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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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뉴욕 독립미술관 협회전에 출품된 작품의 제목은 ‘샘’(Fountain) 이었다. ‘남성용 소변기 모양의 조형물엔 리처드 머트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 작품은 소변기 모양으로 만든 조형물이 아니라 작가가 상점에서 직접 변기를 구매해 원래 쓰임새대로의 모습에서 90도로 방향을 돌려놓고 서명만 남겼다고 밝혔다. 당시 이 작품은 “이게 어째서 예술이냐"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변기 하나도 과연 미술로 봐야 할지에 대하여 큰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 《샘》은 전시회 기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잭슨 폴락, 앤디 워홀, 백남 준 등 파격적인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에는, '이것이 예술인가?'라는 논란이 따라붙는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일까?


《6월 16일 새벽 4시, 그랜드 캐니언의 아름다운 절벽에서 프러포즈한 커플을 찾습니다.》 SNS에 올라온 사진 속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반쯤 굽혀 앉은 남자가 있었다.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자의 어깨에서부터 뒤로 드리워진 베일이 바람에 가볍게 날리고 있었다. 유일한 조명은 달빛이었다. 사람들은 이 사진을 보고 처음에는 아름답다며 찬사를 보냈지만 곧 사진 속 두 사람이 실종 상태였다는 것이 알려지자 비난이 쏟아졌다. 젊은 남녀의 아름다운 프러포즈 장면과 생의 마지막이 사진으로 남게 된 것은 사실 사진 찍는 개 '로버트'였다.그 후 시체 두 구가 발견되면서 실종 수사는 종결되었고, 사진 속 여자의 아버지 빌트만 회장은 딸의 마지막 사진을 찍은 로버트를 위해 미술 재단을 만든다. 바로 [로버트 재단]


안이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올해의 작가상 후원 작가에 선정될 만큼 유망했지만, 몇 달 전 미술 학원을 폐업하고 생계를 위해 음식 배달 라이더의 삶을 산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는 예술도 미뤄야 했다. 이때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자신을 로버트 재단의 한국 담당자인 최 부장이라고 소개한 사람은, '로버트'가 직접 안이지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여 재단에서 그녀의 작품 활동을 후원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지난 7년간 로버트 재단의 창작 프로그램을 거친 작가는 모두 스무 명이었고, 왕복 항공권을 비롯한 숙소와 생활비, 재료비 일체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전시회 마지막 날에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 하며, 소각할 작품은 로버트 재단에서 선택한다는 조건이 담겨있었다.

작가가 무엇을 그리든 그중 하나가 소각용으로 정해지면 작가는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질 테고, 로버트 미술관 소각식의 주요 연료는 바로 작가의 마음이라는 것을. _p.263


『불타는 작품』에는 몇 가지 예술 작품의 조건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1) 기억에 남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로버트가 촬영한 <캐니언의 프러포즈>는 새벽 4시에 달빛을 받아 촬영된 사진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한 커플의 마지막을 개가 찍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2) 화제성이 있어야 한다. 작가의 작품 중 하나를 눈 앞에서 불태워야 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불타는 작품이 아니라, 소멸되어 버린 작품과 작가의 마음을 사랑했다. 3) 메시지가 이어져야 한다.

시한부가 아닌 것은 <R의 똥>이 아니라고. 거기서 불타기로 되어 있었던 걸 빼돌렸다면 그건 더 이상 진짜가 아니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불타는 작품만이 진짜라고. 불타고 있을 때, 그 순간의 화력만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인다고. 그런 의미에서 화염을 피해 밖으로 나온 건 진짜일 수가 없다고. _p.341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꼭 화제가 되어야만 좋은 작품일까? 누군가가 알아주어야만 좋은 예술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거꾸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품도 뛰어난 예술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뛰어난 작품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변기가 예술이 되고, 깡통 속 대변이 작품으로 인정받고, 벽에 붙은 바나나에 열광하는 현대 미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이렇지 않을까? 예술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새로운 주제의 소설이라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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