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
J. 라이언 스트라돌 지음, 이경아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사실 이 책은 '표지'가 너무 예뻐서 꼭 읽어보고 싶던 책 중에 하나였다. (어떻게 내용이 아니라 표지를 보고 골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이 사랑스러운 책을 집어들게 된 경위가 어찌되었든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무척 행복했고, 맛있는 인물들의 삶을 맛보았다. 각 8개의 챕터로 구성되어있는 그 이야기는 각 주어진 <미국 중서부>의 음식 메뉴와 연관된 각 주인공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이 전에 작가를 꿈꾸던 아마추어 문예창작과 학생 시절(먼.. 옛날)에 서툰 실력으로 글을 쓰다보면, 내가 만들어낸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경우들이 꽤 있었는데, 아마 내 실력이 부족해서였겠지만 내가 계획하고 설계한 스토리텔링이 있지만 글을 쓰며 주인공의 뒤를 따라가다보면 (내 시선은 늘 주인공의 등이었다.) 늘 내가 생각한 곳이 아닌 주인공이 가고 싶은 종착지를 휘젓고 다니고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그게 좋았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 순간들이 떠올랐다. 엄청난 행운과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가 자기 주어진 삶에서 생동감있게 살아 움직이고 감정을 표현하고 휘젓고 다니는 것. 작가가 의도했다면 너무 존경스럽고, 의도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사랑스러운 인물들을 또 만나고 싶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에바는 천재적인 미각을 지닌 여성으로, 레스토랑의 셰프인 아버지와 소믈리에를 꿈꾸는 웨이트리스인 어머니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난다. 에바가 아직 갓난아이였을 적, 에바의 어머니 신시아는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찾아 어린 에바와 남편 라르스를 두고 집을 떠나 버리고, 라르스는 홀로 남겨진 채 지극정성으로 에바를 돌본다.


직업이 셰프인 그는 마치 음악을 하는 부모가 특정한 곡들을 자식에게 계속 접하게 해주듯이 아직 갓난아이인 에바에게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해주면서 그녀를 기른다. 그러나 라르스 역시 얼마 안 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숨을 거두고, 에바는 라르스의 동생인 삼촌 가족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10대 소녀로 자란 에바는 남들보다 덩치가 크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 조숙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한다. (에바가 친부모로 알고 자란) 삼촌 부부는 에바를 친자식처럼 사랑해 주지만, 다른 가족들과 달리 엉뚱한 발상을 잘 하고 요리에 관심이 많은 에바의 성향을 깊이 이해해 주지는 못한다. 고된 파트타임 업무로 생계를 지탱해야 하는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부모로서 에바를 세심하게 돌봐 주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열한 살 때 자기 방 벽장 안에 수경 재배 도구와 성장 촉진 램프를 설치하여 살인적으로 매운 칠리 고추들을 취미 삼아 재배하는가 하면, 그 고추를 이용한 계략을 꾸며서 자신을 괴롭히던 못된 남자아이들을 당차게 혼내 주기도 한다. 청양 고추의 20배에 달하는 극도로 매운 고추들을 기르고 맛보며 실험을 거듭해 온 탓에 내성이 생긴 혀로 어른들도 먹기 힘든 매운 음식 먹기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기도 한다.


미국 최고의 디너파티를 주관하는 전설적인 셰프가 되기까지, 이 작품은 천재 셰프 에바의 흥미로운 성장담무엇보다 에바는 한 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놀라운 미각을 지닌 소녀다. (3개월 된 아기에게 항정살 퓌레를 먹인 아버지의 정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자랄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의 눈에 들게 된 그녀는, 그곳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요리의 세계에 입문하고 차츰차츰 셰프의 꿈을 키워 나가며 미국 최고의 디너파티를 주관하는 전설적인 셰프가 되기까지, 이 작품은 천재 셰프 에바의 흥미로운 성장담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에바'만이 주인공은 아니다. 국가대표로 꿈 앞에 다가간 순간 잠깐의 방심으로 임신해버린 브라크(에바의 사촌), 에바에게 한 눈에 반한 밴드소년 윌 (윌은 나중에 더 디너에 참석해 에바와 데이트를 한 적이 있다고 자랑한다.)


에바를 경쟁자로 생각하고 사사건건 질투하는 부유한 여성 옥타비아(후에 에바가 더 디너 사업을 제안하지만 거절하고 후회한다), 의붓 자녀들의 차디찬 무시와 남편의 무관심, 친자식의 마약 재배와 방탕을 자신의 속으로 감내하며 자신만의 캐러멜 바를 만들어가는 팻, 그리고 마지막 이 작품에서 잊혀졌던 인물.


친 자식을 멀리서라도 한 번 만나고 싶어하는 에바의 친 어머니 신디아까지 이 작품 안에서는 모두가 스스로 움직이고, 생동하며 각자 자신의 삶을 달려가고 있다. 난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포인트는 각 스토리마다 명확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멈춤으로 끝나는 열린 결말의 이야기.


근데, 산다는 게 그렇지 않나- 예전에는 산다는 것이 '명확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삶에 있어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잠깐의 방심으로 임신을 한 브라크의 인생이 그 시점으로부터 망한 것은 아니다. 에바에게 한 눈에 반해 고급 레스토랑으로 에바를 처음 데려갔던 윌과 헤어졌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끝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자부심이자 자기 자신과 같던 자신의 캐러멜 바가 무시당하고, 아들의 마약이 경찰에게 단속되는 위기에서도 그녀의 이야기를 작가가 지속해서 들려주지 않을 뿐 그녀의 삶은 종료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상상해본다.

지금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에바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을까?

신시아와 에바는 그 후에도 만남을 이어갔을까? 옥타비아와 조디 또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인생은 무조건 낙관하지 말자, 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이 왔을지도 모르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휘말릴지라도 지금도 나처럼 생생하게 살아갈 그들의 삶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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