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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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쓴 것을 뜻한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소설 중에는 작가 자신이 작품 속 인물로 등장하면서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불명확하게 만드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다. 예를 들면, 박상영 작가나 민병훈 작가, 그리고 『중급 한국어』의 문지혁 작가도.주인공 문지혁은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친 뒤 현지에서 '초급 한국어'를 가르치다 귀국하여 대학원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결혼을 하고 지방의 대학 강사직을 얻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여러 차례 시험관 시술을 통해 딸 은채를 낳는다. 신춘문예에 꽤 응모했으나 당선된 적은 없고,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 출간된 소설은 독자에게 “조잡하고 애매한 소설이며… 주제 실종에 무엇보다 더럽게 재미가 없습니다.”라는 평을 듣는다.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일까?


"만약 A가 제대로 된 여행을 다녀왔다면 아마 A는 A'가 되어 있을 거예요. 작지만 분명한 변화를 겪게 되는 거죠. 진짜 여행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이야기는 결말에 변화가 들어 있어야만 해요. 작품의 주제, 작가의 최종 메시지가 거기 들어 있으니까요." (38)


나의 삶을 어떻게 글로 쓸 수 있을까? 『중급 한국어』는 '자서전'을 쓰는 글쓰기 수업 커리큘럼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총 15주간 자서전 쓰기와 글쓰기의 기술을 배우고, 이후 세계 고전문학 『변신』,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같은 문학작품을 통해 성장과 사랑, 죽음과 고통을 바라본다. 우리 일상을 이루는 것들이자 문학작품의 영원한 주제들. 첫 수업에서 그는 ‘일상→(극적) 비일상→일상’이라는 이탈과 귀환을 통해 A가 A′가 되어가는 소설의 원형적 구조를 설명하지만, 흥미롭게도 자신의 일상은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는 하루하루에 글을 쓰고 고치고 읽고 고치는 되풀이의 연속일 뿐이다.



카버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사랑했던 작품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에는 하나의 죽음이 있다. 여덟 살의 스코티. 부모는 아이의 생일을 맞아 빵집에 가서 우주선과 발사대가 그려진 맞춤 케이크를 주문한다. 그러나 하필 스코티는 자신의 생일 아침 차에 치이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부부가 갑작스러운 사고에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빵집 주인은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 대고, 아이의 죽음 이후 빵집을 찾아간다. 어린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당한 부모는 자신들의 분노를 빵집 주인에게 쏟아붓고, 빵집 주인은 주문해 놓고 찾아가지 않은 진상 고객에게 맞서 싸운다. 그러나 주인은 곧 부부의 사연을 알게 되고 부부에게 시나몬롤빵과 커피를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한다. 섣부른 위로보다는 따뜻한 빵을 건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주인은 이들에게 '검은 빵'을 내어준다. '뜯어 먹기 힘들지만, 맛은 풍부한' 검은 빵.


"인생을 조금 더 알게 되면, 우리는 실망스러운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삶이 결국 고통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바로 거기에 검은 덩어리가 있습니다. '뜯어 먹기 힘들지만, 맛은 풍부한' 인생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이 단계에서는 기쁨도 슬픔도 행운도 불운도 쾌락도 고통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니까 '좋다, 싫다'가 아니라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자라는 동안 나는 삶이 성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얻고, 친구를 얻고, 원하는 대학과 장래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러나 어른이 된 후에 삶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실패나 좌절을 견디고, 내 욕망에 도달하지 못하는 현실을 견디고, 또 일상의 무료함을 견디는 것. 아마 각 사람마다 삶에 대한 각자의 정의가 있겠지.



문지혁 작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둘째를 가지면서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단어들을 익히고 정의 내리는 과정을 통과한다. 나 스스로 정의 내린 삶의 가치는,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고민 끝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삶의 풍부함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어떠한 결과가 아니라,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이 내 삶을 이루고 있으니까. 그러나 살다가 어떠한 고통과 불운을 겪고 나면 나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또 다른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 과정이 아닐까. 먹기 힘들지만, 맛은 풍부한 인생 그 자체를 받아들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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