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고 있잖아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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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말을 더듬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 짧은 말을 3분 동안 덜덜 떨며 더 더 더 절며 말했다. 만,을 마마마마마마마마만, 으로 전을 저저저저저저저저전, 으로 말을 마마마마마마, 하다가 괴로워 한 숨을 내쉬고 고개를 숙였다.  ─ 『내가 말하고 있잖아』 중에서



『내가 말하고 있잖아』의 화자 ‘나’는 1급 말더듬이다. 나는 말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학교에서 친구도 없고 외톨이로 괴롭힘만 당한다. 그건 선생도 마찬가지다. 국어 선생은 걸핏하면 나를 지목해 책을 읽으라고 시켜 댄다. 힘들다. 어려운 단어를 비슷한 단어로 바꿀 수도 없고 주어와 동사를 바꿀 수도 없다. 첫 음이 나오는 게 어려워 앞에 에, 음, 이라고 살짝 붙이거나 어려운 단어를 빼고 읽어 보기도 했다. 그 짧은 시간이 내게는 너무나 길었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찾은 언어 교정원. 원장은 '말을 잘하게 해 주는 곳이 아니야. 말을 하게 해 주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곳에는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얼굴이 빨간 남자 어른, 인상이 차가운 여자 어른, 또래로 보이는 여학생과 항상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왜소한 남학생, 허공에 타자를 치듯 쉴 새 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며 불안하게 앉아 있는 청년, 까만 뿔테안경 너머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더벅머리 아저씨가 있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기도 하고,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나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엄마는 잘해주고 싶어 사랑에 빠지는 여자다. 아무에게나 손을 내밀고 누군가 그 손을 잡아 주면 사랑이 시작된다. 엄마는 나와 닮아 최고 속도로 사랑에 빠지고 그만큼 깊이 상처받는다. 구멍이 뻥 뚫린 마음에서 피가 철철 흐른다. 하지만 나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상처를 받아도 엄마는 사랑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상처를 받으려고 사랑을 하는 사람 같다. 엄마는 욕하는 사람도 사랑하고 때리는 사람도 사랑한다. 곁에만 있어 달라고 애원한다. ─ 『내가 말하고 있잖아』 중에서



엄마는 금방 사랑에 빠져 버린다. 그래서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하다. 114 안내원으로 일하는 엄마는 전화 속에서는 매번 친절하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집에 오면 술만 마신다. 엄마의 친절한 목소리는 전화 상에서만 들을 수 있다. 한동안 잠잠하던 엄마는 요즘 다시 전 애인과 다시 만나, 애인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걸핏하면 손찌검에 무시하는 최악의 남자. 그 작자를 반드시 죽이고 말 것이다.


웃어주는 사람. 말 걸어 주는 사람. 아파서 엎드려 있을 때 손을 들어 선생님에게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려 준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 친구들이 나를 에워싸고 괴롭힐 때 괴롭히지 마, 라고 말해 준 착한 사람. 나는 그들을 다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내게 상처를 줬다. 끝까지 웃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기억해.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 내 편은 없어.  ─ 『내가 말하고 있잖아』 중에서


이 작품의 화자가 겪고 있는 말더듬증은 소아·청소년기에 주로 나타나는 정서장애로 분류한다. 대부분 심리적 요인에서 발현되는 경우가 많고, 부모의 인성이나 양육태도를 개선하는 것만으로 치료가 되기도 한다. 마음의 결핍을 언어의 결핍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라는 동안 경험한 마음의 상처에 고통을 호소한다. 가족에 대하여, 친구 관계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고 두려워한다. 만약 자라는 동안 상처받지 않고 자랄 수 있다면 좋을까?



엄마, 미안해. 잘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안돼. 나도 그게 신기해. 안 되는 게. 너무하다고 생각하는데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데 엄마는 아니야. 엄마는 원망하지 않아. 엄마가 내 말을 들었을까? 내 마음이 들렸을까? 엄마는 말했다. 괜찮아, 라고 했던가, 힘들어, 라고 했던가. ─ 『내가 말하고 있잖아』 중에서




내 친구는 어릴 적 가정 학대로 두려움이 많았다. 누군가 매서운 표정만 지어도 자신감을 잃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크게 분노하기도 한다. 함께 협동해야 하는 과제 앞에서 나서기 두려워하고, 매번 누군가의 한 마디에 상처받아 울곤 했다. 그래서 늘 안타까웠다. 사람들은 상처받기를 두려워한다. 사실 나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상처 좀 받으면 안 되나? 누군가 상처받아야 한다면, 내가 받을게. 며칠 속상할 수 있지만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곁에 있어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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