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동의 - 지금 강조해야 할 것
밀레나 포포바 지음, 함현주 옮김 / 마티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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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4일 해군본부 고등군사법원 특별부(재판장 송창식)는 부하 여군을 강간한 두 명의 해군 간부에게 1심에서 각각 징역 10년(ㄱ소령)과 8년(ㄴ대령) 원심을 뒤집고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ㄱ소령은 직속상관이고, ㄴ대령은 함정의 최고 책임자인 함장이었다. 2심 재판부는 이러한 권력관계 대신 “호감인 줄 알았다"라는 ㄱ소령, “묵시적 합의가 있었다"라는 ㄴ대령의 진술만 채택했다. 피해자가 왜 추행 당시 곧바로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못했는지, 상사가 저녁에 숙소로 불러도 왜 응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맥락은 사라졌다.



"당심 법정에서는 당시 간음행위에 관한 상황을 직접 재현하면서도 키스할 때 자신의 팔을 잡았던 사실 이외에는 자신은 누운 채로 그냥 피고인의 범행을 지켜보고 있었다며 달리 구체적으로 피해자의 저항을 표현하지 않는바, 다른 폭행 내지 협박행위는 없었던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 ─ 판결문 중에서



국내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 사실에 대하여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저항하였는가.'가 재판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2008년 4월, 서울고법 심상철 부장판사는 성폭행 당시 여성이 스키니진을 입었던 사실을 들어 "사건 당시 피해자가 밑단이 좁아 벗기기 힘든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청바지가 가지런히 말린 상태로 놓여 있었던 점을 보면 강제로 벗겼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결이 내려져 논란이 일어난 이후 2019년 여군 사건 판결까지 재판부의 인식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성폭행 피해자는 가해자의 '암묵적 동의로 여겼다'라는 주장에 대해 '얼마나 저항하였는가'를 증명해내야 성폭행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지난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리뷰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는 '여성에게 NO라는 의사 표현을 가르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라는 의견에 무척 동의했었다. 사회는 여성에게 원하지 않는 성관계나 성희롱에 대해 단호하게 NO라고 말하라고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강력하게 NO라는 의사 표현을 하지 않는 그 외의 모든 상황은 YES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성관계 할 의사가 있을 때 YES라는 '성적 동의'를 받았는지가 사회적으로 통용된다면 어떨까? 처음에 언급했던 해군 사건의 경우 재판부는 피해자가 어느 정도 '구체적인 저항을 표현하였는지'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 즉 피해자에게 성관계를 하는 것에 대해 동의를 얻었는지에 주목한다면 사건이 달리 보이지 않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어렸을 때 봤던 미디어에서는 호감의 남녀 사이에 '손잡아도 돼?'라고 묻는 남자를 용기 없는 남자인 것처럼 표현했던 기억난다. 그리고 여전히 드라마와 영화, 문학 작품 속에서 박력 있게 키스하고 손을 잡는 행위가 '남자다움'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렇게 여기던 시기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2020년은 분명 달라졌다. 저자는 동의의 1단계는 '물어보기'라고 확실하게 짚는다. "손잡을래? 키스할까? 계속해도 괜찮아?"



성적 접촉과 동의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지침을 제시한다. 우선, 섹스를 제안하고 싶은 사람에게, 그리고 한창 섹스를 하는 중이더라도 그 상대방에게 정말로 (계속하길) 원하는지 분명히 확인할 것, 명백히 관심 없어 보이는 상대방을 괴롭히지 말 것, 자기 몸에 손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손대지 말 것,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상대방도 그것을 원하는지 확인할 것,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이용해 상대방에게 동의를 강요하지 말 것 등이다. ─ 19p


내가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이유는 저자가 주장하는 '성적 동의'가 현재를 바꿀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견에 반드시 backlash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뭐야, 이제 여자한테 관심도 보이면 안 되는 건가?', '성관계할 때마다 계약서라도 써야 하나?'라는 조소 어린 댓글이 달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YES'라고 말하는 성적 동의가 사회적으로 공유된 행동 지침이 된다면 충분히 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2006년에 박카스에서 ‘젊음, 지킬 건 지킨다’는 주제로 광고를 제작한 적이 있었다. 이 광고에서 청년은 노약자석이 비어있는데도 앉지 않으며 “우리 자리가 아니잖아”라고 말한다. 그 광고가 방영된 후 사람들은 '노약자석'을 비워두어야 한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다. 순진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쩌면 이 책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은 '성적 동의'가 낯선 개념이고, 가능하지 않을 거라 생각될 수 있지만 모두의 인식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면 보다 건강하고 안전한 사회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특히 커플이나 부부가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또 아이에게 성교육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하는 교사와 부모가 있다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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