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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두 번 째 읽고 있다. 2008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문학적인 표현에 단 몇 분 만에 매료된 바 있다. 책을 읽고나면
반드시 리뷰를 쓰리라 다짐했지만, '이상하게도' 리뷰는 쓰여지지 않았다. 독서가 이어지는 동안
책의 매력이 반감되서 그런 것은 아니다(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럼에도 이 책읽기는 정반합적 행위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물음표를 남긴 채 의식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 책이 가져다 준 생활의 변화는 굉장한 것이었다. 나는 '회사 내부의 정치'를 좌우하는
동료 및 상사들과 점심을 같이 먹는 일을 포기하고 도시락을 싸 다녔으며, 이미 친환경으로 넘어간 집안의 식단을 추가로 유기농쪽으로 '비보호 좌회전'시켰다. 첨가물을 100% 피할 수는 없었지만 알면서 첨가물을 섭취하지는 않고자 끊임없이 애썼다. 플라스틱 사용을 30% 이상 줄였고
장바구니와 가방을 애용했으며,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가능한 포장이나 1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추구의 성실성은 약간 옅어졌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추동해 준 새로운 바다 속에서 꾸준히 가속을 얻고 있다. 최근 3년간, 머리 속의 관념이 아닌 진정한 변화라는 관점에서 이 책은 '내 인생의 책'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시금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읽으면서, 내가 새로이 알게 된 건 이 책이 참으로 방대한 지식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깨달음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참신하고 문학적인 표현을 타고 전해진다. 그럼으로써, 그동안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쓸 수 없었던 이유도 명확히 알 수 있게 됐다. 첫째는 내가 이 책에 담긴 사실(또는 지식)을 죄다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읽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진짜 아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배움과 가르침만큼 넓은 간격을 지니고 있다. 둘째는 이 책에 담긴 깨달음(또는 상식을 깨는 새로운 지식)이 너무 많아 스스로 깔끔하게 정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내가 이 책의 표현들에 크게 매혹되어 독서 후에 남은 것이 재치와 날카로움으로 빛나는 수사 몇 개 뿐 그 기반이 되는 내용을 휘발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두 번 째 읽으면서도 나는 아직 충분히 이 책에 대해서 알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 책은 그만큼 방대하고 속깊은 저작이다.

대학시절, 동아리 선배는 세미나 준비가 철저하지 못한 후배들에게 이 말을 되풀이해주곤 했다;
"두 번 읽지 않을 거면, 세미나에 들어오지 마." 그 말은 상당히 재수없게 들렸지만 사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경험도 지식도 모자란 이십 대 초반의 우리들에게 한 번 읽어서
그 정수를 알 수 있는 책은 드물었기 때문이다(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실 더러 있었다. 그리고 한 번 읽을 가치조차 없는 책들도 많았다. 이 괄호 속의 끝에서 두 번 째 문장은 '핑계'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도 많고 에너지도 많았던 스무살 시절, 동아리 세미나에 책을 두 번 읽고 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럴만큼 흥미로운 세미나가 드물기도 했고, 보다 정확히는 세미나 이후의 뒤풀이
자리에 더 관심이 있었다. 독서는 그때에도 내 삶의 주요한 기반이었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더
비중이 낮은 미디어였다. 세상은 책에서 말해주지 않는 것들로 가득했다. 혹은 내가 보는 책들이
내 삶과 유리되어 있었거나.

동어반복이지만, 오직 읽는 일이 즐겁기 때문에 열심히 읽게 되는 독서는, 엄청난 쾌락을 준다.
10대 때도 그러했지만, 30대 후반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조건 때문일지도 모른다. 10대 후반에는 특목고라는 지독하게 경쟁적인 환경 탓에 독서란 사치에 가까운 취미였다. 20대에는 사회와 연애에 관심 갖느라, 30대에는 돈을 벌고 집을 마련하고 회사에서 살아남느라 책은 출퇴근시간에만 읽게 되었다. 휴직이란 틈을 벌려, 잠시 치열한 경쟁의 와중에서 벗어난 지금 오래도록 읽지 못했던 책들만큼 즐거움을 주는 일들은 없다. 무엇보다 여유롭게 한 자 한 자 읽어낼 수 있는 지금의 환경이 그 쾌락을 배가시켜 준다.

되풀이 읽었어도, 나는 이 책의 리뷰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최소한 나로서는, 이 책을 간단히라도 정리해 내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몇 개의 주요한 개념을 뽑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이 책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난감하다. 범박한 비유를 들자면, 양자역학을 몇 글자로 정리해 놓은 요약문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단순히 명제를 줄이고 줄였을 뿐 실제 양자 역학의 진수를 1시간짜리 강의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나는 이 책이 하나의 큰 호수이고, 내가 지금 그려낼 수 있는 것은 우물 하나의 이미지 뿐이다. 더 읽든 더불어 읽든 추가적인 독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럼으로서 나는 조금 더, 더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되겠지.

정말로 좋은 책은 그 책이 독자와는 무관한 사실을 말하면서도 독자의 삶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킨다. 그것은 어떤 텍스트(예를 들면 영화나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단, 그것이 탁월하기만 하다면. 그 점에서 이것 하나는 단언할 수 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대단한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의 영향력은 아직 세상에 충분히 펼쳐지지 않았다.

다음주에는 같은 저자의 새로운 저작 '새로운 밥상'을 읽을 것이다. 내 앞에는 몇 개의 산으로 이루어진 산맥이 드넓게 솟아 있다. 처음에 그것은 그냥 하나의 큰 산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다른 산이 융기하며 등성이를 맞붙이고 하나의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나는 설렌다. 이 형제산에 모두 올라갈 볼 것이다. 등반 뒤에는 좀 더 튼튼해지겠지. 저자가 고맙다. 깊은 산이어서, 큰 산이어서. 그리고 산맥이 되어줘서.  

마이클 폴란. 내 삶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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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운 서른 - 흘러가다 잠시 멈추는 시간,서른
김종길 외 지음 / 버티고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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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춘의 다음장, 서른
청춘의 아름다운 시절이 끝나고도, 生은 계속된다. 인생은 어쩌면 후일담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젊음 이후 기나긴 노화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은 인류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서른살은 청춘이 뒷모습을 보이면서 서둘러 퇴장해갈 때, 눈을 감지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운 고문이 시작되는 나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서른 살은 스무 살도 아니고 마흔 살도 아니다. 한 자리에 정착하기에는 피가 뜨겁고, 그렇다고 무작정 떠나기에는 생활의 때가 적잖이 묻어있다. 서른살에서 서른 아홉 살 사이. 직장에 다닌다면 대리에서 과장, 주부라면 취학하지 않은 아이가 하나 또는 둘 있을 것이고, 공부를 한다면 보따리를 싸들고 전국의 강의실을 누빌 것이며, 사업을 한다면 전쟁터마냥 바로 내일 혹은 다음달을 가늠할 수 없을 때다. 뿌리는 착종하지 못했고, 잎은 바람에 나부끼는 참 묘한 시기, 서른은 그런 의미에서 두 번 째 사춘기, 지독(至毒)의 계절이기도 하다.


당신이 중년을 코 앞에 두고 스스로 비릿해지며 조금씩 기울어질 때, 공감을 얻거나 위안을 받는 질료는 대개 TV 드라마나 대중가요 같은 세속의 유행들과 알코올, 니코틴 같은 탐닉의 중독물질이기 쉽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행이나 중독물질은 1회성 이상의 효용을 지속하지 못하고 그때마다 사르륵 휘발될 뿐이다. 삶에는 사용설명서가 없는 까닭에, 문제가 생기거나 길을 잃더라도 그 상황에 딱맞는 적절한 ‘대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삼십대에 들어서 비로소 인생의 어두운 면을 맞딱드리게 된 당신에게 그것을 미화하거나 감상으로 치부해버리지 않고 그 나이대의 고민과 곤혹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책 한 권이 나왔다. 바로 “설운 서른”(버티고 출판사, 2008)이라는 시집이다.

2. 설운, 서러운 서른
서른은 과연 어떤 순간의 연대기일까. 오십 명의 시인들이 적은 서른이라는 시간의 여행첩을 잠시 들춰보기로 하자.


최승자는 말한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 수 없을 때”가 바로 그때라고. 시큰거리는 치통같기도 하며 놀라 부릅뜬 흰 자위의 경악이기도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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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는 고백한다. 공복과 쓰린 위, 닳아버린 구두 뒷굽, 말없이 걸려왔다가 툭 끊어지는 전화와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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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의 토로는 눈물겹다. 남은 인생은 부글거리며 썩어가는 강물처럼 느껴지고, 오래된 편지와 노래를 버렸으며, 연애(사랑)와 밥(생활)이 거품과 기억으로 뒤섞여 꺼멓게 덮여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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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대개 아프다. 그 아픔은 서른이라는 나이 자체에서 우러나왔다기보다는 청춘의 상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처럼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거나 제 감정에 갇혀 삶을 버려둘 때도 지난 나이가 삼십대다. 그래서 서른은 두 번 서럽다. 한번은 젊음의 퇴장으로 인해, 또 한 번은 그럼에도 나이먹어 목놓아 울 수 없는 자신으로 인해.

3. 서른, 누군가와 자신을 여전히 사랑할 나이
이 시집은 황인숙의 ‘강’으로부터 시작해 조선희의 ‘좋은 나이 마흔’으로 끝맺는다. 편집자의 의도는 아마도 서른이라는 시간이 ‘강’을 건너는 일과 같으며, 이 불안의 한 시기를 지나면 ‘좋은 나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것도 같다. 그도 그럴것이, 서른 살이라는 나이가 꼭 우중충한 장마 같은 날들로만 점칠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이 시집이 그리는 서른의 독특한 즐거움을 따라가보자.


첫번째로, 황지우의 절창 ‘몹쓸 동경’이다.


“그대의 편지를 읽기 위해 다가간 창은/지복(至福)이 세상에//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환하게 빛난다(중략) 신열은 이 나이에도 있다. 혼자 걸린 독감처럼//목 부은 사랑이 다시 오려 할 때(중략) 지구 위에 저 혼자 있는 것 같아요,//라고 쓴 그대 편지를 두번째 읽는다”

고독은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또다른 고독한 이 앞에서 서로를 확인하는 집어등(集魚燈)이 된다. 서른이라는 강을 건너가는 데에도 필요한 것은 역시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 통속적으로 말하여 ‘사랑’이다. 사실 그것은 전 생애를 통틀어 한번도 중요하지 않은 때가 없다. 그러나 삼십대, 사랑이 다시 도드라지는 것은 당신들이 더 이상 젊지 않기 때문이다. 生이 절정에 올라 빛을 발하고, 그 빛에 눈멀어 서로에게 빠져드는 것은 청춘의 특권이다. 그 특권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 다시 찾아온 따뜻한 감정. 그 감정을 예전처럼 무조건 발산할 수만은 없기 때문에 사랑은 삼십대에게 ‘몹쓸 동경’이 되고 만다. 하지만, 사랑없이 살기에는 서른도, 사실 마흔도 너무 젊다. ‘몹쓸 동경’이란 제목의 방점을 ‘몹쓸’에 찍을 것인가, ‘동경’에 찍을 것인가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꼭 그것이 연애가 아니더라도 사랑할 대상이 있고, 그(녀)를 아끼고 배려함으로서 서른 살은 비애를 넘어 '우아'에 이를 수 있다.


그 다음은 안도현의 ‘모항으로 가는 길’을 보자.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거야//(중략)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너는 비록 지쳤으나/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중략) 걱정하지 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서 서기만 하면/이미 모항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과 사회 사이의 소통, 사람과 사물 사이의 조화를 알아간다는 걸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서른 넘어 좋은 것은 스무살 가파른 감정에 예전처럼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명확한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였어도 스스로 만족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으며, 이미 배우고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성숙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점에 있겠다. 바다로 가는 버스를 타면서부터 ‘이미 바다에 있는 것 같은 설렘’을 느끼는 것도 서른 이후가 주는 뿌듯함이 아닐까. ‘결여’를 메꾸기 위해 떠나는 갈증의 여행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 나의 충만을 위해 떠나는 만끽의 여행이 서른 살 이후에 우리가 배우게 된 것들이다.


강연호의 아름다운 시가 책 뒷부분에서 환하게 글자들을 밝힌다.

“(중략)한때 명도와 채도가 가장 높게 빛났던 잘못 든 길/더 이상 나를 철들게 하지 않겠지만/
갈 데까지 가보려거든 잠시 눈물로 마음 덥혀도/누가 흉보지 않을 것이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서른은 제 발로 서기 시작하는 나이다. 제 발로 선다는 건 결국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삶을 꾸린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하여 설령 도중에 실수하고 좌절하더라도, 아예 실패가 되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을 깨닫고 남의 눈에 휩쓸리지 않으며 생활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삼십대란 진정으로 환한 삶의 통로일 수 있다.

4. 시간에 보내는 편지, 설운 서른.
이 시집 제목인 ‘설운 서른’은 안현미의 시 ‘이와 같이’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보온 밥통의 마른 밥을 푸다가/서른은 온다”는 그녀의 문장처럼 삼십대는 느닷없이 우리에게 닥친다. 느닷없는 것,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감당해야 하는 모든 의무들은 견뎌야 하는 당사자들에게 서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서러운 와중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색깔을 발현하는 것은 의미있을뿐더러 반드시 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시집 <설운 서른>은 삼십대라는 예기치 않은 함정에 빠진 이들의 진솔한 내면 토로인 동시에 쓸쓸함과 비애를 딛고 새로운 행로를 만들어갈 수 있는 또렷한 푸른 신호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설운 서른>은 삼십대라는 주제로 시인들의 시들을 골라 만든 편집시집이다. 대개 편집시집이란 독자 감성의 가벼운 배설욕구에 부응하거나 편집자의 스타성에 기대 반짝 매출을 노려 기획된 책들이 많았다. 그러나 <설운 서른>은 무겁지 않으면서도 우리 삶의 무게를 반듯하게 짊어지려 하는 만만찮은 진정성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좋은 시를 모았다는 것 이외에도 여럿 있다. 세로쓰기 전용 서체인 ‘꽃길체’를 사용해 아름다운 글자체와 시읽기에 걸맞는 반발짝 느린 호흡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편집자의 배려가 돋보인다. 책 디자인 역시 또한 그 흔한 띠지 하나 없이 담백한 구성을 취해 오직 시만으로 독자의 평가를 받고자 하는 출판사의 자신감 또한 엿볼 수 있다.


서른은 김수열의 싯구처럼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스스로 신호를 발해야 하는 아픈 시간이다. 그 날선 통증의 시간을 안으로 삼키고 삼켜 오롯한 성숙의 나이테를 만들어내는 일. 가끔 비명을 쏟아내며 삶의 느닷없음에 눈물짓는 일. 바르고 즐거운 기억을 쌓아 삶의 후반기를 준비하는 일 모두가 서른의 명시되지 않은 과제물일지도 모른다. 그 간단치 않은 삼십대의 허전한 왼쪽 옆구리에 필요한 책을 꼽는다면 바로 이 <설운 서른>이다. 서른을 눈 앞에 둔 당신, 서른을 막 지난 당신 그리고 지금 서른을 살아가고 있는 바로 당신에게 감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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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3-20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만 서러울까요. ^^
리뷰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됐어요 2010-03-31 13:14   좋아요 0 | URL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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