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잡 SEASON 1 -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양정우 외 지음 / 블러썸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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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공주 사람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서울로 상경해 나는 그곳에서 살아본 적은 없지만, 아빠는 줄곧 사투리를 썼고 공주에 살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아주 가끔 벌초를 위해 다녀간 것 외에 내가 공주에 대해 아는 것은 아빠의 고향이라는 것뿐이었다.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어죽이었는데, 나는 지금껏 그 음식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다. 빨갛고 멀건 어죽의 맛도 내키지 않았지만, 내륙 지역에 나고 자란 사람이 어죽이라니. 나에게 물고기는 바다를 연상케했고, 지금껏 바다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시민 작가가 공주, 세종, 부여 여행을 떠나며 어죽을 언급했다. 충청내륙은 어죽이 유명한데 공주에서는 어죽을 꼭 먹어야 한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빠를 떠올렸다.


2017년, 첫 방송 당시 '알쓸신잡'은 꽤 화제를 일으켰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 사전'이라는 독특한 제목도 관심을 끌었지만 한자리에서 보기 어려운 출연진도 한몫을 했는데, '여행'이라는 포맷을 가졌지만 방송되는 장면은 대부분 이들의 수다였다. 목적지에 도착해 여행지를 둘러보는 동안, 식사하는 동안 정말 쉬지 않고 다양한 수다가 이어지는데, 커피 이야기를 하다가 뇌과학 이야기로 넘어가고 교과서 박물관을 들렀다가 한국의 문학과 과학의 교육제도에 대해 토론하는 식이다. 한때 유행하던 문과생, 이과생 대화처럼 닿지 않을 법도 한데, 이들은 '뭐 이런 것까지 알고 있지?' 하는 지식들을 쏟아내며 여행과 수다에 집중한다. 아마 방송에 나오는 장면은 극히 일부이지 않을까?


아빠의 고향인 공주 이인면에는 근래에 KTX 역이 들어섰다. 내가 마지막으로 공주를 찾았을 때만 해도 그 지역은 집성촌이었던 터라 아빠 이름만 말하면 곧장 '네가 큰딸이구나'하며 알은체를 해오는 어른들이 많았고, 일대에 고조할아버지의 묘지부터 폐가처럼 버려졌지만 아빠가 어릴 적 나고 자란 집도 남아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교과서로 배우고, 밑줄 그으며 공부했던 동학농민운동의 우금치 전투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1차 접전이 이인에서 벌어졌다는 기록을 보면 내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는 눈으로 목도했던 전투일지 모르겠다. 문득 먼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느껴지던 사건이 생생하게 여겨졌다. 유시민 작가는 우금치 전투에 대해 "조선을 개혁할 마지막 동력이 꺼져버린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결코 헛되게 스러지지 않았다. 동학농민운동은 백성들이 힘을 합쳐 봉건사회와 외세에 저항한 뜻깊은 사건이었고, 후에 일어난 3.1운동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p.153)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을 이끌었던 양정우 PD, 양슬기 PD, 이향숙 작가, 문지은 작가는 방송에 소개된 출연진의 시선이 아닌, 제작진의 눈으로 현장의 모습을 담아 이 책을 만들었다. 방송작가를 하던 내 친구는, 나영석 사단이 이끄는 팀은 늦은 새벽까지 방송 준비를 해도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는다며 부러워했다.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출연진들이 펼쳐놓은 지적인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유쾌한 방송을 만들어 내 매번 많은 사랑을 받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첫 촬영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설렘, <알쓸신잡>팀을 알아보고 반겨준 시민들에 대한 마음, 수십 명의 스태프가 이동하고 식사하고 묵게 될 장소들을 섭외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숨은 노력들은 내가 가진 이 방송에 더욱 애정을 가지게 했다. 


"방송을 만들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 법칙이 있다. 웬만한 연출로는 절대로 시청자들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출연자들이 정말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 적당히 멘트를 치고 연기를 하는 중인지 시청자들은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촬영과 생활의 경계가 없어질 때,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에 마음을 빼앗긴다." (p.123)


여행이란 무엇일까? 나는 여행 전,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전혀 찾아보지 않는다. 무턱대고 떠나 현지에서 맞닥뜨리는 돌발 상황을 즐기는 편이라 당일 아침 가고 싶은 곳을 즉흥적으로 정하고, 인터넷 서칭보다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묻고 길에서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에게 여행은 일상과 다른 '예측 불가능한 하루'이다. 그러나 각 사람에게 여행의 의미는 모두 다를 것이다. <알쓸신잡>의 여행은 나와 매우 다르지만, 이런 여행도 가능하구나. 적어도 이 책 한 권을 들고 통영으로, 아빠의 고향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다시 찾게 된다면, 어죽을 먹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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