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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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와 닮아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타이완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다시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우리나라의 6·25 전쟁 같은 국공 내전이 일어나면서 중국 본토와 다시 갈라지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장기간 계엄 상태를 유지하면서 폭압적인 군부 독재를 자행했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무참히 처형했다. 오랜 시간 권위주의 통치와 가부장제 유교적 가치관이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여성에 대해 차별적이고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엄혹한 사회였다. 흔히 한국인에게는 '한(恨)'의 정서가 깔려 있다고 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침략과 약탈, 전쟁, 가난, 억압으로 점철된 세월을 감내해야 했기에 마음속에 울분이 쌓인 것이다. 타이완도 마찬가지다. 억압의 역사 속 『귀신들의 땅』에 등장하는 천 씨 집안 인물들만 들여다보아도 울분이 맺히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기구하고 박복하다. 그래서 이 책은 귀신들의 땅, 오로지 고통과 상처만 존재했던 그곳의 이야기이다.



타이완의 음력 7월은 귀월(鬼月), 즉 귀신들의 달이다. 그중에서도 귀문(鬼門)이 활짝 열리는 7월 15일, 중원절은 음기가 세고 귀신들이 가장 많이 출몰하는 날. 중원절이 되면 타이완의 각 가정에서는 제사상을 차려 떠도는 혼령을 위로하고 지전을 태우며 귀신들을 달랜다. 이 무더운 중원절의 한낮, 타이완 중부의 외딴 시골 마을 용징(永靖)에 톈홍이 돌아온다. 천 씨 집안의 일곱째이자 막내아들이다. 그는 성인이 되자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쫓기듯 독일로 떠났다. 그러나 독일에서 만난 T를 죽인 뒤 오랜 시간 감옥에 갇혀있던 그는 출소 후 중원절에 다시 돌아왔다. 그에게는 아들을 낳기 위해 태어난 다섯 명의 딸과 드디어 그 아래로 태어난 형이 있었다.


네가 빨리 가 버리기를 바랐던 건 두려웠기 때문이다. 네가 1초만 더 머물렀다가는 사태의 진상을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물탱크 안에서의 일 말이다. 나의 참모습, 네 엄마의 참모습, 우리가 너에게 했던 모든 일들. 우리는 너를 지켜 주지 못했다. 한 번도 지켜주지 못했지. 가장 잔혹한 사람은 경찰도 아니고 네 중학교 담임 선생도 아니다, 바로 우리였다. _p.194


『귀신들의 땅』은 각 인물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하나씩 조각을 맞추다 보면 결국 모든 진실을 깨닫게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누가 누굴 죽였고, 그 죽음의 사연 뒤에 숨은 진짜 의미가 조금씩 드러나는 과정이 특별한 재미이다. 톈홍은 왜 T를 죽였을까? 넷째는 왜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것일까? 다섯째는 왜 의문의 죽음을 맞은 것일까? 뿌리 깊은 남아선호 사상으로 환영받지 못하고 태어난 다섯 자매의 삶과 갖가지 구실로 사람들을 탄압하고 체포하는 광경을 목격하며 자라 온 사람들이 겪는 비극과 고통은 중원절의 재회를 통해 산 자와 죽은 자가 모호해진다.



너무 재미있는 소설이기에 꼭 읽어보셨으면 해서 스포일러 대신 이 소설과 연관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실제 작가 천쓰홍은 소설 속 톈홍과 흡사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톈홍보다 더 많은 아홉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고, 타이완 정부가 갖가지 구실로 사람들을 탄압하고 체포하는 광경을 목격해왔다. 이후 독일로 거주지를 옮겨서 생활한 것도 흡사하여 자전적인 요소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토지개혁으로 땅을 모두 빼앗긴 후 아버지는 옆집의 왕 씨와 사업을 도모하고, 그는 일본에서 과자 만드는 기술을 배워 크게 돈을 번다. 후에 이 왕 씨의 아들은 톈홍의 넷째 누나와 결혼을 하여 용징에서 가장 큰 저택인 백악관에 거주하게 되는데 이 과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찹쌀 선과'이다. 찹쌀 선과는 대만의 왕왕 그룹과 크라운이 협력 개발하여 만든 과자로 실제 왕왕 그룹은 이 과자로 큰 부를 얻었다고 한다.


나라가 망하거나 추방되어 의지할데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는 것, 더 이상 돌아갈 본향이 없는 것이 바로 '집이 없는' 상태였다. 뿌리가 잘려 나가는 단절이자 영원한 이별이었다. 돌아갈 본향이 없어졌다. 집이 없다. _p.340



작가는 '누구나 아픈 기억과 상처가 있으면 이를 덮어 버리거나 묻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과거는 그림자 같고 지나간 일들은 다시 반복'된다고 말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진실을 모두 알게 된 충격과 슬픔이 몰려온다. 그래서 3부의 제목을 이렇게 지었나 보다.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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