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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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 삶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무력해진 인물이 있다. 「유령의 마음으로」에는 2년 전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남자친구 정수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이 끝났음에도 헤어지지 못하는 '나'와 「빛이 나지 않아요」 음악으로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지방으로 떠밀려 온 '나'가 있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로 나무가 되어버린 한 남자(「여름은 물빛처럼」)와 아이를 가지기 위해 여러 차례 인공 수정을 하며 지쳐가는 희애(「낯선 밤에 우리는」)도. 그들의 마음은 뭐랄까, 생기를 잃어버렸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은 묵묵히 살아내지만 마음이 죽어버린 상태.


"너는 당황한 것보다도, 하고 가만히 듣고 있던 유령이 입을 열었다. 실망한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유령이 카운터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나는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12쪽)


삶을 살아낸다기보다 버티고 있다고 여긴 적이 있다. 가장 먼저 내 마음이 모든 것에 무감해졌다. '이후로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76쪽) 세상에 그다지 크게 놀랄 일도, 설렐 것도 없게 되었다. 『유령의 마음으로』의 인물들은 자신에게 닥친 일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앞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유령이 나타나고, 해파리에 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해파리가 되고, 내 집에 모르는 남자가 뿌리를 내리고 나무가 되어도. 자신의 아픔에 골몰하느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주변의 타인에 대해 마음의 거리를 두고 무감하게 버틴다. 임선우 작가는 『유령의 마음으로』에 실린 여덟 개의 단편을 통해 각 인물들에게 일어나는 작은 변화를 포착해낸다.


"기적을 바라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실망이 쌓이면 분노가 되고, 분노는 결국 체념이 되니까.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는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태도는 내가 유령을 순순히 내 삶에 받아들이게 되는 데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24쪽)


「유령의 마음으로」의 나와 똑같이 생긴 유령은 그저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말한다. 유령은 내가 슬픔에 잠길 때면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고, 기쁠 때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정수를 보며 정수와의 사소한 추억을 떠올리는 내 옆에서 눈물 흘리는 유령을 마주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에게 도달하지 못한 감정들이 전부 그 안에 머무르고 있다'라는 사실을. 「낯선 밤에 우리는」은 지난 2년 동안 임신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인공수정을 하고 있다. 성관계는 숙제가 되고 생리는 실패가 되는 일상이 지속되었을 때 금옥을 만난다. 신촌역 4번 출구 앞에서 자기 몸만 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전도하는 금옥과 병원에 가는 날마다 밥을 먹었다. 호르몬 주사로 예민해지고, 시험관 시술로 온종일 시달리고 나면 금옥의 집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들에게는 상황을 변화시킬 행운도, 많은 이들의 격려도 없지만 내 마음처럼 나를 꼭 안아주는 유령과 아무것도 묻지 않고 뚝딱 밥상을 차려주는 금옥으로 인해 스스로 부정해왔던 자신의 감정을 확인한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다섯 평짜리 방 안에서만큼은 아이에 대한 집착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저 요리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설렘을 갖고 지켜보다가 맛있게 먹는 것. 그것이 이 방에서 일어나는 일의 전부였다." (124쪽)


전문가들은 우울하거나 무력감에 빠졌을 때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과 감정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빛이 나지 않아요」의 지선 씨는 해파리가 되고 싶어 했지만 끝내 해파리가 되지 못했다. 몸은 해파리가 되었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지선 씨는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빛나고 있을까? 스스로 질문하다 보면 깨닫는다. 실패하고 떠밀리게 되었지만, 내가 빛나는 모습은 따로 있다는 것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을 버티고 있다는 것을.



여덟 편의 단편 속 '나'는 조금씩 변화한다. 처음으로 정수의 병원을 찾지 않고 미뤄 둔 집안 청소를 하며 자신을 돌보고, 포기했던 음악을 하기 위해 서울로 떠난다. 가족들에게 떠밀려 시험관 시술을 했지만 달력 속 가족의 생일이 표시된 파란 동그라미에 자신이 속하지 않은 것을 보고 삶의 중요한 선택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들을 변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과 아주 작은 응원의 목소리가 아닐까. 살다 보면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 투성이지만, 기운을 낼 수 없는 누군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은 작가의 조심스럽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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