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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병 - 인생은 내 맘대로 안 됐지만 투병은 내 맘대로
윤지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평점 :

AM 9:30 반지와 씨름하다 어린이집에 보낸다.
AM 10:00 아침을 먹고 항암약을 먹는다
AM 11:00 대충 집을 치우고
PM 12:00 믹스 커피 한 잔을 준비해서 컴퓨터 앞에 앉는다.
PM 1:00 오롯이 내 시간. 나는 그림을 그린다.
PM 2:00 점심을 먹고 열심히 그림책 작업을 한다.
벌써 네 시 넘었네? 반지 데리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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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나는 일상의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그 누구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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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사기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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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쉽게 좌절하는 편이다. 종종 어떤 상황을 가정해두고 '나라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보곤 하는데, 예를 들어 나중에 '엄마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혹은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을 보면서 나나 내 가족이 저런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이겨낼 수 있을까? 뉴스나 인터넷 기사를 보면서도 '나라면...' 하고 생각한다. 그때마다 대부분의 결론은 비슷하다.
'나는 견딜 수 없을거야, 난 이겨낼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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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생각했다. '나라면..'
작가는 어느 날 위암 4기 진단을 받는다. 위를 대부분 잘라냈음에도 불구하고 위암 4기 환자가 5년 이상 살 확률은 7%, 이제 갓 두돌을 넘긴 아기가 있다. 힘을 내어 8차 항암 치료까지 마치고 항암 약만으로 치료를 받으며 ‘이제 좀 살만 하다.’를 느낄 때쯤, 암은 난소로 전이되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암 진단을 받고 자신처럼 블로그을 검색하며 누군가의 경험들을 찾아보고 희망을 얻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고 책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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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였다며 어땠을까? 아무리 긍정적인 나의 기질을 떠올려보더라고 나는 알고 있다. 아마 진단을 받자마자 마음부터 지쳐서 자포자기했을거란걸. 살면서 병을 얻는다는 것이 어떠한 인과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라고 억울해하며 남은 시간들을 헛되게 버렸을 것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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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런 항암이 끝나고 제 힘으로 산책을 할 수 있음에 기쁘고, 초콜릿 한 조각을 녹여 먹을 수 있는 것이 행복하고, 느리지만 그려왔던 그림을 마저 그릴 수 있음에 뛸듯 기뻐하는 씩씩한 모습을 보면서 그 소중한 진짜 감정들이 내 마음에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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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 우리는 모두 공평하고, 때를 알 수 없으니 현재를 소중히 하라는 말은 이제 관용구처럼 익숙해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왜 그런 일상 중 소중한 진짜 감정들을 붙잡지 못했을까 아쉽기만 하다. 어제의 일상을 떠올려보면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앉아서 갈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고, 계획한 일과를 빨리 처리할 수 있어 뿌듯했고, 점심에 달콤한 크림라떼 한 잔에, 퇴근길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느꼈던 것들이 왜 나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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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을 쉽게 잊는다. '지겹고 당연한 하루가 또 시작되었네.'라고 여기지만 사실 진짜 소중한 것들은 그 일상에 있다는 것을 (매번 잊고) 또다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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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오늘 하루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음이, 내일 또 살아있어 출근할 수 있음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부러 내보이는 위로보다는 훗날 출간될 작가님의 《사기병2》를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는 내가 제일 먼저 책을 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