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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기와주유소 씨름 기담 ㅣ 소설의 첫 만남 13
정세랑 지음, 최영훈 그림 / 창비 / 2019년 6월
평점 :

옛날 이야기처럼 비기기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길 수 없으면 비기기라도 하는 삶, 그 때껏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었지만 말이다.
도깨비가 나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가슴으로 확 내 가슴을 밀고 들어왔고, 그 바람에 깨진 고둥 껍데기가 그만 내 바람막이를 뚫었다. 그 비싼 로고 위에, 로고를 지우며 구멍이.
그리고 그 구멍에서 신경질이 솟구쳤다. 그냥 신경질이 아니었다. 이십몇 년 어치의 신경질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신경질을 내 본 적이 없었던 거다. 제대로 신경질을 내 본 적이. 나의 무겁고 둥근 몸, 그런 몸을 가지고 신경질을 내면 모두 꼴사납다 여겼으므로. 뚱뚱하고 둔해 보이는 아이가 신경질을 내면, 부모가 키우지 않은 아이가 신경질을 내면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으므로. 내가 먼저 구기고 숨기고 모른 척했던 신경질이었다. 화를 낸 적은 있었어도 신경질을 낸 적은 없었다.
"야 니 X새야, 할머니가 사 준 바람막이란 말이야! 아, 진짜 나도 좀 살자!"
BOOK.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 중에서
가족을 떠난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주인공은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소년은 열 살이 되기 전부터 이미 60킬로그램을 넘겼고 고등학생 때는 100킬로그램을 훌쩍 넘겼다. 그냥 뚱뚱한 아이였지만 고등학교 씨름부에서 훈련받으며 처음으로 행운과 행복을 경험한다.
씨름으로 할머니 노후를 책임지고 싶었지만, 프로 씨름 선수로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리고 홍대의 '청기와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사장은 오래 전부터 씨름을 좋아해서인지 주인공을 살갑게 잘 챙겼다.
그러던 어느 날, 주유소 점장님은 주인공에게 이상한 제안을 한다. 자신의 양자가 되어 달라는 것. 그리고 한밤중에 청기와주유소가 있던 자리에서 도깨비와 씨름을 해 50년 만에 한 번씩 있는 이 씨름 대결에서 이겨 달라는 것.
옛이야기 중 기묘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당시 해석하기 어려운 '초자연' 적인 현상들을 보고 상상력을 보탠 것이 많다. 도깨비 씨름 이야기도 '도깨비불'에 대한 두려움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세랑 작가의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은 지극히 현대적인, 서울의 한복판 홍대를 배경으로 도깨비와 씨름을 한다.
세상에는 '열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 투성이다. 때로는 그 열심에 행운 한 줌은 있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고난 것,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신경질 한 번 내보지 못한 주인공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도깨비 씨름'은 그에게 찾아온 행운이였고, 통쾌한 인생 역전극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인생 역전을 꿈꾸는 것은 모두의 꿈인 걸까. 이 쾌감만으로 충분히 즐거웠다. 나도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런 행운이 한 번쯤 찾아와 내 인생도 역전되길 바라며 도깨비를 이겨주길 응원했다. 역시 정세랑 작가는 일단 믿고 보는 작가인 것으로!
"아 진짜, 나도 좀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