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주택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81
유은실 지음 / 비룡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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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임대 아파트에 거주하는 아이들을 '휴거지(휴먼시아 거지)', 빌라에 사는 아이들을 '빌거지(빌라 거지)'로 불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른들은 이러한 기사를 보며 혀를 끌끌 차지만, 아이들이 부모의 경제력을 기준으로 서로 계급을 나누고 상대를 멸시하는 행동과 태도는 어른들에게 배웠음이 틀림없다. 작년 성북구 보문동 ‘보문파크뷰자이’의 경우 일반가구가 사는 동과 임대가구가 사는 동 사이에 출입문 없는 높은 벽을 설치함으로써 임대가구 주민들이 다른 동으로 이동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온라인 카페에는 아이들 사이에서 자녀가 임대 아파트 아이로 오해받아 따돌림을 당할까 걱정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빌라촌 애들이 관리가 잘 안되는 건 사실이잖아요. 부모 입장에서 솔직히 말해서, 빌라촌 애들과 어울리는 게 걱정됩니다. (p.27)

 


어릴 적 엄마의 몸이 좋지 않아 외할아버지에게 맡겨진 수림이는 얼떨결에 할아버지와 순례 주택에서 순례씨 손에 큰다. 평생 때를 밀어 재산을 일군 세신사 순례 씨는 일명 ‘때탑’ 순례 주택의 건물주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라는 마음으로 살고 싶어 하는 괴짜이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월세를 받지 않고, 이웃들을 너그럽게 품으며 스스로를 성찰할 줄 아는 유일한 어른이기도 하다.


수림의 아빠는 대학 시간 강사로 대학원 후배인 엄마와 서른 살에 결혼했다. 집은 장인에게 얹혀사는 것으로, 부족한 돈은 부모형제에게 받아쓰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했다. "전임교수 될 때까지만 도와주세요." 아빠는 어른들에게 그렇게 부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십오 년째 전임교수가 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라는 말을 버릇처럼 하지만 누구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엄마, '전임교수'가 될 때까지만 도와달라며 15년째 얹혀사는 아빠, 갓 드라이클리닝한 옷에서 나는 냄새가 가장 좋다는 고등학생 언니. 이들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알게 된 빚더미에 평소 업신여기며 무시하던 빌라촌 순례 주택으로 이사 오게 된다.


"이 동네 오니까 왜 이렇게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 솔직히 말해서, 순례 주택에서 정상 가족은 302호랑 우리 집 밖에 없잖아."
나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엄마가 함부로 그어대는 '정상'이 나는 정말 싫다. (167)

 

 

『순례 주택』은 우리가 지닌 삐뚤어진 욕망과 사회를 드러낸다. 그러나 작가는 그들을 지적하기보다는 순례 씨와 그 주택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진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 속 순례 주택과 원더 그랜디움으로 나뉘는 세상은 제힘으로 성실하게 사는 것보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아파트를 선망하고, 출신 대학으로 상대의 지적 수준과 연봉을 평가하고, 빚으로 주식을 투자하며 일확천금을 바라는 지금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과 태도가 고스란히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스며들었다.


우리의 욕망으로 빚어진 수림의 가족은 학벌, 학번, 아파트가 세상의 잣대지만 평생 독립하지 못한 덜 자란 어른이다. 그들에게 순례 주택은 자신들이 지닌 옳고 그름의 경계, 공간, 학벌, 숫자 그 경계를 넘어 남을 배려하고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가치를 알아가는 공간이다. 어른 아이가 많은 요즘 우리에게는 순례 씨 같은 어른과 이웃들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순례씨, 있잖아. 나는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꼭 태어난 게 기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 (p.226) 

 

더 나은 성적, 더 나은 대학, 더 나은 취업을 위해 평생을 경쟁해왔던 우리에게 차별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이겨야만 했고, 보다 나은 내가 되어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어떤 어른, 어떤 사람이 되라고 말하면 좋을까? 나는 내 조카의 눈을 보고 어떤 사람이 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순례 주택』에서 그 말을 찾았다. 태어난 것이 기쁜 사람. 사람으로 사는 게 고마운 사람이면 좋겠다. 설령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도, 대기업에 입사하지 못해도, 아파트에 살지 않아도 제힘으로 살아보려는 진짜 어른이 되어, 태어난 게 기쁜 사람으로 살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의 혐오와 불행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 지도 모른다. 당신도 태어난 것만으로 기쁜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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