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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절망선생 1
쿠메타 코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은 한때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젖은 눈으로 돌아보면 세상은 슬픔으로 자욱하고, 외로움은 사람과 사람 사이 침묵처럼 빼곡히 배어있다. 통증은 매 시간과 모든 공간 위로 햇볕마냥 퍼지는데 비명과 통곡은 어느 한 지역을 가리지 않고 노래처럼 울린다. 태초 이래, 세계는 전부 그러했다.
생각해보면 이처럼 우울한 세계에서 살아있는 것들의 종말로 죽음처럼 어울리는 것도 없다. 有에서 시작해 無로 사라지는 것. 길고 긴 고통의 한살이를 터벅터벅 걷다 대지 위에 눕고 그대로 생을 마감하는 것. 장엄할 것도 비참할 것도 없다. 그것이 생명에 주어진 동일한 귀결이다.
비관의 안경을 통해 바라보면 우리는 너나없이 상복을 입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공허한 세계에서 만화 <안녕, 절망선생>은 질세라 한술 더 뜨며 독자를 현혹한다. 살아봐야 모든 것이 참혹에 지나지 않는 세상, 목표는 '자살'인 것이다. 목을 매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고, 어떤 희망적인 조짐을 만나더라도 이를 한번에 비틀어 삶과 세계를 비하한다. 저승행 가방을 만들고 그 안에 밧줄, 약물, 연탄 등 자살에 필요한 완벽한 장비를 갖추려 한다.
제 손으로 죽는 것이 목표인 주인공이 이끌어가는 이상한 만화 <안녕, 절망선생>은 어두운가? 그렇지 않다. 그는 매회 전편의 인물과 대비되는 새로운 등장인물을 끌어들여 분위기를 일신하고, 온갖 통계와 예시를 제시하며 일본의 비관성을 설파하면서도 그 한결 같은 비틀림이 유머러스하고 쾌활하다. 말 끝마다 ‘절망했다’고 외치지만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법이 없고 논리적인 설득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가르치는 학생과 주변인물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뚜렷하고, 실존하는 일본 군상들에 관한 강한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 같은 와중에서 늘 절망하는 주인공 캐릭터는 결국, 역사와 현대에 대해 끈질기고 암팡진 비판을 쏟아내는 일본 지식인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녕, 절망선생>은 ‘절망’을 주조음으로 깔고 있으면서도 BGM은 확실히 즐겁고 상쾌하다. 스타카토처럼 톡톡 불거지는 농담과 극적인 상황을 한번 더 뒤집어 아이러니로 바꾸어내는 작가의 기민한 재치는 페이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정서적으로 굉장히 암담한 시기였다. 공감을 얻고자 책장을 펼친 이 만화에서 내가 만난 것은 오히려 살아갈만한 위안, 독설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다른 힘이었다. 극단과 극단이 만나는 날카로운 갈등 상황 속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작가의 필력은 경의로울 정도다.
주인공이 말했듯 인생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민폐"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무언가를 소비하면서 살 수 밖에 없고, 제 동료뿐 아니라 자연을 착취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마저도 빠르게 망가뜨리고 있다. 살아간다는 건 어떻게 본다면 인간 존재 그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들에게 절망을 주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일은, 결국은 싸우는 것이다.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 자신이 처한 조건과 싸우고, 나쁜 날씨를 견디고,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고 행복한 현재를 일구며 공감을 얻어가는 일이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나아지게 만드는 일이다. 눈물을 줄이고, 웃음을 퍼뜨려가는 여행이다.
<안녕, 절망선생>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설파하지만 강요하지 않고 논쟁한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화들은 이 세계의 근간에 대한 치열한 질문인 동시에 자신의 존재 증명이기도 하다. 질문과 대답과 반응 속에서 그들은 혼란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흔들림은 변화의 속성이며, 변화란 진화의 핵심이다. 모든 캐릭터들은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우리의 인생만큼이나 파란만장하다. 최소한 절망으로 점칠되어 있지 않고 살 만 하다.
만화 <안녕, 절망선생>은 수만가지 자살의 이유를 대면서도 끝내 살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만화가 이처럼 밝고 유쾌할 수 있을까.
모르겠으면 고민하자. 슬프면 눈물을 흘리자. 힘들면 괴로워하자. 무서우면 눈을 감자. 아프면 엉엉 울자. 그리고 살자. 바로 ‘절망선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