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각자를 찾아서 - 서재필부터 박정희까지, 동상으로 만나다 더 생각 인문학 시리즈 14
이상도 지음 / 씽크스마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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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청와대 출입기자를 했고, 정치부장, 부도국장, 시사프로그램 진행을 하였다.


선각자(先覺者) : 남보다 먼저 사물이나 세상일을 깨달은 사람.


제1장 광진·노원 권역

능동 어린이대공권 방정환 선생 동상

-백성이 아닌 국민이 된 어린이



방정환(1899~1931)

‘어린이’란 말을 처음 사용하고 어린이날을 만든 어린이운동 창시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사위가 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했다.

잡지「어린이」를 발간하면서 수차례 기사 삭제, 압수 등의 조치를 당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P.16)


방정환의 동상은 남산에서 옮겨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설민선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방정환이 손병희의 사위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 이전에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중 1명으로 기억할 뿐이었다.

그런데 방정환은 어린이들 뿐 아니라 옷을 만드느라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조선 여성들까지도 생각해준다.



조선여자들은 한평생 빨래만 하다가 죽는다고 할 만큼 빨래를 자주 합니다.

더구나 조선 옷과 옷감은 빨 적마다 뜯었다가 다시 재봉을 하게 되고 다듬이질과 풀 먹이기를 일일이 다시 해야 하는 것이니 그 손해는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되도록 흰옷만을 입지 말고 연령과 성미에 맞춰 아무 색이나 염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p.19)


방정환은 개량한복 입기를 강조했다.

빨래로 허비해야할 시간을 줄여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음이다.

힘들게 세탁된 옷을 입던 것이 옛날 어른들의 권리쯤 되었을까?

그 때도 여성들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구나..

방정환은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어린이에 대한 기초조건>을 발표했는데 이 선언은 국제연맹이 발표한 국제아동권리선언보다 1년 빠른 세계최초의 아동권리선언이된다.

식민지시대를 살며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계속했던 것이다.

현재도 개도국 어린이들이 노동착취와 성문제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있다.

정말이지 어린이들은 아무런 힘이 없다.

어른들이 보여주는 것, 말하는 것을 보고, 듣고 자란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보호받고 귀히 대접 받아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나라는 잃었지만 그 나라를 되찾아줄 희망이 바로 미래의 어른, 어린이라는 사실을 방정환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방정환의 이야기를 조금 더 알고나니 어린이 날인 그저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로 변질된 요즘이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제2장 남산권역

숭의여대 운동장 안중근 의사 동상

-민주공화국의 씨앗이 된 안중근




안중근(1879~1910)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구한말 독립운동가.

인재 양성과 국채보상운동에도 관여했다.

러시아 망명 후 의병장으로 전투에 참여햇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체포되어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p.45)



안중근 의사의 동상은 여러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 숭의여대라는 곳에 왜 있을까 궁금했다.

숭의여대의 터가 과거 경성신사(대한제국 시절 한국 거주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가 있던 자리로 해방 후 미국선교사가 숭의여학교를 세운다.

3.1운동 때 교사와 학생들이 평양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6.25전쟁후 경내에 있던 8개의 신사 건물을 차례로 헐어 학교 건물로 사용했다.

현재 숭의 여대 본관 앞에는 경성 신사 신전 주춧돌 4개와 석재 부재 등 신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런 연유로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세우겠다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의 커다란 업적은 이토히로부미의 처단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체포된 그는

"자신은 대한의군 중장으로 군인이니 전쟁포로로 대우해 달라"

고 요구했다고 한다.

죽기 전에도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을 남겼다고 한다.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라는 뜻으로 순직 직전 일본인 헌병에게 써준 것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기증되어 현재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보관되어있다.

무엇이 이토록 개인을 나라의 독립에 투신하게 했을까?

자산의 안위보다 나라를 먼저 걱정한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제3장 명동·서울역 권역

만리동 손기정 체육공원 손기정 동상

-올림픽을 제패한 영원한 한국인 마라토너





손기정(1912~2002)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해 금메달을 딴 마라토너이다.

이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일본인을 이길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줬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부상으로 받은 그리스 청동제 투구는 독일의 결단으로 1986년 손기정에게 돌아왔고,

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p.177)


아..저 표정..

나라를 잃고 일본인 신분으로 출전한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한다.

하지만,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은 울고 싶다.

동상은 가슴의 태극기와 투구를 가지고 있다.

가슴에는 원래 일장기를 달고 있었는데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가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을 보도하며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다. 이로 동아일보는 탄압을 받지만, 국민들에게 더욱 애국심 고취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동상의 청동 투구는 고대 그리스 코린토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리스 올림포스 제우스 신전을 발굴하던 중 발견되었다. 그 후 그리스 최대 신문사인 브라디니사가 국제올림픽위원회에 이 투구를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에게 부상으로 줄것을 요청하지만 메달 이외의 부상을 수여할 수 없다는 올림픽 규정으로 베를린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50년간 보관되었다.

그 후 독일 정부가 베를린 올림픽 50주년을 맞아 청동 투구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하면서 손기정에게 돌아왔다.

이 때 손기정은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것"이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해방 후 손기정은 육상지도자로 꿈에 그리던 태극기를 달게 된다.

안타까운 사실 하나는 손기정의 우승당시의 올림픽 기록의 국적이 일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이 조선인 청년의 우승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조선인 마라토너는 나라 잃은 설움을 잊고 나라의 독립을 소원하며 달리고 또 달렸을 것이다.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손기정 동상의 표정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제4장 종로 광화문 권역

정동 이화여고 유관순 동상

-저항의 아이콘이 된 한국의 잔 다르크




유관순(1902~1920)

3.1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서울 이화학당을 다니다 3.1운동이 일어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휴교령이 내려져 천안으로 내려와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벌여체포됐다.

옥중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그때마다 고문에 시달리다 건강이 악화돼 옥에서 숨졌다.


이화여고의 유관순 동상은 18세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상을 만든 작가는 "독립투사 등 강성 이미지로만 인식되고 있는 유 열사에게 소녀 이미지를 강조했다."고 밝혔다.

18세..

저 어린 나이에 여자의 몸으로 감옥에 갇혀서도 죽을 때까지 나라의 독립을 외쳤다.

유관순의 이화학당 시절 봉사정신과 함께 애국심을 키워준 사람은 스승인 박인덕이다.

또한, 이화학당 입학 부터 다니던 정동교회의 손정도(독립운동가) 목사의 가르침으로 애국애족 정신을 고취시켰다.

여성의 사회 활동 참여가 제한되는 시절 18세 어린 소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게 여겼다.

이 소녀를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제5장 종각·대학로 권역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공원 김상옥 열사 상

-일본 경찰과 벌인 1대 1,000의 싸움



김상옥(1899~1923)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추격 중인 일본 경찰 1명을 죽이고 16명에게 부상을 입힌 독립운동가이자 중소사업가이다.

총독 암살계획 발각으로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해 종로 경찰서에 폭타을 던졌다.

이후 뒤를 쫓는 경찰과 효제동에서 결전을 벌이다 자결했다.

(p.293)


김상옥은 1922년 1월 12일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로 아수라장을 만들고 은신한다.

1월 22일 은신처가 발각되고 경찰은 투항할 것을 권유했으나,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다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한다.

김상옥은 총독 처단을 위해 조선으로 떠나는 날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라는 말대로 끝까지 소신을 지킨다.

사업가로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으나 나라의 독립에 더 큰 뜻을 두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열사의 희생으로 나는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다.

제6장 서대문·성북·용산 권역

효창동 효창공원 이봉창 의사 동상

-제국주의의 심장 도쿄에서 일왕을 떨게 한 기개



이봉창(1900~1932)

일본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 투신의 뜻을 품고 상하이로가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원이 된다.

일본으로 돌아와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지지만 불량으로 처단은 실패한다.

이후 체포되어 사형당한다.

(P.345)


이봉창은 20대 중반까지 평범한 식민지 청년으로 살다가 철도국에 취직해서 일본인과의 차별에 불만을 품고 일본으로 간다.

그러나 일본에서 한글 편지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나 때를 기다리다 일왕 암살을 목표로 다시 일본으로 간다.

이봉창의 거사는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암살 시도는 큰 반향을 일으킨다.

특히 중국의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된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 국민들은 실패를 실패로 생각하지 않고, 그 시도만으로도 대한독립의 염원을 불태웠을 것이다.

저자는 동상이 위치한 장소와 의미, 동상의 형상 묘사와 동상 설립과정등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동상이 만들어진 후 정권 교체 또는 작가의 이력 논란으로 동상이 철거 되기도 한다.

어릴 적 초등학교에 있던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은 각종 놀이의 기준점 역할을 할 뿐이였는데

하나의 조각에 지나지 않고 그 분들의 업적과 생애를 함께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은 독립 운동에 투신한 분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사 문제집에서 시험용 외우기 하던 내용보다는 동상의 주인공들의 삶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들이 공부할 때와는 다르게 마음가짐 부터 편하고 쉽 고 읽었고 , 또 문제집에 나오지 않는 내용들도 담겨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태극기

억울하게도 그 태극기를 숨기고 살아야 했지만, 잊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이 목숨과도 바꿔 지켜낸 독립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다.

이제 동상을 만날 때마다 마냥 지나쳐지지 않을 것 같다.

출판사에서 무료로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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