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 한계 시간
율리 체 지음, 남정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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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인 '잠수 한계 시간'은 Nullzeit, 즉 무감압 잠수 한계 시간을 뜻한다. 이는 수면 위로 바로 돌아가더라도 건강에 해를 입지 않으면서 특정한 수심에서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물속의 높은 압력 때문에 질소가 몸속에 저장된다. 마치 탄산수 병안에 든 탄산과 비슷하다고 상상할 수 있는데, 뚜껑이 닫힌 채 압력을 받는 동안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병을 너무 빨리 열면 폭발하듯 무감압 잠수 한계 시간을 넘기고 빨리 물 밖에 나온다면 이와 비슷한 일이 몸에도 일어나게 된다. 욜리 체는 이 소설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다. 스페인 라호라에서 잠수를 배우기 위해 찾아 온 욜라와 테오와 스벤이 경험하게 되는 '잠수'와 흔히 사회적 관계에서 떠난다는 의미로 '잠수탄다'라고 말하는 도피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회적 관계를 떠나, 나 혼자만 괜찮으면 된다는 개인주의의 틀 안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내가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그 사람들 삶에 개입하고, 혹은 그저 좋은 의도에서 충고하는 일을 막았다. 나는 그 후로 내가 ‘전쟁터’라고 부르는 독일과 더 이상 아무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 얼마 후 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때, 나의 세계관은 ‘개입하지 않음’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졌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스벤은 자신을 길들이고, 평가하려는 독일의(혹은 세상의) 평가로부터 벗어나고자 가족과 친구들 모두 인연을 끊고 스페인의 작은 섬에서 잠수 강사로 살아간다. 그는 스스로 어디에도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세워 철저한 개인주의자로 살아간다. 2011년 11월 12일, 욜라와 테오라는 한 쌍의 커플이 두 주 동안 스벤에게 잠수를 배우며 휴가를 보내겠다고 찾아온다. 그리고 오직 자신들만을 전담하며 다른 고객은 받지 않고 스물네 시간 돌봐 주는 것을 전제로 스벤에게 1만 4천 유로라는 거금을 제시한다. 귀족 가문 출신의 여배우 욜라와 지적이고 점잖아 보이는 작가 테오는 누구에게나 부러움의 대상이 될만한 커플로 보이지만, 이들은 뭔가 이상하다. 


스벤은 오랜만에 잠수하는 이들을 위해 기초부터 다시 가르쳤다. 수신호를 설명해 주고, 압력계를 읽고, 위급 상황에서 서로 공기를 공급해 주는 법을 연습했다. 이후 수심 8미터까지 내려가 균형을 잡고 호흡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갑자기 테오가 호흡기를 움켜쥐더니 바닥을 박차고 수면 위로 올라가 버렸다. 잠수 중 호버링을 할 때 욜라가 테오 뒤로 손을 뻗어 밸브를 잠군 탓에 테오는 호흡기에서 공기를 공급받지 못했던 것이다. 더 깊은 곳이었다면 최악의 경우 목숨도 잃을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욜라는 웃었다. 욜라는 테오가 보는 앞에서 스벤을 유혹하고 테오의 성 불능과 창작 불능을 비난하며 상처를 주고, 테오는 사람들 앞에서 욜라의 비참한 상황을 떠벌리며 모욕을 주면서도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


"욜라와 테오가 어떤 게임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데, 나는 그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 규칙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는 지금도 그 어떤 해명을 찾을 수 없다니 기이한 일이다. 해명이란 우리가 지나가는 시간을 참고 견뎌 낸 데 대해 마땅히 얻게 되는 대가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우리에겐 해명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해명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미쳐 버릴 것이다."



『잠수 한계 시간』은 스벤의 일인칭 서술과 욜라의 일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그러나 함께 하루 일과를 보냈음에도 이들의 진술은 엇갈린다. 이렇게 이중 관점을 동시에 제시하지만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스벤과 욜라,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걸까? 스벤이 자신의 생일을 기념해 수심 100미터 난파선에 잠수하기로 하고, 욜라의 부탁으로 이들과 동행한다. 스벤은 잠수를 마무리하고 순수 산소와 바텀 가스를 번갈아 호흡하며 조금씩 수면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테오가 물에 빠져 점점 가라앉았다. 우선 스벤은 계류 밧줄을 풀고 테오를 붙잡았다. 테오는 의식이 없었고 이삼 분이 지나면 호흡 정지에 이를 테지만, 지금 수면으로 올라간다면 몸속의 질소가 기포로 변하며 죽을 수도 있다. 개입하지 않음. 스벤은 그저 개입하지 않고 테오가 말없이 깊은 곳으로 사라지는 것을 외면한다 해도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의 망설임 끝에 테오는 자신의 호흡기를 테오에게 밀어 넣었다. 구조된 테오는 곧장 치료를 위해 독일로 돌아갔다. 스벤은 이들의 짐을 정리하며 욜라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만약 테오가 죽었더라면 그 살인자는 스벤일 수 밖에 없는 기록이 남겨져있었다.


"살인이 시도되었던 그날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날의 아주 특정한 순간이 생각났다. 그리고 갑자기 고마운 감정이 흘러넘쳤다. 갑자기 그 순간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여겨졌다. 나는 망설였고, 결정을 내렸다. 나는 테오를 심연으로 가라앉게 두지 않았고, 그의 생명을 구했다. 그 결정에 대한 고마움에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왜 내가 십사 년 동안 ‘개입하지 않다’라는 개념을 그토록 매력적이라 여겼는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추한 개념이었다."



잠수하지 말 것, 다른 이들을 외면하지 말 것, 사회적 변화를 위해 개입하기를 주저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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