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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7월 초,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한 후 피해자를 향해 비난이 쏟아졌다. 참혹하고 지겨운 패턴.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사람들은 그의 자살이 "진실이 규명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 죽음"으로 느꼈고, "왜 결국 죄책감은 피해자의 몫인가" 분개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시선으로부터,』의 이 문구를 공유하며 성폭력 피해 경험을 풀어놓기도 하고, 고발자와 연대한다는 메시지나 해시태그를 남기기도 했다.
『시선으로부터,』의 주인공 심시선은 천재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의 도움으로 학업의 기회를 얻었지만 그의 폭력과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마티아스를 떠난다. 그러자 마티아스는 보란 듯이 자살을 택하고, 사람들은 시선을 재능 있는 화가를 파멸하게 한 마녀라며 비난한다. 심시선의 손녀 화수 역시 협력업체 사장이 대기업의 갑질을 못 견디고 던진 염산병에 맞아 트라우마를 겪는다. 협력업체 사장은 화수가 소송을 시작하려 할 때쯤 자살했고, 명백한 가해자임에도 동정을 받는다. 손녀는 비슷한 일을 겪었던 할머니를 떠올린다. "죗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쳤다. 그건 도망이었다."
2018년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 유튜버가 스튜디오 비공개 촬영회에서 강제적인 촬영과 사진 유포, 성추행 등의 피해를 폭로했다. 그러자 피해자의 이름이 포르노 사이트의 검색어 1위를 차지했고, 포털 사이트에서는 피해 촬영물을 공유해달라는 댓글이 달렸다. 그 후 피해자가 고소한 비공개 촬영회 스튜디오 관계자 중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사람들은 피해자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목숨을 끊었겠어.'
"화수와 동료들을 경악하게 한 것은, 사람들이 가해자인 기민철에게 이입했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억울하면 그랬겠느냐고, 대기업 놈들은 몹쓸 놈들이라고, 중소기업 하는 사람들은 살지를 못하겠다고, 나라가 약자의 편이 아니니까, 잘 풀려봐야 상대는 가벼운 벌금을 내고 모른 척할 테니까 그랬을 거라고."
보통 내 또래의 친구들은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지 않는 경우들이 많다. 이에 대해 언론에서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고되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라며 그럴듯한 분석을 내놓았고 국가에서는 이를 보조하기 위해 지원금을 내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를 낳기 꺼려 하는 이유는 복합적이겠지만, 나는 내 아이를 이 세상에 내놓을 자신이 없다. 네가 살아갈 세상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엄청난 축복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왜 아이를 갖지 않느냐는 말에 화수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염산을 던지는 세계에 살러 오라고 할 수 없어요. 도저히.”
"그래도 요즘 여자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걸 모조리 경제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공기가 따가워서 낳지 못하는 거야. 자기가 당했던 일을 자기 자식이 당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서는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 뉴스는 화수에게 와 독하게 고이곤 했다. 일곱 살짜리가 공원 화장실에서 강간당하고, 스물한 살짜리가 그저 이별을 원했단 이유로 목이 졸렸다.?
『시선으로부터,』는 이처럼 일상 속에서의 폭력과 억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위로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시선의 시대에는 대다수가 이러한 폭력에 대해 저항하지 못했다. 시선과 같은 어른들이 폭력과 억압을 거부하고 저항하며 조금씩 변화해왔다.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몇 년 사이에도 사람들의 인식에 큰 변화가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여전한 법 제도와 고정관념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귀요미송을 작곡한 단디는 자고 있던 지인의 여동생을 성폭행했지만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석방되었고, 외주 스태프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된 강지환 또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범죄를 저지르면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하면 나 또한 고통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법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점점 더 강력하게 목소리를 내며 서로 연대해가고 있다는 것, 그렇게 세상을 바꿔 나갈 의지가 있다는 것뿐. 우리는 시선과 같이 본보기가 되어줄 어른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