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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평점 :
+250825
https://www.youtube.com/shorts/js_RwrpodoY
이 영상을 지금에서야 보았어요...🥲 쬐끔 부끄럽고 정말정말 기뻐요...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먼저 읽었습니다만 저는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구매하였으므로 이 리뷰는 구매자칸에 있겠지요…

이 책, 심지어 이 리뷰까지 도달한 사람이라면 궁금하다. 고됐던 지난 겨울을, 계엄과 비상식의 순간들을 어떻게 견뎠는지.
나는… 자주 황정은을 생각했다.

2024년 12월 4일의 내 일기
나의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30분 경은 이랬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대학 동기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서 한 친구가 연락을 한다.
얘들아 뉴스 좀 봐.
당시 우리 학과는 모종의 이유로 신입생을 받을 수 있을지 그 여부가 불투명했고, 나는 그 메세지를 보자마자 드디어 이 망할 놈의 학교가 진짜 망해가는 게 동네방네 소문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입력창에 우리 학교 드디어 뉴스 나왔냐는 말을 쓰고 이어서 'ㅋㅋㅋㅋㅋ'를 연달아 치려고 했는데 손이 딱 멈췄다.
비상 계엄 선포했대.
그때도, 이 문장을 쓰는 지금도 말문이 턱 막힌다. 믿기지가 않고 어이가 없어서 채팅방에 올라오는 글자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미친놈, 하나 쓰고 거실로 나가 예능 프로그램을 보던 엄마를 툭툭 치며 함께 뉴스를 보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중고등학교 동창들과 뉴스와 정치인들의 라이브를 하나씩 맡아 상태를 중계하고 발을 구르며 새벽을 보냈다. 새벽 2시가 지나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아 출근을 해야 하는 친구를 다독이며 일단 자자고 했는데 다들 통 잠에 들지 못했던 것 같다. 나도 결국 밤을 지새웠고, 퀭한 눈으로 학교에 가는 버스에서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왜 나는 학교 가는 버스에 어제처럼 몸을 싣고 있는지…
아, 맞다. 올해 황정은 신작 나온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텄다…
정확히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 책도 2024년 12월 3일에서 시작한다.
집을 수리하고 책을 읽고 소설을 쓰는 일상이 계엄이라는 한 단어로 순식간에 뒤바뀐다. 시간이 지나 잠시 잊고 있었던 한 순간 한 순간이 황정은의 기록으로 다시 되살아난다.
다소 막막하고 답답하고 속에서 뜨거운 것이 차오르던 순간들.
동시에 막연히 잘 될 것 같기도 하고 이 사람들이 있다면 어쩐지 괜찮을 것 같던 순간들.
그런 순간들 속에서 돌아가는 일상들이 이 책에 있었다.
옮기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은데 그랬다가는 책을 다 옮겨적는 꼴이 될 것 같아 몇 개만 옮긴다.
사람들의 악함을 마음에 들여 되짚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게도 그 싹이 무성하게 있으니까. 그런 것이 자신에겐 없으며 없을 거라고 믿는 얼굴 앞에 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내게는 그런 입장 역시 악함의 기반이 되는 약함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의 악함에 내가 얼마나 분노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약함은 어느 정도가 그의 탓일까. 그리고 권력 가진 이들의 혼돈 그 자체인 악함도 약함에서 그 탓을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엔 정말 악한 게 있어.
정말 나쁜 게 있어.
(66p)
이 탄핵이 어떤 결과에 이르든 남태령에서 서로 연결되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경이로 목격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놀라운 사람이 이렇게 많다.
(59p)
우리가 서로를 목격하고 있으니 각자의 방식으로 다정해져야 해. 나의 목격과 나를 목격하는 다른 목격자를 위해서라도. 가급적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이번 한번뿐이니까 올 앳 원스.
(135p)
하지만 이대로 부서지는 게 좋겠다, 이런 사회, 하고 생각할 수가 없다. 많은 이들이 애쓰고 있고, 너무 많은 이들이 어렵고 아프다.
(1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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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지난 겨울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들이 잦았다.
나의 고향에서 서울역, 혹은 용산역을 오가는 데에 필요한 육만사천원. 아르바이트로 벌어두었던 여윳돈이 고스란히 교통비로 깨진 것을 알았을 때. 추운 날씨와 견디지 못하고 고장난, 그 전까지는 한 번 쓰고 아껴두던 두 개의 응원봉. 소리를 지르고 기침하기를 반복하다 다 쉬어버린 목.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상황.
무엇보다 견딜 수 없던 것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것 같은 순간들과 그 '아무렇지 않은' 풍경을 이루기 위해 끼어 있는 나.
그럴 때마다 부적처럼 황정은의 책을 꺼내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2월 초에는 지금까지 출간된 단행본을 다 읽어서 3월에는 올 봄호 창작과 비평에 수록된 「문제없는, 하루」를 감사히 읽었다. 「작은 일기」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단편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말할수록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가벼워지고 하찮아지는 것 같았냐고 묻자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문한다. 나도 겪곤 하니까. 그 무서운 일을. 내게 너무나 중요한 그것이 당신에겐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목격하는 일, 사람의 무언가를 야금야금 무너뜨리는 그 일을
(42-43p)
나한테 정말 중요한 일들이 있어. 내가 생각하기엔 사람들에게도 정말 중요한 일이거든. 그래서 나는 자꾸 그걸 말하는데, 말하면 시답잖은 일이 돼. 시답잖아져, 말하면서.
말하면, 내가 그걸 말하면, 사람들은 그 진부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왜 여태 하느냐는 얼굴로 나를 봐. …(중략)… 그러면 나는 사람들이 그 일을 얼마나 신경 쓰지 않는지를 알게 돼. 그게 그 사람들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돼. 내게 너무, 너무 중요한 그 일들이, 사람들한텐 중요하지 않아.
그걸 보게 돼.
그게 어떻게 나를 죽이고 있는지, 언니는 몰라.
창작과비평 207호(2025 봄),「문제없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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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크게 공감가기도 했고… 많이 찔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우리 과 사람들은 대체로 SKY로 불리는 국내 상위권 대학을 뒤로 하고 온 사람들이다. 나를 포함하여…)
4월 4일과 어떤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선고를 듣고 「디디의 우산」 마지막 페이지를 찍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다. (황정은의 독자라면, 혹은 「디디의 우산」을 읽은 사람이라면 쉽게 '이것으로 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공감한다고 믿는다)
그날 학교에 가서 어떤 동기들이 내게 비릿하게 웃으며 조심해야지, 무슨 뜻이냐, 깜짝 놀랐다 하하… 했던 걸 잊을 수가 없다. (왜 그들은 다 남자일까?)
수능 성적 상위 1-2%의 내 동기들 혹은 선후배들.
무관하다고 믿는 그 얼굴들.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그 얼굴들을.
그 얼굴들과 다르게 '좋아요'를 눌러준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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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머리에 쓴 일기처럼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건 굉장히 주제넘은 일이라고,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신은 분명 여기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
찬 바람에 아린 볼을 감싸며 이런 짓 이런 생각 다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황정은이 이 깜깜한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면, 나는 최대한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나를 계속 광장으로 향하게 했다.
그가 나를 멈추지 않게 했다.
그래서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리고 동시에 대체 왜 황정은에게 서평단 모집이 필요한지… 서평단이라뇨, 황정은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근데 또 그걸 내가 갖지 못한다면 누가 나보다 먼저 읽는다면 배 아파 죽을 것 같다고 사방팔방에 난리를 치며 데굴데굴 굴렀다. 그덕인지 내 손에 가제본도 들어와 있다. 정녕 도움이 된단 말인가? 나의 이 주절거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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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최악을 생각하는 버릇 탓에 절필한 어떤 작가들이 떠오르며 혹시 당신이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하면 나는 어쩌지… 했는데 책 곳곳에서 정말 말도 안되는 기우였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백 번 천 번 만 번 안도했다. 꾸준히 읽고 쓰는 이야기가 있어서 읽는 중간중간 행복한 마음으로 가득해졌다…
작가에게 쓰는 일이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읽혔지만… 그러므로 이런 마음을 먹은 것도 조금은 죄송스럽지만… 행복한 걸 어쩌겠어요… 난 정말 작가님이 오래오래 써주셨으면 한다…
단편 원고를 이어 썼다. (42p)
단편 원고를 보름 안에 마무리해야 한다. (69p)
독감 백신을 맞았다. 단편은 거의 끝나간다. (76p)
오전에 소설을 쓰는 동안 대화를 끝없이 쓰고 지웠다. (89p)
단편 원고를 마감했다. (99p)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거의 매일 쓰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126p)
이제 뭐가 되든 써야지. (158p)
최근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가볍게 흩뿌리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밖에 할 수 없다. 그 시간을 함께 견딘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면 대체 무엇을 건넬 수 있을까.
그래서 구태여 소리 내어 발음해보는 것이다.
내가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
(175p)
나도 이 세계를, 당신을, 깊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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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식으로든 유독 길고 지난했던 2024년과 2025년의 겨울을 지나온,
어쩌면 아직도 어딘가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을 모두에게.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를 그리며.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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