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당시 인기를 끌던 가수들처럼 칼머리를 하고 커다란 옷을 입고 건들거리며 돌아다니는 아이들. 나도 그 아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내가 다닌 중학교에도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이반’이라고 불렸다. 당시에 난 레즈비언이라는 말을 몰랐다. 하지만 이반이라는 말은 잘 알고 있었다. 여자끼리 사귀는 아이들은 전부 이반이라고 불렸다. _p.18

 

민선 선배를 만나기 전 나는 자신의 성격이나 자질을 객관적으로 가늠해 본 일이 없었다. 나 자신을 평가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가족이나 친구들이 일러 준 나의 모습을 받아들여 그것이 나의 특성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 수 없어졌다.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 내가 원한다고 믿었던 삶이 나의 기질과 어울리는지. 사람들의 시선과 모르는 사람들의 존경, 가상의 기대와 평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어떤 식으로 살게 될까.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혼란스러웠다. _p.131

 

그때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인희를 한심하다고 여겼다. 과거를 그리워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그 애를 비웃었다. 그건 그저 유행이었다고, 그뿐이었다고 못받아 주고 싶었다. 여자 아이들 집단에서 너는 남자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얻었던 거라고 말이다. 나는 또 이렇게도 말해 주고 싶었다. 정신 차리라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_p.158

 

긴 시간 동안 이 해변은 내게 쓰라린 장소로 남아 있었다. 오래전 민선 선배는 이 모래밭에 "사랑해!!"라고 썼다. 그때 난 열여덟 살이었고, 선배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 장면은 내 인생에서 뼈아픈 실패를 뜻했고, 떠올릴 때마다 쓰라린 좌절을 안겨 주었다. 난 선배를 원망했었다. 과녁을 맞힐 수도 있었을 그 말을 환한 햇살 아래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 그래서 더이상 무엇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선배를 원망하고 원망했다. 하지만 이 글의 후반부를 쓰고 매만지는 동안 나는 그 장면이 더 이상 내게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_p.167

 



내가 중고등학생이던 1990년대 후반부터 H.O.T와 젝스키스, 신화로 이어지는 아이돌이 인기를 얻으면서 이를 중심으로 '팬픽'이 유행했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동성애 문화가 은밀하고 만연하게 퍼졌다. 이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청소년 문화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의미로 '이반'이라고 불리길 원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그 시대의 중심에 나도 있었다.

 

『항구의 사랑』은 단 한 번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자 나와 동일한 시대에 성장한 소녀 '나'의 성장기라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축제 때 연극부에 참여한 '나'는 생기발랄하고 매력적인 '민선 선배'를 만나고 우정과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낀다. 가장 절친한 친구인 규원은 민선 선배가 자신을 좋아해주는 게 신기해서 나와의 관계를 그저 즐기는 거라고 말하지만, 점점 선배와 가까워지고 서울의 대학에 입학해 같이 살기로 약속하면서 선배도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민선 선배에게 빠져 있는 동안 나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잃었고, 선배와의 소소한 행복만을 바라고 꿈꾸었다.

 

민선 선배의 수능이 끝나고 찾은 바다에서 선배는 모래밭에 "사랑해!!"라고 적으며 밝게 웃었고, 나는 처음으로 선배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 후로 선배는 만나주지도, 연락을 받지도 않았다. '내'가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어떻게 몰랐을 수 있어. '나'는 눈물을 흘리며 언덕길을 올라 선배의 집 앞에서 밤이 늦도록 기다려도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민선 선배는 대학에 입학해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나' 또한 서울의 대학에 입학하며 목포를 떠났고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과 애인이 된 남자 선배에게 과거에 자신이 여자와 사랑에 빠졌던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때 유행처럼 지나간 일로 여겨졌고, 그때 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영영 그 시절을 묻어 두고 살 것 같던 어느 날, 칼머리에 힙합바지를 입은 고등학교 친구 인희가 찾아온다. '나'는 내심 과거에 머물러있는 인희를 한심하고, 부끄럽다고 여기며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처럼 여긴다. 그런 '나'에게 인희는 묻는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때 그건 다 뭐였을까?”

 

성인이 된 나 또한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 또한 마음 속으로 그 시절에 우리가 겪었던 서툴고 충동적이었던 감정들을 유행처럼 지나가는 '어떤 일'로 여겼다. 그리고 그때 내 친구들 또한 성인이 되어 하나둘 남자친구를 사귀었고, 그 누구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수 년전에 나에게도 인희처럼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한 친구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 아이의 감정을 어떻게 여겼던가. 대뜸 자신이 교제하고 있던 '여자'와 관계를 털어놓던 그 친구를 향해 나 또한 '이 친구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구나' 한심하게 여겼는지 모르겠다. '이제 정신차리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이제는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 희미한 얼굴들, 하지만 그 때 우리가 나누었던 고민과 대화들은 얼마나 진지했던가. 그리고 일반인과 다르고 싶었던 '이반'이란 이름 밖으로 성장했을 때, 자신의 평범함과 아무것도 되지 않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때 그건 다 뭐였을까?
민선 선배를 향한 맹목적이었던 사랑, 선생님의 관심을 얻기 위해 계단에서 뛰어내리던 경미의 사랑, 내가 자신의 첫사랑이라고 떠들고 다녔던 인희의 사랑,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 같은” 그 불완전하고 미성숙했던 감정들. 그 시간들은 우리가 모두 입밖으로 꺼내지 않고 묻어두어야 할 의미없는 시간이었을까?

 

우정이라기엔 진지했고, 사랑이라기엔 미성숙했던 미성년 소녀들의 그때 그 감정은 다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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