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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
김홍모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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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모 작가님 고생 많으셨어요. 세월호 생존자 김동수씨의 이야기, 혹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잘 읽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꼼꼼히 새기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기대하고 또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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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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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를 기억에서 지울 수 없게 만드는 단 한 권의 책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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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뒷마당의 제국 - 자급자족에 도전하는 뉴요커의 리얼 생태 서바이벌
매니 하워드 지음, 남명성 옮김 / 시작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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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는 지금, 하나의 취향이거나 고급한 도락이다. 축복처럼 보였던 산업화가 당도한 뒤, 식탁을 점령한 것이 값싸고 풍성한 먹거리뿐만 아니라 아토피와 광우병, 슈퍼박테리아의 음울한 그림자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미디어는 건강과 환경을 동시에 위무한답시고 몇 개의 낱말을 신탁처럼 흩날렸다. 웰빙, 로하스, 로커보어... '착한 소비'로 요약될 수 있는 그 신조어들은 도시 중산층의 감성과 윤리를 감싸안으며 널리 유행처럼 번졌다. 그렇지만 소비는 소비일뿐, 무언가를 끊임없이 쓰고 버리고 휘발유와 탄소발자국을 덕지덕지 묻힌 채 '잘 썼다'고 혼자 가슴을 주무르며 안도하는 일이 제대로 된 해결책일 수는 없었다. 자본과 산업이 장악한 생산과 유통망에 작은 우회로를 만드는 일도 필요할 것이지만 그 이상, 아예 처음부터 다른 생산과 유통, 소비가 아닌 생활을 꿈꿀 수는 없을까? 돈벌이로서가 아니라 자급과 공존을 위해 농업을 재발견하고 그에 맞춰 삶을 재편하는 일, 엄청난 부가가치를 생산하며 99%를 고용하고, 1%에게만 이윤을 몰아주는 폭주적 산업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형태로, 나 자신뿐 아니라 다른 생명과 지구까지 아우르며, 부유하게 살기 보다 소박하고 건강하게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농업, '오래된 미래'로서의 농업은 다시 살아나는 중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도시에 거주할 수 밖에 없는 이들도 '도시 농업'이라는 각개전투로 여기에 동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경향이 다수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닌데, 기득권을 가진 기업뿐 아니라 사실상 기업과 결탁한 정부와 토건화된 지방자치권력, 변화를 바라지 않는 적지 않은 개인들도 이를 반대하거나 무시하고 있다. 매스 미디어에서 살펴보면, 조명받는 농업은 그저 주말농장이거나 산업화 유기농이 거의 전부다. 눈여겨 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미디어에서 살필 수 있는 농사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 천편일률적으로 하나의 취향이거나 고급한 도락일 뿐이다. 

도시인으로 살다가 거슬러 다시 농업으로 돌아간 이들, '개혁'보다는 '변혁'을 생활방식으로 선택한 이들의 책을 최근에 주로 읽었다. 웬델 베리의 <생활의 조건>, 바바라 킹솔버 스티븐의 <자연과 함께 한 1년>, 노벨라 카펜터의 <내 농장은 28번가에 있다> 등등. 대체로 그 책들은 난생 처음 농사를 직업으로 삼는 것에 대한 공포로 시작해, 농부가 되면서 피부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 결과적으로 삶을 바꿔서 얻은 놀라운 행복에 대한 예찬으로 끝난다. 그러니까, 대개 이 부류의 책들은 '해피 엔딩'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책들을 읽는 일은 재미와 함께 안도감을 주었다. 몇 년간의 준비 계획을 세우고 차근히 도시 탈출의 꿈을 꾸고 있는 나로서는 앞서 시도해 본 자들이 시행착오를 겪긴 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으며 그 과정 역시 신선하고 흥미로웠다는 점이 초심자의 불안을 위로해 주는 데가 있었다. 길을 떠나기 앞서, 선행자들이 하나같이 놀라운 경험을 했으며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격려인가.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당에, 매니 하워드의 <내 뒷마당의 제국>을 골랐다. 마찬가지의 결과를 기대하면서. 

저자는 음식 평론가로 여러 유명한 신문과 잡지에다 음식과 요리사에 대한 수많은 글을 써 왔다. 중간에 그는 방향을 틀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취재하게 되는데, 거기서 겪은 이야기들을 다큐로 만들어 제작하려고 몇 년 간 혼신을 쏟아붓던 차에 <뉴욕매거진>으로부터 프로젝트를 의뢰받는다. 집에서 도시농업을 시작하고 거기서 나온 음식으로만 먹고 살며 그 경과를 철저히 기록하라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비용이 얼마가 들든 상관없이 지원하겠다는 것(원고료도 별도로 챙겨주고!).  

그리하여 매니의 여행은 갑작스레 시작된다. 집의 뒷마당을 갈아엎고, 흙을 새로 깔며 토끼를 키우고, 닭을 키우고, 오리를 키우고, 온갖 작물을 기른다. 한번도 농부를 꿈꿔 본 적 없고 자의로 이 일에 뛰어들지도 않은 그는, 완전 '쌩 초보'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겪으며 농장과 가족과 생활을 그야말로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영위해 나간다. 계획은 끊임없이 수포로 돌아가고 가축은 페사하고, 채소는 시들거린다.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비슷한 부류의 책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읽고 있자면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매니의 기록은 철저한 실패담이다.  

<내 뒷마당의 제국>의 미덕은 바로 그 점에서 나온다. 준비되지 않은 농사란, 참혹한 패배의 연속이라는 점을 미화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 철학이 없이 밀어붙이는 일의 마지막에는 그저 황량함이 자리할 뿐이라는 것. 저자가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지독할 정도로 성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이 책은 앞서의 책들과 같은 부류의, 그러나 전혀 다른 과정과 결과를 담고 있지만 동일하게 공유하는 부분도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농장일을 벌이게 되면서, 결국 그가 느낀 것은 본인이 기르고 재배하는 동식물과의 교감이며 동질감이라는 것을. 토네이도가 마을을 휩쓸어버리고 나서도 그는 쓰러지고 짓눌린 멜론나무를 포기할 수 없으며, 불안한 환경 가운데 낳는 즉시 새끼를 죽여버리는 어미토끼의 해산 과정에 눈을 피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곁을 지킨다. 거듭된 농장의 실패로 인해 안온했던 가정이 무너질 위기에 이르러서도 그는 농장을 버리지 못한다. 농사란 이렇게 관계맺는 일, 나와 토마토와 달걀과 토끼와 흙과 날씨가 결국 하나라는 것을 몸으로 이해하게 되는 일일 것이다. 어설픈 준비와 전치된 욕망으로 인해 좋은 결과를 맺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 임시 농부가 깨닫는 바가 전업 농부로 성공한 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내 뒷마당의 제국>은 과장이나 미사여구 없이 진정으로 우리가 농사로부터 배워야 하는 점을 가장 신랄하게 일깨워주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책의 마지막 부분, 저자가 덧붙인 에필로그는 쓸쓸하기 그지없다. 그는 결국 뒷마당을 다시 갈아엎고 도시농부로 계속 살기를 포기한다. <뉴욕 매거진>의 프로젝트가 끝나면서, 그의 프로젝트도 끝나고 만 것이다. 매니 하워드와 <뉴욕 매거진>에 있어 농사란, 하나의 취향이거나 고급한 도락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독자는 실망할 필요가 없다. 매니 하워드는 그저 잠시 경로에 끼어든 여행자, 개종할 뜻이 없이 '180일간 무료 체험'을 자원한 소비자에 불과했던 것이니까. 농업 역시 다른 비즈니스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이윤을 내는 사업이며, 그러기 위해서 단일재배, 유전자조작, 화학비료, 살충제, 제초제, 항공 방제, 석유를 필요로 하는 착취산업이고 투기와 낭비가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향락 산업으로 치부되는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농부로 다시 살기 위해서는 단순히 일을 바꾸는 게 아니라 생활의 변환이 필요한 법이므로. 지속가능한 삶을 꿈꾸는 독자라면, 이 책은 반면교사로 삼고, 저자 매니 하워드도 끊임없이 되풀이 읽는 웬델 베리의 책들을 정본으로 삼는 편이 좋겠다.  

책 표지에 실린 사진은 풍요롭기 그지없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는 점에서(아마도 뉴욕매거진에 실렸던 연출 사진이었을 듯 하다) 이 책은 저자가 욕망했던 지점과 도달했던 지점이 판이하게 달랐다는 걸 암시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농사를 지으려 하며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단단한 결의와 세밀한 위기관리책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좀 더 매섭게 자문하게 됐다. 나 역시 도시인으로서, 농사를 아주 추상적으로, 낭만적으로 구상하는 단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취향이거나 고급한 도락을 넘어, 그것을 내 삶으로, 유일한 삶으로, 지고의 삶으로 수락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을 위해 어떤 프로젝트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수행해 나갈 것인가? 책과 컴퓨터를 넘어, 마트와 술집을 넘어, 생협과 로코보어를 넘어, 남들의 우려와 내 희망을 넘어.  

 내 앞에 놓여진 뭇생명의 유일한 순환제국에 참전하는 일, 삶으로서의 농업을 다시금 바라본다.
결심하고자, 받아들이고자, 사랑하고자, 다시. 또 한 번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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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길을 떠나다 - 길 위의 신부 문정현
김중미 지음 / 낮은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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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을 다룬 책들 가운데, 원저와 리뷰 사이의 공명(共鳴)이 제일 크게 느껴졌던 것은 수잔 손택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에서도 <우울한 열정>에 쓰인 글의 밀도가 가장 높았다고 평가하는데, 해당 책의 원제가 'Under the Sign of Saturn(토성의 영향 아래)'이며, 그것은 또한 책 안에서 저자가 벤야민에 관해 쓴 에세이의 소제목을 그대로 책명으로 삼은 것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와 전쟁의 참화 가운데 무너지고 있는 제 삶을 하나의 알레고리로 만들어낸 이들, 죽음으로 뜨거운 상징이 된 벤야민과 30년간 암과 투병하면서 그것을 탁월한 문명비평서(<은유로서의 질병>)로 전유해 낸 손택은 '지식인의 최전선'으로 온 생을 기동했다는 점에서 꼭 닮았다. 급진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만이 급진적으로 살아온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결정적인 일격은 항상 왼손으로 날린 주먹'이듯이, 그들은 국가가 폭력으로 짓밟아버리고자 했던 '사회적 왼손'의 역할을 개인적으로 담당하면서 그 갈등과 희생의 비릿한 현실을 글쓰기로 증폭해 '인간의 윤리'를 읽는 이들의 양심에 아로새겼다.  

서두가 길었는데, 오늘 이야기하는 책은 '길 위의 신부'라 불리는 문정현의 평전이다. 장편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로 유명한 김중미가 문정현을 기술했다는 것에, 읽기에 앞서 사실 나로선 의아함이 있었다. 그렇지만 책을 모두 읽고 나서, 의문은 단 한 점도 남지 않았다. 내 의아함과 의문점은 모두 내가 그들(문정현과 김중미)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데서 비롯했다. 사람을 한 가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제대로 들어맞을 확률보다 그렇지 않을 확률이 훨씬 크며, 그것은 독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책은 거슬러 올라, 그가 사제를 선택하게 되는 어린 시절과 가정 형편부터 그려보인다. 가난했지만 래디컬하기 그지없던 성장 환경은 그대로 문정현과 문규현의 삶에 옮아붙고, 그리하여 안온하고 존경받는 길을 가고자 했던 그는 어느새 '고집 센 싸움꾼'이 되고 만다. 그가 '명성', 아니 '악명'을 얻은 사회운동에의 입문 동기는 하도 소박하고 순응적이라 읽는 도중 실소를 터뜨리게까지 되는데, 시작이야 어쨌든 문정현은 그 뒤로 이 세상의 '낮은 곳'들에 제 안위를 살피지 않고 몸을 던지는 '투사'의 삶으로 변모한다.   

그와 동생 문규현 신부가 싸운 곳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자면, 이 땅의 근현대사가 지닌 질곡이 그대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5.18, 임수경 방북, 매향리 사격장 문제, 미선이,효순이가 무근리에서 미군탱크에 압사당한 사건, SOFA 개정, 부안 핵폐기장, 대추리 미군기지, 용산 참사와 강정마을까지...장애아들과 작은 공동체를 꾸려내는 일로 마냥 행복해하던 '아빠' 신부는 제국과 국가 공권력의 이름으로 시민이 짓밟히는 참혹한 현장에서 머리가 허얘지도록 세월을 보냈다. 미사 때마다 누구나 말하는 '평화'가 진실로 진실로 모든 이들의 삶에 깃들도록 하기 위해, 그 자신은 인신의 자유와 고통으로부터의 안전을 포기하면서 '체제의 상식'을 '보편적 상식'과 또렷이 대비시켰다.   

책을 읽다보면 '한 순간도 유보 없이, 망설임 없이, 곧바로'라는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그 말은 문정현 신부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함께 싸우던 이가 경찰에 잡혀가면, 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대로 경찰서로 가 단식농성에 돌입한다('준비단식'같은 여유로운 낱말은 그의 사전에는 없다). 대추리에서의 장장 935일의 촛불집회가 끝나자, 그는 다시 생명과 평화의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는 다른 현장으로 거처를 옮긴다. 경찰과 안기부가 그를 불법연행하는 와중에서도, 그는 의기를 잃기는커녕 잠시 소변을 보게 해달라며 차 밖으로 나서 돌멩이를 집어들고 홀몸으로 그들과 맞선다. 한 순간의 유보 없이, 망설임없이, 곧바로, 그는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 그의 미사는 늘 전투경찰과 미군이 병력과 화기로 대대적으로 겁박하는 가운데 집전된다. 크레인에서 떨어지고, 단식 중에 쓰러지는 등 그 지난한 과정에서 그도 문규현 신부도 더이상 '평범하지 않은' 몸 상태가 됐다.    

재벌에게 막대한 재개발 이익을 몰아주는 속도전의 와중에서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시민 5명이 죽고, 진압에 나선 경찰도 1명 사망했던 용산 참사의 현장에서, 시민단체들도 방문을 꺼리고 권력의 약속은 늘 뒤집혔으며 사법부조차 '자살테러'로 피해자들을 욕보인 상황에서 문정현은 자신의 몸 상태로 인해 예전처럼 거기서 늘 '노숙'할 수 없음을 아파한다. 용산 참사의 유가족 합의 직후에 그는 또 다시 제주 강정마을로 떠났는데 칠순도 넘은 노구의 몸으로, 심지어 성치도 않은 몸으로 공권력이 급습할 때마다 대열의 맨 앞에서 형형한 목소리로 시시비비를 논파하는 그를 매번 만나볼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중덕 바닷가에서 풀피리를 말아 불며 자신과 주민들을 부드러이 위무하는 그가 '빨갱이', '싸움꾼'이라면 나도 죽을 때까지 '빨갱이', '싸움꾼'이 되기 위해 몸을 바쳐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지금도 문정현 신부는 젊은 활동가들과 공동체를 꾸리면서, 때로는 20대 젊은이의 '방 안에서 담배 태우지 말라' 같은 지적에 삐치거나 화를 내기도 하지만 그 다음날이면 생활방식을 바꾸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다. 타인을 가르치거나 비평하기는 쉽지만, 그 기준을 견고하게 자신에게도 적용하는 이들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세상에서, 이 고집센 늙은이의 겸허함은 감동적인 데가 있다. 나는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 김중미의 글은, 싸움과 투쟁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순정한 인간, 문정현에 대한 담담한 증언이다. 성경구절이 종종 실려, 문정현에 대한 액자 노릇을 하려고 드는 점이 작위적인 약점으로 제기될 수는 있겠으나, 한 인간의 지극한 삶은 레토릭을 넘어서는 장엄함이 있다. 설령 그 레토릭이 성경이더라도 말이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어리석은 물음을 한 가지 떠올렸다. 만약 이 땅에 예수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크리스천이 가장 많다는 순복음교회에? 남북한 대치가 계속되고 있는 휴전선에? '친환경 녹색성장'을 위해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붇고 주민들과 뭇생명을 몰아낸 4대강에? 

나는 예수가 어디에 있을 것인지 대강 알것 같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와 함께 있을 한 사람을 꼽을 수는 있을 것 같다. 20세기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기적을 동시에 창출해낸 몇 안되는 국가 대한민국에서 자본의 '하얀' 십자가를 대신 지고, 아픈 몸으로 세상의 아픈 곳들을 전전하는 '붉은' 예수 문정현이 있는 곳에 예수도 더불어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이 책을 다른 사람이 아닌 김중미가 썼다는 것이, 아마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수도 있겠다고 귀가 길 내내  생각했다. 이 부분은 책을 읽어봐야지만 알 수 있는 점이고, 문정현 못지 않게 김중미의 삶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두 명의 삶은 우리 시대의 '윤리'가 가리키는 하나의 정점이라고 나는 믿는다. 전우익의 말처럼, 모두가 변하는 때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진보다.  

문정현은 자신의 이상형을 평생동안 순교자에 둔 사람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현장에서 '한 순간도 유보 없이, 망설임 없이, 곧바로' 제 삶을 헌신하였다. 그가 왜 그러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을 수도 있고, 딱 한 가지 동기만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 대해 내가 단정하기보다는 앞서 언급한 수잔 손택의 <우울한 열정(원제:토성의 영향 아래')>에서 손택이 벤야민에 관해  쓴 에세이 "토성의 영향 아래" 맨 마지막 단락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면서 이 어설픈 글을 맺기로 한다.  

 

"(전략)벤야민은 수사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 크라우스는 새 시대의 최전방에 섰는가?
"아아, 전혀 그렇지 않도다. 그는 최후의 심판의 문턱에 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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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n_er 2012-11-05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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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사회학 도서 한 권이 한반도 남쪽을 흔들고 있다. '정의'를 다룬 이 책은 정의의 대한 개념과 역사, 논쟁들을 소개하면서 정의란 지금 우리에게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복합적으로 설파한다. 하버드, 석학, 명강의라는 태그로 수식될 이 책은 우리 땅에서 개발독재정권의 가열찬 공격적 드라이브와 더불어 뜨거운 반향을 얻고 있다. 얼마 전에는 까다로운 개념서로는 처음으로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달성했다고도 한다. 놀라운 일이다.

노동이 모욕받는 시대, 법적 정의란 가진 자만을 위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요즈음에 정의에 대한 탐구란 사실 좀 미심쩍은 데가 있다. 위의 책이 정의에 대한 논쟁사를 거쳐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애국적 정의를 최고의 가치로 꼽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와 애국은 근본적으로 무관한 가치일 뿐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은 정의에 대한 개념이 달라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부도덕과 도덕, 반민주와 민주, 정의 대 부정의로 구분되는 단순한 구도이기 때문이다. 이 정권은 단 한 번도, 무엇이 더 나은 가치인가에 대한 논리적인 접근을 한 적이 없다. 국민들의 MB에 대한 혐오는 방향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철학에 대한 문제다. 그들이 신봉하는 가치 자체가 저열하거나 노골적인 건설 숭배, 자본 독점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시점에서 갑자기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건 그저 생뚱맞다.

게다가 이 책 역시 의심쩍은 부분으로 가득하다. 이런저런 입장들을 소개하면서 공평한 입장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그저 저자가 취하고 있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줄곧 충실하게 공정한 분배를 외면하고, 보호무역주의를 찬양하며, 공동체주의의 현실적 반동성을 애써 외면한다. 안타깝지만 이 책이 주창하고 있는 정의는, '합리성을 지닌 우파적 정의'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노무현-유시민 세력과 차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같은 정파적 관념을 우리는 5년간 실제로 경험한 바 있다. 미안하지만 그들의 정의는 MB의 정의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무제한적 개발을 옹호하며 반노동적이고 유사진보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을 겪어봐야 결국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의 질문에 맞닥뜨리게 될 뿐이다.

이 땅에는 수많은 독서 캠페인이 있고, 여러 조사에서 한국인은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해지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은 책을 읽는다. 다만 그것이 회사에서 나눠준 책이거나 유명한 사람이 쓴 책, 재테크나 경쟁에 도움이 되는 책들일 뿐이다. 개인의 기준을 가지고 책을 읽어가는 이들이 많지 않다. 독서란 사실 가장 내밀한 행위, 개인만의 도락인데도 말이다. 너나없이 위기론을 말하는 인문학 책이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단 사실은 반갑지만, 결국 그 책이 내포하는 가치란 反개인이라는 의미에서 이쩌면 이 사건은 하나의 비극이다.

뉴스에서는 연일 '4대강'에 대한 논란들이 나오고 있고, 새로 내정된 내각 후보자들은 하나같이 범죄자다. 그럼에도 책읽는 이들은 위선적인 권력자들과 현실에서 맞부딪히기 보다는 관념의 수준에서 자신이 그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해주는 책들에서 위안을 찾으려 한다. 게다가 그 책은 생각만큼 도덕적이지도 않은데 말이다.

우리의 문제는 망가지다 못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작금의 현실이 아니라 한 번도 현실과 대결하지 않고 위협이 일 때마다 힘없이 사그라들고 마는 '비겁'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Q도 아닌데 우리는 언제까지 '정신 승리법'만을 쓸 것인가? 여행중에 수없이 만나는 강줄기들의 참혹한 공사현장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리다.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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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 2010-08-23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만 한 가지 궁금증이 있어서요^^ 왜 이 책이 '사회학 도서'인지 여쭙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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