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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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니어와 몽고메리의 살인 사건은 1843년 7월 23일에 벌어졌고, 그레이스 마크스는 1840년대에 열여섯의 나이로 살인범으로 기소돼 캐나다에서 악명이 높았다. 연일 캐나다뿐 아니라 미국과 영국의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는데, 당시의 살인범으로 지목된 그레이스는 어렸을 뿐 아니라 남달리 예뻤던 외모도로 주목받았다.


이 사건의 피해자인 키니어와 키니어의 가정부였던 낸시 몽고메리는 사생아를 낳은 적이 있었고, 사망 당시에도 부검 결과 임신 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레이스와 그녀의 동료였던 제임스 맥더모트는 함께 미국으로 도주했고, 언론에서는 이들이 연인이라고 보도했다. 그들 사이의 엇갈린 사랑,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폭력, 그리고 고용주를 죽이고 달아난 하층민들의 반항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가십거리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좋은 사건이었다.


애트우드는 왜 캐나다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여성 범죄자인 '그레이스 마크스'의 실화를 가지고 이 작품을 썼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흥미롭게 여길만한 자극적인 사건이기때문에, 혹은 그녀가 진짜 '살인범'일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 사건을 선택했다고만은 생각되지는 않는다. 당시 이 사건을 대하는 대중들이 가진 생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사람들은(혹은 지금도) 그레이스 마크스의 이중적인 태도를 '여성의 천성'이라고 여겼다. 그레이스의 고용주인 부잣집 나리인 키니어는 늘 다정하고 하녀인 그레이스에게도 부탁을 하는 신사였는데, 키니어와 하녀였던 낸시 몽고메리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좋은 집안 출신이 아니었던 낸시 몽고메리가 같은 하녀이면서 여주인처럼 행세하는 것에 질투를 느껴서 낸시를 죽이고자 했다는 것, 그리고 제임스 맥더모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그를 이용해 낸시 몽고메리를 죽여달라고 사주한 요부라는 것이다.


키니어에 대한 사랑과 낸시에 대한 질투심으로, 맥더모트에게 몸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으로 살인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그레이스에게서 보고 싶은 모습만을 보았고 그것이 그레이스의 본성이라고 여겼다. 재판 당시 그레이스를 둘러싼 이들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멋대로 재단하려 한 것처럼, 사이먼도 그녀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기억상실증인지 아닌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진단할뿐이다.


신문에서는 제가 처음에 침착하고 기분이 좋아 보인 데다 눈도 맑고 초롱초롱했다고, 그걸 보면 얼마나 냉정한지 알 수 있다며 그걸 가지고도 뭐라고 했어요. 하지만 제가 흐느끼거나 큰 소리로 울면 죄책감의 표현이라고 했을 거 아니에요. 사람들은 이미 저를 유죄로 단정짓고 있었어요. 범죄를 저지른 게 분명하다고 일단 결론을 내리면 제가 뭘 하든 범죄의 증거로 해석하잖아요. _519p


이 작품은 그레이스가 수감된 지 16년 후부터 시작된다. 정신과 의사인 사이먼은 그레이스와의 대화를 통해 사건 당시에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을 밝혀내고자 한다. 그레이스는 생생하고 비통한 목소리로 아일랜드에서 보낸 비참한 어린 시절과 캐나다로 이주한 후 하층계급의 삶, 그리고 키니어와 몽고메리가 살해된 당시의 상황을 듣게 된다. 그레이스가 더 이상 기억해 내지 못하는 지점까지 들여다보며 사이먼은 의문에 쌓인다. 그레이스는 정말 어떤 사람일까? 영악하고 잔인한 살인마일까? 아니면 희생양일까?



몇년 전, 드라마 「킬미힐미」에서 '해리성정체장애'(다중인격)에 대한 소재를 드라마로 다룬 적이 있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다수의 인격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고작 100여년 전 의학계에서 발견되었고, 다수의 인격이 벌인 범죄가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은 1978년 빌리 밀리건이 최초였다. 해리성정체장애의 경우 이중인격부터 수십 개의 인격이 존재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며 이들을 모두 총괄하는 하나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의 비어있는 시간들은, 그레이스가 감추는 시간인지 다른 인격이 출현한 지점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때때로 살인을 저지른 후 다중인격을 주장하는 범죄자들이 존재한다. 국내에서도 살인을 저지른 후 해리성정체장애를 주장한 범인이 있었다. 1998년 3월 부천 비디오방 사건의 경우, 비디오 가게 주인 김씨가 가입한 보험금을 받을 목적으로 임씨에게 '상해를 입히되 생명에 지장이 없고 후유 장애가 발생하지 않도록' 약속하고 성공하면 보험금의 3분의 1을 사례하기로 약속하고 이 과정을 비디오 촬영으로 남기기로 한다.


“조금만 참으세요, 형님” 하며 고분고분 존칭을 사용하던 임씨가 몽둥이를 몇 차례 휘두르더니 갑자기 “내가 누군 줄 아느냐? 난 ‘쉐도우’다. 내 나이가 몇인 줄 아느냐, 난 3천 살 먹은 악마다. 너 같은 놈이 이해하지 못할 위대한, 수천 년 전부터 널 응징하기 위해 기다렸다”라는 등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쏟아내며 결국 김씨를 살해했다. 임씨는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면서도 악마처럼 변해 마구 공격을 휘두르던 모습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테이프를 보고 임씨를 면담한 정신과 의사 등 전문가들의 견해도 엇갈렸다. ‘환청·환시 등 망상 중세를 보이는 정신분열병이 의심된다’는 의견부터, ‘악령이 빙의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다중인격 장애의 소견이 보인다’라는 주장까지 여러 가지였다.


그레이스는, 부천 비디오가게 사건의 임씨는 잔인한 살인마일까?무엇이 진실인지는 끝내 알 수 없지만 진실이란 원래 알 수 없는 것. (참고로, 임씨는 다중인격 연기임이 밝혀졌다. 어느 부분에서 들켰는지 안알려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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