 시도 꼬옥 읽어보아야지…


이거 말고도 단편집에서 한 두 편씩 읽었다.


여행은 돌아가야 비로소 여행이므로

이곳도 좋지만 얼른 돌아가서 집에서 기다리는 책들을 또 펼치고 싶은 마음으로~ 귀환 완료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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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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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25

https://www.youtube.com/shorts/js_RwrpodoY

이 영상을 지금에서야 보았어요...🥲 쬐끔 부끄럽고 정말정말 기뻐요...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먼저 읽었습니다만 저는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구매하였으므로 이 리뷰는 구매자칸에 있겠지요…



이 책, 심지어 이 리뷰까지 도달한 사람이라면 궁금하다. 고됐던 지난 겨울을, 계엄과 비상식의 순간들을 어떻게 견뎠는지.

나는… 자주 황정은을 생각했다.


2024년 12월 4일의 내 일기


나의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30분 경은 이랬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대학 동기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서 한 친구가 연락을 한다.

얘들아 뉴스 좀 봐.

당시 우리 학과는 모종의 이유로 신입생을 받을 수 있을지 그 여부가 불투명했고, 나는 그 메세지를 보자마자 드디어 이 망할 놈의 학교가 진짜 망해가는 게 동네방네 소문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입력창에 우리 학교 드디어 뉴스 나왔냐는 말을 쓰고 이어서 'ㅋㅋㅋㅋㅋ'를 연달아 치려고 했는데 손이 딱 멈췄다.


비상 계엄 선포했대.


그때도, 이 문장을 쓰는 지금도 말문이 턱 막힌다. 믿기지가 않고 어이가 없어서 채팅방에 올라오는 글자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미친놈, 하나 쓰고 거실로 나가 예능 프로그램을 보던 엄마를 툭툭 치며 함께 뉴스를 보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중고등학교 동창들과 뉴스와 정치인들의 라이브를 하나씩 맡아 상태를 중계하고 발을 구르며 새벽을 보냈다. 새벽 2시가 지나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아 출근을 해야 하는 친구를 다독이며 일단 자자고 했는데 다들 통 잠에 들지 못했던 것 같다. 나도 결국 밤을 지새웠고, 퀭한 눈으로 학교에 가는 버스에서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왜 나는 학교 가는 버스에 어제처럼 몸을 싣고 있는지…

아, 맞다. 올해 황정은 신작 나온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텄다…

정확히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 책도 2024년 12월 3일에서 시작한다.

집을 수리하고 책을 읽고 소설을 쓰는 일상이 계엄이라는 한 단어로 순식간에 뒤바뀐다. 시간이 지나 잠시 잊고 있었던 한 순간 한 순간이 황정은의 기록으로 다시 되살아난다.

다소 막막하고 답답하고 속에서 뜨거운 것이 차오르던 순간들.

동시에 막연히 잘 될 것 같기도 하고 이 사람들이 있다면 어쩐지 괜찮을 것 같던 순간들.

그런 순간들 속에서 돌아가는 일상들이 이 책에 있었다.


옮기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은데 그랬다가는 책을 다 옮겨적는 꼴이 될 것 같아 몇 개만 옮긴다.


사람들의 악함을 마음에 들여 되짚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게도 그 싹이 무성하게 있으니까. 그런 것이 자신에겐 없으며 없을 거라고 믿는 얼굴 앞에 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내게는 그런 입장 역시 악함의 기반이 되는 약함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의 악함에 내가 얼마나 분노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약함은 어느 정도가 그의 탓일까. 그리고 권력 가진 이들의 혼돈 그 자체인 악함도 약함에서 그 탓을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엔 정말 악한 게 있어.

정말 나쁜 게 있어.

(66p)


이 탄핵이 어떤 결과에 이르든 남태령에서 서로 연결되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경이로 목격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놀라운 사람이 이렇게 많다.

(59p)


우리가 서로를 목격하고 있으니 각자의 방식으로 다정해져야 해. 나의 목격과 나를 목격하는 다른 목격자를 위해서라도. 가급적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이번 한번뿐이니까 올 앳 원스.

(135p)


하지만 이대로 부서지는 게 좋겠다, 이런 사회, 하고 생각할 수가 없다. 많은 이들이 애쓰고 있고, 너무 많은 이들이 어렵고 아프다.

(153p)


-


생각해보면 지난 겨울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들이 잦았다.

나의 고향에서 서울역, 혹은 용산역을 오가는 데에 필요한 육만사천원. 아르바이트로 벌어두었던 여윳돈이 고스란히 교통비로 깨진 것을 알았을 때. 추운 날씨와 견디지 못하고 고장난, 그 전까지는 한 번 쓰고 아껴두던 두 개의 응원봉. 소리를 지르고 기침하기를 반복하다 다 쉬어버린 목.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상황.

무엇보다 견딜 수 없던 것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것 같은 순간들과 그 '아무렇지 않은' 풍경을 이루기 위해 끼어 있는 나.


그럴 때마다 부적처럼 황정은의 책을 꺼내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2월 초에는 지금까지 출간된 단행본을 다 읽어서 3월에는 올 봄호 창작과 비평에 수록된 「문제없는, 하루」를 감사히 읽었다. 「작은 일기」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단편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말할수록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가벼워지고 하찮아지는 것 같았냐고 묻자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문한다. 나도 겪곤 하니까. 그 무서운 일을. 내게 너무나 중요한 그것이 당신에겐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목격하는 일, 사람의 무언가를 야금야금 무너뜨리는 그 일을

(42-43p)

나한테 정말 중요한 일들이 있어. 내가 생각하기엔 사람들에게도 정말 중요한 일이거든. 그래서 나는 자꾸 그걸 말하는데, 말하면 시답잖은 일이 돼. 시답잖아져, 말하면서.

말하면, 내가 그걸 말하면, 사람들은 그 진부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왜 여태 하느냐는 얼굴로 나를 봐. …(중략)… 그러면 나는 사람들이 그 일을 얼마나 신경 쓰지 않는지를 알게 돼. 그게 그 사람들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돼. 내게 너무, 너무 중요한 그 일들이, 사람들한텐 중요하지 않아.

그걸 보게 돼.

그게 어떻게 나를 죽이고 있는지, 언니는 몰라.


창작과비평 207호(2025 봄),「문제없는, 하루」

-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크게 공감가기도 했고… 많이 찔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우리 과 사람들은 대체로 SKY로 불리는 국내 상위권 대학을 뒤로 하고 온 사람들이다. 나를 포함하여…)

4월 4일과 어떤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선고를 듣고 「디디의 우산」 마지막 페이지를 찍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다. (황정은의 독자라면, 혹은 「디디의 우산」을 읽은 사람이라면 쉽게 '이것으로 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공감한다고 믿는다)

그날 학교에 가서 어떤 동기들이 내게 비릿하게 웃으며 조심해야지, 무슨 뜻이냐, 깜짝 놀랐다 하하… 했던 걸 잊을 수가 없다. (왜 그들은 다 남자일까?)


수능 성적 상위 1-2%의 내 동기들 혹은 선후배들.

무관하다고 믿는 그 얼굴들.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그 얼굴들을.

그 얼굴들과 다르게 '좋아요'를 눌러준 사람들도.


-


첫 머리에 쓴 일기처럼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건 굉장히 주제넘은 일이라고,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신은 분명 여기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

찬 바람에 아린 볼을 감싸며 이런 짓 이런 생각 다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황정은이 이 깜깜한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면, 나는 최대한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나를 계속 광장으로 향하게 했다.

그가 나를 멈추지 않게 했다.


그래서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리고 동시에 대체 왜 황정은에게 서평단 모집이 필요한지… 서평단이라뇨, 황정은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근데 또 그걸 내가 갖지 못한다면 누가 나보다 먼저 읽는다면 배 아파 죽을 것 같다고 사방팔방에 난리를 치며 데굴데굴 굴렀다. 그덕인지 내 손에 가제본도 들어와 있다. 정녕 도움이 된단 말인가? 나의 이 주절거림이…


-


마지막으로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최악을 생각하는 버릇 탓에 절필한 어떤 작가들이 떠오르며 혹시 당신이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하면 나는 어쩌지… 했는데 책 곳곳에서 정말 말도 안되는 기우였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백 번 천 번 만 번 안도했다. 꾸준히 읽고 쓰는 이야기가 있어서 읽는 중간중간 행복한 마음으로 가득해졌다…

작가에게 쓰는 일이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읽혔지만… 그러므로 이런 마음을 먹은 것도 조금은 죄송스럽지만… 행복한 걸 어쩌겠어요… 난 정말 작가님이 오래오래 써주셨으면 한다…


단편 원고를 이어 썼다. (42p)

단편 원고를 보름 안에 마무리해야 한다. (69p)

독감 백신을 맞았다. 단편은 거의 끝나간다. (76p)

오전에 소설을 쓰는 동안 대화를 끝없이 쓰고 지웠다. (89p)

단편 원고를 마감했다. (99p)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거의 매일 쓰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126p)

이제 뭐가 되든 써야지. (158p)


최근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가볍게 흩뿌리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밖에 할 수 없다. 그 시간을 함께 견딘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면 대체 무엇을 건넬 수 있을까.

그래서 구태여 소리 내어 발음해보는 것이다.


내가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

(175p)


나도 이 세계를, 당신을, 깊이 사랑합니다.


-


어떤 방식으로든 유독 길고 지난했던 2024년과 2025년의 겨울을 지나온,

어쩌면 아직도 어딘가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을 모두에게.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를 그리며.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광고 #협찬 #작은일기 #황정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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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www.youtube.com/shorts/js_RwrpodoY

이 영상을 지금에서야 보았어요...🥲 쬐끔 부끄럽고 정말정말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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