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소비의 시대, 학살의 경제학

0. 소비의 시대

"우리들의 시대는 식료품을 위한 일상적인 지출도, 위신을 나타내기 위한 지출도
모두 '소비'라고 불리는 시대, 그것도 만인의 전폭적인 합의에 따라서 그렇게 불리는
최초의 시대이다"
- 쟝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중에서

한국의 정치적 경험과는 다르게 1980년대는 세계경제상 호황의 시대였다. 1차대전과 2차대전을
겪은 후 자본주의는 소련을 위시한 국가사회주의와 경쟁하면서 구성원들에게 그 자신의 가치를
생산과 복지로 각인시킨다. 미국의 자동차회사 포드의 생산방식을 딴 포드주의(Fordism)는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자본주의의 성장 모델이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특징되는 포드주의는 이를 위해 노동자들을 대거 공장에 투입하고, 작업의 효율성을 위해 점점 숙련된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 숙련된 노동을 노동자들에게 감당케 하는 대신에 제시한 당근은 '높은 임금'이었다.
사회의 대다수가 표준화된 방식의 제조업 노동에 종사하게 되고, 그 종사자들이 생활에 필요한
보수 이외에 충분한 경제적 여유를 지니게 되면서 구매력도 자연스레 늘어난다. 이같은 선순환이
복지기반의 확충과 문화적 지원으로 이어지면서 제 1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적 여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 문화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국가사회주의권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제 1세계의 '복지국가 모델'을 전지구권에서 가장 이상적인 국가체제로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제 3세계권이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수입, 적극적 교류를 통해 경제성장에
몰두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90년대 초반, 체제경쟁과 일당 독재 이후의 민주화에서 실패한 국가사회주의의 초강대국
소련이 무너지면서 자본주의는 20세기의 가장 현실적인 국가 모델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 1세계의 경제성장율은 조금씩 낮춰졌으나 아세안을 비롯한 신흥 자본주의 국가군들이
고성장을 이루면서 '자본주의 성장의 역사'를 계속 써 나갔고, 이 국가군들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서도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둠으로서 후기 자본주의는 전 지구적으로 '완전한 순환'을
만들어 가는 듯 했다. 제 1세계에서 '풍요의 시대'가 열린 것도 80년대 후반즈음부터이고,
한국을 비롯한 신흥 자본시장에서, 저학력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공장노동자로 10년 정도 일하면
'집도 살 수 있고 차도 살 수 있는 중산층'으로 편입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때부터
소비는 생산을 유도하는 '미덕', 만인이 인정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기본적 생활양식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자본이란 이윤을 남기기 위해 기능하는 것이고, 그 이윤은 제로섬의 원리에 바탕하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를 통과한 자본주의는 대륙과 지역을 망라하는 각종 무역체제를 동원해
'경제 식민지'를 창출하는 데 전력을 쏟는다. 시장이 다양화되면서 포드주의의 호시절도 끝난다.
도요타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포스트 포디즘(Post Fordism)'이 등장하고, 무한경쟁체제에 따라
자본과 자원이 집중을 통해 이윤의 집중과 부의 쏠림을 부채질하면서 구성원 대다수에게
'일정 이상의 경제적 수준'을 보장했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자본주의는 부를 특정 계층에게 더 많이 배분하고, 사치품(Lucury good, 한국에서는 '명품')에 대한 이미지와 향략적 소비를 영상매체의 발달에 발맞춰 선망의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서 사회적 경쟁을 다시 체계화시키고 경제적 평등의 중심추를 다시 오른쪽으로 밀어넣는다. '80대 20'의 사회가 펼쳐지고, 이는 점점 더 '95대 5'의
사회로 옮겨져간다. 부의 재분배가 막히고, 삶의 질이 '경제 성장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게 되고,
국가 내 착취, 기업간 착취, 노동자간 계급화가 발빠르게 자리잡으면서 '풍요의 사회'는 상당수 구성원의 착취를 볼모로 이루어진다. 90년대 이후, '세계화'란 이름으로 미국적 경제모델과 다국적 기업의 자본 집중이 강요되면서 축적된 풍요와 자원은 나누지 않고, 다만 '소비'의 눈높이만 공유하는 새로운 사회가 도래한다. 가진 자들에게는 '꿈', 그리고 못 가진 자들에게는 '지옥'같은
세계가.


1. 88만원 세대의 등장

"지금의 20대는 상위 5% 정도만이 한전과 삼성전자, 그리고 5급 사무관과 같은 '단단한 직장'을
가질 수 있고, 나머지는 이미 인구의 800만을 넘어선 비정규직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비정규직
평균 임금 119만원에 20대 급여의 평균비율 74%를 곱하면 88만원 정도가 된다. 세전 소득이다.
88만원에서 119만원 사이를 평생 받게 될 것이다."
  - 우석훈, 박권일, <88만원 세대> 중에서

90년대 후반까지 대한민국의 성장모델은 아세안 신흥 자본주의 국가군 가운데서도 아주
돋보이는 본보기였다. 한국은 세계 경제순위 10위권에 안착하면서 OECD에 편입되고,
민주화와 고성장, 저실업을 동시에 이루면서 일본 이후 아시아 국가의 선진국 진입의 청사진을
실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한 IMF 관리체제가 들어오면서
한국경제모델의 장점은 반년만에 '절딴'난다. 더이상 평생직장을 보장하지 않게 되었고,
'성과급제'를 도입하면서 연공서열제도 무너진다. '노동의 유연화'가 이루어지면서
처음으로 '상시적 비정규직'이 대대적으로 등장한다. 신규 노동시장 가운데 아주 극소수만
대기업 신입사원, 공무원, 공기업 등에 선발되고 나머지는 모두 실업자와 비정규직 가운데
택일을 강요받는다.

대학만 졸업하면 밥벌이를 할 수 있던 시절은 온데간데 없고, 토익과 공모전, 사회봉사 경험 등과
같은 새로운 진입장벽이 출현하여 정규직으로 들어가는 문을 더욱 옥죈다. 20대들은 휴학과
대학원 진학, 어학연수 등을 통해 학업기간을 늘리고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힘쓰지만
사회는 더이상 예전처럼 고학력 졸업자들의 대다수를 '풍요를 나눌 동반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20대들의 성장과정은 한국경제의 고성장 시기였고, 그에 따라 '소비의 미덕'이 학습되어 있다.
휴대폰과 해외 수학여행 같은 물질적 기반 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떤 브랜드를 소비하느냐에
맡기는 '자발적 자본화'에 함몰된 세대가 지금의 20대들이다. 더구나 그들의 성장기는 정치적으로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료되고, 그 이후 '실질적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보수정당 사이의
지지부진한 헤게모니 다툼으로 '탈정치화'가 가속화된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제 1세계의 高 소비'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사회적으로는 제 1세계가 70년대에
이룬 복지 기반을 보장받지 못했고, 정치적으로는 바로 전 세대인 386 세대가 불의에 항거하면서
획득했던 '저항의 권리'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런 20대에게 제대로 된 노동시장은 급속히
좁아들면서, 소비의 유혹은 더욱 더 전면화되고 노골화되었다. 동시에 대학과 정당은 민주화의
1차적 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잃었으며, 국가와 기업은 싸우고 설득시켜나가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개인의 '동일체'로 격상되어 졌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20대들의 대다수는 '88만원'의 월급을 받으면서도 명품을 소비하고,
프랜차이징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며, 해외여행을 가야하는 것이 당연한, 소득에
기반하지 않은 '소비의 세대'로 자리매김된다. 그러면서도 어떤 정치적 저항도 하지 않는 세대,
노력한다고 해서 대다수가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없는, 강요된 합의체제에 순응하는 세계사적으로 아주 독특한 세대가 된다.

2. 20대를 포위하라: 세대 착취론
 

우석훈의 이 책이 탁월한 것은 이같이 신세대들에게 한없이 가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과정이 어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는지 밝히는 데 있다. 저자는 90년대 이후
극도로 좁아진 '좋은 직장'들이 단지 자본의 세계화와 국가적 체제개편에 의존하고 있는 게
아니라 '세대간 착취'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는 것을 낱낱이 밝힌다.

6.25 이후 자신의 몫을 희생해가며 차세대 부의 기반을 축적하는 데 전 생애를 바친 냉전 세대와
독재의 유신 시절을 거치며 경제성장의 몫을 돌려받기 시작한 유신 세대, 고학력을 바탕으로
80년 광주의 경험을 공유하며 독재자를 끌어내린 386 세대들은 연령에 따라 한국경제의 늘어난
몫을 점점 더 많이 분배받았다. 경제적 자원뿐 아니라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으며, 사회의 각
분야에서 지도적 위치를 점유하면서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1997년 이후, 다시 말해
한국 경제가 고성장의 시대를 끝내고, '80대 20의 사회', '95대 5의 사회'로 재편될 때
새대간 경쟁은 특히 치열해지면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20대를 인질로 삼아 자신들의
안정을 꾀하는 특징을 가진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OECD 국가들이 '자본의 세계화' 이후 20대를 어떻게 대하고, 20대가
어떻게 저항에 나서고 권리를 획득했는지를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10대를 제외한 전 세대가
20대에게 노동의 권리를 주지 않고 삶의 질을 전혀 보장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권력과 자원을
사회적 합의로 재편하지 않는 사실상의 '경제적 학살'의 현 상황을 꼬집는다.

더군다나 이 현실이 더욱 슬픈 것은 '학살된 20대의 지갑'을 그들의 부모이며 조부모 세대인
유신 세대와 386 세대가 '개인적으로' 보조해줘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업과 국가조직의 임원
또는 경영주, 지도자이면서 가장 많은 경제적 자신을 보유한 유신세대와 회사의 팀장이거나
국영조직의 4,5급 사무관으로서 실질적 권력을 지닌 386 세대들은 줄어든 '안정된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20대들을 밀어내면서, 달리 말해 탈출구를 마련해주거나 새로운 사회체제에
관해 전혀 논의하지 않으면서도 한편 20대들이 단지 '이미지에 종속되어 있'고, '소비에 탐욕스런'
세대라고 비난하며 살벌해진 한국 사회 자본의 풍경을 '20대들이 못나 취업을 못하는 탓'으로
단순화해 버린다. 그리고 동시에 집으로 돌아가서는 이들의 긴 학업기간과 학업 이후에도
필요한 '취업 학습'에 돈을 쏟아부으며, 개인적인 부양을 힘겹게 받쳐나가는 괴이한 처지에
시달린다는 것을 이 책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 우석훈과 박권일은 이 책에서 '전에 없는' 세대착취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논거의 정확성을
보충하기 위해 전통적인 거시경제학 뿐 아니라 진화경제학, 시스템경제학, 조직론, 정보경제학,
생태경제학 등 최신 경제학 이론과 사회학적 개념들을 풍부하게 원용하고 있다. 또한 저자
우석훈은 고전적 자본주의 비판이론에 기대선 좌파이론가가 아니라 UN에서 기술분과 의장을
역임하고 이한동 총리 시설 대한민국 정부에서 '범정부 대책'을 입안한 바 있으며, 기업과
시민사회에서 실물경제통으로서 다양한 이력을 쌓아온 사람이다. 즉,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실질적이고 화려한' 경력을 지닌 전문가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표지 맨 위에 실린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는 선동적 문구와는 달리
저서의 문장과 함의들은 지극히 공정하고 대단히 합리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3. 88만원을 넘어서 


저자들은 지금의 20대에게 희망이란 '적립식 펀드'외에는 사실상 없다고 말한다. 말할 나위 없이,
최소한의 직업적 안정성과 경제적 사회보장을 마련하지 못한 세대에게 '적립식 펀드'가 대안이나
희망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20대들이 이룩해야 할 책무는 책의 표지에 쓰인 붉은 글씨처럼, '토플책을 덮고 짱돌을
드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한국의 20대는 프랑스의 20대처럼
공공의 파업을 권리이자 현실로 학습한 세대도 아니며, 설령 그들이 투쟁에 나선다 하더라도
'세대간 대결'에서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한다. 그들이 싸워야 할 세대는 그들의 부모이거나
조부모이기도 하고, 그들은 싸움의 공정한 심판(정당한 언론권력과 합의적 시민사회 체제)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대의 이같은 불행은 단지 20대로 끝나지 않는다. '승자독식', '5%의 정규직 사회'가
정상적인 체제가 아니고, 결국 불만과 불평등은 어떤 식으로든 폭발하기 마련이다. 치안은
불안해질 것이고 각종 병증이 만연될 것이다. 구매력은 떨어질 것이고, 불황은 장기화될 것이다.
결국 이같은 사회적 비용은 전(全) 세대가 떠안을 수밖에 없다. 잘라 말한다면 '20대 착취'는
결국 모든 세대의 문제가 된다. 20대만을 희생시키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유신 세대와 386 세대의
행복한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이상 경제시스템은 그같은 예전의 영광을 반복해
주지 않는다.

저자는 말한다. '먼저 젊은이들이 처한 (가혹한)사회적 조건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열악하다는 점을 인정"해 주는 것이 먼저이며, 타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실례를 교훈삼아 '세대간 합의'에 나서야'
한다고. 물론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단지 세대간 합의만은 아닐 것이다.
부와 이윤의 사회적 재분배를 논의하는 새롭고 공정한 틀을 만드는 것, 그것이 레디앙 출판사의
다음 책이 되리라.

'88만원'은 이미 노동자 절반을 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고, 젊은 세대의 피할 수 없는 미래다.
20대를 '소비와 이미지의 포로'라고 욕만 할 게 아니라, 비열한 승자독식이란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모색에 모든 세대가 나서야 한다. '비정규직'의 구덩이를 탈출할 수 없는
20대들에게 '능력을 키워 좁은 문을 통과하라'고 불가능한 주장을 설파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이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다른 OECD 국가들처럼 공적,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하는 데 힘써야 한다.
내 눈에도 20대들은 'TV'와 '연예인'에 중독된 세대이고, 거대담론의 시대를 벗어나면서
'미시 담론'에도 집중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스캔들에나 몰두하면서, 자신을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과 동일시하고, 대학등록금 인상조차 저지할 수 없는 무기력한 아이들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우리가 낳은 세대이기도 하다. 더딘 실질적 민주화는 90년대 이후
자본의 생활화를 빚었고, 20대는 경제적 이전투구 속에서 아무런 발언권도 가지지 못한 채
소외되었다. 그들을 좀 더 따뜻하게 보듬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에 대해 좀 더 치밀하게 토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대통령 후보들이 설파하는 '경제성장률 7% 제고'의
낡은 성장담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프레임, 합의의 준거틀을 마련해 주었다.

가난은 생존을 위협하는 조건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접적인 '살인의 환경'이 된다.
세계적 자본주의의 흐름 가운데서도 극히 예외적인 '한국의 세대착취'에 관해, 그리고
'20대의 예정된 절망'에 대해 우리들은 이제 세대를 넘어 공론화를 논의할 때가 되었다.
대선을 한달 여 앞두고 있는 이 정치의 계절에, 누가 대통령 후보로 가장 적합한가 하는
'실질적 논의'를 위해서도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길 권한다.

88만원 세대를 위해, 그리고 88만원 세대를 다시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