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행방 새소설 3
안보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99년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현장에 있던 유치원생을 비롯하여 초등학생과 인솔교사 23명이 사망했다. 화재는 2층에서 시작되었다. 불은 단 20분 만에 건물 전체로 옮겨붙었고, 화재 진압 후 잿더미로 변해 버린 건물에서 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됐다. 사고 당시 아이들을 지켜줄 어른은 없었고, 화재경보기와 소화기는 작동되지 않았으며 아이들이 자고 있던 건물은 컨테이너를 얹어놓은 불법 건축물이었다. 유치원 캠프로, 초등학교 수련회로 아이들을 이곳에 보냈던 부모는 끊임없이 자책했다. 그리고 2014년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이 진도 부근에서 침몰하였고, 침몰 중에도 선내에 '가만히 있으라'라는 안내에 따라 머물렀던 탑승자 대부분이 사망했다. 이날 여객선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고등학생 325명이 탑승해있었다.


『밤의 행방』의 주인공 주혁은 부실하게 지어진 수련원으로 캠프를 보낸 뒤 황망하게 딸을 잃은 인물이다. 유난히 캠프를 가기 싫다고 고집을 부렸던 수아를 설득해,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보낸 터였다. 뼈가 다 여물지 못한 아이들은 고온에 녹아 뼛조각으로밖에 남지 않았다. 주혁과 영주의 아이는 그곳에 있었다. 그곳엔 누구의 아이도 있을 수 있었고, 누구의 아이든 죽을 수밖에 없었다.


"주혁의 누나는 그들이 왜 이 슬픔을 함께 견뎌내려 하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끼리 보듬고 격려해줘야지. 누나가 울분에 차 말하면 주혁도 똑같이 되받았다. 같은 고통을 겪었으니까 안 되는 거야. 똑같이 후회하고 똑같이 증오하고 똑같이 절망했는데 무슨 수로 서로를 보듬어? 무슨 수로 서로를 용서하느냐고!"


『밤의 행방』은 주혁이 '선녀 보살'인 누나의 법당에서 기거하는 중 기묘한 일을 겪으면서 시작된다. 용한 점쟁이가 되기 위해 산속으로 기도를 떠난 누나를 배웅한 후 기묘한 나뭇가지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저기요, 아저씨. 저 좀 보실래요? 마누카 꿀을 반 스푼 타주시면 피로가 좀 풀릴 것 같네요.” 주혁은 황당했지만 나뭇가지와 티격태격하며 정이 들고, 우연히 점을 보러 법당에 들른 사람들의 죽음을 맞추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절박하다. 가출한 딸을 언제쯤 만날 수 있을지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 직장 내 성희롱으로 모욕을 견디고 있는 사원, 부모의 학대로 고통받고 있는 남매와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에 원인을 알고자 하는 언니까지.


작가는 모든 사람이 모두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받았을 씨랜드 화재 사건을 시작으로 '인재(人災)'라는 이름하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해 썼다고 밝혔다. 인간이 만들어낸 죽음, 지금 이 순간에도 탄생하고 있을 밤에 대하여. 그리고 그 사고로 인해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 대하여. 주혁이 그랬던 것처럼 유족들도 고통과 증오와 죄책감과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 속에서 아이가 마땅히 누렸을 무탈하고 평범한 미래를 끊임없이 상상했을 것이다.


"제가 유년기에 복이 있었군요. 아뇨, 그랬던 것도 같습니다. 별다른 일 없이 이 나이까지 무사히 살아남았으면 그게 복이죠. 부모에게 학대당하거나 이웃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학교에서 따돌림당하지도 않고,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가스통이 폭발해 몸이 산산조각 나지도 않았으니 운이 좋았네요. 요즘 같은 세상엔 운도 복이죠."


최근에 나는 삶이 '권태롭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지금의 일상에서는 내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도, 내 인생의 방향을 뒤흔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어떻게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무리 죽음이 당연하고 공평하게 주어진다 하더라도 만들어진 죽음을 피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만약 누군가에게 죽음이 길을 잃어 찾아온다면 "따뜻한 한 모금을 입에 머금는 것만으로도,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새날이 밝아올 수 있음을, 서로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어줄 수 있음을" 서로 알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여러 인재(人災)는 여전히 모두에게 상처로 남아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내가 될 수도 있었고,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겪을 수밖에 없었을 일이기에 그들에게 진심어린 위로의 마음이 전달되었기를, 이제는 용기를 얻고 새날을 살아갈 힘이 생겼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