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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평점 :

친구들과 때때로 이런 농담을 했다. "세상이 범죄 스릴러인데, 누가 범죄 스릴러 책을 읽으려 들겠어." 그런데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를 보면 마리아나 엔리케스가 느끼는 세상은 '공포'이다. 목이 잘린 시체, 사람의 손톱과 치아가 진열장에 장식된 폐가, 아기만 살해한 연쇄 살인마의 환영, 슬럼가의 오염수 탓에 고양이 코를 가지게 된 아이 등 갖가지 기괴한 소재와 사건들이 등장하는데, 놀랍게도 상당수가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한때 부유했지만 군사 독재와 경제 불황의 시기를 겪으면서 오갈 곳을 잃은 빈민들이 급증하고, 강도와 살인 등 약자를 향한 폭력이 만연해진 아르헨티나 사회는 우리 모두가 지닌 사회적 문제들을 직시하게 한다. 진짜 공포가 무엇인지.
마리오와 동거하던 아파트에서 그녀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그녀는 몸의 70퍼센트에 화상을 입었다. 싸움을 벌이던 중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그가 그녀의 몸에 불을 붙인 것이다. 지하철 여인과 마찬가지로 마리오도 침대에 누워 있던 그녀의 몸 위로 알코올 한 병을 다 부어버렸다. 그런 다음 성냥을 그어 그녀의 벌거벗은 몸에 불을 붙였다. 그녀의 몸에서 벌겋게 타오르던 불길을 몇 분간 지켜보던 그는 마침내 이불로 그녀를 덮었다. 지하철 여인의 남편처럼 그도 그녀가 자기 몸에 불을 붙인 거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중
2011년 아르헨티나에서 한 남성 의사가 병적인 질투심으로 대학생이었던 열한 살 연하의 여자친구의 몸에 알코올을 붓고 불을 지른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이 소설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의 몸에 불을 지르는 일이 끊이지 않자, 많은 여자들은 '불타는 여성들'이라는 조직을 형성해 스스로 불길에 몸을 던지는 분신 의식을 거행한다. "앞으로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남자들은 습관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게 될 겁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나처럼 되고 말 거예요. 목숨을 건진다면 말이죠. 그렇게 되면 꽤나 멋있지 않을까요? 새로운 시대의 아름다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p.331) 작가는 만연한 여성 혐오 범죄에 더욱 극악한 방식으로 대응함으로써 사회에 만연한 여성들의 공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드디어 속보가 올라왔다.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는 살갗이 벗겨진 채 뼈가 훤히 드러났지만, 머리카락은 그 주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아이의 눈꺼풀은 실로 꿔매져 있었고, 혀는 심하게 깨물린 상태였다고 경찰은 전했습니다.' 게다가 시신에서 고문을 당한 흔적이 다수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상체가 온통 담뱃불로 지진 자국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다. 현장 조사한 검시관들의 1차 보고서에 따르면, 성폭행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는 가운데, 범행 시간은 새벽 2시경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 「더러운 아이」 중
창밖 거리에는 임신을 한 채 마약에 취해있는 엄마와 아이가 길거리에 매트리스 하나만 깔아놓은 채 살고 있다. 다섯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하루 종일 지하철 승객들에게 엑스페디토 성인 판화를 주면서 돈을 구걸한다. 어느 날, 늦은 밤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다며 문을 두드린 더러운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아이는 해골 성상 제단이 있는 건너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얼마 뒤, 인근 주차장에서 목이 잘린 한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고, 나죽은 아이가 더러운 아이일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내가 왜 아이를 데리고 있지 않았던 걸까? 그 불쌍한 것을 엄마에게서 떼어낼 방법을 왜 생각하지 않았던 거지? 아니면 왜 아이를 씻겨주지도 못했던 걸까?"
이 이야기들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접수된 데이트 폭력 2만 건, 담뱃불로 손등 지지고 테이블로 머리를 가격해도 벌금형이 그쳤던 사건들. 부모에 의해 쇠사슬에 묶인 채 갇혀있다 탈출한 창녕의 아이와 7시간 넘게 여행 가방에 갇혀 숨진 천안의 아이. 호러 소설보다 끔찍한 현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잃은 것들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